§94. 탐사 일지
#1
예상 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열기구가 추락했다.
#2
열기구가 추락한 원인은 돌풍이었다. 기구를 띄워서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예기치 못한 돌풍에 기구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아서의 예상과 달리, 이곳 지하엔 출처 모를 기류가 흐르고 있던 것이다.
떨어지는 중에도 조종줄을 꽉 잡고 버틴 덕에 기구는 뒤집히지 않았고, 가까스로 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 추락하던 기구는
기구는 떨어지던 중에 암벽에서 빠져나온 바윗돌에 걸려 멈추었다. 나와 앨리스는 앞으로 어찌할지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기구의 손상을 살피고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천운이 닿았는지 기구는 구피를 수선하면 바로 쓸 수 있을 정도였고, 떨어지면서 기류를 탈출했는지 처음 닥친 것 같은 거센 바람은 불지 않았다.
반대로 돌아가려면 다시 그 돌풍 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그렇게 다시 위험을 감수하며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탐사를 재개하고 무사히 돌아갈 방책을 마련하는 편이 나았다.
앨리스는 내 주장에 설득되었는지 군말 없이 작업에 복귀했다. 그녀는 준비한 보강용 천을 구피에 덧대어 기구를 고치고 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이렇게 탐사 일지를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기구의 수선이 끝난 모양이다. 조작하는 동안에는 손이 바쁠 듯하니, 추후 앨리스를 통해 대필하고자 한다.
#3 - A
교수님, 절 앨리스라고 부른 적이 없지 않나요?
#4
손이 바쁘신 교수님을 대신하여 대필합니다.
열기구는 천천히 하강하고 있다. 언제 돌풍이 다시 불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무색하게 대기는 잔잔하다. 나는 기구 조작이 익숙하지 않아서, 항로를 보는 것은 앨리스가 도맡았다. (부르실 때는 리들이라고 불렀다 - A)
나는 열기구의 하강 속도를 미리 계측해 보지 못한 일이 아쉽게 되었다. 이곳은 공간 감각이 아주 희박하여 얼마나 내려왔고, 또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찾기 위해 절벽 벽면에서 떨어져 나온 지도 꽤 되었지만, 지침이 될 만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 이곳은 순수한 어둠의 공간이다.
교양을 익힌 나조차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동굴 공간을 무심코 지구의 공동이라고 여길 법했다. 리들은 이 서술의 수정을 요구했으나 거절하였다. 불충의 대가로 이 부분도 직접 서술하게 한다.
지표면 아래에 액체 마그마가 흐른다는 것은 이미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런던 아래에 얼마나 거대한 공동이 있건, 그건 국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5
열기구 조종법이 손에 익으니 여유가 생겨서 다시 일지를 직접 기록하려 한다.
내가 일지를 작성하는 동안, 기구의 조작은 앨리스에게 맡겼다.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만에 하나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녀도 조종법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앨리스는 조종줄로 균형을 잡는데 애먹더니, 삼십 분쯤 지나니 꽤 괜찮게 다루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알려주기도 전에 기구 방향을 움직이는 법을 익혔다. 이제는 기본적인 열 관리 방식과 가스 점화법만 가르치면 혼자서도 기초 수준에는 이르렀다 할 수 있었다.
실은 이곳은 조종 연습하기 제격인 장소이기도 했다. 처음 불었던 돌풍 이후로, 기구는 어떤 기류도 만나지 않았다. 태양이 없는 지하에선 반사열이 없으니 자연풍도 불지 않는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앨리스에게 조종을 맡긴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한편 이곳은 정적이다. 저번 일지를 쓰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풍경엔 어떤 변화도 없다. 그저 어둡고,광활하다. 빅 벤이 완성된 지 40년이 흘렀는데, 최근에야 가장 안쪽의 시멘트가 말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작 그만한 건물도 굳는 데 수십 년이 걸리건만, 이토록 커다란 동굴이 형성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백만 년? 일억 년? 그 단위가 너무 커져서 한낱 인간의 생으론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과거, 나는 런던 지하에 있는 추악한 무언가가 수억, 수십 억 년 전부터 런던의 추락을 바라며 입 벌리고 있다는 영감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과 지금 이 동굴은 완전히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알게 될까?
뭔가 변화가 생긴다면 다시 기록하려 한다.
#6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하강을 시작하고 서너 시간쯤 지날 무렵이었다.
지하 암흑 세계에서는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어둠만이 이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차 밝아지더니 곧 많은 사물을 구분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어딘가 흐르는 용암에서 생긴 광원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앨리스는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이 근방에 용암이 흐르는 게 사실이라면 조만간 기구가 착륙할 수 있는 화성암 지대가 나타날 거라고 예측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은 곳에 지면이 나타났다.
우리는 분주히 착륙을 준비했다. 어두운 탓에 원근감 살아나지 않아서 바닥에 불붙은 양초를 던져서 거리를 가늠했다. 예상보다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버너에 가스 출력을 더했다. 다 쓴 연료통을 바닥에 버리니 오히려 상승하는 탓에 다시 출력을 낮춰야 했다.
이렇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탓에, 우리 중 누구도 기구를 향해 접근하는 비행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대처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비행체는 곧장 기구와 충돌했고, 기구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것은 떨어진 기구 위를 잠깐동안 빙글빙글 날더니, 곧 멀리 떠나 사라졌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날개가 달린 생물 같은데, 나는 그렇게 거대한 생물을 알지 못했다.
이번에도 운이 따랐는지 추락할 때 지면이 가깝기도 했고, 착륙을 준비하고 있은 덕에 둘 다 크게 다치는 사태는 면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못하다.
열기구의 손상이 크다. 구피부는 거의 쓸 수 없는 지경이고, 어디가 망가진 건지 균형 있게 서지도 못한다. 준비한 물자로 수리할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물자를 충당하여 기구를 수리해야 했다. 다행히 우리가 착지한 곳은 바윗골따위가 아닌 넓은 평원 같은 곳이라서 일말의 희망쯤은 품어볼 수 있을 듯하다.
뭔지 몰라도 저렇게 커다란 생물이 산다면, 머지않은 곳에 큰 규모의 생태계가 번성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우리는 추락 지점을 임의로 기록하고 북쪽을 향한다.
#7
놀라운 발견을 했다. 여정에 관해선 순서대로 기록하겠다.
햇볕이 닿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지하는 아주 춥고 습했다. 흰 수증기 안개 같은 것이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가득했는데, 준비한 옷을 모두 입고도 앨리스는 추위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북쪽은 내리막이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앨리스는 세 번이나 내게 돌아가는 게 어떤지 물었다. 하지만 나는 흰 안개가 아래에서 올라온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처럼 대량의 수증기가 올라온다는 건, 수원이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물을 날려 보낼 만큼 열원도 있다는 뜻이 되었다.
물과 열이 있는 곳에는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다. 그리고 돌무더기를 뒤적이는 것보단 무성한 이끼라도 뜯는 것이 나았다.
탐험에서 예기치 못한 환경에 떨어지는 건 흔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도, 체력도, 쓸수록 생존 확률이 낮아지는 것이니 뭐든지 이유를 가지고 행동해야만 했다.
내 정성스러운 훈계에, 앨리스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는지 그때부터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명백한 거짓임 - A)
그렇게 한참을 걷자 흰 수증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온도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습기가 없어진 것만으로 한결 쾌적해졌다. 흰 안개를 완전히 지나고 나니, 나는 내 추측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사실 그 이상이다!
나는 용암 지대를 중심으로 한 작은 생태계 오아시스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곳은 마치 또 다른 세계였다. 안개를 지나니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호수였다. 그 주변을 돌아보던 우리는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일 기색이 없어서 관뒀다. 그것은 내가 아는 어떠한 호수보다 컸고, 깊이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얕아 보이진 않았다.
열린 바위틈 사이로는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는데, 나는 이 크지 않은 물줄기가 템스만큼 거대한 강의 시발점일 것임을 직감했다.
그 주변에는 키 낮은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낮다고 하는 것은 정말 과장이 아니라서, 대부분 내 가슴을 넘지 않았다. 작은 앨리스는 빼곡한 나무에 불편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나로선 소인국에 방문한 거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햇볕이 없으니 광합성을 위해 높이 자랄 필요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촘촘히 자란 나무들이 무엇을 양분으로 삼을지 심히 궁금했지만, 그걸 알아보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무의 경도를 확인했다. 나무는 쉽게 부러지고 바스러져, 건물이나 가구에는 전혀 쓸 수 없어 보였다. 이것을 엮어서 기구를 보강하려 했기에 낙담하고 말았다. 이것이 식용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으나, 도무지 영양이 있어 보이진 않다.
대신 나는 어떤 동물을 발견했는데, 사람을 본 적도 없을 텐데 우리를 눈치채자마자 잽싸게 달아났다. 작은 나무 아래에 숨어다니는 통에 모습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크기나 빠르기가 토끼와 비슷한 것이 그런 사족 포유류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이곳은 발견의 보고다. 또 다른 발견을 하면 다시 일지를 쓰려고 한다.
#8
앨리스가 딱딱한 육포에 불평했다. 내가 여기 내려와서 알게 된 사실로, 그녀가 굉장히 수줍음을 탄다는 것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이 우리 관계를 조금이라도 가깝게 해줬는지, 앨리스는 전보다 아주 많이 말하게 되었다.
#9
우리는 탐사를 잠시 멈추고, 옷을 말리기로 했다. 안개를 지나온 동안, 알게 모르게 축축이 젖은 외투가 체온을 뺏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땔감은 현지에서 조달했다. 키 작은 나무는 맨손으로 부러트릴 만큼 연했는데, 모으는데 수고를 던 만큼 불을 붙이는 것이 고생이었다. 나무는 땔감으로도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불을 붙이려 했지만, 검은 연기만 잔뜩 나오며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몇 번째인가 간신히 불을 붙였을 때는 완전히 진이 빠져서, 차라리 지피지 않은 것만 못했다.
젖은 옷을 말리며 우리는 시답잖은 잡담을 많이 했다. 앨리스는 언변이 뛰어나다 할 수는 없지만, 간혹 보여주는 발상이 날 놀라게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언어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녀와의 대화 중에 이상한 내용을 들었다. 대화 내용을 기억으로 재구성하면 이러하다.
-아까 그건 "벤더스내치"예요. (밴더스내치 - A)
-벤더스내치?
-그렇게 큰 생물이 달리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게 뭐지?
-우리가 "벤더스내치"의 영역에 있다면 위험해요.
-누구에게서 들었지?
-잘 몰라요.
-모른다니, 어찌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그녀는 뭔가 알고 있다. 꿈에서 봤다는 지하 세계와 관련이 있을까? 사실 나도 그 새에 관해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러면
그나저나 벤더스 내치라니. 우연일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단어가 아니던가? (??? 이상한 나라의 나? - A)
#11
우리는 강줄기를 따라 이동했다.
미지의 영역을 탐사할 때, 강만큼 좋은 지표는 없다. 긴 구간 아우르며 언제든 원래 장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불안한 점은 우리가 무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에는 많은 포식자가 모이기 마련이다. 이곳에도 맹수가 있고, 그 크기가 지상의 맹수와 비슷하다면 내가 가진 권총으로 상대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아까 그 새를 제외하곤 여기 지하에서 만난 생물 중 허리보다 높이 올라오는 생물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곳엔 대형 포식자가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도 이들이 어디서 열량을 얻고, 빛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지 못했다. 겉보기와 달리, 이곳은 아주 정적인 환경일 수도 있었다.
한편 머리 위로는 아까 보았던 뿌연 안개가 거리를 두고 구름처럼 맺혀 있다. 광원은 저 위에 있는 것 같은데, 추락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한 듯하다. 열기구로 귀환하면 그때는 이런 지하에 빛과 열을 비추는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있겠지.
여기서 동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다섯 종을 발견했다.
구분법은 순전히 발자국뿐이었다. 동물은 모두 이끼 더미, 나무 아래, 바위틈, 심지어 흙 밑에도 숨어 있어서 모습을 도통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영민한지, 우리를 눈치채면 쏜살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점이 내 불안이다.
대단히 간악한 사냥꾼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예민한 동물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저것들을 저렇게 겁먹고 떨게 하는데, 그것이 포식자의 증거가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나는 권총을 숨기지 않고 들고 다녔다. 앨리스는 그 모습에 긴장한 눈치이다.
그런 와중, 본의 아니게 문제를 일으킨 것은 내 왼 다리였다. 우리는 개활지를 찾아 쉬기로 했다. 어떤 포식자라도 그늘 밖으로 나오긴 꺼릴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거리가 있다면 권총으로도 족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별탈 없이 여길 지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12
틀리더라도 나는 생물학자가 아니니 별수 없지 않은가.
#13
설령 리빙스턴 박사라도 나만큼 깊이 와봤을까?
아문센이라 할지라도 나와 같은 모험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번 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닥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도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속에 싹튼 감정은 다름 아닌 호승심이었다.
명예나 영광 따위엔 초연해졌다고 믿었는데, 아직도 이만한 열망이 내게 남아 있던 것이다. 기쁘다. 뜻밖의 수확이다.
#14
열기구를 수리할 수 있을 만한 소재를 발견했다. 점착성이 강하고, 천처럼 면적이 넓다.
열에 변성하는지 알아봐야겠지만, 마치 꿈에서 나온 것처럼 딱 원하던 물건이다.
너무 절묘한 우연이라서 도리어 불안할 지경이다.
이런 자연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15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람의 발자국이다.
더 알아보기로 했다. (단서? - A)
#16
앨리스에게.
이걸 봤다면 강 위에 있는 열기구로 돌아가라.
#17 - A
교수님이 행방불명 되었다. 혹시 단서가 남아 있을까 일지를 엿봤다.
몇몇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별첨을 남겼다. 연관이 있을까?
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뭔가 이상하다.
나는 바로 저것을 다른 사람이 쓴 거라는 걸 눈치챘다.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대로 강 아래로 걷고 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