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재버워크
승전 이후 황색파의 행보는 더욱 과격해졌다.
런던 소방대는 이제 황색파의 친위대가 되어, 왕당파 색출을 명분 삼아 갖은 폭정을 감행했다. 그들은 가정과 기관을 허락 없이 군홧발로 치고 들어와, 서슴없이 그들의 적을 찾아다녔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 연줄로도 더는 어디 숨어다닐 곳이 없었다.
모든 곳에서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브라운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릴 숨겨줄 순 없었다.
"허버트, 미안해... 우리도 만약 왕당파로 몰린다면...."
"이해하네, 충분히 이해해."
브라운은 특유의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계속 사과했다. 그의 뒤에 있는 브라운 여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버트 씨, 쫓아내는 처지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몸조심해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였지만, 나는 그녀의 겉모습 뒤에 얼마나 강한 마음이 감춰졌는지 이제 알았다.
"고맙네."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당신 같은 신사와 왕자님이 대역죄인처럼 쫓기는 시대라니, 흥."
우리는 더 인사하지 않고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여, 여보, 말조심해. 그러다가 왕당파로 몰리기라도 하면...."
겁먹은 브라운 씨의 만류가 잔음처럼 우리 뒤를 쫓아왔다. 대로에서 벗어난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윌리엄 왕자는 내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미안해, 경."
그는 보고 있는 내가 괴로울 정도로 기가 죽은 채로 사과했다.
"왕자께서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머뭇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대한 사죄는 누가 해야 하는가. 런던, 죄 많은 도시여, 네가 사과할 테냐?
내 대답에도 왕자의 기분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보다 경비가 삼엄해질 겁니다. 그 전에 런던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왕자는 내 지팡이를 보았다.
"경은 다리가 불편하고, 나는 미숙한 몸이라 마음껏 달리지도 못해. 도시를 벗어나기도 전에 소방대에 잡히고 말 거야. 경도 도시를 탈출하려다가 잡힌 사람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봤잖나."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교외에 지인의 저택이 있습니다. 그곳에 자동차 한 대가 있는 걸로 압니다. 옛날 물건이고 잘 주행하지 않아서 상태가 어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일이 잘 풀릴까?"
왕자의 부정적인 질문은 공연한 트집이 아니었다.
여느 때와 달리 나도 내 계획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었다. 특히나 아서 프랑크와 프랑크 저택은 노란 외벽 회사가 오랫동안 노려오던 것이 아닌가.
황색파가 그들의 지원을 받는 게 분명하고, 런던을 둘러싼 왕립군의 포위도 풀렸으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는 그들이 이미 프랑크 저택을 점거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가야만 했다.
"희망이 있는 한, 뭐든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모든 문이 닫히고, 어디로도 갈 수 없을 때, 열리지 않을 문틈을 바라보며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만한 거짓말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렇게 절름발이와 어린 왕자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우릴 완전히 버리진 않았는지, 우리는 다섯 개의 감시소를 지나고, 몇 번이나 순찰대를 만나고도 한 번도 적발되지 않고 통과했다.
도시 전체가 광란에 들떠 있었고, 그렇기에 경비가 느슨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기 도착했다.
"저 언덕만 지나면 저택입니다."
"나는 괜찮아. 경이 더 걱정이야."
윌리엄 왕자는 어린 몸으로 씩씩하게 걸었다.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는데, 기꺼이 배려심을 발휘한 것이다.
그것이 왕가에서 받는 교육인지, 아니면 왕자의 천성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접하고 있을수록 안타까운 마음만 점점 커졌다. 내가 왕가에 품고 있던 의심마저 어느 정도 불식할 만큼 이 어린 왕자가 보여주는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여하튼, 우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 언덕에 올랐다.
그리고 저택의 정문이 보이고,
"이럴 수가...."
왕자는 절망한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는 내내 이런 결말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고, 이것이 아주 필연적인 절망이란 것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프랑크 저택 정문에는 열 대는 족히 되는 자동차가 정차해 있었다.
이미 늦은 것이다.
저들이 오라클을 발견했을지는 몰라도, 저택이 점거된 이상 지하실을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혼수상태로 누워 있던 아서가 제때 탈출했을 리는 없으니, 그는 아마도....
하지만 마리는 영리한 여성이다. 그녀는 런던의 상황이 안 좋은 것을 알고 아이들과 함께 무사히 런던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아이들도 마리와 함께라면 안심이다.
그렇게 나는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아직 희망은 남았다. 모든 희망이 사그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한편,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저택 앞에 서 있는 신사숙녀는 아마도 노란 외벽 회사의 관계자일 텐데, 그들의 행색, 행색이 너무나도 기괴했던 것이다.
우선 옷차림도 제법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단한 사교장에서나 볼 법한 훌륭한 정장을 입거나, 몸매가 드러나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로 폭이 좁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차림으로 숲 한가운데 서 있는 것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런 점조차 다음에 설명할 특이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겐 머리가 없었다.
난처하지만, 문자 그대로였다. 그들의 머리가 있을 자리에는 그만한 크기의 에디슨 전구가 박혀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건... 내가 본 것 중 가장 기괴한 것이었다.
만약에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게 마네킹을 이용한 아서의 기발한 장난 같은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 아니, 그것들이 사람인지도 의심스러웠는데, 여하튼,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웅성거렸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제법 떨어진 여기까지도 들렸는데,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거대한 웅성거림으로, 서로 마구 악을 쓰는 것 같은데 말소리가 들리기나 할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들과 마주하고 있단 말인가.
"선생님."
등 뒤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로 권총을 겨누었다.
"접니다, 선생님."
"이런, 세상에! 윌슨, 자네, 살아 있었나!"
나는 그의 모습을 돌아보고 감동한 나머지, 그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자네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었나?"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다면 반드시 이쪽에 들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네가 적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그의 말대로 너무 뻔한 동선이었다. 만약에 누군가 매복하고 있었다면 속절없이 끌려갈 신세였다.
"해후를 푸는 것도 좋지만,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저들은 오감이 둔하지만, 이렇게 눈에 띄는 언덕에 언제까지고 서 있는 것도 그리 현명한 방책은 아니니까요. 자동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서두르시죠."
"그래, 그래. 하지만 어디로?"
"런던 안에 생존자 몇이서 피난처를 마련했습니다. 그곳이라면 잠깐 정도는 안전할 겁니다."
"생존자라니, 무슨 생존자?"
윌슨은 탁하게 흐린 눈을 찡그렸다.
"경찰이요. 경찰청과 수사국은 무너졌습니다. 런던에 사법 기관은 이제 소방대뿐입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추격은 아주 길어졌다.
이곳 지하의 진흙은 어찌 된 영문인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마르지 않았다. 마치 해안가의 갯벌 같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한참이나 발자국이 직전에 난 줄 알고 쫓아다닌 거였다.
아무리 따라가도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탓에, 나는 몇 번이고 돌아갈까 마음먹었지만, 이젠 그리할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내가 지나온 길에는 모든 발자국이 신기루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지하 세계의 기묘한 법칙인지, 아니면 발자국 주인이 신통한 마법을 부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정말 이 주인을 찾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한편, 지하 세계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광활했다.
냇가 주변에 좁게 펼쳐져 있을 줄 알았던 생태계는 냇가를 벗어날수록 오히려 크고 번성하였다. 나는 심지어 내 몸보다 큰 발자국을 보기도 했다.
그런 공룡 같은 생물이 세상에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몇 번을 봐도 그건 발자국이 맞았다. 나는 키가 별로 작지도 않은데 몸이 왜소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조차 날 불안하게 하지 못했다.
날 정말로 불안하게 만든 것은 어떤 천 같은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열기구를 수리하는데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점차 생각이 바뀌고 있는 참이었다.
발자국을 따라갈수록 그건 점점 늘어났는데, 하얀 비단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은빛으로 반짝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 상태에서 나타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가공했다고 하면, 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이것을 만들고 방치했는지 의문이 남았다. 또 이렇게 대량 작업을 한 이들은 어째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할수록 마음속 불안은 비대해졌다.
내 불안을 터트린 기폭제는 소스라치는 비명이었다.
──────!!!
샨타크의 울음이었다.
가뜩이나 영혼을 긁어내는 악몽 같은 소음인데, 거기에 비통함까지 더해지니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음색이 아니었다.
나는 병에 걸린 것처럼 귀를 손가락으로 마구 팠다. 소리의 잔향마저 벗겨 내겠다는 듯이 손톱으로 귀에서 피가 철철 날 때까지 긁어댔다.
그러고 난 뒤에야, 나는 지옥 밑바닥에서나 들릴 법한 이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찾아보았다.
잠시 후, 나는 하늘에 걸린 샨타크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처음에는 어떤 독특한 비행법의 일종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그것이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려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세상에 이보다 큰 생물이 없을 것 같던 샨타크 같은 끔찍한 피조물도, 어떤 존재 앞에서는 그저 피식의 대상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통찰에 전율하고 벌벌 떨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주인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따닥따닥 거리는 세상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불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호흡이 누락된 숨소리 같기도 했고, 침 없이 입을 오물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거미줄의 주인은 큼지막하고 오밀조밀한 이빨을 왕성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것이 샨타크에 다가가는 동안,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악몽 같은 장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묶인 것처럼.
처음에는 더 소란스러운 샨타크가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가 먹힐 테고. 저것은 날 집어삼키는 예언의 총체이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죽음을 기다렸다.
그 순간, 어떤 마른 손이 나를 붙잡았다.
그 손은 그대로 저항하지 않는 내 몸을 붙들고, 머지않은 작은 암벽 틈 사이로 끌고 갔다. 내가 뭔가 깨닫기도 전에 손은 내 몸을 놓았다.
"당신은...."
"쉿."
암벽 틈의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메마른 남자였다. 그는 손가락을 입가에 올렸다.
"저것은 울림을 들어요."
"울림?"
"우리가 말할 때 목청이 어떻게 움직이죠?"
나는 그가 하는 말을 그제야 알아들었다. 소리, 진동에 예민하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했다.
"잠깐 쉬고 계세요. 냄새를 맡았을 겁니다. 저건 아주 끈질긴 사냥꾼이라서, 포기하고 떠나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겁니다."
듣자하니, 그는 나보다 여기 아주 익숙한 사람 같았다.
나는 그야말로 내가 찾던 발자국의 주인이라고 직감했다..
"저것들, 저것들은 대체 뭐요?"
"재버워크요."
"재버... 뭐?"
나는 당황하여 더 물으려고 했지만, 긴장이 풀리고 워낙 오래 걸어 피로했던 탓에 더 묻지도 못하고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조금 쉬셨습니까?"
나는 윌슨의 부름에 조수석에서 깨어났다. 어린 윌리엄 왕자도 잠에서 갓 깨어난 모양이었다. 멀리 보니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왕립 베스렘 병원입니다."
또 의외의 장소였다. 들어본 적이 있는 수준이 아니라, 여러 인연으로 묶여 있는 장소 아니던가.
"원래는 정신병동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우리의 은신처죠. 들어갑시다."
나는 병동 건물 안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자 윌슨이 갑자기 제지하고 나를 불러 멈췄다.
"어디 가십니까?"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요, 그래서야 은신처라고 할 수 없죠."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처럼 정보를 주는데 인색했다.
"거점은 아래 있습니다."
"아래라고 하면, 지하?"
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떤 붉은 녹이 슨 작은 창고에 다가가더니, 그만큼 녹슨 자물쇠에 열쇠를 쑤셔 넣었다.
틀린 열쇠를 집어넣었나 의심할 정도로 한참 씨름하던 그는 간신히 잠금을 풀고 문을 열었다. 귀청 따가울 정도로 큰 소음이 났다.
이래서야 정말로 은신처라고 할 수 없었다.
"뇌수술동입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