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몇몇시간
빈 창고 안에는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계단의 잠금을 풀고 내려가니 또 다른 쇠창살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쇠창살 문을 열고 지나니, 또다시 쇠창살 문이 나타났다. 급하게 조성한 것은 아니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여러모로 은신처라고 말하기에는 눈에 띄는 구성이었다.
"왕자, 어둡습니다. 발을 조심하세요."
사정을 모르는 윌슨은 내가 윌리엄 왕자를 부르는 호칭에 의아한 눈치였다. 언젠가 설명할 기회가 있을 테지. 그리 생각하며 길을 걷던 나는 낯익은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푸줏간에서나 맡을 법한 냄새에 길들지 않은 왕자는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누가 죽었군."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고작 며칠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윌슨은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지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별로 태연해 보이지 않았다.
"뭐든지 말입니다."
우리는 썩은 살점이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진 복도를 지났다.
좌우에 늘어진 치료실은 방보다는 감옥에 가까웠고, 그 두터운 철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지만, 굳이 눈에 의지하지 않아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경, 손을 잡아주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떨어지지 마십시오."
여기가 정서 교육에 치명적으로 좋지 않다는 말은 사족이었다.
하지만 내가 태연한 것은 그렇다지만, 윌슨마저 이런 광경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순수하고 애국심 가득하던 청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아까 그건 뭐였나?"
"무엇 말입니까?"
"그 전구 머리들 말이야."
"아, 관리 위원회 말이군요."
윌슨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관리 위원회라면... 내가 아는 한, 그런 이름을 쓰는 단체는 런던에 하나뿐인 줄 아네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것이 맞을 겁니다. 노란 외벽의 9개 회사를 총괄하는 최상위 회의 기관 말입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위원들이 인간의 길을 벗어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도대체 모든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선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나는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미 모든 것을 그르치고 난 뒤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그저 처절한 무력감을 곱씹을 뿐이었다.
계속 복도를 걷던 와중에, 나는 한 가지 낯익은 문양을 발견하고 발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보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종이에 그려진 것은 분명 제임스 타운 칼리지를 상징하는 태양이었다. 올드코트 대학은 이런 외진 정신병동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것일까.
하지만 그조차도 지금은 의미 없는 고찰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나?"
"그것이라면...."
"관리 위원회 말이야. 이번 내전의 내막을 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였네만."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레오 브레이버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나는 설명을 촉구하며 그를 응시했다.
"보편사무국의 요원을 자칭하는 살찐 남자였습니다. 말을 아주 많이 더듬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데 고생을 꽤 했습니다."
어쩐지 설명을 들을수록 인상이 뚜렷해지는 것이, 내가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한 설명 같았다.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그자도 여기에 있나?"
"네, 있습니다."
"만날 수 있겠나?"
윌슨은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숨 막히게 어색한 간격이었다.
"또 숨어서 누구도 만나기 싫다고 하나?"
"비슷합니다."
"괜찮아, 나는 그를 잘 알거든."
실은 그렇게 말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간 세상에 적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버티던 와중, 이렇게 뜻이 일치하는 자를 계속 만나니 기분이 좋아져서 무심코 허풍을 친 것이다.
그러자 윌슨은 벌레를 씹은 듯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조금 뒤, 윌슨은 어느 방 앞에 멈췄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치료실과는 분명 다른 방으로 직원이 쓰는 시설인지 몰랐다. 안에는 전구 불이 환하게 비쳤는데, 뇌수술동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본 뚜렷한 광원이었다.
깔끔한 인상과 달리 방 안으로 들어오자 끔찍한 악취가 확 풍겼다. 그렇지만 복도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었기에, 실제론 별 차이 없었다.
실내에는 세상 모든 고뇌를 짊어진 듯한 남자 한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만 들어서 우릴 바라보더니, 갑자기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런, 세상에, 이게 누구야. 자네, 살아 있었나?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
은근한 프랑스 억양이 남은 독특한 영어 발음을 가진 남자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를 잘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 문법학교 동기이자, 여러 번 내 힘이 되어줬던 든든하고 고약한 친우였으니 말이다.
살아 있다면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반가움이 앞섰다.
"페터 국장,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그 호칭은 됐어. 이제 수사국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범죄수사국 3대 국장, 윌리엄 페터가 바로 그였다.
나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다가 윌슨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우리가 전부입니다."
윌슨은 말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이야. 아까 말했던 브레이버리는 어디 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방구석을 가리켰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끔찍하게 후회했다. 옆에서 누군가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것이었다.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주제에 어설프게 용감했죠."
윌슨은 담담히 설명했다.
"세상과 맞설 용기는 없지만, 방아쇠를 당길 용기는 있었던 겁니다. 손가락 한 번 움직이면 편해진다면, 그것이 낫다고 생각했겠죠."
나는 내가 아는, 알았던 고깃덩어리에서 눈을 떼어 놓았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말투와 호들갑, 끝내 자라지 못한 용기에 대한 기억은 천천히 파편처럼 흩어졌다.
"그래서, 경찰과 형사를 통틀어 살아남은 자들이 자네들뿐이라고?"
"처음 도착했을 때는 더 많았지."
페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스무 명은 있었을 거야. 아무튼, 그 얘기는 이제 하지 말자고. 산 사람은 어쨌거나 현세에 대해 떠드는 편이 건설적이지."
어떤 참사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나는 그 기억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이란 걸 알아보고 물러났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는 페터의 눈동자에서 일순 피어오른 광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쪽 꼬마는 대체 누구야?"
페터는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에게 핀잔을 줬다.
"자네는 국장이나 되는 사람이 왕자 얼굴도 못 알아보나?"
그러자 페터와 윌슨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왕자? 설마 윌리엄 왕자? 런던에서 실종되었다는 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경들에게 의탁하게 되었네. 지금은 해줄 것이 없지만, 왕실로 복귀하거든 반드시 보은하겠네."
윌리엄 왕자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서 의젓하게 말했다. 직전까지 구토하던 것을 포함하여 퍽 인상적인 첫인사였다.
"영광입니다, 왕자. 하지만 자네가 데리고 있었을 줄은."
페터는 윌리엄을 향해 가볍게 격식을 갖추고는, 바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는 늘 그랬어. 언제나 예상 못 하는 일을 해내지."
"호들갑 떨지 말게. 그런다고 지금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야."
실제로 그랬다.
불충한 생각이기는 하다만, 왕자는 지금 상황에서 짐을 늘리는 어린아이 한 명에 불과했다. 단둘이서 여기 이르기까지 얼마나 고생하였던가.
"필레몬, 잠깐 이리 와봐."
그럤더니 페터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부르며 복도로 나왔다. 나는 순순히 그를 따라서 방에서 나왔다. 우리는 방에서 조금 더 떨어졌다.
"왕자가 우리 손에 들어온 건, 이 상황을 타개할 해답이 될지도 몰라."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나는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여왕이 끔찍하게 아끼는 손자잖아. 아무리 외국 지원을 받아도, 결국 영국 한복판에 있는 황색파 입장에서는 뭐라도 협상 카드를 쥐고 싶지 않겠어? 그러니까...."
나는 옛 벗이 다짜고짜 쏟아내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너도 느꼈겠지만 이런 환경에 왕자를 두는 것도 좋지 않아. 차라리 황색파 보호에 들어가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낼 거라고. 내가 정치를 하니까 잘 알아."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 왕자를 팔자고 말하는 건가?"
만약 그가 조금만 덜 진지한 눈을 했더라면, 조금만 덜 간절한 눈을 했더라면,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았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걸로 분명해졌다.
그는 나보다 현실을 더 직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렇지 못할 뿐이었다.
"있잖나, 나는...."
나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에게는 어떤 설득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여기 온 것이 실수였던 듯싶네. 우리는 떠나겠어."
나는 등을 돌렸다. 그 등 뒤로 딱딱한 철체 감촉이 닿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페터의 격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모두가 괴롭지."
"아니! 보편사무국장이 내게 말하더군! 자기네가 왕립 베스렘 병원과 제휴하고 있다고, 그 지하에 피난처로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다고 말이야!"
그는 갑자기 외쳤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어떤 마음으로 형사들을 추려서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지. 그리고 여기 이르는데 몇 명이 희생되었고, 붙잡힌 보편사무국장과 경찰청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많은 희생을 겪고 여기 도착하고, 쇠창살 문을 여니까 그제야 알았지. 보편사무국장은 자기 혼자 살 생각으로 우릴 끌어들였던 거야! 우리를 괴물들 먹이로 던져주고, 저 혼자 살 생각이었겠지! 형사 중 반은 싸우다가 죽었고, 반은 자살했지. 나는 둘 다 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도 없었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레오 브레이버리라는 돼지 자식이 찾아오더니, 온갖 절망적인 보고를 하고는 혼자 구석에서 벌벌 떨다가 태연히 자살하더군. 그 모습을 보더니 형사 몇 명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어. 남은 건 우리 둘뿐이었지.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구명줄을 보여주고 돌아가겠다고? 돌아가겠다고! 너는 아무것도 몰라! 여긴 지옥이야! 나는 여길 벗어나려면 뭐든지 할 거야! 뭐든지!"
페터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마구 내뱉는 말을 들으며, 나는 허리를 찌르는 총신이 따가울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법을 잘 알았다. 척추를 노리는 이상 살 방법이 없었다.
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탕!!
총성이 울리고, 페터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허억...."
윌슨은 거칠게 숨을 마시며, 자신의 총과 쓰러진 페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윌슨."
"제가 죽였습니까? 제가 국장님을 죽였습니까?"
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물었다. 나는 어떤 대답도 돌려줄 수 없었다.
"고맙네."
그제야 그는 실이 풀린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 마구 악쓰며 소리 질렀다.
쓰러진 페터의 입이 붕어처럼 벌어져 있었다. 모든 희망을 삼키는 식탐 많은 붕어였다.
"아, 당신. 당신도 눈을 떴군요. 아니면 이 경우, 눈을 감았다고 해야 할까요?"
나는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압니다. 당황스러우시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해는 뜨고, 아침은 옵니다."
그는 나를 아이처럼 달래며, 자장가처럼 속삭였다. 나는 틈새 밖을 보았다. 밖에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든 괴물은 사라진 것이다.
나는 다시 남자를 돌아보고, 마른 입으로 말했다.
"자네, 자네가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이지, 아닌가?"
"생전에는 그렇게 불렸지요."
그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그를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렸다. 고속 열차를 타고 드림랜드를 관통했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야 위의 세일즈맨이 바로 그였다.
"생전? 그렇다면 여긴 저승이고, 자네는 날 마중하러 온 베르길리우스인가?"
내 질문에 그는 대단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언어를 싫어해요. 그 자식은 늘 본질을 흐리거든요."
루이스 캐럴은 언어가 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되지도 않는 허풍을 늘어놓았다.
"제가 만약 여기가 저승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믿는 종교의 저승을 상상하겠죠. 천국 매표소나, 저승의... 염소... 뭐, 그따위 것들 말이죠. 거기에 본연의 창의성이 발휘될 기회는 전혀 없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언어라는 자식은 아주 끝내주게 재미없는 놈이죠. 모두 그렇게 지루한 방식으로 말하니, 세계도 따분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음... 그리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말했다. 이런 화법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더니, 앨리스나 그의 아버지와 꽤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이곳을 찾아오면 늘 이렇게 소개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상한 나라라고."
"정말로 당신이군요, 루이스 캐롤."
그러자 그는 놀란 것처럼,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도 말한 거 같지만, 생전에는 그렇게 불렸지요."
캐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저는 아주 오랫동안 홀로 지냈습니다. 10년? 아마 그쯤 될 것입니다. 이곳의 시간은 현실의 그것과 아주 달라서, 어떤 때는 하루가 수년처럼 길게 느껴지죠. 예전에 시간과 관련한 농담을 한 적이 있는데, 제가 그 안에 갇혀 버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자네가 자살했다고 들었네."
루이스 캐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요(Back in time), 때로는(Sometimes)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흐르는지(time flies by)."
나는 그것이 루이스 캐롤의 수상쩍은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 말인지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실천했을 뿐이었다. 다시 시간 얘기로 돌아간 것(Back in time)뿐이니까.
"하지만 자네는 자살한 게 아니야. 문제는 현실에서 죽은 자네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하는 거야."
"가끔은요.(At time)"
나는 그 대답을 듣고,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건 그저 말장난이었다. 그는 그가 말하는 시간에 있을 뿐(At time)이었다.
"자네가 말장난을 잘한다는 건 알겠어. 이제 그놈의 시간 얘기 좀 집어치우고 말하지."
"결국엔(In time) 쉬는 시간(breaktime)이 오는군요."
심지어 쉬는 시간(breaktime)은 시간 얘기를 끝낸다는 의미로 쓸 수도 있었다. 마침내 앨리스의 모든 말장난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정색하며 말했다.
"당신 추측대로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육체를 잃고, 이렇게 꿈의 세계를 방황하며 길고 긴 고독을 견딘 이유도 하나뿐입니다. 절 죽인 살인자를 고발하고, 그에게서 한 소녀를 지켜내는 것 말입니다."
나는 그가 누굴 말하는 것인지 묻지도 않고 답할 수 있었다.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
"이곳에서 시간은 정말 기이합니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마세요, 이번엔(this time) 농담하자고 꺼낸 말이 아니니까."
캐롤은 정색한 내 얼굴을 보며 기어코 시간 한 단어를 더 쓰고 말았다.
"평생 영적 체험 비슷한 것은 하나도 해본 적 없지만, 육체를 잃고 여기 이상한 나라의 주민이 된 순간부터 저는 어떤 계시를 봤습니다. 그것은 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암시하고 있었죠. 저를 죽인 살인자가 다시 소녀 앨리스를 살해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얼마나 고독을 견뎌야 할지, 그에 관한 단서는 무엇도 없었죠. 하지만 저는 기꺼이 모두 감당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이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제가 본 예지를 막을 방법을 찾아 방랑했죠."
그는 아련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올해가 햇수로만 그의 사후 11년이 되는 해인데, 실제로 이곳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시간을 얼마나 길었을지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신을 찾았죠. 저는 궤적을 울리는 열차가 도착하고, 총성이 울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남겨진 당신의 꿈을 발견하고, 그 잔해를 통해 당신을 엿봤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하에 내려오며 '추락 사고'를 겪고 이곳에 떨어진 지금이야말로 기다리던 때가 왔음을 확신했죠."
또 그 모든 시간을 견디고도 여전히 감정의 희석 없이 견뎌낸 캐롤의 정신력 또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저는 포트 미도우 언덕에서 떨어지는 앨리스를 구하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토끼풀이 우거진 깊은 구멍, 토끼굴로 추락해서 이 드림랜드를 발견하게 되었죠. 그자는 영악했지만 그 사실은 몰랐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한순간도 복수를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도 몰랐겠죠. 저는 이 고발의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 왔습니다."
캐롤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주문을 외웠다.
"더 이상 그가 현실을 주무르게 두지 마세요, 꿈과 현실을 자유롭게 오가며 악행을 자행하는 그 악마의 이름은 에드워드. 제가 지침이 되겠습니다, 여기는 그가 올 수 없는 꿈속의 이상한 나라."
나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 캐롤은 날 보고는 세게 등을 떠밀었다.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자, 어서 가세요. 빨리요!"
나는 눈을 떴다.
"앨리스!"
아직 전부 끝난 것은 아니다. 전부 끝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