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앨리스 (1)
안녕하신가요, 독자 여러분.
갑작스럽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누구이며, 또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빠졌기에 이렇게 여러분께 하소연하게 되었는지 말인지요.
내 이름은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입니다. 위로는 오빠가 둘, 언니가 하나, 아래로는 동생이 여섯 있습니다. 하지만 둘째 오빠는 내가 두 살 때 죽어서 기억나지 않습니다. 집안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아서, 나도 집안의 족보를 보기 전까지 몰랐던 사실이지요.
죽은 형제는 한 명 더 있습니다. 우리 가족의 골칫거리 알버트입니다. 나고 바로 그 해에 세상을 떠나서 모든 가족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못된 알버트.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늘 화목합니다.
언니 로리나가 날 못살게 굴긴 하지만, 남에게 흉을 볼 정도는 아니랍니다. 그러니 내 하소연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족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기왕 어릴 적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어른들은 누구도 믿지 않았고, 내 형제자매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고 놀려대는 통에,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여러분께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한 가지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나는 누구도 겪지 못한 신비한 일을 겪었답니다.
아버지는 내게 많은 책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밥투정을 하는 소년이 빼빼 말라서 굶어 죽는 이야기, 불장난을 좋아하는 소녀가 활활 타서 재가 되는 이야기, 게으른 사냥꾼이 토끼에게 사냥당하는 처지가 된 이야기, 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치는 날, 아이는 놀러 나가고 싶었습니다.
아이는 좋아하는 빨간 우산을 쓰고 나갔지요.
하지만 바람이 너무 강해서 그만 하늘 멀리 날아가 버렸답니다.
먹구름이 지나고 나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늘 그 아이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습니다.
천사가 있는 하늘나라로 갔을까요, 아니면 뿔이 달리고 독을 뱉는 생물들이 사는 먼 이국으로 떠났을까요? 얼굴 본 적 없는 내 오빠와 못난 알버트도 그렇게 멀리 떠난 건지 모릅니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언제나 그들의 모험에 대해 상상했습니다. 얼마나 즐겁게 지내는지 가족들에게 편지 한 통 보내는 일조차 잊고 지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부터 그런 상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바뀌었거든요.
안타깝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글로 남지 않았습니다. 오직 어렴풋한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지요.
우리는 화창한 날에만 나갔습니다. 그는 내게 구름 한 점 없이 완벽한 날만을 주고 싶어했습니다. 템스 강에 도착하면 느긋하게 들썩이는 나룻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보다는 젊고, 시종들보단 나이 많은 그 수줍은 청년을 나와 자매들을 배 위에 차례대로 태우고, 언제나 마지막에 자신이 오르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언덕에 있다는 토끼굴 아래로 떨어진 소녀가 지하 세계에서 겪는 대단한 모험극이지요.
소녀의 이름은 앨리스.
맞아요, 이건 모두 나를 위한 이야기였습니다.
"리들, 리들."
"어?"
나는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앞에는 어째선지 화난 표정의 학우가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요, 로리나?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졸았어? 네가 순찰돌 시간이야."
"아, 응, 미안해."
나는 자지 않았지만 구태여 말다툼할 필요는 없었기에 순순히 사과했습니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정도는 이제 압니다.
나는 촛대를 받고는 어두운 복도로 나아갔습니다. 흔들리는 약한 불빛만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광원이었습니다. 전기도 끊기고, 기름도 없으니, 나중에는 이런 양초도 없어질지 모릅니다.
────쿵!
나는 폭발음에 촛대를 꽉 잡고 벽에 붙었습니다. 일렁이는 촛불 빛마저 사라진다면, 이 복도엔 정말 어둠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바깥을 바라봤습니다. 여기서 꽤 떨어진 곳에는 횃불을 든 일련의 무리가 대학을 향해서 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방금 흔들림의 정체는 바로 저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우릴 겁주려고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대포를 수십 분에 한 발씩 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아까 얘기했던 난처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교정 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건물 밖에는 안에 들어오지 못한 피난민이 가득했습니다. 황색파의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 온 왕당파들로, 나는 잘 모르지만 대단한 귀족이나 지주들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이 대학의 실체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여기는 자유 런던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는 듯합니다. 어째선지 이 대학까지는 저들이 들이닥치지 않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쿠궁!
"꺅!"
나는 다음 충격은 예상하지 못해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촛대를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양초가 바닥을 구르고, 촛불이 꺼지며 복도가 완전한 어둠으로 점멸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양초를 주우려 바닥을 더듬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앞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그리고, 아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 어둠 너머로부터 새벽녘과 같은 금색 광휘가 분출하며 세상을 백색으로 물들인 것입니다. 넓지 않은 복도는 무한하게 확장하고, 저의 존재는 빛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습니다.
화려한 대성당처럼 복도 양옆에 나란히 선 천사들은 합창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머리가 반절이 잘린 탓에 뇌도 없고, 눈과 코도 없었기에 입을 뻥긋거리는 붕어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첫 소절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 노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헨델의 메시아였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배워, 형제자매와 함께 부르곤 한 익숙한 코러스 부분이 들렸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문에 응하듯이, 빛 무리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머리가 없는 천사들과 달리 완전하고 완벽한 초인의 형상이었습니다. 그의 등 뒤로 비치는 광채가 너무 눈부신 탓에, 그림자 외로는 어떤 형체로도 보이지 않았지만, 존재감은 거인보다 크게 느껴졌습니다.
<너 처녀 앨리스야, 미카엘을 따라가거라.>
그는 입을 쓰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리하면, 너는 만국을 구하게 되고, 아도나이의 왕국에선 삼천 명의 왕이 마중 나와 네게 감사하며, 순금보다 가치 있는 관을 머리에 씌우고, 가장 귀한 날에만 쓰는 향유를 기꺼이 그 위에 부으리라.>
도무지 눈이 적응할 수 없는 거센 빛이었습니다.
금색 물결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한 명의 구원자, 메시아뿐이었습니다. 나는 어렴풋이 비치는 그의 안면을 눈에 담았습니다.
초인의 안면에는 이목구비가 없이 오직 한 장의 천만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 위로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잘 보이진 않았고, 마치 사자死者의 얼굴을 덮은 면사포처럼 보였습니다.
나의 눈에는 계시가 보였습니다.
메시아를 따라서 인간을 구하고 만인의 찬사를 받는 내 모습 말입니다. 앨리스의 이름은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내 이름을 딴 성당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지어졌습니다.
나의 관은 금으로 만들어졌고, 언제나 시들지 않는 화환에 둘러싸여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찌 성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기쁜 환희를 느끼며, 동시에 내가 아니게 되는 감각에 소름 끼쳤습니다. 너무나도 두려워서 다리조차 움직일 수 없었지만,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경사스러운 가사가 계속 울렸습니다. 이아, 할렐루야.
"당신이 학장이죠?"
성가가 멈췄다.
오직 하늘을 올려다보며 경배하던 모든 머리 없는 천사가 일제히 날 바라봤다.
"교수님께 들었어요. 당신은 신이나 천사가 아니라, 그저 인간에 불과하다고. 수백 년간 살아오며 사람을 속여서 뇌를 파먹을 뿐인 괴물이라고요."
찬란하게만 보였던 황금색 빛은 서서히 추하디추한 유황 색으로 바뀌었고, 성가처럼 들렸던 합창도 인간의 아우성, 한탄하는 곡소리, 문란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성으로 바뀌었다.
완전무결하게 보였던 초인의 형상은 점차 노후하여, 나중에는 노인이라 부를 수도 없는 영락하고 추한 인간의 결함품으로 바뀌었다.
"당신이 보여준 환상 속에서, 살아 있는 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미카엘의 방위, 동쪽으로 가면 저는 죽어요.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절 속일 수 없어요."
나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숨겼습니다. 어디선가 읽기로 마귀에게 두려운 모습을 보이면, 그 약함을 파고든다는 글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차게 내뱉었습니다. 나는 가슴 속의 십자가 목걸이를 움켜쥐고 외쳤습니다.
"물러나라, 마귀야!"
그러자 내 말에 응하듯이 그림자는 물러나고, 어두컴컴한 빛무리도 사라졌습니다.
"아...!"
나는 다시 빛 한 점 없는 조용한 복도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이겨낸 것입니다.
기쁨도 잠깐,
"시성하라."
"어...?"
나는 고개를 돌리고, 눈앞까지 다가온 괴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머리가 없는 인간은 미지근한 숨결을 흘리며, 이빨을 보이며 다시 속삭였습니다.
"시성하라."
그 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괴물들은 날 완전히 둘러싸고는 어디도 가지 못하게 속삭였습니다.
"시성하라."
"시성하라."
"시성하라!"
"시성하라!"
"그리 되리라!"
"그리 되리라!"
속삭임은 고함이 되어서 나를 다그쳤습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 귀를 막았습니다. 무섭습니다. 더는 이런 괴로운 일을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리들. 리들."
"리들! 리들!"
나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내 어깨를 잡고 흔들던 손은 깜짝 놀란 것처럼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손의 주인을 살폈습니다.
"뭐야, 왜 그래?"
나는 그제야 날 둘러싸고 있던 괴물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세상이 완전한 적막 속에 다시 가라앉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촛불 떨어트렸어."
"미안!"
나는 사과하며 급하게 바닥의 촛불을 주우려다가, 아직 식지 않은 촛농 때문에 손을 데고 낮게 소리 질렀습니다. 손의 주인은 그런 내 행동을 눈에 담지도 않고 물었습니다.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방금 그 사람 누구야?"
"그 사람?"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습니다. 그녀도 내가 본 것을 똑같이 본 걸까요? 하지만 그녀는 고갯짓으로 복도 끝을 가리킬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마 40야드(*약 36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아주 인상이 희미한 남자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내 또래쯤 되는 남학생 같았습니다.
"너한테 오던데, 몰라?"
나는 남자의 얼굴을 몇 번이나 살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계속 내가 있는 곳을 응시했습니다. 내가 느끼는 불쾌함은 나만의 것이 아닌 듯이, 날 일으킨 학우도 싫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기분 나쁘다."
나는 어두운 복도에서 누군가 소리 없이 내게 다가오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 모습은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정말 끔찍하게 불쾌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쿵, 쿠쿵, 쿵.
나는 창 너머에 도심지 쪽에 붉은 노을이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요, 아니지요, 이 소리와 빛은 이제 런던 시민 모두가 아는 것이었습니다.
"폭격? 왜?"
나는 학우의 떨리는 혼잣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대답할 만큼 알지 못했습니다. 비행선의 추락 이후 런던의 하늘을 나는 것은 이제 소방대의 비행기뿐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잠에서 깬 학생들은 모두 복도로 나와서 도시 한가운데 떨어지는 폭격을 바라봤습니다. 런던의 악몽의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그보다 복도 끝에 서 있던 남학생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고개를 돌려봐도 몰려든 학생들 때문에 붐벼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혹시나 그가 이 혼잡을 틈타서 내게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기분 나빠.
결국, 교수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했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교수님이 무슨 사고를 당하신 것이 아니라면, 지하에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내려와 있는 것이다.
가지고 내려온 비품은 모두 열기구에 남겨뒀지만, 이제 와서 거기로 돌아가는 건, 죽여달라고 늑대에게 목을 내미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가진 몇 끼분 식사와 간단한 도구만 가진 채로 지하 한가운데 던져진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님까지 죽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절망적이라서, 나는 그분이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교수님을 막연히 기다릴 수 없었다.
식량이 다 떨어지고도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면 굶어서 죽을 테고, 그 이전에 잠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이 추운 지하에서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자연이라고는 평생 옥스퍼드 외각의 작은 숲과 언덕밖에 알지 못하던 내가 졸지에 세상 누구도 와본 적 없는 오지에 단신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다행히 나는 진정한 의미로 혼자는 아니었다.
해리 오빠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사냥 다녔고, 돌아오면 늘 의기양양해서 우릴 불러모으고 제 영웅담을 설파했는데, 그 기억이 지금 와서 도움이 된 것이다.
나는 냇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작은 공터를 만들고, 이곳 어디서나 주울 수 있는 은색 천과 키 낮은 나무를 엮어서 움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뽑아낸 풀은 잘 말려서 잔가지와 함께 성냥불을 붙여서 모닥불을 피웠다.
성냥은 얼마 없으니 불씨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며 관리했다.
이렇게 보면, 나는 꽤 잘한 셈이다.
하지만 사냥에 이르러서는 빵점이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내가 만든 조잡한 덫을 밟는 동물은 아무도 없었다. 냇가에는 아무 동물도 살지 않으니 어망을 칠 수도 없었다.
그나마 그냥 마셔도 될 만큼 물이 깨끗한 것만이 위안이었다.
나는 해리 오빠의 얘기를 좀 더 잘 들어놓을 걸 하고 후회하다가, 문득 내 꼴이 퍽 우습다고 느꼈다.
결국, 가져온 먹을 것이 전부 떨어지고도 사냥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허기를 참고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하루 중 일과는 불씨를 다시 지피고, 덫을 고치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하염없이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옛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내게 이런 것을 가르쳐 준 해리 오빠를 떠올리거나 하는 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가 온지 이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보지 못한 것이 벌써 십 년은 된 것처럼 낯설었다.
아니, 그보다 나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올 정도라면 오빠도 이미 어른티가 나야 할 텐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직 아이 같은 모습밖에 없었다.
다른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두 살 어린 에디스도 열댓은 되었을 텐데, 나만큼 자란 모습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가족 모두의 기억이 그렇게 한참 전에 멈춰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이상했다. 문제는 기억만이 아니었다.
여기는 누구도 온 적이 없는 지하 세계일 텐데, 어떻게 나는 여기서밖에 나지 않는 은색 천으로 움막을 짓고, 왜 냇물에 동물이 살지 않는다는 걸 바로 알았을까.
십 년도 전에 들은 해리 오빠의 얘기만으론 설명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다닌 오빠는 고작 하루 동안 주변 숲에 사냥을 나갔다 돌아올 뿐이었으니, 이런 야영 경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꿈이 아니었어."
나는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난 여기 와본 적이 있어."
내가 지하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누군가와 만났고, 헤어졌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가진 미련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더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부스럭.
나는 작은 나무가 멀리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 고개 돌렸다. 거기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허버트 교수님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인상이 흐릿한 남자였다. 그는 눈대중으로 3, 40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무성한 나무 수풀을 헤치고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메모를 남긴 그 사람인 게 분명했다.
나는 짐도 챙기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서두르기는커녕, 그 자리에 서서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