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앨리스 (2)
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안 것은 가족사진을 찍고 이틀이 지난 뒤였습니다. 사진사가 인화한 사진을 액자에 걸어서 가져왔습니다.
그걸 받아 본 부모님은 본 적 없이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그걸 고스란히 창고에 가지고 가서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찍은 사진이 도착하기만 기다렸던 우리 형제자매에겐 불운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표정들을 보고도 사진에 대해 물을 만큼 용감한 사람은 우리 중에 없었습니다.
선량한 나의 형제자매는 부모님을 거스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만이 그들이 느낀 불안을 거름 삼아 호기심이란 부패한 감정을 키워냈습니다.
너무 탓하지 말아주세요.
그것이 내 본질인 것을 어쩌겠어요? 나는 선천적으로 금제와 불문에 이끌리는 기질을 타고난 것입니다.
여하튼, 나는 창고의 열쇠를 서재에서 빼돌렸습니다. 부모님이 들어가길 금지한 창고로 가는 것이 신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모든 비밀은 다 시시한 것이랍니다.
어린 나에겐 대단한 모험이었지만 전리품은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날 내가 얻은 것이라곤, 창고에서 목구멍이 틀어막힐 정도로 많은 먼지를 마시고 걸린 목감기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놀이에 정신이 팔려 목적을 잊진 않았습니다.
나는 짧은 수색 끝에 그럴싸한 벨벳 천으로 감싼 액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가족사진이 분명했지요. 나는 그걸 불빛이 들어오는 곳까지 끌고 나온 후에 풀어헤쳤습니다.
그리고 모든 금기가 그렇듯, 금기를 파낸 자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입니다.
사진에는 화목한 우리 가족의 평화로운 한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른 흉내를 내는 해리 오빠부터 아직 어린 로다까지, 모두 부모님 주변에 모여서 찍은 사진은 장관이었습니다.
그 조화로운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나요. 나 말입니다. 흑발 가족에서 태어난 금발 짐승, 앨리스 리들 말입니다.
비밀을 엿본 대가로 나는 졸지에 천애 고독한 홀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아, 나는 떠나고 싶었습니다. 정말 떠나고 싶었던 겁니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둘째 오빠와 알버트가 그랬던 것처럼, 태풍을 타고 저 하늘 너머에 내가 있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야기는 순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태풍도 어린 아이를 하늘에 날려버릴 만큼 강하진 못했습니다.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렸고, 부모님의 감시는 더욱 엄격해지고 말았죠.
나는 부모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옥스퍼드를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행선지가 런던이 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맑은 옥스퍼드의 하늘과 달리 연중 우중충하며, 인간의 마음속에 짙은 안개가 낀 이 도시야말로 내게 어울렸습니다.
나는 하늘을 나는 데 실패한 이후, 대신 몸에 위장색을 칠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컬트, 불가사의, 악마 숭배, 민속학... 나의 금발 따윈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검고 불쾌한 색을 계속 칠해갔습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높은 담장에 긴 그늘이 걸렸습니다.
해가 뜨고, 대학에도 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활기 넘치는 분위기는 감돌지 않았습니다. 학우들의 표정은 어둡고 피로하기만 합니다.
폭격은 고작 십여 분에 그쳤지만, 누구도 다시 잠들지 못했습니다. 어디 떨어졌을지 모르는 폭격이 당장 대학 건물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전염병처럼 돌았습니다.
나는 식당으로 이동하던 중에 갑자기 밖에서 들린 고함에 놀라서 발을 멈췄습니다.
"아이라도 들여 보내줘!"
가슴 위에 손을 올리니, 손바닥을 통해 쿵쿵거리는 박동이 느껴졌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살짝 바깥을 엿보니, 한 늙은 신사분이 모지스 교수님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밤에 들었잖아. 외벽이 지키고 있다고 한들,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
"저번에도 통보 드렸지만,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학내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대체 뭔 놈의 적법? 지금 런던에 법이랄 게 하나라도 남아 있나?"
교수님의 말에 신사분은 한껏 비아냥대며 말했습니다.
"왕가가 물러났으니 왕권도 없고, 귀족원과 서민원이 무너졌으니 입법도 없고, 경찰청과 수사국이 불탔으니 사법도 없는데, 대체 무슨 잘난 법이 남았지?"
"천부권이요."
그러자 신사분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천부권? 신? 자네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문을 열고 사람들을 구하라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인가?"
그러자 교수님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태연히 답했습니다.
"고작 신이 어찌 올드코트의 학칙을 어기겠습니까?"
그 오만한 대답에는 노기등등한 신사분조차 말을 잊은 것 같았습니다.
모지스 교수님은 더 대화하지 않고 그대로 교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들릴 만큼 무거운 철책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맥없이 지켜보던 늙은 신사분은 손을 벌벌 떨더니, 곧 닫힌 문을 향해 허하게 외쳤습니다.
"천벌 받을 놈들!"
정말 그 말대로입니다.
나는 대단한 비밀을 엿본 듯하여, 심장이 더욱 크게 뛰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가서 몰래 열어줄까요? 여기는 넓으니 수십 명쯤은 들키지 않고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겐 그런 용기가 없었습니다. 교내에는 바깥과 다른 도덕규범이 있었고, 나는 거기서 벗어날 만큼 대단한 용기는 없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놈들'이란 표현은 참 알맞은 것입니다.
무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죄가 없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가요. 죄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그 부분을 제대로 변별하고 있습니다.
"리들."
나는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식당에 모이라는 얘기 못 들었어?"
"아, 미안. 지금 갈게."
나를 아는 체하며 부른 학우는 날 영 못 미더워하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가 누군지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란 뜻이겠죠.
그는 잠깐 망설이더니 머지않은 복도 끝자락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너도."
나는 그가 누구에게 말을 거는지 퍽 궁금하였기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상태 그대로 딱딱하게 굳고 말았습니다.
거기 서 있던 것은 어제 보았던 그 남자였습니다
어제처럼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오니까 그의 특이점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얇았는데, 창백하기보단 근섬유가 비춰 보여서 불긋하게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그 아래에 흐르는 핏줄은 불쾌한 박자로 꿈틀거려서 도무지 사람의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나는 그가 인상이 옅다고 기억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동안 어떻게 눈치채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대답도 하지 않고 날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학우는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봤고, 나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 그 따가운 시선.
나는 발을 접질린 탓에 바닥을 굴렀다.
"아얏!"
흙구덩이에 넘어져서 먼지가 날리고, 오른쪽 손바닥에 땅에 긁힌 상처가 크게 났다. 나는 피 흐르는 것을 수습할 새도 없이 급하게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었다.
무엇에 걸렸나 뒤를 살피니 미처 보지 못했던 돌부리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신발이 잘 신겨지지 않아서 성질 내며 마구 구겨 신었다.
하지만 거리를 꽤 벌린 건지, 뒤에 누구도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휴...."
나는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처음 쫓기고부터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숨이 벅찬 나머지 머리에 산소가 가지 않는지, 어질어질해서 생각도 잘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작은 바위에 기대어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걸으려고 일어나던 나는 뭔가 허전한 느낌에 생각을 정리했다. 급히 떠난 탓에 짐이라고 할 만한 건 아예 챙겨오지 못했었다.
없는 것은... 그러고 보니, 교수님이 남긴 탐사 일지가 없었다.
아마 넘어질 때 어딘가 떨어트린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 교수님의 흔적을 찾을 유일한 단서일지도 모르는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두고 가는 것도 문제다.
만약 날 쫓던 그 남자가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남긴 주석을 읽고 내 정보를 뭔가 알아챌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당장 피해는 없더라도 상상만으로도 영 꺼림칙했다.
나는 조금 더 찾아보다가,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 발견하고 그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하얀 솜뭉치 같은 동물이었다.
"토끼?"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그건 토끼였다.
나는 단숨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리가 발견한 지하 세계는 지상과 완전히 분리된 생태계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면 다윈의 진화론이 맞아서 지상과 환경이 비슷한 이곳에 토끼처럼 수렴 진화한 생물인가? 만약 그렇다면 토끼처럼 재빨리 도망쳐야 하는 신체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니까, 대형 포식자 동물이 존재한다는 뜻일까?
그렇게 마구 떠오르는 상념은 지금 상황과 아예 관계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는데, 한참 굶고 달리며 고생한 탓에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서 그랬다. 사실 나는 그보다 급선무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아참, 일지!"
나는 토끼의 수중에 있는 노트를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토끼는 유유히 내 손을 피하고, 두 발로 벌떡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멍하니 바라봤다. 도망치는 것까지 예상했지만, 두 다리로 달려서 도망치는 토끼를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바보처럼 입을 헤벌렸다가, 흙조차 털지 못하고 급하게 그 뒤를 졸졸 쫓았다.
토끼는 깊고 어두운 수풀과 동굴을 지났다.
냇가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지하 세계는 더욱 넓고 광활한 환경을 다짜고짜 내밀었다. 토끼를 쫓고 있자니 어쩐지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달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그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내 주위로 기차에 탄 것처럼 빠르게 풍경이 뒤로 지나갔다. 나는 겁에 질려서 금방이라도 몇 번씩 멈출까 했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정말 길을 잃고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유일한 이정표인 흰 토끼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토끼는 들을 새도 하지 않고, 어느 언덕에 도착하더니 그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힐끗 살폈다. 굴은 척 봐도 아주 깊어서, 아무 장비도 없이 뛰어내렸다간 크게 다칠 것 같았다. 토끼가 아무리 유연하다고 해도 이런 곳에 떨어지고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고민했다.
첫째로 토끼가 저렇게 자신 있게 뛰어내린 것을 보면, 평소 다니던 안전한 길이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고, 둘째로 내가 이 풍경이 아주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나는 여기 와본 적이 있었고, 그 굴을 몇 번이나 지나다녔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게 어릴 적에 여러 번 다니고도 다치지 않았다는 건, 여기가 안전하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불안하게도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 말이다.
나는 조금 더 망설이다가는 정말 토끼를 놓치게 될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다. "히약...." 하고 허무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체공은 길었다.
정말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굴은 깊었는데, 어느 정도였느냐면 '어라, 여기 너무 깊지 않아?'라고 생각하고도 조금 뒤에야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내 걱정과 달리, 나는 아주 축축하고 두텁게 쌓인 토끼풀 더미 퇴비 위로 떨어졌다.
몸에서 냄새가 고약하게 났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하는 것보단 나았기에 안도했다. 다만, 기억과 달리 상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마른 풀에 베인 생채기가 몸 곳곳에 그어졌다.
나는 간신히 풀더미에서 빠져나와, 상처투성이에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자 갖은 설움이 북받쳐서 눈물이 쏟아졌다.
"싫어... 집에 돌아가고 싶어."
"어디로?"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 들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남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있는 것은 토끼 한 마리뿐이었다. 일지를 품에 안은 두 발로 선 기괴한 흰 토끼 말이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데?"
이제는 부정하려도 방도가 없었다. 토끼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목소리가 들렸다.
"토끼야, 네가 말한 거니?"
"토끼? 그게 누구야?"
그건 하얀 털에 대비되는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날 내려다봤다. 나는 지하에서 정말 뭘 보고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건방진 생각을 교정하기 충분한 광경이었다.
또박또박 영어를 말하는 토끼라니!
"너 말이야. 너는 토끼잖아."
"내가 토끼라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그게 무슨 말이니? 너는 누가 봐도 토끼잖아."
그러자 그것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인간 같은 동작이었다.
"내가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게 뭣 때문일까?"
"뭐?"
"내가 알기로 존재를 규정하는 가치는 둘이 있어. 시간 요정과 우주 요정이지. 시간 요정은 내가 언제 있었는지 속삭이고, 우주 요정은 내가 어디 있었는지 속삭여. 그렇기에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거야. 하지만 이 공간은 두 요정 다 태업하는 통에 뭐든지 뒤죽박죽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나로 존재하는 건, 네가 정의해준 지금 순간뿐이란 말이야."
토끼는 따박따박 도무지 무슨 말인지 어려운 철학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나는 바보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넌 토끼잖아!"
"그러면 너는 뭔데?"
"나는 사람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 네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
나는 바닥을 털고 일어났다. 옷에 붙은 토끼풀이 축축하니 달라붙어서,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다가 토끼가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신경 쓰여 관두고 말했다.
"매일 아침, 저녁마다 거울로 보고 있거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진짜 네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
"어?"
"그건 거울에 반사된 모습에 불과하잖아. 심지어 좌우가 거꾸로니까 어떤 의미론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너는 네 모습을 알고 있느냐는 거야."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세상에서 누구도 달성한 적 없는 불명예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토끼한테 말싸움으로 지기!
"네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야. 아니야?"
"세상에, 너는 꼭 칸트처럼 어려운 얘기를 하는구나."
그러자 토끼가 물었다.
"칸트? 그게 누구야?"
"칸트도 모른단 말이야? 그렇게 유명한 철학자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나는 토끼의 무식을 탓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나도 칸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아는 척했을 뿐이었다. 나는 토끼가 그가 한 말에 대해 묻기 전에 재빨리 이야기를 마쳤다.
"아무튼 그런 사람이 있어."
"그래, 앨리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일지를 읽었구나!"
"읽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남의 물건을 그렇게 함부로 손대면 안 돼!"
"여기는 그런 곳이야.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하게 되지."
토끼에게 인간의 도덕을 말하는 건, 그렇게 똑똑한 일 같지 않았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질문은 무슨 말이야?"
"매일 구름을 보면서 생각하고 있어. 대체 저건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이곳의 주민이 아닌 너는 구름을 닮았으니, 어쩌면 대답을 알려줄지도 모르잖아."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구름? 여기도 구름이 있니?"
"한 번도 하늘을 보지 않았어? 하늘을 보면 보이잖아."
한참 생각하던 나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깨닫고 외쳤다.
"구름? 저 위에 있는 하얀 안개가 구름이란 말이야?"
"그래, 여기는 고원이거든."
그러고 보면 그랬다.
늘 사라지지도 않고 하늘에 걸려 있는 저 새하얀 안개를 구름 말고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있었을까. 나는 지하 세계의 하늘에 있었던 것이다.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나는 여기를 렝(Leng) 고원이라고 부르고 있어."
렝 고원,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토끼는 말하려다가 말고,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위를 보고 냄새를 맡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마저 긴장해서 소리 낮춰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 위에 있어."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깊은 토끼굴 통로 위는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위험한 것들이 여럿 살지만... 내가 아는 어떤 냄새랑도 달라. 그래, 굳이 말하자면, 앨리스, 너랑 닮은 냄새야."
"사람."
"그래. 그리고 지금 내려오고 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곧장 토끼풀을 털어내며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가 쫓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