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앨리스 (3)
우리는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하면, 물론 나와 학우, 그리고 무사히 화를 피한 몇몇 교수님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별 공동체 의식을 느끼지 못했지만, 자리가 좁은 탓에 떨어져 앉을 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도 공통점은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희멀건 죽 말입니다. 무슨 곡물을 넣고 끓였는지 건더기가 보이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식단에 디저트가 없다고 투정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마실 물도 넉넉하지 않아서, 빨리 비가 와주지 않는다면 모래부터는 물 마시는 것도 검사받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장 나쁜 것을 공유했습니다. 가난 말입니다.
그런 허무한 식당 정면에 문법 교수님이 나와서 섰습니다. 미안한 일이지만,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수업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어젯밤에 다들 들었니?"
교수님이 어렵사리 첫말을 떼었습니다.
"그래, 그리 소란스러웠으니 모르는 게 더 어렵겠지. 어젯밤 벌링턴 하우스가 폭격당했다. 당연히 비행선이 추락한 이후, 그런 걸 주도할 수 있는 건 런던 소방대뿐이지. 안다, 나도 얼마나 수상한 이야기인지 안다. 하지만 지금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불안해하는 학우들을 진정시켰습니다. 나는 벌링턴 하우스가 어딘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소란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하지만, 벌링턴 하우스는 왕립 학회가 설치된 건물이다. 명단이 나오진 않았지만 밤중에도 건물엔 사람이 제법 있었는지, 사망자가 꽤 나온 모양이다. 그리고 미리 눈치채고 도망쳤다는 튜더 학회장을 제외한 다른 모든 회원이 일제히 가정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에겐 모반 혐의가 씌어 있다고 하며, 적절한 재판 후에 처벌하겠다고 발표했다."
다행히 교수님은 무정한 분은 아니셨기 때문에, 나같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도 배려하여 설명했습니다.
서두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요.
"물론 너희도 알겠지만, 왕립 학회란 우리 영국이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자랑이다. 회원들의 두뇌 하나하나가 소중한 국보와 같지. 그런 그들을 처벌하겠다고 말하는 거다. 처우가 어찌 될지 확정된 건 아니지만, 우리에겐 참고할 만한 전례가 있다. 프랑스 혁명 말이다. 혁명군은 곧바로 대학의 지식인들을 잡아들여 모두 단두대로 보냈다. 기반이 허술한 권력자일수록 지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귀결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그 설명에 옆자리에서 "그렇구나." 하는 안도한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양돈장의 돼지가 도축되는 것이 당연한 흐름이라고 돼지들이 안심을 하던가요?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위안이 되지 않는 일은 있습니다.
"반면 저들은 우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이야말로 저들의 허술한 통치 기반을 무너트릴 힘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참 막연한 말이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날아오는 총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차라리 여기 허버트 교수님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허버트 교수님은 비록 지루한 말만 한다고 해도, 한 번도 이해하지 못할 얘기는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용도 몹시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었죠.
하지만 여기 교수님은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지식은 힘이기에, 올드코트는 불멸이다. 우리는 수없이 무너지고, 그때마다 견고하게 다져진 역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 대학에 누가 있는지 결코 잊지 말아라."
문법 교수님은 두 손을 꼭 모았습니다. 마치 신께 기도를 바치는 것 같았습니다.
"an dTigerna, saoi saoi."
단언컨대 실내의 누구도 그 말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조금 전까지 이보다 난해하게 말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그걸 넘는 경지를 보여줬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외국어를 사용해서,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만든 것이지요.
하지만 교수님이 누굴 말하는지는 눈치껏 알 수 있었습니다. 앞부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교수님 중에 종종 saoi saoi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분들이 몇몇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일랜드 게일어로 의미는 이랬습니다.
현자 중의 현자.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 말입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하여 옆을 쳐다봤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학우가 교수님처럼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다른 학생들, 교수님들도 모두 하늘을 보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본 머리 없는 천사들의 모습과 지금 광경이 겹쳐졌습니다.
나는 오싹한 마음이 들어서 하늘을 보지 않았습니다.
"케이시 오' 제럴드가 왔다!"
이제 한계였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식당의 모든 사람이 날 바라봤습니다. 동공은 비정상적으로 벌어져서 홍채 대부분을 차지했고, 크게 뜬 눈은 한계를 넘어서 가쪽 눈구석 살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습니다.
"싫어...."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대로 식당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는 동안 누구도 날 막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조용한 복도에 나오고도 조금 더 뛰어서, 복도의 반쯤 지나고서야 겨우 발을 늦췄습니다.
나는 그대로 계단 쪽을 향해 정처 없이 걸으며 숨을 골랐습니다.
방금 보았던 것은 대체 뭘까요, 하늘에 뭐가 있었던 걸까요, 혹시 하늘을 봤다면 나도 똑같이 되었을까요? 그것이 너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계속 걷던 나는 계단 쪽 벽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고 발을 멈췄습니다.
아직 오전 중이라 태양은 각도가 기울어져 있었는데, 그 탓인지 처음에는 왜소하던 그림자는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거인의 그림자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불길한 마음에 뒷걸음질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몸을 부딪치고는 짧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꺅!"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이름 모를 학우가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 반가워서, 나는 그를 바라보며 호소했습니다.
"저기, 저 사람이 계속 따라와서...."
다시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학우의 얼굴을 돌아보는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너 어제, 대포 소리에 웅크리고 가만히 있었다며. 지금도 교수님 말씀하는데 갑자기 뛰쳐나가고."
나는 눈을 깜빡였습니다.
"지금 너 혼자 힘든 게 아니잖아."
왜 그런 얘기를 지금 하는 걸까요. 나는 도무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너 이상해."
아닌데.
아닌데요. 왜 다들 나를 그렇게 보나요?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학장님과 쫓아오는 그 남자잖아요. 왜 다들 내가 잘못했다는 것처럼 쳐다보는 건가요?
하지만 나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어제 본 천사의 계시 같은 것을 설명하고, 어떻게 계속 내 주변에 나타나는 본 적 없는 남자에 대해 변명할 수 있을까요.
나는 늘 그랬습니다.
모두 나를 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나는 그렇게 남들과 다른가요? 그건 그렇게나 나쁜 건가요?
시성(諡聖).
한 단어가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올랐습니다.
나는 따끔하여 무릎을 바라봤습니다. 그곳에는 언제 생긴지 모를 긁힌 상처가 나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야...."
나는 달리던 중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앞서 가던 토끼는 몸을 돌리더니 내게 걸어서 다가왔다. 물론 두 다리로 서서 말이다.
"왜 그래, 앨리스?"
"아까 다친 곳이 아파서."
나는 갑자기 토끼가 넘어져서 무릎을 찧는 느낌을 알까 궁금했다. 다른 토끼라면 몰라도, 이 토끼는 두 다리로 걷고 뛰니까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서두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쫓아올 거야."
"아직도 따라오고 있니?"
"딱 잘라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토끼는 건방지게 멋진 문장을 말했다. 나는 그것에 왠지 샘나고 심통이 나서 따지듯이 물었다.
"그냥 모르는 게 아니고?"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는 시간이나 공간이 분명하지 않은 곳이야. 그러니 네게 한 걸음 다가간다고 한 걸음 가까워지는 건 않단 말이야. 그는 그걸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
알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나는 사람처럼 걷고 말하는 토끼를 만난 이후, 그의 말을 우화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곧이곧대로 들어야 할지 정말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맨 처음 그 사람을 봤을 때랑 비교해서 지금은 훨씬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어?"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곱씹었다.
거리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남자는 나타났다가 사라졌기를 반복했으니, 꼭 가까워졌다고도 멀어졌다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한편으론 토끼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처음 그와 만났을 때는 40야드 정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아까부터 그를 만날 때마다 그 거리 차이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면."
"그 사람을 지금 널 쫓아오고 있지 않아. 이곳과 저 반대편을 오가며 거리를 좁혀서, 언젠가 반드시 잡힐 거야."
토끼는 담담히 운명을 선고하는 것처럼 단언했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나는 여기 도착한 사람을 몇 명이나 봤지만, 저렇게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은 처음 봤어."
유일한 희망이었던 토끼도 뾰족한 수는 내주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토끼가 하는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스스로 해결책을 내는 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나는 절박한 마음에 아무거나 물었다.
"그나저나 이곳과 반대편을 오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여기는 지하 세계잖아."
"지하? 렝 고원은 하늘과 별을 제외하곤 드림랜드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야."
"드림랜드라니...."
여기는 딱히 꿈꿀 만큼 좋은 장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잠들어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제대로 열기구를 타고 지하에 내려왔어. 그러니까 여기는 지하 세계일 거야."
"여기 도착하는 방법은 둘이야. 하나는 시속 88마일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거야."
토끼는 말했다.
"그건 별로 꿈이랑 관계없어 보이는데. 다른 하나는?"
"꿈을 꾸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논리적이네."
"하지만 평범한 꿈은 안 돼. 그래서는 모든 사람이 여기 왔을 테니까. 꿈속에서도 아주 빨리 움직여야지. 하지만 꿈에서는 다들 느리게 움직이잖아?"
토끼는 또 단언했다. 하지만 그 말은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자면서 꿈꾸는 걸 자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몸이 물 아래 빠진 사람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여서 불편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꿈을 꿔야 해. 그러면 여기 오게 되는 거야."
"떨어지는 꿈이라니."
불길하게도 나는 그 말에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여기에 어떻게 도착했더라.
처음에는 분명 낙하산을 준비해서 뛰어내렸다. 낙하산을 펴기까지 아주 빠르게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열기구를 타고 천천히 내려왔지만, 그 이전에 강풍을 만나서 빠르게 추락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언덕에서 떨어지는 꿈 말이다. 나는 그러고 언제나 이곳에 도착했다.
"그 말은... 꿈이 아니었다는 거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쉿.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벌써 쫓아왔어?"
"아니, 다른 사람."
우리는 낮은 수풀 속에 숨어서, 조심스럽게 나무 옹이로 만들어진 굴 너머를 엿봤다. 우리가 조금 있었던 동굴과 달리, 옹이 너머로는 울창하고 생기 넘치는 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동굴 천장까지 닿은 나무의 가지와 뿌리는 촘촘히 벽면을 감싸고 있었고, 바닥에는 녹색 폭설이 내린 것처럼 깊은 토끼풀이 쌓여 있었는데, 한 부분이 사람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토끼풀이 부스럭거리며 안쪽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한 명이 걸어나왔다.
"어?"
"아는 사람이야?"
나는 토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고작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어린 소녀는 아주 낯익은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너무 낯설어서 아예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수풀 안쪽에는 그녀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다. 스물 조금 넘어 보이는 청년으로 피부가 하얗고 유약한 인상의 남자였다.
"괜찮니?"
청년은 상반신만 일으키며 작은 소녀에게 물었다.
"미안해요, 루이스."
"나는... 나는 괜찮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루이스. 나는 그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낯익게 느껴졌다.
그 청년, 루이스는 떨어지면서 몸을 다친 것인지 잘 일어나지 못했다. 소녀는 그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것처럼 루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요! 아무도 없습니까!"
루이스는 자신들이 떨어진 구멍 위를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물론 드림랜드에서 소리 지른다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울상이 된 소녀를 향해 자상한 미소를 보이며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지금 모험을 온 거야. 토끼굴로 뛰어내려서 다른 세상에 들어왔어. 왕국의 이름은 이상한 나라야, 정말 재밌지 않니?"
그는 통증을 참는 것처럼 눈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주머니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 가자.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쳤다. 흰 물안개가 지나고 나니,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나무 옹이는 꽉 닫혀 있었다. 마치 춘몽을 본 것처럼 하염없었다.
"방금 거기."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떨어진 곳과 닮았어."
"그럴 수도 있지. 여기는 시간도, 공간도 불안정하니까."
기억 위에 탁한 막이 쓰인 것처럼 답답하고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더듬다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떨어진 물건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몰라."
"쫓아오는 사람은 어쩌고?"
"하지만 지금은 없는 거잖아. 다른 세계에 있다며. 잠깐 갔다 오면 괜찮을지도 몰라."
토끼는 별말 없이 나를 뒤따랐다.
"고마워, 너라도 있으니 위안이 되네. 어째서 날 그렇게 도와주는 거니?"
"오직 너만이 날 토끼라고 불러줬고, 내 존재를 인정해줬어. 그런 네가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얘기였다.
나는 잠깐 입 다물고 생각했다.
한참 더 동굴을 걷던 우리는 다시 구멍 뚫린 굴 아래에 돌아왔다. 나는 굴의 정경을 아까 보았던 풍경과 비교해 보았다. 잘 보면 그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보지 못했지만, 굴의 외벽을 이루는 돌은 나무뿌리가 파고들었던 것처럼 갈라져 있었고, 바닥에는 한때 왕성했던 식물의 자취가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그래, 맞아, 여기였어. 그리고 떨어트린 물건은 분명...."
나는 내가 처음 떨어졌던 썩은 토끼풀 더미를 파헤쳤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흙에 묻힌 은제 로켓을 발견하고 들어 올렸다.
"로켓?"
아무 무늬도 없는 수수한 로켓에는 오직 이름 같은 문자 하나만이 찍혀 있었다.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
나는 그 이름을 알았다.
"기억났어, 흑발 소녀는 나였어... 나는 아주 어릴 적에 여기 온 적이 있어!"
토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끼야?"
그는 고개를 돌려서 구멍 너머로 하늘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서서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안개로 뒤덮여서 늘 우중충했던 하늘이 지금 갈라지고 있었다.
한 번도 걷힌 적 없는 검은 구름이 물러나고, 그 너머로 짙은 청색을 품은 우주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흩어지는 흑운 사이로 교교히 빛나는 두 개의 쌍둥이 흉성이 불길한 형상을 드러냈다.
토끼의 붉은 안구에 별이 담겼다. 그는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숨어야 해."
"왜?"
"여왕이 왔어."
"누구?"
"고원의 주인."
"주인 누구?"
대답은 더 돌아오지 않았다. 토끼는 겁먹은 것처럼 두 발로 황급히 뛰어서 굴 안으로 달아났다.
"앗, 기다려!"
토끼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혼자 남는 것이 무서워서 황급히 뒤를 쫓았다.
여러모로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마치 기차라도 탄 것처럼 빠르게 풍경들이 뒤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처음보다 여유가 있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풍경은 동적이었다. 본래 움직이지 않을 동굴 벽면은 계속해서 꿈틀거렸는데, 잘 보니 풀이 돋았다가 시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빠른 것은 주변의 시간이었다. 공간이 아닌 시간이 움직이는 풍경이라니, 이런 것은 나 말고 아무도 본 적이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늦췄다. 빛에 산란하는 금색 털이었다.
나는 서서히 느려지다가 아예 멈춰 섰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동굴 갈림길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은 작은 아이였다. 나이는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았고, 산발한 금발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나는 다시 토끼 쪽을 바라봤다.
그는 내가 멈춘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눈치채고도 달아나는데 급한 건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반면, 소녀는 가만히 서서 내 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망설이다가, 아예 소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 어째서 아이 한 명이 홀로 있는지 몰랐지만, 적어도 모른 척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서 걸어가며 물었다.
"아이야, 넌 누구니? 왜 이런 곳에 있어?"
"나는 네가 싫어."
소녀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내 시선을 벗어나고 모퉁이 너머로 달아났다.
"잠깐!"
나는 모퉁이를 향해 달려가다가, 깜짝 놀라며 발을 멈췄다. 맞은 편에서 흑발 여성이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날 보고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그건, 그녀는, 나였다!
"거울?"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천천히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분명 조금 전까지 소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주 커다란 거울이 놓여서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손을 올려보니, 손은 맥 없이 거울을 통과하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손을 다시 빼냈다.
이건 말 그대로 거울 속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나는 누군가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길 바랐지만, 토끼는 떨어지고 난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거울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그 순간이었다.
거울 너머로 한 그림자 같은 검은 형상이 비춰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통로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거울을 바라보니 그것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다시 통로를 봤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시 거울을 돌아봤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바로 뒤에, 한 남자가 달라붙어서 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거울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