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02화 (102/232)

§102. 앨리스 (4)

해리 오빠는 사냥이 끝나면 자랑스럽게 전리품을 한 손에 들고 보였습니다.

큰 동물이 살지 않는 숲이었기에, 사냥감은 언제나 토끼였습니다. 혐오스러운 주검에 동생들은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나는 늘 오빠 옆에서 온기 없는 주검을 보았습니다.

왜 항상 토끼일까요?

나는 궁금했습니다. 내가 보았던 동화에서는 토끼가 게으른 사냥꾼을 도리어 사냥했습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는 교훈적인 우화였지만, 나는 그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뭐가 잘못된 걸까요?

토끼와 사냥꾼은 날 때부터 쫓고 쫓기는 천명을 점지받은 건가요? 하지만 나는 게으른 사냥꾼입니다. 토끼보다는 사람에 가깝지만, 쫓는 일은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천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쫓는 일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모두가 내가 쫓기를 기대한다면, 나는 이번 이야기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나는 도망쳤습니다.

물론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과장없이 말하건대, 나는 이 대학에서 누구보다 숨바꼭질을 잘하는 사람일 테니까요.

올드코트 대학에는 그에 관한 농담이 있을 정도로 숨겨진 통로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걸 저만큼 열심히 조사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어른들은 비밀 통로 같은 쓸데없는 일을 신경 쓰기엔 너무 바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작년에 나밖에 다니지 않는 길에서 교수님을 만났을 때 아주 기뻤습니다.

외톨이였던 내게 동류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내가 오래도록 엿보며 흠모해 온 기인, 필레몬 허버트라니까요. 그는 내가 런던에 오고 알게 된 사람 중 가장 나와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런던은 그야말로 괴이한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늘 바쁘면서도 아무도 생기가 없었고, 거리에는 낮에도 밝은 곳보다 그늘진 곳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가장 밝은 날의 햇빛조차 옥스퍼드의 흐린 날보다 어두울까요.

교수님은 그런 도시에서도 유별난 존재였습니다. 신문을 통해 그에 대해 접할 때마다, 나는 정말 기뻐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소식을 접하는 걸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주세요. 홀로 말 통하지 않는 머나먼 외국에 나왔는데, 고국의 사람이 같은 도시에 살면서 간간이 소식을 전해온다고요. 그렇다면 내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나요?

이야기가 새었나요?

아무튼, 나는 저녁까지 숨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줄곧 날 쫓아다니던 남자도 날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서 몰래 나와 보니, 이미 진작 해가 지고 밤이 되었는데 창밖에 노을 진 것처럼 붉고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건 이미 십이사도 칼리지가 전복되어 불타는 빛이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태우는 불꽃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우리 칼리지 안뜰을 내려다봤습니다.

교수님과 학우들이 분투하며 외벽에서 밀려 닥치는 군인들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끓는 물을 뿌리는 이쪽에 비해, 상대는 군용 화기를 갖추고 총포를 쏘고 있었으니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외벽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고, 사상자가 속출하니 분위기는 이미 죽은 사람들처럼 침통했습니다. 나는 대학이 이제 무너질 것을 직감했습니다.

모두 외벽의 수비를 포기하고 안뜰에 모였습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 갑자기 한 사람이 부서진 담장을 타고 올랐습니다.

"노래합시다! 할렐루야!"

모두 담장 위에 오른 모지스 교수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소란이 거짓말처럼 헐떡이는 사람들 숨소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an dTigerna, 우리의 주!"

모지스 교수님은 계속 외쳤습니다.

"방주의 주인!"

사람들은 서로 마주 봤습니다.

"모든 왕국이 사하고 남을 천년왕국을 이끌 왕 중 왕!"

"케이시 오' 제럴드!"

어디선가 누가 대답했습니다. 좌중이 술렁이며, 침체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

"케이시 오' 제럴드!"

"마지막 메시아!"

"케이시 오' 제럴드!"

하나의 대답은 곧 다수의 연호가 되었고, 그건 다시 하나의 큰 소란이 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절망적이었던 사람들의 얼굴에 광적인 흥분과 열광이 돌아왔습니다.

"노래합시다! 노래합시다!"

"할렐루야!"

그리고 합창이 시작되었습니다.

────쿠웅!

외벽이 무너지고, 군인들이 안뜰로 들이닥쳤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지스 교수님이 가장 먼저 죽었습니다. 혼자 높은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인지, 홀로 다섯 발도 넘는 총알을 맞고 몸이 잠깐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영원 후의 영원을 다스리실 분.

야포가 떨어지며, 흙과 함께 학생들의 몸이 비산했습니다. 살점으로 만든 붉은 꽃이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영원히, 그리고 또 영원히.

학생, 교수 중에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보고 있었던 내 말이니까 틀림없습니다. 오전에 문법 교수님이 하신 말이 맞았습니다. 오히려 총을 쏘는 군인들이 겁을 먹었고, 노래하며 죽어가는 이들 중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영원히, 그리고 또 영원히.

그리고 또 영원히, 그리고 또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거듭 반복하던 찬가는 끝내 멎었습니다. 더는 살아서 서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큰 승리를 거두고도 군인들은 안뜰에 서서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이 없는 건물을 향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습니다.

시성.

내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리한 것입니다. 얼마나 우둔하고 가치 없는 희생인가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도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같은 생명을 태우고도 그렇게 아름답게 빛난 십이사도 칼리지 화재와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가치 없는 것인가요?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태양이 역행했습니다.

서쪽 하늘에서 하얀 광채가 떠올랐습니다. 물론 해가 뜰 시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들 해가 떠오를 방위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분명 황도를 거스르고, 천천히 천정을 향해 올랐습니다. 그 기적적인 광경에 군인들은 제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그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봤습니다.

빛의 정중앙에 뚜렷한 인영 하나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천사다...."

병사 한 명이 총구를 바닥에 내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착각한다 한들 별수 없지요. 하지만 굳이 내게 저걸 부르라고 한다면 악마라고 부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신을 참칭하는 것은 신 아니면 악마뿐이니까요.

하늘이 환하게 빛나며, 우주에 흐르는 별은 모습을 감췄습니다.

나는 저 멀리 런던 시내는 어둠에 잠긴 것을 보았고, 이 백색 섬광이 올드코트 대학 부지만은 넓게 원형으로 내리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신성하게 보이는 이 빛 아래에서 참사가 벌어질 것도요.

"눈이, 눈이 안 보여!"

한 병사가 소리를 지르며, 눈가를 손으로 눌렀습니다. 손 틈 사이로 검은 연기가 뿌옇게 뿜어져 나왔습니다. 눈이 불탄 것입니다.

"도와줘!"

병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재빨리 그늘 아래에 숨은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눈이 불타서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빛 아래 선 병사들의 피부가 암석처럼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빛이 환하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색은 점차 하얗게 바뀌었고 움직임은 점차 멎었습니다.

피바다 위로 수십 개의 소금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피를 머금은 흰 기둥이 하부부터 녹아,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너무나도 참혹하고, 또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가뜩이나 흐리던 현실감이 더욱 옅어지고만 말았습니다.

"도망쳐."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거울에 들어오고 남자는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거울 속 세상은 현실과 똑 닮아서, 내가 거울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마저 잊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금발 소녀의 흔적을 쫓았다. 아이는 마치 동물처럼 행선지에 금색 털을 수북이 남겨둬서 추적이 어렵지는 않았다.

"앨리스."

나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 아까 보았던 금발 소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날 아니?"

"나는 네가 싫어."

"왜 싫은 거야?"

"너는 나랑 똑 닮았으면서도 소심하잖아."

소녀는 뛰어서 도망쳤다. 나는 그 뒤를 쫓았다.

"나라면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언니가 괴롭힌다면 도리어 혼내줄 거야. 말하고 싶은 사람 앞에서 수줍음 타다가 기회를 놓치지도 않을 거고, 싫은 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억지로 참지도 않을 거야."

소녀는 좁은 구멍 사이를 지나면서 말했다. 내 몸 크기로는 도무지 지날 수 없는 길이었다. 나는 뛰어서 통로를 우회했다.

소녀는 작은 동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날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데."

나는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내 처지가 되면 생각하는 것만큼 잘하진 못할걸."

"그러면 이렇게 하자."

방 안에 들어가니, 소녀가 튀어나온 돌에 걸린 휘황찬란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거울 액자였다.

거울이 있을 자리에는 검고 두꺼운 타르 같은 액체가 잔뜩 발라진 탓에 제 역할은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거야. 우리는 머리카락을 빼면 똑같이 생겼으니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소녀의 시선은 이상하게 맞지 않았다. 그녀는 날 보며 얘기하면서도 시선은 한참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소녀가 날 보고 말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것은 그저 과거의 모습에 불과했고, 그녀가 말을 걸고 있는 상대는 또 다른 소녀였다.

"나도 네가 싫어, 앨리스. 하지만 그렇게 하자. 아버지가 도지슨과 만나지 못하게 했거든. 꿈속에서라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좋아. 대신 잘하지 못하는 쪽이 없어지는 거야.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 둘은 필요가 없어."

내 옆에 서 있던 흑발 소녀는 서서히 흩어지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 소녀가 누군지 알았다. 아까도 보았던 내 어릴 적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금발 소녀는 나였다.

하나는 낮에 살았고, 다른 하나는 밤에 살았다. 하나는 빛 아래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하나는 살았고, 다른 하나는 죽었다. 하나는 사적인 하임리크였으며, 다른 하나는 보편 속의 언캐니였다.

우리는 서로 닮지 않은 쌍둥이였다.

금발 앨리스는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전혀 비쳐 보이지도 않았지만, 예전에는 지날 수도 있을 만큼 말끔했을 것이다.

나는 하염없이 그 앞에 섰다.

"앨리스."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가 방 중앙에서 들려와서 급히 고개를 돌렸다.

"토끼야?"

동굴의 중앙에는 흰 토끼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가운 마음보다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토끼는 밧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그의 것으로 보이는 피와 내장이 한바닥 쏟아져 있었다.

"토끼야!"

나는 옷을 더럽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다가가서 피투성이가 된 주검을 매만졌다.

"아, 앨리스, 너구나."

"아직 살아 있었니? 기다려, 내가 지금...."

"아니. 나는 죽었어."

토끼는 정색하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지금 살아서 말하고 있잖아."

"여기는 뭐든지 반대로 되는 곳이잖아. 죽어서 말하는 건, 살아서 입 다무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지."

나는 여전히 그가 하는 말의 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죽음으로 이별한 게 아니란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된 거야?"

"그 녀석이 나타났어."

"녀석? 녀석이 누군데?"

"널 찾고 있는 사람, 아비 잃은 에드워드 말이야. 도망쳐, 앨리스. 녀석은 내 주검을 함정으로 널 꿰어낸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밧줄을 풀려고 시도했지만 맨손으로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깐만, 도구를 찾아서 내려줄게."

"도망쳐."

"아직 보이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아니, 지금 네 뒤에 있어."

나는 그 말에 몸을 휙 돌렸다.

에드워드.

남자는 거기 서 있었다. 그는 고작 두세 걸음 떨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충분히 목소리가 닿을 거리였지만,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쫓아오는 건가요?"

"앨리스."

에드워드가 말했다.

특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금방이라도 소음에 묻혀서 사라질 것 같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잔잔한 목소리가 더없이 소름 끼쳤다.

"당신의 특이한 체질은 늘 방해였습니다."

"체질이요?"

"인간이란 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단순합니다. 보통은 꿈과 현실의 정체성이라 해도 그리 다르지 않죠. 하지만 이중적인 당신은 꿈속의 자신과 대화할 정도로 분리되어 있었고, 덕분에 꿈 너머를 인식하고 자유롭게 오갔습니다. 드림랜드 말입니다. 그 재능 덕에 당신은 학술회의 우수한 탐사원 노릇을 했죠."

나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지금 상황에 대해 이해할 만한 설명을 해주는가 했더니, 그 뒤부터는 있지도 않았던 일을 마치 옛날 일처럼 말했다.

"처음에는 그 배경에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당신의 과거에 큰 영향을 미친 그를 죽인다면, 어쩌면 제가 아는 앨리스 리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오산이었습니다. 당신은 그가 없어도 결국 학술회에 접촉했고, 심지어 멋대로 꿈과 뒤집혀서는 아주 위험하고 난해한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겠죠, 분명 그렇겠죠. 불쌍한 앨리스."

에드워드가 한 걸음 따라붙었다.

보폭의 차이로 거리는 도리어 좁아졌다.

"전생을 믿습니까?"

"전생?"

나는 다시 뒷걸음질쳤고, 그는 다시 따라왔다. 거리는 다시 가까워졌다.

"하늘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그리고 땅밑에는 지옥이 없죠. 그러면 대체 길 잃은 영혼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수백 년간 구천을 떠돌다가 대체 어디로 가겠느냔 말입니다. 죽은 자에게 구원이 없는 이 세상에, 인간은 대체 뭘 믿고 의지해야 하느냔 말입니까!"

그의 점잖은 말투와 달리 목소리는 거칠고 난폭해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니, 등이 벽에 딱 맞닿아 있었다. 물러날 곳은 없었고 에드워드의 얼굴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에드워드의 얼굴은 내 머리 위에 있었고, 그림자 드리운 안면은 짙은 흑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이 올라와서 내 목을 향해 다가오더니, 그대로 움켜쥐고 강하게 졸랐다.

"켁...."

억센 손을 잡고 저항해 봤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통이 막히고 빠르게 의식이 점멸했다.

그리고,

────탕!

총성이 울리고, 에드워드의 몸이 들썩였다.

"콜록! 콜록!"

간신히 그 손에서 벗어난 나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필레몬, 허버트...!"

에드워드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원망을 담아 부르며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람이 서서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교수님!"

"또...."

────탕!

허버트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하려는 에드워드의 이마에 정확히 총알을 박아넣었다.

"이번엔 말로 현혹할 기회는 주지 않을 거다."

"아아... 아아아아아아...!"

에드워드는 바닥에 쓰러져서, 피와 뇌수를 흘리면서도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모습은 가엽다기보다는 소름끼치게 두려운 악몽 같았다.

────탕! 탕! 탕! 탕!

허버트는 약실에 총알이 남지 않을 때까지 바닥에 쓰러진 에드워드를 맞췄다. 그때마다 몸부림치던 에드워드의 몸이 서서히 느려지다가 멈췄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건가요?"

"꿈에서 죽어봐야 악몽밖에 되지 않지."

그 말뜻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시체는 점차 형체가 무너지더니, 수백 마리나 되는 지네로 분리되어서 사방으로 기어나갔다.

"꺅!"

나는 다가오는 지네를 피해서 다리를 들었지만, 다행히 그것들은 계속 달려 도망쳐서 바위틈 사이로 흩어졌다.

"루이스 캐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군."

허버트는 뜻 모를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떠올라서 황급히 그에게 말했다.

"교수님, 빨리 여기서 떠나야 해요. 여긴 지하 세계가 아니었어요. 여기는...."

"드림랜드지. 자네가 어릴 적에 방문했던 이상한 세계이기도 하고. 내 말이 틀렸나?"

말을 도중에 끊는 허버트의 말은 정확했다. 나는 떨떠름한 심정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꿈속에서도 꿈을 꾸는 셈이야."

"하지만 어떻게 깨어나죠?"

"왔을 때랑 같은 방법을 쓸 거야. 열기구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한 번 떨어지는 거지. 문제는 에드워드가 어디로 갔느냐 하는 점이야. 한 번 쫓아냈다고 해도 우리가 꿈속에 있는 한, 결코 안전하지 않아."

"괜찮아요. 에드워드는 여기 없을 때면...."

나는 뒤늦게 착상이 닿아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참!"

그리고 황급히 거울 쪽으로 달려가서, 타르처럼 검고 두꺼운 도색이 칠해진 거울을 향해 외쳤다.

"앨리스! 도망쳐! 에드워드가 거기 있어!"

거울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는 잘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허버트는 입구 쪽에서 가자는 듯이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발을 옮겼다.

"가지마."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렸다.

"앨리스, 떠나면 안 돼. 네가 없이 나는 어떻게 나일 수 있겠어. 누군가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지 않고서,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어."

토끼의 주검은 절박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아까 네가 물어봤지? 남들이 말해주지 않고, 내가 어떻게 사람인 줄 아느냐고 한 질문 말이야."

나는 몸을 돌려서 주검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내가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 남에게 들을 필요는 없어. 나는 내가 사람이란 걸 알아.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나는 여기 존재해."

토끼의 주검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꼭 칸트처럼 어려운 말이야."

"약속할게. 네가 생각하고 있는 한, 내가 사라지고도 넌 거기 있을 거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 토끼의 주검이 파도에 쓸려나가, 어디론가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좋아, 그러면 기다릴게. 앨리스, 나는 여기서 네가 한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을게. 나는 여기 내 무덤에서...."

그리고 끝이었다.

주검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서 다시 허버트 교수를 쫓았다.

지긋지긋한 꿈에서 깨어날 때였다.

"앨리스, 도망쳐. 앨리스, 도망쳐...."

나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에드워드."

그렇습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걸까요? 그토록 신출귀몰하며, 나를 적대하며 쫓아올 이유를 가진 자가 에드워드라면 납득이 됩니다.

전에 허버트 교수님이 내게 알려준 인상착의와도 꼭 맞아떨어졌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에드워드가 날 노리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합니다.

────부우웅!

귀가 따가울 정도의 굉음이 저 바깥 하늘에서 들려옵니다.

나는 아주 소란스러워서, 처음에는 무슨 벌레떼나 철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착각도 괜한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수가 많았던 겁니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비행기였습니다.

노랗게 칠해진 수백 대의 비행기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태양에서 섬광이 내리자, 몇 대의 비행기 빛을 받고는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하지만 수가 워낙 많으니까 티 나지 않았습니다.

─────쿠웅!

"꺄악!"

추락하는 비행기는 그대로 건물에 부딪혔습니다. 안에는 폭약이 잔뜩 실렸는지, 큰 폭발이 일어나며 건물이 흔들렸습니다.

비상하는 비행기는 어느 국면에서 두 패로 나뉘었습니다.

절반은 하늘로 오르며 기관총을 발사했고, 나머지는 곧장 아일랜드 성인의 탑으로 강하했습니다. 품새로 보아서 하루 이틀 연습한 것 같지 않은 매끄러운 연계였습니다.

그리고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총성이 귀 따갑게 울렸습니다.

나는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총성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그보다 큰 소리로 비통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천사가 죽는다면 꼭 이런 비명을 지를까요?

한편, 아일랜드 성인의 탑에 다가온 비행기들에서 무언가 떨어졌습니다. 그것들은 지상에 떨어지고는 무수한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탑은 신화 속 바벨처럼 웅장하게 무너졌습니다.

모든 폭발이 잠잠해질 무렵, 간신히 육안으로 보이게 된 잔해는 무참했습니다. 하늘에서 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큰 공동이 파여서, 심지어 지하의 어떤 공간이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소음은 점차 가라앉았습니다.

두 개의 비행기 편대는 왔을 때처럼 홀연히 멀어졌고, 폭격이나 총격도 완전히 멈췄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창밖을 엿봤습니다.

조금 전까지 새하얗던 하늘은 다시 본연의 흑색으로 돌아왔습니다. 대신 그 백색이 찢어져 내리는 것인지, 하늘에서 깃털인지 소복 조각인지 모를 하얀 잔해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태양이 떨어졌습니다.

빛을 잃은 태양은 지면에 처박히고는, 귀리죽 모양새의 붉은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사지는 완전히 짓이겨져 원형을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 시체를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멀리서도 보아 알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등에 나 있었는데, 마치 날개 한 쌍을 뽑힌 비둘기처럼 보였습니다. 얼굴에는 뭔가 그려진 면사포가 씌어 있었지만, 피를 머금어서 붉게 물든 탓에 알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조심스레 그늘 밖에 나왔습니다.

온세상이 조용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소음은 여느 때보다 크게 들렸습니다. 무너진 대학 외벽 사이로 소란스러운 인파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품위 없이 꽥꽥 소리를 질러댔는데, 먼 이국의 욕설이라면 이런 식으로 들릴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행색은 조금 전에 일어난 사건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괴했습니다.

의상은 하나같이 버킹엄 궁전에서나 볼 법한 훌륭한 연미복과 드레스를 차려입었는데, 이런 난장판에 들어오면서도 옷이 찢기고 더러워지는 걸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그들의 머리에 비하면 수수했습니다.

예, 머리요. 목 위에 달린 그것 말입니다.

원래 사람의 머리가 달려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에디슨 전구를 수십 배 키워 놓은 것 같이 커다란 전구가 위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시끌벅적하게 안으로 들어왔는데, 줄이 끊어지고 세어보니 거의 쉰에 가까운 숫자였습니다. 그들은 한 손에 후줄근한 갈고리 꼬챙이를 들고서, 하늘에서 떨어진 시체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체의 살갗 사이로 갈고리를 꽂아넣고, 마구 잡아 당기며 살점을 난도했습니다. 하늘로 핏방울과 고깃덩어리가 비산했습니다.

모처럼 비싼 옷이 더럽혀졌지만, 오히려 야만적인 그들에게는 그것이 정장이었습니다.

내가 이 모든 기괴한 광경을 통해 안 사실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정말로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케이시 오' 제럴드는 죽었습니다.

지난 이백 년 동안 런던의 음지에서 암약하며, 원대한 계획을 꾸며온 악마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본 것이 모두 실제일까요?

아니면 어떤 악한 존재가 허상으로 꾸며낸 거짓에 불과할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 가지 않는 점이 많았습니다.

나는 가만히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교정 쪽에 홀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 열심히도 뛰어 왔습니다.

허버트 교수님이었습니다.

나는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위치를 알리려고 했지만, 어디선가 불어오는 검은 돌풍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바람이 지나는 곳마다 복도의 불은 모두 점등하고, 그곳엔 오직 정적인 어둠이 가라앉았습니다.

왜 잊고 있었을까요. 에드워드, 그가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소리 내어 위치를 알리는 것은 위험했습니다. 교수님이 도착한다면 몰라도, 그전에 에드워드에게 발견되면 나로선 상대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에드워드는 찾지 못하고, 교수님은 찾아낼 수 있는 곳에 숨을까요.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에드워드가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가 찾지 못할 정도로 꼼꼼히 숨기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에드워드가 찾지 못한 걸, 교수님이 찾으리란 보장도 없으니까요.

에드워드는 바로 목전에 이르러 있었고, 나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나는 창문을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의 날카로운 파편에 왼손 손바닥을 그어서 큰 상처를 냈습니다. 흥분한 나머지 깊게 찌르고 말아, 생각한 것보다 큰 상처가 났습니다.

"아야!"

하지만 아파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피 흐르는 손으로 맞은 편 벽을 때리고, 다른 팔로 손을 잡아끌며 획을 그었습니다.

고통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메시지만큼은 틀려서 안 되었기에 정신을 가까스로 잡았습니다.

「젖소 뱃속에 있는 봥소개구리」

이 수수께끼를 저번에 교수님이 제대로 풀어냈던가요? 머리가 아파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에드워드는 모를 겁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쪽지 전문을 알아야 하고, 대학 건물 구조를 오랫동안 보아서 이해하고 있어야 할 테니까요.

나는 그 자리에서 달려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학우들처럼 헛된 죽음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기에, 나는 해가 뜬 반대편으로 절박하게 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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