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04화 (104/232)

§104. 후기 (1)

나는 창 너머 은은한 불빛에 눈을 떴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창문의 실크 주름 커튼이 나른하게 살랑거리고, 밖에서는 잠결에 듣지 못했던 풀벌레 울음소리가 뒤늦게 찌르르 찌르르하고 잇달았다.

그런 내 곁에서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남자는 나무 바닥에 의자를 끌며 다가왔다.

"얼마나 잤는지 궁금하겠지. 오늘은 5월 6일이야. 벌써 해가 질 시간이니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은 넘게 잔 셈이지."

목소리는 차분하고 관용 넘치는 흉내를 내었지만, 은연중에 담긴 책망의 의도를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상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는 불쾌한 화법이었다.

나는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했다.

"너는 매번 날 오래 기다리게 해."

"알트."

내 입에서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쉰 목소리가 나왔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는 아서가 드물게도 안경을 쓴 채로 날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손에는 커버를 씌워 표지가 보이지 않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침대 옆에 있는 서랍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지?"

"글쎄, 나는...."

"네가 대학에 부임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지. 12월 24일에 너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한나절 동안 잠들어 있었지. 다음에는 또 얼마나 기다리게 할 생각이지?"

갓 깨어난 사람에게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말을 태연히 늘어놓는 사람이 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아서 프랑크 본인이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어 가물가물하며 물었다.

"자네는 혼수상태가 아니었던가?"

"아직 잠을 덜 깼나 보지?"

아서는 질문을 간단히 일축했다.

정말로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단 말인가. 영란은행 밑에 잠든 비밀을 파헤치고, 고흐가 남긴 유작의 비밀을 밝히며, 런던이 몰락한 그 모든 날의 기억이 한낱 춘몽에 불과했다는 것인가.

나는 누운 채로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정에 걸린 샹들리에의 유리 장식이 느긋이 흔들렸다. 그때마다 노을빛이 장식에 부딪혀서 산란하며, 벽면에 바람의 형태를 붉게 그렸다.

내 머릿속에서 탄생한 것 같지 않은 자연미의 극치였다. 그러기에 나는 꿈 꾸고 있지 않았다.

"꿈이라, 꿈이었나? 그게 다 꿈이었단 말이지?"

"오래 잤으니까 여러 꿈을 꿨을 테지. 그중 하나를 기억하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아서는 창밖을 돌아봤다.

"그리고 벌써 저녁이야. 꿈을 꾸기엔 너무 이르고, 기억하기엔 너무 늦지."

그의 말대로였다.

해가 지지 않은 지금은 잠들 시간이 아니었고, 또 아침에 보았던 꿈을 기억할 시간도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가까운 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자네가 그렇게 현실적인 줄은 몰랐는데."

"나는 언제나 이치를 좇아."

방에는 은은한 포도의 잔향이 떠돌았다. 나는 그의 말투가 묘하기에 물었다.

"한 잔 했나?"

"홀로 기다리는 동안 적적해서."

다시 보니, 서랍 위에는 책 말고도 라벨이 붙지 않은 와인 병과, 표면에 피처럼 붉은 줄기가 묻어난 잔이 놓여 있었다. 벌써 몇 번이고 비운 듯 싶었다.

"심지어 라벨도 없는 것을."

"뗀 거야. 저택에서는 늘 그렇게 마시거든."

나는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다.

전에도 그가 값비싼 와인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는 허영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마르고나 무통 로쉴드에서 난 포도주란 걸 안다면 더 향이 깊어지고, 무명 샤토라면 깊이가 떨어지나? 언어란 건 그렇게 부정확한 거야. 고작 몇 문장 글귀로 진리를 다루려고 하지."

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

그 문장을 아서가 직접 떠올렸을 리가 없었다. 그는 지금 어디서 들은 멋진 행동과 글귀를 실천하면서 과시하고 있었다. 그답다면 그다운 알기 쉬운 허영이었다.

"그래서 한 잔 들겠어?"

나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절의 말을 꺼내는 것조차 입 안이 마르고 텁텁하니 나오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서는 옆에 놓인 새 잔을 들었다.

햇빛에 뽀얀 먼지가 올라온 것이 보였다. 아마도 거기 놓은 지 꽤 되었을 것이다. 아서는 거기다가 먼지를 털거나 불지도 않고, 그대로 와인을 부었다.

나는 잔을 건네 받았다. 아서의 잔에 남은 것처럼 붉은 색보다는 검게 느껴지는 액체가 찰랑거렸다. 나는 한 모금 머금었다. 와인의 향과 맛 같은 건 잘 알지 못하는 나도 알 정도로 좋은 물건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생각하겠지."

아서는 갑자기 말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길래, 내가 이렇게나 닥달하는지 말이야. 그렇지 않아?"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속을 읽힌 것 같아서 불쾌했지만,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회화의 흐름이 그의 주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았다.

"네가 지하에 내려간 5월 1일 이후로, 넌 나흘이 지나서 5월 5일에 도착했어. 뭘 묻기에는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고, 바로 의식을 잃는 통에 그럴 수도 없었지. 그렇게 침실로 옮겨오고, 너는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잠들어 있었어."

아서는 나에 관해 얘기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내 일보다는 생판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하에 내려갔던 것이 현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올라온 기억은 좀처럼 남지 않았다. 내가 대체 어떻게 지상까지 돌아왔을까.

그리고, 줄곧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런던 독립에 관해서는 어떻게 된 걸까. 그곳에서 나는 앨리스를 구하지 못하고, 에드워드를 죽였을 텐데....

"맞아!"

나는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앨리스,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지?"

"네가 리들 양과 이름으로 부를 만큼 친근한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

아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다행히도 내 말실수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는지, 그는 더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처럼 예리한 사람에게 내가 알고 있는 앨리스 동화 같은 걸 들키지 않고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속내 몰래 안심했다.

"그녀는 바로 돌아갔어. 너와 다르게 의복은 더러웠지만, 상태는 더없이 멀쩡해 보였지. 아니, 실은 그보다 나았어. 전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는커녕,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훨씬 성숙하고 안정적으로 보였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아서는 영 심란해 보였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영국 귀족답지 않게, 자신의 감정에 아주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애매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좀처럼 보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뭔가 문제가 있었으리라 직감했다.

"이봐."

"응?"

"정말 이상한 질문인 건 알아. 하지만 묻겠네. 자네가 보기에, 앨리스 리들의 머리색은 어떤 색이었나?"

내 머릿속에는 두 명의 앨리스가 존재했다.

에드워드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지상에 추락한 금발의 앨리스와, 지하에서 무사히 구해내서 지상으로 올라온 흑발의 앨리스.

공교롭게도 두 사건은 모두 5월 1일부터 5월 5일동안 일어났고, 나는 어느 쪽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대로라면, 내가 현실이라 기억하는 금발 소녀는....

"당연히 검은 색이었지. 그런 건 왜 묻지?"

"아니, 아니야. 나중에 설명하겠네."

아서는 수상하다는 듯이 날 쳐다봤지만, 내가 나중에 설명한다고 하는 말을 믿어준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따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는 일상으로 복귀했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왜 내가 누워 있는 동안, 그녀에게 묻지 않았나?"

내 질문에 그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서는 심오한 문제를 앞에 둔 철학자 같기도 했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심통난 악동 같기도 했다. 나는 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물었지."

"그런데?"

"기억하질 못하더군."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아니. 학술회 그 자체를."

───똑똑.

우리 둘은 동시에 문쪽을 돌아봤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노집사가 우직하게 노크하고 있었다. 그는 족히 우리 시선을 눈치챘을 거면서, 기어코 대답할 때까지 두드리고 있을 모양이었다.

"친구랑 얘기 중이잖아."

아서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대화 중에 결례를 범합니다. 하지만 주인 어르신께서 급히 보셔야 할 사안이라."

그는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노집사의 품에서 나온 뻣뻣한 인쇄지를 보고는 서둘러 달려갔다.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인상을 썼다.

"언제 나온 거지?"

"확인한 결과, 어제 새벽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5월 5일."

"뭐?"

내 혼잣말에 아서가 고개를 돌렸다.

"어젠 5월 5일이었어."

"그래, 그렇지. 그게 뭐?"

나는 지팡이를 잡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랬다가 너무 오래 누워 있던 탓에, 피가 돌지 않아서 바로 주저 앉고 말았다.

노집사가 날 부축하러 다가왔지만, 나는 일어나는 대신 그의 손에 들린 인쇄지를 거칠게 가로채었다. 인쇄지에는 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문자가 마구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단 쯤에 이르러서 로마자로 「Ⅴ」라는 숫자를 선명히 새겨놓았다.

"나 때와 똑같아."

나는 무심코 혼잣말했다. 상념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는, 꽉 차서 당장에라도 뇌가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작년 성탄절 전야였다.

아까도 아서가 말했던 그날, 나는 아일랜드 성인의 탑을 올랐다. 도망칠 곳은 위로도, 아래로도 없었다. 무수한 불가시의 괴물들이 계단을 올라서 우릴 쫓아왔다.

그곳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마지막 수단으로 신께 빌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폭풍우 너머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를 향해 빌었다.

하지만 그곳은 탑의 정상.

런던에서 가장 바다와 떨어진 그곳에서, 나는 심해의 마법을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 순간, 기이하게도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았다.

평생 아가미로 호흡하던 인류의 조상이 처음으로 뭍에 오르고 내쉰 장렬한 첫 숨처럼,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나는 별을 보고 빌었다.

탑은 심해보다 우주에 가까이 닿아 있었으니, 저 하늘을 바다로 바꾸어서 그 힘을 빌리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별을 바라보며 빌고 또 빌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의 영혼은 수십 억년 후, 우주가 완전히 얼어붙은 그 미래에 예속되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사하고 융성할 지고의 존재와 마주했다. 그는 조롱하는 것처럼 야훼를 사칭하며 사문자의 이름을 대었고, 내게 기꺼이 힘을 내어주었다.

나는 하늘과 바다를 바꾸는 대가로, 고작 영혼과 만 개의 정신을 내놓은 것이다.

에드워드는 나의 닮지 않은 거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는 날 매개로 올드코트 대학에 침입하려고 했고, 그것이 무산되자 대학의 적인 노란 외벽 회사와 손을 잡아서 런던을 점거했다.

그리고 수 일에 걸쳐 꿈과 현실을 마구 오가며, 앨리스와 나를 혼란에 빠트리고 그녀를 살해하려 한 것이다. 그에게 처음부터 현실을 조작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구태여 필요 없는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그 순서가 반대였던 것이다.

"윽!"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자니, 손바닥이 뚫리는 통증이 일어났다. 마치 주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그리 되신 것처럼, 쇠못이 박히는 것 같은 감촉이었다.

나는 주먹을 피고 내려다 보았다.

손바닥에는 깊고 어두운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검은 피가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쏟아져 나왔다. 성흔이었다.

다만, 흐르는 것은 성혈이 아닌 인류 선사부터 존재하던 심해 바닥의 부패한 진흙일 뿐이었다. 그것은 마구 쏟아져서 방바닥을 더럽혔다.

"손바닥에 뭐라도 써놨어?"

아서는 그런 구멍과, 쏟아지는 진흙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어떤 원리인지 몰라도, 이것은 나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뜩이나 복잡한 상황을 더 어지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함구했다.

꿈에서는 상처가 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내 기억대로 5월 5일 올드코트 대학에서 일었던 일도 꿈은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꿈과 현실을 뒤바꾼 것이다.

"에드워드는 대가를 치뤘어."

"누구?"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아서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눈치 빠른 그이기에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정작 그 실체는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전에 내가 말한 적이 있지 않나. 멸망한 지구에서 점지받은 여섯 명의 기름부음 받은 자 말이야. 내가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이거늘,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는 넷밖에 있지 않았지. 이상한 일 아닌가?"

아서는 갑작스러운 설명에 당황했다. 그는 노집사를 바라보며, 나가 있으라는 듯이 눈치를 줬다.

노집사는 정중한 동작을 한 번 취하고는 문을 꾹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아서는 말하기 시작했다.

"글쎄. 순서가 정해지는 것이 시간순이 아니었다든지."

"하지만 내가 받은 계시대로라면, 그건 아주 먼 미래야.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 시점에는 이미 모두 일어난 뒤일 테니 빈 자리가 있어서는 안 되지."

내 엉성한 설명에도 아서는 그럭저럭 납득했다.

"그러면 순번을 착각한 것 아닌가. 네가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라든가."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네. 그럴 수밖에 없었지."

평생과 다음 평생.

그만큼 나와 잘 어울리는 문장은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내가 다섯 번째 기름부음 받은 자이자, 마지막 메시아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렇지 않았다. 내가 받은 계시 속에서, 나는 전에도 나의 정신을 바친 적이 있다고 하였고, 그것이 바로 내가 내세운 조건이었다.

내가 제시한 것 중에 평생이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이제 알겠어. 다섯 번째 기름부음 받은 자는 나보다 이르게 선각했지만, 내가 계시받은 것보다 느리게 선각한 거야. 바로 어제!"

그 말에 아서는 결국 질렸단 듯이 고개 저었다.

"막 깨어나서 혼란스러운 건가, 아니면 미친 건가? 세상 물정에 아무리 어두워도 어제보다 작년이 더 먼 개념이란 건 알 거야."

나는 고개 저었다.

"어제보다는 작년이 멀지. 하지만 작년보다도 이것이 더 멀지."

그리고 말했다.

"전생."

.........

.....

...

..

.

나는 죽는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별을 향해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살려달라고,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연명하게 해달라고 빈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살아 남았다.

육신은 완전히 얼어 붙었고, 수십 억년의 세월 동안 냉동되어 보존되었다. 혹시나 어떤 사람이 내 시신을 발견해서 화장해 주리라는 기대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내 육신은 그저 등산객들의 지표로만 쓰였고, 그나마도 어느 시점부터 올라오지 않았다.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인류가 완전히 사멸한 것이다.

아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다.

매순간 홀로 남은 고독과, 얼어 붙은 육신에서 느껴지는 환상통에 수없이 소멸을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뤄지지 않은 소원이다.

나는 하늘을 가득 메운 별 아래에서 방부되었다.

시간은 끝없이 흘렀다. 무한한 시간이 흐르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하늘의 별이 하나씩 점멸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고 점차 세상에 어둠이 도래했다.

암막이 씌워졌다.

완전하 어둠이 도래했다. 우주의 모든 빛이 꺼지고, 나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우주조차 멸망하였건만, 내 정신만은 꺼지지 못한 것이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깨닫지 못하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지구의 맞은 편에 등불이 켜졌다.

우주의 유일한 빛이었다. 그 불길한 광채는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죽은 우주의 주인이 거하심이다.

(2:1)주께서 가로되

(2:2)네 모습을 보고 처량하다 하고 이 모두 네가 바라고 자초한 바가 아니냐고 물으시매

(2:3)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2:4)다시 주께서 가로되

(2:5)내가 너의 기도를 기억하고 네 부름에 응했건만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느냐 탓하시매

(2:6)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2:7)다시 주께서 가로되

(2:8)하늘에 대고 거짓을 말한 네 죄가 깊으니 사죄할 기회를 주겠노라 하며

(2:9)그리하면 오늘까지 겪은 고난 곱절의 시간을 벌 받을 것이라 하시매

(2:10)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2:11)그렇게 세 번을 거듭 부인하니 주께서 말씀하시되

(2:12)나는 네게 세 번의 기회를 주었다 하나는 진실을 고할 기회였으며 하나는 바로 잡을 기회였으며 하나는 사죄赦罪할 기회였다

(2:13)허나 기어코 네가 날 세 번 부인하였으니 너를 구할 방법이 없다

(2:14)나는 그 말을 듣고 통곡하며 다음에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애원하였다

(2:15)가령 주께서 명령하면 해가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지게 하겠노라 하고

(2:16)가령 주께서 명령하면 이 땅에 번성하는 모든 아비와 자식이 나지 못하게 천 큐빗의 땅에 소금을 뿌리겠노라 하고

(2:17)가령 주께서 명령하면 인간 중 가장 부유한 나라 왕의 머리를 금관채로 바치겠노라 하고

(2:18)가령 주께서 명령하면 땅에 있는 불빛은 하나 남김없이 모두 끄겠노라 하고

(2:19)가령 주께서 명령하면 뭇 수백 개의 목을 가진 뱀이 수백은 있다고 한들 모두 베어내겠노라 하매

(2:20)그제야 주께서 가로되 나를 따르라 평생과 다음 평생토록 내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옳은 줄 알고 맹목하라

(2:21)나는 그리하겠노라 거듭 약속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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