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후기 (2)
마리는 익숙한 동작으로 차를 꺼내 대접했다.
"보아하니 여기 생활도 꽤 길들었나 보지?"
"말도 마세요."
나는 그녀를 맞은 편에 앉게 권했다. 그녀는 여전히 대담하는 것이 낯설었는지 머뭇거리다가 이내 자리에 앉았다.
"이 큰 저택의 일을 저 혼자 다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일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잖나?"
"백작님의 형님이요?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그분에게 맡겨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마리는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추운 겨울밤에 창가에 부딪히는 나뭇가지처럼 섬뜩한 음색이었지만, 나는 여러의미로 그것을 정겹게 느꼈다.
"그럴 것 같았어."
전에 아서가 먹고 있던 그 설탕덩이인지 뭔지가 저절로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바닥이 다 썩도록 손도 대지 않는 그가 뭔가 제대로 된 가사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약간 곰팡내가 나는 것이 찻잎의 관리도 썩 잘 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그녀가 냄새를 맡거나, 맛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란 것이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존재는 나를 얽매는 원죄였다.
나는 수은으로 만든 동공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깔았다. 찻잔 위에 어느새 오른 건지 모를 먼지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오래 걸릴까요?"
"마시기 좋게 식은 것 같은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차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 걸 알아챘다.
"다시 불러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멀었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근래에 여러 사건을 겪다 보니 새 거주지를 구하는 일은 거의 신경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니, 금방이야."
그렇지만 나는 쉽게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사태가 안정되면 집을 새로 구할 의향은 있었으니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아이들이랑은 좀 친해졌나?"
나는 애써 말을 돌렸다. 마리는 살짝 얼굴을 돌렸는데, 표정이 바뀌지 않는 탓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웠다.
"쉽지는 않네요."
"그래."
구태여 그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녀도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선물을 가져왔네."
"선물이요?"
나는 가방을 뒤져서 곱게 접어놓은 신문을 꺼냈다.
"재밌는 기사가 실렸던 신문인데."
안에는 우주인의 런던 침략에 관한 런던 소방대의 호소문을 시작으로 그녀가 좋아할 법한 기괴한 내용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마리는 신문을 받고 한참 읽기 위해 노력하다가 물었다.
"꽤 지난 신문이네요. 제가 저택에만 있는 동안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이죠?"
"아니, 사실 일어난 일은 아닌데."
마리는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날 바라봤다.
"자네는 설명해도 모를 거야."
"또 그렇게."
"아니, 내가 이해할 만큼 잘 설명할 자신이 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마리는 신문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급하게 일어나서 날 부축해서 세웠다. 이렇게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서 벗어놓은 코트까지 입으며 말했다.
"내일 또 찾아오겠네."
"내일이요?"
"음. 아서가 다시 할 얘기가 있다고, 내일 저녁쯤에 들르라고 했거든."
거리가 가깝지도 않으니 마음 같아선 오늘 말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가 뜸들이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어느새 이런 번거로운 일을 자연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말을 들은 마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모았다.
보아하니 뭔가 말하고 싶은 것 같았는데, 좀처럼 말하지 않길래 나는 그녀가 말할 생각이 들 때까지 멈춰 서서 기다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마리는 어렵사리 말을 꺼내놓았다.
"주인님, 프랑크 백작님을 너무 믿지 마세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왜 그러지?"
"그분께는 주인님이 계실 때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 있어요. 늘 그런 것은 아니고, 또 매일 그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가끔, 아주 짧은 동안, 저는 몇 번이고 그 얼굴에서 봤어요."
"보다니, 무엇을?"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분노요, 인간보단 짐승에 가까운 불 같은 분노요."
등불을 등진 마리의 밀랍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깔리고, 예언을 내리는 여신상처럼 불길하게 느껴졌다.
내가 한 발자국 물러나자, 마리의 몸에 드리운 그림자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다시 내가 아는 밀랍 인형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에게도 숨기는 건 있겠지."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하물며, 우리는 미치지 않고는 멀쩡하기 힘드니...."
그렇게 저택을 나설 때까지, 우리는 서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머리가 복잡했고, 마리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처럼 조용했다.
"주인님."
떠나기 직전에 마리는 날 불렀다.
"몸조심하세요."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저택을 떠났다.
마차가 런던 시내를 가로질렀다.
도시는 얼마 전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런던에서 벌어진 참상은 모두 꿈이 되었고, 런던 독립 전쟁이나 황색파의 득세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점거되었던 버킹엄 궁전과 국회의사당은 전처럼 근엄하게 런던 중앙을 지켰고, 경찰청이나 왕립 학회 건물 역시 온전하였다.
깨었을 적만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던 해는 완전히 가라앉고 밤이 되었다. 하지만 가로등 불빛이 환하니 도시의 하늘은 밤답지 않게 환했다.
"선생님, 교수인가 뭔가요?"
하늘을 보고 있자니 마부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런 걸 묻나?"
"별 뜻은 없어요. 이런 시간에 대학에 가달라는 손님은 드무니, 신기해서 물었수다."
달리는 마차는 낮은 언덕 길을 올랐다. 평탄한 런던에 이런 고지에 오르는 건물은 하나뿐이 없었다. 대학이라는 이름과 달리 높은 돌담이 성벽처럼 옆으로 들어서 있었다.
내 마지막 기억 속에는 무참히 불타고 있던 건물은 밤하늘 아래에 평온하게만 보였다.
"그래, 여기서 일하고 있지."
"그럴 줄 알았어요."
올드코트 대학.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삯을 쳐주고는, 성 헨리 8세 칼리지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시간입니다. 차라리 내일 찾아오시죠."
여자 기숙사의 늙은 사감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도 그런 요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학장 대리님이라고 해도요."
"그래서 불러줄 수 없다는 건가?"
나는 고집스럽게 물었다.
사감은 한참이나 고민하며 날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는 의심이 들어차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10분만 기다리세요."
"그렇게나 오래 걸린다고?"
그러자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날선 말투로 쏘아 말했다.
"다들 자는 시간에 다 큰 처녀를 불러내고, 머리 빗을 시간도 안 주겠다는 말인가요?"
이번에 입을 다무는 것은 내 쪽이 되었다.
사감이 떠나고, 나는 홀로 여자 기숙사 문 앞에서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진작 소등이 되었어야 하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몇몇 방에서 흐릿한 촛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밖에서 보니 이렇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 뜸을 들였다.
아마 사감이 말한 10분도 더 지났을 시간이 흘렀다.
"교수님."
나는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절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리들."
검은 머리의 소녀, 앨리스가 날 보며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다 온 것인지, 잘 준비를 하던 것인지 외출복 아래로 잠옷이 빠져 나온 것이 보였다.
앨리스는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내 모습이 어디 이상한가?"
그러자 앨리스는 이상한 질문을 돌려줬다.
"앨리스라고 부르시지 않네요?"
"외간 처녀의 이름을 막 부를 만큼 무례하진 않네."
내 진중한 대답의 어디가 그렇게 우스운지, 앨리스는 아예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녀는 늘 유별난 소녀였기 때문에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교수님. 갑자기 너무 웃겨서요."
"뭐가 말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디선가 그녀만의 재밌는 이야기를 찾아낸 것일 터였다. 금발의 앨리스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어찌나 웃었는지 눈가에 고인 눈물마저 닦아냈다. 나는 그녀가 침착하고 난 뒤에야 본론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게 뭘 물어 보신다고요?"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나?"
그러자 앨리스는 조금 전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전날에 자네와 내가 함께 프랑크 저택에 도착했다지만, 나는 그 경위가 기억나질 않네. 내가 자네를 에드워드의 손에서 구해내고 지상에 올라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어."
앨리스는 그 말에 내 어떤 기대와도 떨어진 대답을 돌려줬다.
"지하요?"
"그래, 지하. 열기구를 타고 내려갔잖나."
그녀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도리어 수상하다는 듯한 표정마저 지었다. 그제야 나는 아서가 했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앨리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질문을 바꾸지. 나흘 전부터 어제까지, 어디서 뭘 했지?"
그녀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사감님께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거즘맹세하지."
"그게 뭐예요."
앨리스는 내 진지한 표정을 보며 실소했다.
"실은요, 잘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나지 않는다니."
"말 그대로요. 외박을 했던 것만은 분명한데, 어디서 뭘 했는지 이상할 정도로 떠오르는 게 없어요. 사감님께 허가도 받지 않았으니까, 아신다면 크게 혼내실 게 분명해요."
그녀는 기억이 없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허가받지 않은 외출을 했다는 게 불안한 눈치였다.
"궁금하지 않나? 어떤 불가사의한 이유로 기억이 사라졌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야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알아내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앨리스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안에서 뭔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은 있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치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앨리스는 수줍게 웃었다.
아서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앨리스 리들은 전보다 훨씬 정서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그녀는 더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추적하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하지 않았고, 신변의 일화를 토대로 모험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나는 교육자로서 그녀의 성숙해진 면모를 좋게 보아야 했다. 어떤 경유에서건, 그녀가 더는 위험한 학술회의 일에 관심이 사라진 것도 늘 내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 자는데 깨워서 미안했네."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인사하고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라서 물었다.
"아참, 혹시 일지를 보지 못했나?"
"일지요?"
"탐사 일지 말이야, 내가 지하에서 쓰던 것인데."
"지하요."
"그냥 잊게."
이번에야말로 나는 그녀와 작별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밤, 나는 자상한 꿈을 꿨다.
그것은 우주 끝에 놓인 차갑고 푸른 행성과, 거기 사는 한 소녀에 관한 꿈이었다. 벨벳처럼 반짝이는 신비한 금발을 가진 소녀는 행성의 극점에 서 있었다.
소녀의 머리 위로는 대기가 없어 뚜렷한 은하수가 비치는 어두운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허리 숙인 채로, 천체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별을 관측하고 있었다.
"아, 교수님. 오셨네요."
"앨리스."
그녀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날 불렀다.
"자네는 죽은 줄 알았는데."
내 질문에 그녀는 그제야 망원경에서 떨어져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도 살아 있다면 좋겠지만, 전 죽은 거 같아요."
"그래."
나는 다리가 너무 아파와서 앉아서 쉬려고 했다가, 내 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앉을 다리는커녕 아플 다리도 없었으니, 지금 느끼는 통증은 모두 환상통에 불과하였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모든 것이 하룻밤 꿈에 불과하다면, 아픔이 있을 리가 없을 테니....
"그러면 자네는 내 상상 속에서 나온 건가?"
"무슨 질문이 그래요?"
나는 그녀의 반응에 멋쩍어서 헛기침했다.
"꿈이란 건 결국 내 심상 아닌가. 그러니까 자네도 엄밀히 말하면, 내 상상의 산물이 아닌가 해서...."
"꿈이 아니예요."
앨리스는 말했다.
"그렇다면 현실인가?"
"만사에 그렇게 딱 잘라 떨어지는 일이 그리 많겠어요?"
말하면 말할수록 그녀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때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앨리스가 본인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일단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그러니까 설명이 조금 알아듣기 어려워도 이해해 주세요. 어제 죽은 사람이 얼마나 설명을 잘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정말 자네로군."
"그거 무슨 뜻이에요? 좋은 뜻은 아닌 거 같은데."
앨리스는 재잘재잘 떠들다 말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말할게요.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에드워드에게 살해당하고 그 일은 꿈이 되면서 없는 일이 되었어요. 저는 죽었지만, 사실 죽지 않은 것이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내가 종합한 결론과 같았다. 꿈과 현실이 바뀌며, 잠들어 있던 아서는 현실로 돌아왔고, 현실에서 죽었던 사람은 불쾌한 악몽을 꾼 것이 되었으며, 런던의 파괴는 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꿈과 현실이 그토록 다른 그 둘은 어찌 된 것일까. 나는 그 해답만은 내놓지 못했었다.
"교수님은 모르시겠지만, 저와 앨리스... 그러니까 그 검은 아이는 어릴 적 약속을 했어요. 최근에야 기억난 사실이지만, 약속대로라면 저는 이제 그녀에게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 돌아갈 곳이 없게 된 거예요. 그렇게 저는 있으면서도 갈 곳 없는 외톨이가 되었어요. 마치 캐롤처럼요."
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온 그 이름에 놀라서 되물었다.
"그를 만났나?"
"여기 올 때 도움을 받았거든요. 실은 어릴 적부터 알았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는 않아요."
앨리스는 여기라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이 공간을 제대로 인식하고 다시 물었다.
"여긴 어디지? 나는 드림랜드 같은 꿈속인 줄 알았는데."
"우주예요. 지구 밖의 태양계 외곽에 있는 춥고 외로운 왜행성이요. 지구에서는 행성 X라고 부르는 미지의 행성이죠."
나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명왕성."
"여기 주민들은 유고스(Yuggoth)라고 불러요."
앨리스의 말을 불길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주에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제가 이렇게 교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것도 그분들이 도와주신 덕이에요."
"자네가 부른 거였군."
"맞아요, 정신뿐이지만, 교수님을 여기 불러온 건 저예요."
나는 내 몸이 존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겨우 알게 되었다.
"작별 인사 할 생각으로 부른 건 아닌가 보지."
"이 별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지구가 보여요."
앨리스는 할 말이 없어 나온 경망스러운 농담에도, 그저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천체 망원경을 아이처럼 쓰다듬었다.
"어둡고 두터운 우주 장막 너머, 구슬보다도 작은 공, 그게 바로 지구였어요. 저는 항상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면 푸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늘이 그렇게 푸르니, 하늘에 둘러싸인 지구는 분명 푸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먼 훗날, 지구의 모습은 상식이 되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위성 사진 같은 것은 지금 기술력으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실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지구가 푸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지구의 색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제가 틀렸어요, 교수님."
앨리스는 그런 내 상식을 전면으로 부정했다.
"지구는 슬퍼요. 태양계 어느 행성보다 슬픈 별이에요."
"슬프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나의 시야가 서서히 떠올랐다. 짧은 재회가 끝나고, 긴 이별이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앨리스는 마지막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구는 무덤이에요. 강철로 만든 무덤."
나는 그 의미를 끝내 알지 못한 채 잠에서 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