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일팔구오
──찌르르, 찌르르...
내가 저택에 도착할 무렵, 해는 저 멀리 빅 벤 첨탑 끝에 걸려 있었다.
층층이 응어리져서 도시를 무겁게 짓누르던 구름은 어느샌가 갈갈이 찢겨서, 그 틈 사이로 불타는 하늘의 참상을 여과없이 내리쬐었다.
그런 구름 사이에는 교량처럼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잠깐 고민하던 나는 곧 태양이 지난 황도였음을 알게 되었다. 눈부신 광채는 하늘마저 그을려 화상 입힌 것이었다.
──....
겨울이 지났음을 알리듯이 줄기차게 울리던 풀벌레 소리가 고장난 오르골처럼 멎었다.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주변에 울 만한 벌레가 한 마리도 살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었다.
프랑크 저택의 황망한 정원은 어떤 연유에선지 오직 가시만 자라고, 그 작은 벌레 한 마리도 품지 못할 만큼 빡빡하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중을 나온 노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어디선가 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기에는 아이가 다섯 명이나 있으니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 어르신께서는 창고에 계십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창고? 정원에 있는 그곳 말인가?"
"아니요. 그것도 창고지만, 거긴 오직 원예 용품만 보관합니다."
언제부터 천에 덮힌 자동차가 원예 용품으로 취급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지적하는 대신 다음 말을 기다렸다.
"3층에 창고 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렇군."
몇 번이고 들렀지만, 실은 난 저택의 구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니 3층에 창고가 있다는 얘기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거기도 유이한 창고는 아니지만요."
"그렇군."
"거긴 오직 박제품만 보관합니다. 주인 어르신께서 그렇게 정했죠."
그 말을 듣고, 나는 저택의 옛 모습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분명 그런 게 있었지."
대학 시절, 아직 프랑크 백작이 실종되기 전에, 나는 아서를 따라서 이 저택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저택은 오늘 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헀다.
마르지 않는 분수가 놓인 정원에는 담당 정원사만 여섯이 있었고, 방문할 때마다 다른 꽃과 나무가 자라 있었다. 색은 오색찬란하여 조화로웠고, 꽃 향기에 끌려온 나비의 가짓수는 여느 박람회 못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교외의 낙오지이지만, 당시에는 분명 이곳이 런던의 중심이었다.
저택은 굉장한 인력으로 도시를 끌어당겼고, 프랑크 백작이 실종되기 저너까지 매년 도시가 저택으로 수 미터씩 다가왔다는 말도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나는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너무나도 융숭한 대접에 혹시 내가 어느 이국의 숨겨진 왕족이 아닌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런 황송한 기분으로 있으면, 신문으로 접하는 유럽의 명사들이 이웃처럼 다가와서 말을 걸었으니 그런 착각도 괜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오직 한 사람만은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멀었다.
프랑크 백작 말이다.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몇 번의 방문 동안, 그와 대화를 나누긴커녕,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저택에 방문한 날을 제외하고는.
"박제는 그분의 취미였지, 아닌가?"
노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내 실수를 바로 깨달았다. 나에게는 추억이라고 한들, 그에게 프랑크 백작은 끔찍한 학대의 과거를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그에게 그런 추악한 이면이 있을 줄, 나는 바로 앞에서 보고도 알지 못했다. 당시에 프랑크 백작은 그저 인생에 지친 한 노인처럼 보였을 뿐이었으니.
그 마지막 날.
진탕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에서나 깨어나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가던 나는 복도에서 한 사람과 마주쳤다.
복도는 어둡기도 하였고, 설령 밝다고 했더라도 그와 마주친 적 없던 나는 그가 프랑크 백작이라고 바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내 상상과 조금도 닮은 면이 없었다.
맨손으로 프랑크 가문을 일군 마법사, 수많은 기적을 행한 재림 예수, 자본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천재, 광인, 심지어 악마!
그 수많은 수식이 따라붙는 남자는 그저 나이에 비해 주름이 많고, 남들보다 조금 더 지친 얼굴을 한 노인에 불과했다. 초상화에는 황제처럼 그려졌던 위용 넘치는 수염은 실제론 돼지 털을 꼬아 만든 붓보다 거칠었다.
"자네는?
남자는 물었다. 그 어조가 너무 담담했기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대답했다.
"필레몬 허버트라고 합니다."
"허버트? 남작 허버트?"
나는 설마 저택에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을 만날 줄 몰랐기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아십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에겐 낯 익은 이름이란다. 남작은 건강한가?"
그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재작년, 돌아가셨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그저 연로하고 지친 노인처럼 보였던 남자의 존재감이 서서히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호흡에선 돌풍이 불고, 눈에서는 불길이 일어나고, 그 기세는 폭풍우보다 거대하였다.
당시에는 경험이 적었던 나는 눈앞의 남자가 마치 마법사처럼 보였다. 아니면 밤에 장난을 나온 악마가 날 놀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남작이 죽었단 말이지."
남자는 중얼거렸다. 그 말이 겁먹은 날 현실로 되돌렸다.
"현재 허버트 남작은 누구지?"
"첫째 형님, 배즐입니다. 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구시길래 저희 아버지에 대해 아시고, 또...."
나는 말문이 막혀서 더 묻지 못했다.
방금 내가 겪은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평범하던 노인의 몸에서 빛이 뿜어지고, 그 목소리가 동굴 안에 있는 것처럼 울리는 걸 뭐라 물을 수 있을까.
"나는 프랑크라네."
그 대답에 나는 내가 겪은 모든 신비한 현상을 납득했다.
눈앞의 남자가 이름만 들어온, 그 유수한 프랑크 백작인 것이다. 그 모든 별명 중에 과장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작은 마법사이며, 악마였고, 또 예수였다.
"그것은...?"
나는 당황하여 무작정 물었다.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손수레가 눈에 띄었다. 백작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박제라네. 내 취미지."
손수레 안에 실려 있는 것은 살지도 죽지도 않은 짐승의 주검이었다. 나는 아무 생기도 없는 짐승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도착했습니다."
나는 노집사의 부름에 현실로 끌려나왔다.
"이 방입니다."
창고 방은 복도의 끝에 있었다.
저택에서 가장 높은 3층의 끝이니, 사실상 가장 구석진 곳이었다. 이곳은 등불도 닿지 않아서 복도부터 어두컴컴하였다.
"고맙네. 이제 가봐도 돼."
"잠시."
노집사가 문 손잡이를 쥐려는 날 만류했다.
"외람되오나, 들어가시기 전에 하나 경고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목소리는 전에 들은 적 없이 심각했다. 빛을 등진 탓에, 그의 흉물스러운 안면 사이에 부조화스럽게 박힌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뭐지?"
"최근 주인 어르신의 모습이 이상합니다."
나는 이런 경고를 전에도 들은 적 있었다.
"이상하다니."
"그분께서는 평소와 다릅니다. 판단이 온전하지 못하고, 하지 않은 언동을 일삼으십니다."
마리가 내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참작하겠네."
"하나."
노집사는 다시 한 번 말을 이어나갔다.
"그분이 하는 말을 모두 믿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네는, 그의 형제 아닌가."
"전에도 말씀 드렸지요."
그는 말했다.
"저와 주인 어르신의 뜻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자네."
나는 말을 잃었다.
"실례했습니다."
노집사가 떠나고도 나는 한참이나 그 장소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아서가 잠들어 있던 꿈의 저편에서의 대화를.
방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술 냄새였다.
수 세기 동안 쌓인 것 같은 먼지내와 포도주 향이 뒤섞인 악취에 코가 시큰거릴 정도로 독하게 흘러나왔다. 반면 후각적 충격에 비해, 시각은 놀랄 만큼 무감각했다.
실내에는 어둠이 고여 있었다. 방에는 어떤 광원도 없었고, 하나 뿐인 작은 프랑스식 창문도 커튼과 차양에 가려져서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복도의 불빛 뿐이었다.
"알트? 자네 거기 있나?"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숨소리가 들렸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은 어두운 방의 중앙에 웅크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방 안으로 발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빛의 세계와 멀어지고, 눈은 느리지만 어둠에 길들어갔다. 어둠 속에서는 수십 개의 눈이 흐리게 반짝이며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박제였다.
뿔이 잘린 순록의 머리, 미간에 난 구멍을 털가죽으로 덮은 회색 너구리, 가죽과 머리만 벗겨져 걸린 뱅갈 호랑이 카펫, 어떤 비참한 유 머인지 상아를 깎아 만든 코끼리 조각상....
원망도 담지 못한 죽은 짐승들의 공허한 안구가 유리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그 위에 소복히 쌓인 먼지의 두께는 그들이 외롭게 삭은 세월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줬다.
그리고 그 모든 죽은 짐승 한가운데에, 그는 홀로 앉아 있었다.
"대낮부터 마셔댔나?"
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앉은 의자 옆에 놓인 걸상에는 반쯤 찬 와인병과,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고, 그 아래로 쓰러진 병이 셋이나 더 굴렀다. 카펫 없는 목재 바닥이 붉은 액체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알트, 깨 있는 줄 알아."
내가 들어온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일부러 못본 척하는 건지, 그는 여전히 문 쪽으로부터 등 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술도 잘 못하는 사람이, 어제부터 대체 무슨 바람인가?"
마침내 내 목소리가 닿았는지, 아서의 상반신이 천천히 뒤로 돌았다.
나의 예상과 달리, 보이는 옆모습은 아주 말끔하여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오직 복도의 불빛의 받은 눈 뿐이었다.
그의 반짝이는 눈에는 현자와 같은 숙고와 번민이 깃들어 있었다.
"In vino veritas."
아서는 취한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그것이 취기에 나온 헛소리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외국어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뭐라고?"
"영어로 말하면, 술잔 안에 지혜가 있노라."
몇 번이고 들어본 적 있는 숙어였다.
"그거 알고 있나?"
나는 자리에 앉은 아서를 지나쳐, 더욱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물건으로 좁은 창고 방의 창가에 다가가니, 두꺼운 커튼 사이로 붉은 빛이 희미하게나마 비쳐보였다.
"그 뒤에는 이런 말이 이어지지. 그리고 물잔에는 건강이 있다, 라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수 년간 묵은 먼지가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붉은 물결과 함께 몰려온 쌀쌀한 바깥바람이 허전하지 않게 가득 채웠다.
"세간에는 주당의 변명거리로나 알려졌지만, 애초에 그 말은 그렇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야. 알고 보면 오히려 정반대지."
아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찬 바람을 갑자기 맞으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그가 취객임을 고려하면 놀랄만큼 절제된 표정을 지었다. 그저 말없이 웃는 것 말이다.
"너는 정말 노인이구나."
"무례한 걸 보니 제정신이 든 모양이군."
"아니, 아니야. 내 말은, 네가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한다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실제로도 그렇지. 슬픈 사실이지만, 자네나 나나 벌써 마흔 하나야. 철부지처럼 취할 때까지 마시는 나이는 지났다는 거지."
내 말에 아서는 고소를 머금었다.
"너말고 누가 날 그렇게 볼까."
처음에 나는 그것이 나를 비웃는 말인줄 알았다. 그러나, 곧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서는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내가 몇 살로 보여?"
"자네, 취했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해. 자, 보라고. 내가 마흔 한 살로 보여?"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위태롭기 그지 없어서, 혹시 발을 헛디뎌 창밖으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넘어지겠네."
"말 돌리지 말고, 고개 돌리지 말고, 날 보란 말이야. 내 얼굴을 보고 말하라고."
걱정과 달리, 그의 두 눈은 강한 확신을 가지고 날 향했다.
그가 다가올수록 포도향이 짙게 났다. 내가 방 안에 묻었다고 생각한 술 냄새는 사실 대부분 그의 몸에서 나는 것이었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노을빛을 정면으로 받아서 그런지, 유난히 붉은 얼굴이 부쩍 다가왔다.
아서는 자신의 얼굴을 조형처럼 잡아당겼다. 그의 눈아랫살이 뒤집히며 선홍빛 살갗이 드러나고, 말끔한 얼굴은 익살스럽게, 혹은 비극적으로 일그러지며 주름졌다.
하지만 그건 세월이 만드는 주름이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노인이 될 수 없었다.
"너는 바뀌었어. 오래 전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작년과 비교해도 명백해. 뺨의 색소는 더욱 침착해서 검게 보이고, 수염은 전보다 희뭇거리게 물들었지. 반면,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지금의 아서 프랑크는 작년, 스무 해 전의 아서 프랑크와 비교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거야."
그의 몸이 다시 멀어졌다.
그 순간, 나는 문득 마리와 노집사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들이 말한 분노가 바로 이것인가? 그의 눈에 빛나는 것은 총기가 아니라 광기였단 말인가?
"여기 있는 박제는 모두 선친의 작업물이야. 말년에 들어 갑작스레 시작된 취미였지."
아서는 그대로 방 안에 가득한 박제품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울 때는 몰랐으나, 그 수는 내가 평생 본 박제보다도 많고 다양했다.
"이국의 진귀한 동물이 연일 저택으로 들어왔어. 선친께선 수입한 동물을 해체하고, 가죽을 말리고, 아교를 칠하는 그 모든 작업을 직접 도맡으셨어. 대단한 열정이었지. 쉬운 작업은 아니었으니, 박제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그가 늙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어. 애초에 나이에 맞지 않는 격무였던 거야."
들은 것과 달리, 박제를 치운 장본인이 그 사이에서 그것들을 친근감 있게 매만지는 모습은 퍽 기이한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낯익은 오랜 벗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어느 날부터, 이런 소문이 돌더군. 박제의 수가 부족하다는 거야. 들인 동물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거지. 누가 이런 소문을 퍼트렸는지 몰라도, 도시와 떨어진 심심한 저택이었으니 사용인들은 좋아라 이야기를 만들어대더군. 선친이 몰래 동물을 잡아 먹었다는 소문부터, 밀수품을 숨기는데 사용했다는 소문까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사실인 것처럼 하는 거야. 선친은 생전부터 무수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자였으니까 그의 괴담이 몇 늘어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
아서는 소문을 말하면서도 전혀 재밌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선친의 실종과 동시에 모든 소문은 사라졌어. 그리고 잊혀졌지. 박제는 여전히 저택 곳곳에 놓였지만, 누구도 거기 흥미를 갖지 않았어. 그러다가 수 년 전, 우연히 선친의 서재를 뒤지던 나는 한 권의 장부를 발견했지.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그 낡은 장부에는 날짜와 동물 이름이 명단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어."
그는 말을 끊고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프랑크 백작이 남긴 박제에 대한 기록이란 것쯤은 명백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서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장부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어. 아까 내가 말했듯이, 선친의 공식적인 박제 취미가 시작된 건, 그가 실종되기 얼마 전부터였어. 하지만 그 명부에 적힌 첫 날짜는 족히 40년도 더 된 것이었지. 심지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던 거야. 나는 이 저택에 살면서 평생 그런 거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지."
그는 괴담을 말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자신과 그 부친의 일이라는 자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그저 남일처럼 태연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숫자였지. 수가 너무 많았어. 내가 아는 저택 박제품보다 훨씬 많았어. 동물이 줄어들었단 소문은 누가 퍼트린 게 아니었던 거야. 누구라도 이 정도로 동물이 사라진다면, 어딘가 빼돌렸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지. 저택 일에 관심이 없는 나만이 몰랐던 거야. 처음에는 수 달이 걸리던 반입 빈도도 말년으로 갈수록 점점 짧아졌지. 특히 마지막 한 해는 그 전을 다 합친 것만큼 많았어. 말할 필요도 없이, 선친이 박제 취미를 공표한 시기였지. 그리고... 마지막, 장부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더 있었어."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기 전에, 그는 꼭 이렇게 한 번 흐름을 끊는 버릇이 있었다. 어떤 계산이 들어간 건지, 아니면 선천적인 변사의 재능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인명人名이었지. 주로 아일랜드계였지."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필로,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었지. 내가 저택의 지하실을 찾아낸 날 말이야. 그날 나는 지하에서 해석기관 오라클을 발견했고, 나의 숨겨진 쌍둥이 형을 찾아냈지. 그런데, 내가 말하지 않은 한 가지 발견이 더 있었어. 너라면 봐서 알 테지."
나는 그가 말하려 하는 게 뭔지 알았다.
작년, 다시 찾은 프랑크 저택에서 날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황폐해진 정원도, 썩어가는 저택 건물도, 노화를 형상화한 것 같은 괴물 같이 늙은 집사도, 비밀의 지하실, 퀴리 부인, 심지어 19세기에 완성된 컴퓨터 같은 것도 아니었다.
지하실 가장 으슥한 곳에, 끝없이 늘어진 문과 방을 지나서 감금된 한 존재, 그것이야말로 날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걸 부를 여러 이름을 연상했지만, 지금 부를 단어보다 정확한 것은 없었다.
"자네의, 모친 말이군."
"법적이진 않지만."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발견하고, 치우는 데만 두 달이 걸렸지. 달리 둘 곳이 없었기에, 나는 정원에 고르게 묻었어."
그가 뭘 발견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이들은 나의 형제야."
아서는 박제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선친이 빚어낸 정교한 공예품이지. 나는 인간의 박제야.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수밖에. 나의 태생은 저주받았어."
그는 말했다.
"내 푸른 동맥에 흐르는 건, 그건 결코 인간의 피가 아니야. 나는 그걸 깨닫자마자 추악한 실체를 들킬 새라 은둔을 결정했지. 네게 했던 말은 반만 사실이야. 형님 때문에 떠난 사람이 반이었고, 나머지 사용인은 내가 직접 해고했지. 수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내 모습을 보고 의심하는 그들이 두려웠던 거야."
그것은 말보다는 악쓰는 것에 가까웠다.
"모든 사용인을 쫓아낸 뒤에, 나는 정원의 꽃과 나무를 파냈어. 그리고 지하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묻고, 누구도 파헤칠 수 없도록 가시나무와 덩굴장미 씨앗을 뿌렸지. 이걸로 나의 비밀을 지켜질 거라고 믿고, 또 누구도 가시밭을 통하지 않고 저택에 들어올 수 없게, 또, 나갈 수 없게...."
아서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종국에는 거의 속삭이듯 말하던 그는 지쳐 보였다. 박제품 사이에 걸려 있는 또다른 박제품, 그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저곳에서 그는 꽤 잘 어울렸다.
"전날에도 말했지. 언어는 본질을 흐려. 그러니까 믿지마."
영문 모를 말이었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는 말을 이었다. 설명은 하지 않았고, 전혀 다른 주제였다.
"모든 일은 1895년에 시작되었어. 하지만, 왜 그날인지 생각해본 적 있어?"
아서는 갑자기 물었다.
"그래, 맞아. 자네가 작년에 보낸 편지,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꿔놨지."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갑자기 질문을 받은 나는 당황하여 대답하지 못하고 딴소리했다.
아서는 그 헛소리를 듣고 그저 싱긋 웃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는 법이야. 어떤 절묘한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무대의 장막을 들추고 보면 무수한 필연의 교차란 걸 알게 되지. 19세기의 끝, 20세기 이성과 과학의 시대가 다가오는 지금, 인류는 가진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와 마주하고 있다. 그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일까?"
문어체처럼 말한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 중에 우연은 아무것도 없어. 선친 사후에 저택을 방문한 보험 조사원이 누구보다 꼼꼼했던 게 우연일까? 아니,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고작 보험사가 우리의 거대한 적이란 걸 알지. 그들은 처음부터 알고 접근했을 거야. 그리고 내가 학술회를 조성한 것 그것도 우연일까? 그럴 리가, 호언하건데 세상에 나만한 야심가는 더 없을 거야. 나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모든 회원을 엄선하고 불러모았지."
아서는 쏟아내던 말을 멈췄다.
"그런데 그중에 오직 1895년, 네게 보낸 편지만이 우연한 걸까?"
"왜, 왜 나였나?"
내 물음에 아서는 웃으며 말했다.
"편지에도 써놨듯이 우리 여정에는 뛰어난 학자, 탐험가, 군인이 필요했거든. 지난 한 해 동안 너는 내 안목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줬지."
"그런 질문이 아니야.
나는 다시 말했다.
"우연한 일은 없다. 그게 자네 주장이 아니었나? 그 무수한 사람 중에 20년 동안 연락하지 않은 대학 동기를 불러서, 자네가 평생 숨기려고 한 가장 거대한 비밀을 공유한 것이 우연일 리가 없지."
"내가 회원 모두와 비밀을 공유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것에 한해서는 불가능하네. 전에 자네가 내게 직접 말하지 않았나, 이 비밀을 아는 것은 나뿐이라고."
"내가 그랬나?"
"그래."
아서는 그 말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돌아가 보자고. 20년 전, 너와 내가 친구가 된 것부터 말이야. 언제나 나는 특별한 존재를 원했어. 그리고 너는 분명 그 조건에 맞았지. 그게 왜 그런다고 생각해?"
나는 말문을 트고, 처음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주목할 만한 나만의 특이성, 그것을 도무지 연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겠나보지?"
나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표정을 나는 몇 번 보았던 적이 있었다.
아주 고약한 미소였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오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떤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너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여겼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어. 너는 선천적으로 연기력이 좀 부족하거든. 뭘 숨기려고 하면, 티가 난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가?"
아서는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옆, 걸상에 놓인 책을 들어올렸다. 방에 들어오고 한 번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었다.
"1895년, 해상에서 표류했던 화물이 도착했어. 리빙스턴 박사가 선친께 보낸 것이었던 것이지. 그것이 십수 년간 동안 바다에서 떠돌다가 내 품에 안긴 거야. 나는 강렬한 운명을 느꼈지. 그런데 같은 해에,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물건이 하나 저택에 들어왔지. 그게 바로 이 책이야. 이건 네가 가진 대단한 마도서나, 세상의 이치를 담은 학술서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누구나 즐겨 읽는 소설책에 불과했지. 하지만 내 오랜 호기심을 풀어주기엔 충분한 물건이었고."
아서는 자신이 감춰놓은 책 커버를 벗겼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오랫동안 숨겨 놓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 선천적인 변사였다.
표지에는 스핑크스 모양의 삽화와 함께, 이런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The Time Machine」
"너는 이 시대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