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08화 (108/232)

§108. 9월의 새로운 사건

아침에 움튼 싹이 우거지고, 노을이 질 무렵엔 붉게 시들었다.

봄내 자란 초목에서 낙엽이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구두 밑창에 닿은 마른 잎사귀가 으스러지며, 바람이 불 때마다 부스러기가 되어 도로 위를 굴렀다.

대화재 이후 4달이 지난 거리의 풍경은 전과 많이 달랐다.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도로 위였다.

수백 년간, 항상 도시 물류의 중심에 있던 마차는 완전히 패권을 내주고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는 그 정겨운 말발굽 소리 한 번 들으려면, 교외로 나가는 달구지라도 타야 할 지경이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자동차가 되었다. 천장이 확 트인 자동차는 특유의 엔진 떨리는 소음과 함께, 도시 어디서나 공장 굴뚝처럼 매캐한 흑색 매연을 뿌리며 도로를 질주했다.

속도는 마차보다 두세 배는 빨랐고, 악취는 곱절 이상 심했다. 거리에서는 연일 사고가 끊이질 않았는데, 신문에서는 얼마나 뒷돈을 받았는지 사고에 관한 기사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있습니다!"

창고 건물 안에서 누군가 외쳤다.

"이 새끼가!"

안에서 몇 명이 거친 욕설을 내뱉고, 달음박질 소리와 함께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직접 보지 않아도 거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소리가 잠잠해지고, 다시 한 박자 여유를 들이고 나니, 안에서 너덜너덜한 모양의 경관이 걸어나왔다.

여기서 너덜너덜하다는 표현은 주관적인 것으로, 실제 모습이 그렇다기보다는 얼굴이 초췌하고, 어깨는 안으로 굽어서 그 모양새가 볼품없다는 정서적인 의미였다.

"있었나?"

"예."

경관은 힘없이 답했다.

그리고는 중요한 의무를 깜빡했다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어설픈 폼으로 경례했다.

"수사에 협조 감사드립니다."

경관은 보이는 외모 그대로, 아직 어리고 경험도 적어 보였다. 하지만 근 몇 달 이어지는 밤낮 없는 격무 때문인지, 눈주름 하나만큼은 제 또래의 배 이상 많아 보였다.

나는 그의 경례를 묵례로 받고는, 살짝 오른발을 들어서 그의 어깨너머를 살폈다. 때마침 창고 건물 입구로 나오는 한 형사를 발견한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그를 호명했다.

"이봐, 피터."

피터라 불린 형사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자였다.

얼굴색은 꼭 시체처럼 검게 침체하였고, 표정은 평생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우울한 장의사처럼 엄숙했다. 만약 미리 알지 못했다면, 눈앞에 새파랗게 어린 경관과, 저 세파에 찌든 형사가 같은 연배라는 걸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사국의 젊은 형사, 피터 윌슨은 위태로우면서도 절도 있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본래 수염 한 올 기르지 않고 말끔하던 얼굴에는 잡초밭처럼 듬성듬성 불균형한 수염이 뻗쳐 있었고, 두 안구는 여름철 건물 옥상만큼 뻑뻑하게 건조했다.

"아, 저는, 그러면."

"볼일 보게."

"실례했습니다."

경관은 당황하며 물러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무슨 이유로 부르셨습니까?"

"안쪽 상황은 어떤가?"

"늘 같습니다. 건물에 잔류한 관계자는 모두 체포했고, 나머지는 근무 장부와 대조하여 수배할 예정입니다."

"물건은?"

"확보했습니다. 선생님의 협조 덕분입니다."

형식적인 질문에,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있잖나, 피터. 자네가 얼마나 열심인지는 알겠어."

"안 됩니다."

윌슨은 단호히 말했다.

"끝까지 듣지도 않았잖나."

"무슨 말을 할지 아는데, 꼭 끝까지 들어야 합니까?"

짐짓 무례하게 들리는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우리는 지난 넉 달 동안 만나면 늘 같은 대화를 했고, 대답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모든 사건이 해결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성급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줄 알잖나."

내 설득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지막으로 면도한 게 언젠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단 하루라도 마음 놓고 쉰 적이 있나?"

"지금 이 순간에도!"

윌슨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에게 놀란 것처럼,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모이자,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러다 자네가 먼저 쓰러지겠어."

"아니요."

돌아오는 대답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저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될 때까지, 절대...."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나는 그가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속죄? 복수심? 무엇이 되었건, 그 끝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의 뻔한 파국을 짐작하고도, 차마 떠나는 윌슨을 잡지 못했다.

부른다고 멈출 뒷모습도 아니고서니, 설령 잡기라도 하면 쓰러져선 다시 일어나지 못할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자리를 잠깐 더 서성이며, 적잖은 무력감을 곱씹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런 내 뒤로, 갑자기 유난한 음성이 나타났다.

"필레몬, 이 아저씨야! 요즘 따라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리 열심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나 참, 알 만한 사람이 그리 빼나? 아니면 내 부하랑은 되고, 나는 못 들을 이유라도 있다는 거야?"

남자는 거침없이 내 어깨에 팔을 감아 넣으며 호방하게 웃었다.

"뭐, 우리 쪽에서는 일을 덜어서 좋지만."

이런 거침없는 스킨십은 당연하지만 영국식은 아니었다. 만약 그 특유의 프랑스식 억양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오해와 추문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분명한 남자였다.

물론, 지금도 그는 온갖 소문과 적을 달고 다니긴 했지만 말이다.

"자네야말로 현장엔 무슨 일인가?"

"내가 꼭 짐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인데."

나는 그의 주의를 환기할 요량으로, 말없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현장에 있는 많은 경찰과 형사는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아닌,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지만.

"보다시피, 그러네."

남자는 다시 숨넘어가게 웃었다.

정말 우습다기보단, 웃는 편이 형편에 좋다는 걸 아는 사람 특유의 사회적인 웃음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런 가식을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정말 자네밖에 없어."

그도 그렇겠지. 그의 말은 과장도, 거짓도 아닐 것이다.

측근은 비위를 맞추려고 안달일 테고, 정적은 부담스러워 피하려고 할 테니 말이다. 이 절름발이의 어깨에 과감히 매달린 염치 없는 남자야말로, 최근 9년 동안 런던 정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명사, 범죄수사국의 3대 국장, 윌리엄 페터이니까.

또한, 그는 나의 문법 학교 동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가?"

"왜 그걸 내게 물어보나?"

"내 부하들은 솔직하게 대답하질 않거든. 뭘 물어봐도 잘 되고 있다고만 말하지. 그런 내가 누구에게 묻겠나?"

나는 그를 대하는 게 도무지 자연스러워지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 비록 꿈의 저편으로 사라졌다고 해도, 그날 5월의 런던에서 있었던 일은 여전히 그를 통해서 마음 표면으로 떠오르곤 했다.

"뭐, 늘 똑같지."

반면, 페터는 당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날 대했다.

내가 세운 가설대로라면, 페터처럼 꿍꿍이를 숨기고 사는 자라면 응당 기억하고 있을 텐데, 나의 추측이 틀렸는지, 아니면 페터가 보기보다 자신에게 정직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지금 나오는군."

페터의 말에, 나는 창고 입구로 눈을 돌렸다.

가려진 입구 벽 너머에서 커다란 프로펠러가 천천히 끌려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바람을 타기 쉬운 유선형 몸체가 연달아 드러났다.

"비행기라."

페터는 놀란 기색 없이 담담히 말했다.

"매번 줄줄이 잘도 나타난단 말이지. 한두 푼 들어가는 작업도 아니었을 텐데, 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저걸 숨겨놨을까. 어때, 필레몬?"

"나란들 알겠나."

"최초 제보자도, 최고 기여자도 자네잖나. 어떤 심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응?"

그렇게 말하며, 페터는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말대로 최초이자 최다 제보자는 나였다.

런던 부둣가 창고에서 세 대의 무장 전투기가 처음 발견된 이래, 도시 곳곳에서 이런 발견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뒤로 나는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을 만한 활주로를 계산하여, 그것이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를 연달아 제보했다.

누가 만들었고, 또 누가 숨겼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다만 비행이라고 하는 터무니 없는 기술과 기체에 실린 다량의 폭약, 탄약의 위험성을 감안하여, 경찰청과 수사국은 암암리에 수색과 압수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발견은 벌써 지난 넉 달에 거쳐, 스무 건이 넘었으니 경찰과 형사들이 지쳐 있는 것도 당연했다. 반면 관계자는 모두 무고를 주장하며, 투옥된 지금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전직 군인으로서, 국가에 해악이 될 위협을 제거하는 것만이 내 소명이네. 거기 관련된 범죄를 밝혀내는 것이 자네들 형사와 경찰이 할 일이고."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애써 말했다.

물론, 나는 이미 알았다.

이들이야말로 5월의 런던, 그 당시의 참극을 이끈 주역들이란 사실을. 그리고 또, 지금 발견되는 비행기의 수가, 당시 하늘에서 보았던 것에 턱없이 못 미치는 적은 수라는 것 또한.

런던 어딘가에는 여전히 수백 대의 전투기가 음지에 숨은 채로, 하늘로 비상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 런던에는 수백 톤의 폭탄이 떨어질 테고, 도시는 다시 한 번 지옥도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니 윌슨이 느끼는 초조함도 괜한 것은 아니었다.

"아는 기술자한테도 물어봤는데, 정말로 이런 기술력은 우주인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고도 하더군. 그렇다고 우주인을 수배할 수도 없지 않겠나."

페터는 한숨을 푹 내쉬며 투정했다.

"기술자, 누구?"

"기술부 장관. 물론 비공식 발언이니까 어디서 누설하진 마."

나는 장관을 일개 기술자 취급하는 그의 담력에 할 말을 잃었다.

"아무튼, 오늘은 자넬 만나러 왔는데."

"나를?"

"그래, 요즘 수사에도 적극 협조해주고 있지 않나. 그래서 내 나름의 감사 표현으로 저녁 식사나 대접할까 해서. 르 호튼에 예약했는데, 어떤가?"

그의 발언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 꿍꿍이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 본다면, 그 이면에 널린 수작질 때문에 한없이 뻔뻔하게 느껴지는 화법이었다. 당연하지만 그의 용건이 단순한 감사 인사일 리는 만무했다.

르 호튼이라면 런던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식당인데, 그런 곳에 예약을 미리 잡아둔 것은 반드시 오라는 모종의 압박이었다. 그런 압박을 줄 정도이니, 대단한 용건이 따로 있다는 은밀한 뉘앙스는 물론이었다.

추측하건대, 근래의 수사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는 제안이었지만.

"고마운 제안이지만 사양하겠네. 그런 여유가 있다면 부하들이라도 대접하는 게 어떤가?"

설마 단번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페터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떠올랐다.

"뭐? 왜?"

"선약이 있거든."

"미룰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만 신사 된 도리로 숙녀를 바람 맞힐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나름 이치에 맞는 답변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페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져서 황당하다 할 지경이었다. 나는 의아하여 물었다.

"뭐가 이상한가?"

"그야, 이상하지! 실없는 거짓말 좀 하지 말게."

"거짓말이라니?"

"자네가? 여자를?"

나는 그것이 고약한 농담쯤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봤을 땐, 영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그가 뭔가 착각을 한다는 생각에 정정했다.

"잠깐, 자네,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겠지."

"이건 그런 일이 아니야."

"그렇겠지!"

그날 저녁, 시티 오브 런던.

르 호튼이 명실상부한 런던 최고의 사교장이라면, 더 디너 홀은 그보다 미식가를 위한 장소였다. 저녁에도 고즈넉한 홀에는 도란도란한 신사숙녀의 담소와, 반드시 이중주를 넘지 않는 절제된 악단의 합주만 은은히 울렸다.

런던의 뭇 식당들처럼 유행에 뒤질세라 건축한 무대는 있었지만, 오랫동안 한 번도 무도회나 연극이 열린 적이 없어서 이제는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처럼 놓여 있었다.

좋게 말하면 음식이 주가 되는 장소였고, 달리 말하면 시시한 가게라는 뜻이 되었다. 물론 미식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런던 사교계로부터 더 디너 홀은 외면받은 장소였다.

하지만 내게는 오너의 이런 운영 방침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자의가 되었건, 타의가 되었건, 이런 도시에서 언제나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꽤 마음에 드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르 호튼의 식사도 훌륭하긴 하다지만, 거기서 먹어서야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뭘 먹는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다만, 오늘 여기서 있을 약속을 생각하면, 여기서 하는 식사가 꼭 페터를 따라 르 호튼에 들른 것보다 훌륭할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나는 입구에 서서, 마지막으로 품속의 편지를 다시 확인했다.

- Aoibh Fitzhenley -

발신인 란에 그렇게 적힌 편지는 지금으로부터 사흘 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피츠헨리, 이런 드문 성을 가진 사람이 런던에 흔할 리 없었다.

나는 은밀한 경로를 통해서 반출한 장부 한 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편지에 적힌 이름과 같은 성을 지닌 인물이 거기 기록된 것을 발견했다.

그 때문에, 나는 편지를 보낸 장본인과 만나기로 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좋은 저녁입니다."

입구로 다가가자, 종업원이 모자를 올려 인사하며 영업적인 미소를 지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필레몬 허버트."

내 대답을 들은 종업원은 장부를 들여다보고, 또 당황한 표정으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묻지 않아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남작? VC? 아무것도 없나?"

"실례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날짜를 확인해 드릴까요?"

종업원은 고객의 과실임을 확신하였으나, 굳이 상대 기분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를 가진 채 정중히 물었다.

나는 다시금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9월 30일, 저녁 7시 15분.」

현재 시간이 7시 5분을 막 넘어가는 중이니, 약속 시각에는 틀림없었다.

혹시 상대가 늦거나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일부러 그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번 사안의 중대함을 고려하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실수가 생길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여기까지 오는 중에 무슨 사건을 만나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모를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넉살맞게 말했다.

"아니, 괜찮아. 일행이 착각을 한 모양이야. 내가 들어가서 찾아보지."

"그러시겠습니까?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안내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홀에는 화사한 샹들리에가 움직이는 것도 모르게 느린 속도로 흔들리며 빛을 뿌려댔고, 약간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많은 인간 군상이 넓게 떨어져 제각각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홀을 외각을 따라 걸으며, 모든 손님을 한 번씩 훑어보고는, 마지막으로 한 테이블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었다.

테이블에는 아직 앳되어 보이는, 붉은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처음엔 날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내가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자, 자리에 앉은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태연히 물었다.

"합석해도 되겠나?"

"어, 사실은 제가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서요."

"혹시 그 일행이 필레몬 허버트라는 이름의 멋진 신사 아닌가?"

그러자 여인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아, 당신이!"

"방금 대답은 긍정으로 받겠네."

나는 그녀의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지팡이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걷는 일이 많아서, 조금이라도 빨리 앉고 싶거든."

"어떻게 아셨죠?"

그녀는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

"이런 걸 기대한 것 아닌가?"

"그게, 사실, 저... 네, 맞습니다...."

"마치 소설 속 탐정처럼, 아무 단서도 없이 자신을 찾아내도록 말이야."

"네, 맞아요! 그런 걸 기대하긴 했죠! 하지만 진짜로 할 수 있을 줄은 몰랐고요!"

자신의 뻔한 속내가 들통 난 것이 부끄러운지, 아니면 초조한 것인지, 그녀는 여간 안절부절못한 기색이 아니었다. 보이는 그대로, 자신을 숨길 줄 모르는 경험 적은 청년 같았다.

내가 최근에 상대한 닳고 닳은 자들과 비교하자면, 도리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들으면 시시할 거야."

"혹시 직원에게 물어봤나요?"

그녀는 그렇게 묻고는, 혼자 단정 지었는지 "그래, 아마 그럴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얼마나 확신이 깊었는지 다소 실망한 눈치이기도 했다.

"자네의 추측에 주석을 달자면, 틀렸네. 그건 방법으로는 너무 번거롭지."

"번거롭다고요?"

"그래, 자네가 보낸 편지에 모든 답이 적혔는데, 굳이 남에게 물을 필요는 없지 않겠나."

"제가 어느 자리에 앉는다곤 적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녀는 진위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름은 적었지. 피츠헨리는 아일랜드 성姓이야. 그렇다면 이름도 아일랜드식으로 읽으면 되겠지. 내가 게일어에 능통하다곤 못하겠지만, Aoi를 '이'라고 읽고, bh를 '브'라고 읽는 것 정돈 알고 있네. 이브라면 틀림없이 여성의 이름일 테고, 자네가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면 홀에서 홀로 앉은 여성을 찾으면 그만인 거야."

이브 피츠헨리는 잠자코 숙고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론 말이 안 됩니다. 여기 혼자 앉아 있는 여자는 저 혼자가 아닌걸요. 하지만 당신... 저, 선생님? 교수님?"

"편한 대로 부르게. 허버트로도 좋아."

"아무튼, 허버트 씨는 망설임 없이 다가왔죠. 제 추측이지만 어림짐작한 걸음걸이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도 간단하지. 자네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은 어디서나 눈에 띄거든."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머리카락, 아일랜드 계통의 특징인 선명한 적발을 보고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나는 약속을 꽤 잘 지키는 편이라네. 그래서 늘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하지. 반면, 자네는 조금 게으른 편인가 보군. 만약 내가 미리 와서 반응을 살피려고 했다면, 나는 7시 정각에는 도착해서 준비를 끝냈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죠?"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장갑 한 짝과, 아직 벗지 않은 오른손 장갑을 깨닫곤 수줍게 웃으며 마저 벗었다. 그녀가 가게에 막 도착해서,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는 숨길 수 없는 증거였다.

"이름과 약속 시간, 두 가지 사실로 유추한 시시한 추리야."

내 말에 피츠헨리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머뭇거리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듣던 소문대로예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보다 먼저 할 말이 있을 텐데."

"그...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멋대로 시험해 봐서, 그렇지만 능력을 의심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더듬으며 번복했다.

"아니, 시험해 봤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능력을 의심한 게 맞네요. 뭐가 됐든 죄송합니다.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저는 정말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이렇게 해서라도 꼭 믿음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편지에 적은 내용대로라면,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서 물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조금 실망했겠죠."

"그뿐인가?"

"아무 단서도 주지 않았는데, 사람을 찾아내는 소설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 실존할 거라곤 생각 안 했거든요. 하지만 허버트 씨는 달랐네요."

피츠헨리의 말은 얼핏 합당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한계였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심각하게 여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선, 아주 상식적인 영역 안에서만 다뤄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착각을 정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정도는 대단한 축에도 못 끼어."

"소문보다 겸손하시네요."

소문, 대체 무슨 소문. 아까부터 그녀가 말하는 소문의 정체가 영 거슬렸지만, 지금 당장 말할 화제는 아니었기에, 나는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따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한 가지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내가 말한 것은 어떤 과장도, 겸손도 아니란 것을 말이다.

"아니, 불운하게도 사실이네. 자네는 자신, 아니, 자네의 아버지에게 닥친 사건이 얼마나 심각해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해. 자네가 대단하다고 말한 나의 이런 연상법도, 우리가 앞으로 헤쳐나갈 일들에 있어선 최소한의 도움밖에 되지 못한다는 거야."

"위험하다는... 말씀이죠?"

"죽을 수도 있고, 그보다 못한 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네."

그녀가 얼마나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허풍이나 과장이라고 흘려 들을 지도, 혹은 자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것까지는 차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정말 알고 싶나?"

"...네."

아주 짧은 망설임 후에, 피츠헨리는 말했다.

"저는 어떻게든 알고 싶어요. 저의 아버지, 명예로운 왕립 학회의 회원이신,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의 신변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진위를, 어떻게든 밝혀내고 싶어요."

잠시 후, 종업원이 전채 요리를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는 누가 제안하기도 전에 함께 식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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