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10화 (110/232)

§110. 빛의 언덕

모든 도시에는 저마다의 오로라가 뜬다.

지구가 지난 46억 년간 빚어낸 시간의 빛깔을 인간은 고작 수천 년 만에 지상으로 옮겨놨다. 다만 저 극지의 하늘에서는 우주의 법칙이 작용했다면, 여기 지상에서는 인간의 법칙만이 통용되었다.

런던 중심의 시티 오브 런던에는 밤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번잡스러운 그곳은 야간에도 소음으로 가득했고,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낮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 모든 소란을 피해서 중심을 벗어나자면, 도시 북서쪽 외곽의 캠든 구가 딱 알맞았다. 주로 가난한 서민 계급이 주거하는 이 동네에는 런던 동물원을 비롯한 각종 여가 시설이 모인 탓에, 낮에는 거주민과 부유한 관광객 간의 갈등으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밤이 오면 낮 동안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적막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안으로 향하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음악가의 마을, 켄티시 타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 거리야말로 밤마다 빛의 마술이 벌어지는 도시의 경계부이다.

하늘에서 검푸른 물결이 밀어닥치고, 거리에 짙은 어둠이 몰려오면, 발전소에서는 신호를 보내어 환한 백열등 전구를 밝혔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장대를 든 점등원이 분주하게 달려와서 가스등에 불을 붙여놓았다.

관을 통해 이어진 석탄 가스를 낮은 온도로 태우는 옅은 황색광과, 탄소 필라멘트를 가열하여 발생하는 선명한 백생광이 충돌하자, 거리에는 백색과 황색의 그라데이션이 길게 묻어났다.

이것이 바로 도시의 오로라이다.

산업 혁명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공예품은 가난과 부유 사이에서 피어났다. 이러한 색채는 분명 어느 시대,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 어느 색도 런던만큼 창연하지는 않았다.

이렇듯이 켄티시 타운은 런던 안에서도 각별했다.

도시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이 마을은 도시의 부유함이 끝나고, 가난함이 시작하는 경계선 위에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시에서 주도하는 여러 개발 정책에서 번번이 소외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20년 전 개통한 작은 기차역 하나 말고는 눈여겨볼 점이 없는 심심한 동네였다.

그나마 옛 방식을 지키는 음악 세공사가 모여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기도 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시대에 뒤처진 자들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 외엔 퇴직한 독거노인이나, 구빈원, 어느 귀족이 사들였다는 빈 건물뿐으로 거리에는 도시에 걸맞은 활기보단 적적한 우울감이 얼룩처럼 묻어 있었다.

그 점이 특색 없는 마을을 런던에서 가장 독특한 곳으로 만들었다. 이런 소란스러운 도시에서 정적이란 굉장한 가치를 가지는 법이었다.

한 가지 불운한 사실은, 그 유일한 개성마저 최근에는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멀리서 자동차 소음이 들렸다. 이 거리에서 나는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떨어진 도심, 시티 오브 런던에서 들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닿는 것이었다.

"아직도 런던에 이런 곳이 남아 있는 줄 몰랐군."

"그래도 기차역은 있던걸요."

피츠헨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나는 거리를 걸으면서 정겨운 옛 런던에 돌아온 듯한 향수에 젖었다. 지금 도심의 건물은 대부분 2차 런던 대화재로 불타고 신축되었는데, 이곳은 화재의 여파가 전혀 닿지 않았는지 낡은 옛 런던 건물들이 온전히 늘어서 있었다.

"기분 나쁜 마을이죠."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가 내가 느끼는 애달픈 향수를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설마 그런 혹평이 나올 줄은 차마 몰랐다.

"어떤 점에서 말인가?"

"건물이 꼭 서로 감시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나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운데 길을 두고 대칭으로 늘어선 건물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렸지만, 설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는데, 알다시피 내 주변에 있는 아서나 마리나 하는 자들이야 귀신처럼 눈치가 빨랐으니, 내가 그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직접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감시라니?"

"건물들의 모습 말이에요. 꼭 탐정 소설에 나오는 미스테리한 배경 같지 않나요?"

그녀는 짧게 말했다. 건물의 외관이라고 한다면, 별 특징이 없는 조지아식 테라스 하우스였다. 이것도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마침내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저런 건물은 브리스톨에 없겠군."

"네,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런던에서는 흔한가요?"

건물의 양식은 평범했다. 하지만 어떤 한 부분에 있어선, 세계 어느 곳에도 흔치 않은 개성을 갖고 있었다.

어떤 점이 그러냐면, 정문이 그랬다.

하나의 건물에 두 개의 현관문, 그리고 거기에도 각각 다른 이름의 주소 판이 걸려 있었다. 건물 하나에 두 가구가 들어가고, 그들을 구분하는 건 중심을 가로지르는 내벽 하나뿐이었다.

"그래, 아마도 런던에만 있을 거야."

실은 여기엔 런던사를 아우르는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

올해 3월, 런던에서 일어난 큰 화재를 흔히 런던 대화재라고 부르긴 했지만, 실은 이건 줄임말이었다. 그 앞에는 '제2차'라는 단어가 누락되어 있었다.

소위 제1차 런던 대화재는 200년 전에 일어났다.

한 공장에서 발생했던 화재는 나흘간 도시의 8~90%를 태우고, 장기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세상의 끝까지 달려간 불길은 더는 삼킬 것이 없다는 걸 알고서야 저절로 가라앉았다.

하늘이 지상의 불을 껐으니, 이젠 의회가 시민의 분노를 식힐 차례였다.

문자 그대로 거리의 시민은 모두 노숙자였다. 일이 끊이지 않던 공장은 모두 멈췄고, 부둣가에 배가 들어와도 짐을 옮길 창고가 없었다. 건물로 가득하던 도심은 공터처럼 황량했다.

말 그대로 건물이 없었던 것이다.

시청은 단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건물을 확보해야 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의 이름난 건축가들을 초빙했다.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융통했지만, 누구도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건축가들은 모두 유능했지만,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복구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당시엔 알지 못했지만, 이는 갓 태동하려는 산업혁명의 요구에 부응하기엔 턱없이 느린 속도였다. 건축업계 전반에 걸쳐, 증기기관 발명에 준하는 대단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 무렵, 애든버러에서 세 명의 건축가 형제가 런던에 도착했다.

이들 형제가 그린 설계도는 기존 방식과 판이하면서도, 미학을 잃지 않았으며 또한 건축 효율이 대단히 뛰어났다. 그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처음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 무시당하던 형제는 머지않아 런던을 넘어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바로 아담 스타일의 창시자인 아담 형제였다.

이 아담 스타일이 접목된 건물들은 대칭적이면서도, 공간을 어찌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는지, 말 그대로 반으로 잘라서 한 집씩 쓴다고 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였다.

다들 슬슬 눈치챘겠지만, 보통 발상으로 끝내는 것들이 런던에선 손쉽게 현실이 되곤 했다.

조금이라도 많은 노숙자를 줄이려고 노력하던 런던 시청은 우연히 나온 그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기꺼이 채용했고, 이렇게 반으로 갈라진 테라스 하우스는 런던의 명물 아닌 명물이 되었다.

물론 런던 태생인 내게는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니었기에, 브리스톨 출신인 그녀의 관점은 퍽 새롭게 들렸다.

왜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사는 두 가족. 그리 말한다면, 그녀의 표현대로 꼭 어느 탐정 소설에 나오는 으스스한 배경 같기도 했다.

"소설을 꽤 좋아하나 보지?"

"하하...."

피츠헨리는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대신 조금 떨어진 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 왔습니다. 바로 저기가 제 아버지이신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께서 생전 살던 집입니다."

나는 속으로 참 개성적인 화법을 구사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녀는 따로 힘준 말투 같지도 않았다.

우리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보기에는 평범한 시골 주택 같았는데, 이곳에서 어떤 광기가 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향토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당신들."

나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목소리는 꼭 공동묘지에서 들릴 법한 스산하고 힘 없는 것이었지만, 그건 봉긋 솟은 무덤 대신 옆집 문 너머에서 들리고 있었다.

"당신들, 옆집에 볼일이 있나?"

노인은 우릴 부르며 물었다.

나는 무심결에 피츠헨리를 돌아봤다. 그녀도 마침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짧은 사이에 우리는 말 없이 참 많은 의논을 주고받았다.

"그렇습니다만."

대답은 내가 하기로 했다. 피츠헨리는 없는 사람처럼 숨 죽였다.

"박사를 찾아왔다면 그만둬. 이젠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야."

"피츠헨리 박사에 대해 좀 아십니까?"

내가 묻자, 노인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박사와는 무슨 관계지? 가족? 친척?"

어렵게 꺼낸 노인의 목소리에는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여실히 묻어났다. 나는 이면에 숨겨진 어떤 사정을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죽음에 대해서 모른 척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 사업을 하면서 좋은 친구 정도 되면 좋겠군요."

내 대답에 놀란 것은 피츠헨리였다.

그녀는 내 옷깃을 잡으며, 내 *실수*를 정정하려고 들었는데, 나는 그녀가 소리내기 전에 황급히 멈추고 타일렀다.

한편, 노인은 조금 더 경계 어린 침묵을 지켰다.

"그러면 이미 늦었네."

그는 느지막이 뒷말을 떼었다.

"늦었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박사는 죽었네. 10일쯤 되었나, 자동차 사고였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는 뻔뻔하게 연기했다.

"저런, 유감입니다."

"유감도 뭣도 아니야."

노인은 단칼에 말했다.

"그놈은 미쳤어. 가만뒀다면 더한 사고를 쳤을 텐데, 차라리 죽어서 다행이지. 다들 고인이라서 말은 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 격양된 어조에, 나는 급히 피츠헨리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 진짜 사인을 찾겠다고 먼 타향에서 나 같은 자를 찾을 정도로 절박했던 그녀였다. 자칫하면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우려와 달리 피츠헨리는 차분했다.

그보다는 할 말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입술은 벌벌 떨리면서 달싹거렸고, 녹안은 정처를 찾지 못하고 위태롭게 오갔다. 그리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빠르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가 알기로 피츠헨리 박사는 왕립 학회의 회원까지 지내신 훌륭한 분입니다만."

"그건 자네가 그자의 본성을 몰라서 그래."

"말씀해주시죠."

노인은 문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로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차마 내칠 이유가 없어서 말하는 그런 어설픈 느낌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피츠헨리 박사가 마을에 나타난 건, 바로 작년 이맘때쯤의 일이었네. 처음부터 독특한 사람이었어. 얼마나 조용하게 행동하는지, 나는 그가 이사 오고 반나절 동안 바로 옆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지. 심지어 이삿짐이라곤 봇짐 하나뿐이었으니까 말이야."

그건 내가 아는 것과 달랐다. 피츠헨리 양... 구분을 위해서 이름을 부르자면, 이브의 설명으론 오스카가 런던에 따로 나와 산 것은 5년은 되어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4년 정도 다른 곳에서 살고 있던 것이 되었다. 나는 확인을 위해서 재차 물었다.

"이맘쯤이라면, 작년 9월 무렵입니까?"

"그래, 이제 기억나는군. 어떤 대학교수가 사람을 물어 죽였니 하는 일로 시끄러웠던 때니까,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아마 10월쯤이었지?"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사는 어땠습니까?"

나는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다행히 이브는 옆에 있는 신사와, 방금 거론된 살인마를 연관 짓지 못한 듯싶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원래 어느 박사라는 작자에게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사고로 후원자가 죽어서, 형편이 안 좋아서 여기 온 거였어. 그러니 처음부터 이웃과 어울릴 생각이 없을 수밖에."

노인은 툴툴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사가요."

"놈이 마을 전체를 깔보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았어.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는 없었지. 하지만 발작... 그래, 놈의 발작이 시작한 건 올해 3월쯤이었지. 도심가에서 큰 불이 났었잖나? 군대가 들어오고, 밤새 총 소리가 들리고 난리도 아니었지."

런던 대화재 당시의 얘기였다. 그 현장에 있던 나는 지금도 그날의 악몽 같은 풍경이 선명히 떠오르는 듯했다.

"그 불이, 거대한 불이 놈 안의 짐승을 깨운 거야. 미친 것들은 으레 불 속을 뛰어다니지 않나. 그놈도 사람 흉내를 제법 내었지만, 결국 미쳐버린 거지."

노인은 말하는 것도 불경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서 어떤 모순을 발견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들었다.

"놈은 점점 빛을 피하기 시작했어. 꼭 박쥐나 지네 같은 해충이 그런 것처럼, 낮에는 집 안에 웅크려서 소리 없이 지내다가, 오직 밤에만 나돌아다녔지. 얼마나 햇빛을 받지 않았는지, 창백하고 기괴하게 뒤틀린 모습 때문에 동네에 괴물이 돌아다닌다는 소문까지 돌았네."

나는 박사의 수기에 쓰여 있던 한 문장이 기억났다.

'자연광이 아닌 모든 불빛을 피하라.'

그것은 노인이 말하는 증상과 연관이 있는 걸까. 당장 듣기로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어느 병의 증상이 떠올랐다.

광견병 말이다. 빛과 물을 피하는 건, 광견병에 걸린 짐승이 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지. 시간이 좀 더 지나고,  5월인가부터는 몇 주에 한 번만 나왔어. 그는 해가 질 때 짐수레를 끌고 나와서, 밤이 되면 수십 명은 먹일 만한 빵과 우유를 갖고 나타났지. 그러면서도 잘 먹고 지내지 못하는 것처럼 비쩍 마르고, 다리는 O자로 굽어서 사람의 모습 같지도 않았어."

나는 노인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들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오스카 박사는 여러 모순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집안에서 뭘 하는지, 밤마다 벽에 못질하는 소리가 온 동네에 퍼졌네.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어. 참다못한 젊은이들이 몰려가도 묵묵부답이었고, 경찰을 대동해도 한두 번은 나오는 시늉하더니 그 뒤로는 문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그더군그래."

이것은 내가 원래 알던 것과 같았다.

이런 신고가 이어졌기 때문에, 경찰에서는 오스카 박사의 사고에 대해 사고사로 단정 짓고 수사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사고가 터질 줄 알았어."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할 얘기도 없어. 그놈이 아편에 취해서 뛰쳐나왔다가, 집 앞을 지나는 자동차를 보지 못하고 치여 죽은 게 다야. 우리 동네의 어떤 젊은이가 목격했다지만, 워낙 늦은 밤이었으니 어두워서 범인이나 차종은 못 봤다고 하더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냄새는 안 났습니까?"

"냄새? 무슨 냄새?"

"뭐, 여러 가지 있잖습니까. 피 냄새라든가."

내 질문에 노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로 심하진 않았네."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튼, 박사를 찾아왔다면 돌아가. 여기엔 아무도 살지 않으니까."

"정말 그렇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브를 향해서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고, 그 자리에 조금 더 기다렸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다시 거리 쪽으로 걸어 나왔다.

"자, 잠시만요."

이브는 당황하며 날 따라왔다.

"들어가려는 것 아니었나요?"

"그랬지."

"방금 그 노인의 말을 믿는다고요?"

"어느 정도는."

나는 이제 아예 집 반대 방향, 런던 중심부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약속이랑 다릅니다."

"물론 지킬 셈이야."

"그러면 왜 안 들어가고요?"

역시나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는 발을 멈췄다.

───탁.

지팡이가 보도에 박히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혹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피츠헨리 양?"

이브는 날 따라서 걸음을 멈췄다.

"뭐가요?"

"지금은 알다시피 꽤 늦은 시간이야. 보통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리고 내 추측이지만, 방금 옆집 노인의 목소리는 은퇴하여 할 일 없는 나이처럼 들렸네. 알다시피 일거리가 없는 노인은 일찍 잠드는 편이지."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요?"

"여기까지 말했는데 모르겠단 말인가. 들어보게, 노인은 왜 문 앞에 있었나?"

나와 키가 엇비슷한 장신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흔들리는 녹안이 정면으로 비쳐 보였다.

"어...."

"설령 노인이 깨어 있었다고 해도, 우리가 오는 인기척을 듣고 나왔다기엔 시간이 꽤 촉박하지 않았나? 아니, 심지어, 나는 처음부터 노인이 문으로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어. 그게 내가 처음에 놀란 이유네."

이브는 입을 열었다.

"설마."

"그리고 그 노인, 문 너머에 계속 서 있더군."

그녀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걸어서 거리를 벗어났다. 길모퉁이를 돌 무렵에, 이브는 황급히 내 옆에 따라붙었다.

"실은 조금 전까지 반신반의했네. 오스카 박사의 죽음에 어떤 내막이 있다는 사실 말이야."

나는 수풀 쪽으로 발을 들였다.

건물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탓에, 풀밭을 지나가면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건물 뒤까지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젠 확신하네. 박사에게 일어난 사고는 우연이 아니야. 이 마을에선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노인은 그 사실을 숨기려 했지. 그자가 한 몇 가지 거짓말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해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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