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켄티시 타운 사건 (1)
"거짓말이요."
"그래, 눈치채지 못했나?"
이브는 갑자기 발을 멈췄다.
나는 노인이 쫓아온 줄 알고 급히 뒤돌았지만, 이브는 그저 가만히 서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긴 숙고 끝에 말했다.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죠."`
"그리고, 그게 끝이었군."
내 대답에 이브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랬죠."
"탓하려는 게 아니네. 누구도 남을 의심하길 원하지 않아. 그게 사람의 선한 본성이지.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눈에 보이는 불편은 없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위로할 셈으로 한 말인데, 이브는 말없이 고개를 깔았다.
"하지만 하나 일러두겠네. 자네가 정말로 이번 일에 진지하다면, 앞으론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거야. 이건 내 추측이자 경험담이지만, 자네 아버지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거야. 가장 단순한 진실조차 무수한 거짓에 덮여 있을 테지. 그걸 알지 못하면 그저 길을 잃고 말 거라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Nullius in verba."
그 나지막한 음성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무심코 뒤돌아봤다. 이브는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의 말도 믿지 마라."
"그래, 우연히도 같은 말을 했군."
나는 애써 말했다.
"이토록 같은 길을 쫓으면, 그만큼 진리는 단순해지기 마련이야. 그들도 언젠가 나와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겠지."
"그들 누구요?"
"왕립 학회."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녀가 뭔가 더 물을세라 화제를 돌렸다.
"여하튼,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아까 노인이 했던 말을 기억하나? 자네 아버지가 미치기 시작한 게, 런던 대화재 무렵부터라고."
"네, 기억합니다. 불길이 내면의 짐승을 깨웠을 거라고 말하면서요."
이브는 그리 말하면서, 자기 아버지를 스스로 욕보이는 게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래, 실은 그 부분이 꽤 중요한 대목이네. 노인은 불길을 강조하면서까지, 그 시점을 확실히 특정했어. 하지만 자네라면 알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맞아요!"
내 말을 들은 이브가 성급히 동조했다. 나는 그녀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확신하고 재차 설명했다.
"아니, 내 말은 정말로 불가능하다는 거야."
이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네는 오스카 박사가 화재 당시, 미치지 않았다는 물증을 가지고 있네."
"제가요?"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열고 안쪽을 뒤적였다. 그리고 곧 뭔가 깨달은 얼굴로 편지 봉투 한 장을 꺼냈다.
다름 아닌 오스카 박사가 본가에 보냈던 친필 편지 말이다.
"화재로부터 한 달 뒤, 오스카 박사는 고향의 본가에 편지를 보냈지. 그 내용은 가족을 걱정하고, 어떤 위협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 광증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네."
이브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마디 더 얹었다.
"너무 느낌에 의존한 것 같나? 그러면 추측에 조금 더 확신을 기해볼까. 자네의 노력 덕에 우리에겐 박사의 문체를 비교해볼 만한 사료가 하나 더 있지. 그의 수기 말이야. 그게 얼마나 더 나중에 쓰인 건지 몰라도, 적어도 편지보다는 나중에 쓰인 게 분명하지. 그 문체와, 편지의 내용, 둘을 비교해보면 두 문서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상이한 걸 알 수 있지. 그러니까 요컨대...."
"편지를 쓸 때, 아버지는 미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티 오브 런던의 빼곡한 거리와 달리, 이 작은 동네에서 건물은 좁게는 수 미터에서 멀리는 수십 미터씩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키 낮은 관목이었다.
허나, 잘 관리된 정원수와 달리, 마땅히 손보는 사람이 없는지 이 마을의 나무는 거친 가지가 삐죽빼죽 튀어나와서 볼품없을 뿐더러, 몰래 지나는 사람의 옷과 피부를 마구 긁었다.
이나마 없었더라면, 이 조용한 마을에도 시간이 흐른다는 걸 잊을 법도 했지만, 덕택에 수풀을 몰래 지나는 우리 둘만 고생하게 되었다.
"제가 앞장설게요."
"아서, 비싼 옷만 상하네."
"아니요, 계속 말씀하세요."
이브는 그렇게 말하고, 날 제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난 길은 한결 걷기가 편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잡으려고 했는데, 내가 속도를 내는 것보다 그녀가 더 빨리 걷는 탓에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전부 이 비루먹은 다리가 말썽이었다.
"일단 노인이 속이려 했다는 건 알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론 노인이 박사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네."
"왜죠?"
이브는 억울한 듯이 항변했다.
"그 사람은 거짓말했잖아요."
"그래, 노인이 자네 아버지를 싫어하니까. 그런 상대이니 깎아내리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잖나."
"하지만, 그 사람은 거짓말을 했잖아요."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목소리를 낮췄다. 어쩐지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슬슬 알 것 같았다.
"유감이지만, 거짓말 자체는 문제가 안 되네. 중요한 것은 의도지. 나는 노인이 그저 자네 아버지를 모함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떤 중요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속였는지 알아야 했네. 그래서 나는 그를 시험했지."
"대체 언제 그런걸...."
"내가 마지막에 사고 당일에 대해 물었던 걸 기억하나?"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노인은 여기서 큰 실수를 저질렀지. 그는 사고의 원인을 단정 지은 거야."
"아, 아편!"
그녀는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외쳤다. 그러나 곧 어리숙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게 왜요? 경찰 조사와 같은 대답 아닌가요?"
"그게 실은 그렇지 않네. 노인은 어떤 이유로 절대 경찰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까."
"어떤 이유요?"
이브는 서서히 짜증이 나는지 목소리를 깔았다. 요즘 아서를 따라서 말해보고 있지만, 아무래도 득보다 실이 많았다. 그야 그보다는 교육자인 내가 말을 잘하기 때문인가 싶었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지. 사건 당시에 현장에 있던 어떤 것이, 경찰 조사 당시에는 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네."
나는 다급히 보충했다.
"최근 런던 경찰은 모종의 사건으로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네. 그 때문에 자잘한 사고에 돌리는 인력이 부족한 편이야. 자네가 경찰 조사에 앞서, 박사의 집에서 수기를 빼돌릴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그러니 사고부터 경찰 조사까지는 적어도 몇 시간, 크게는 일까지 차이 나게 된 것이지."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도 아버지의... 시신, 을 수습하고도, 경찰은 한참 뒤에 도착했습니다. 반나절은 지나서 말이죠."
"그래, 그러니까 경찰은 박사의 집을 수색해서, 아편을 발견하고 정황상 그가 아편을 태웠을 거란 추측밖에 할 수 없었던 거야. 반면, 노인은 사고 당시에 벽 하나를 두고 모든 일을 겪었지. 그러기에, 노인은 절대 그가 아편에 취했다고 말할 수 없었지."
"잠깐만요,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코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냄새 말이야. 아편을 태울 때는 고약한 냄새가 나지. 이렇게 건물이 널리 떨어진 동네이니 다른 주민은 몰라도, 벽 하나를 두고 산 노인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독한 냄새 말이야."
그리고 나는 계속 말했다.
"거기서 모순이 발생하지. 경찰은 박사의 집에서 대량의 아편을 발견했으니, 그가 아편을 피웠을 거라고 추측하는 게 당연해. 하지만 노인은...."
"그 사람은 아무 냄새도 안 났다고 했어요!"
이브는 드디어 깨달은 것처럼 외쳤다.
"자네 아버지는 아편 중독은커녕, 사고 당일까지 한 번도 아편을 피운 적이 없을 거야. 그리고 박사의 집에서 발견된 그것도 아마 그의 것은 아닐테지. 이쯤되면 노인과 경찰이 같은 결론을 말했다는 게, 꽤나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내 말에 이브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숨기는 게 있고, 또 공범이 있군요. 이제야 허버트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아직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아편 냄새도 모르는 노인이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했을 것 같진 않군."
아직 의문점은 남았지만 명쾌한 결론이었다.
우리는 이윽고 건물 뒤편에 도착했다.
멀리서 어렴풋한 주행음이 들리고, 밤하늘을 움직이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물의 뒷 창문을 위로 당겨봤다.
───덜컥, 덜컥.
문설주에 뭔가 걸린 것처럼 덜컥이는 소리만 날 뿐, 정작 창문은 열릴 생각을 않았다. 보아하니 잠금이 걸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안에서 걸린 듯했다.
"잡고 있어 보게."
나는 이브에게 지팡이를 건네고, 창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지끈하는 낮은 소음과 함께 창문이 활짝 열렸다.
"부순 건가요?"
"열려 있던 거야."
얼빠진 소리를 하는 이브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자 그제야 알아들은 이브가 지팡이를 건넸다.
나는 문턱을 잡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넘었다.
"젠장!"
의족이 창틀에 걸려서, 창문을 열 때보다도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브는 손으로 의족을 잡고 내가 창문을 건너게 도왔다가, 방 안에 뒤따라 들어오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 다리는...."
"그래, 원래 붙어 있던 건 아니지. 지팡이는 왜 들고 다닌다고 생각했나."
"무릎이 안 좋으신가 했죠."
"자넨 좋은 탐정이 되긴 글렀군."
나는 풀 죽은 이브를 내버려두고 실내를 살폈다.
장소는 주방이었다.
오스카의 수기대로라면 1층에는 복도와 이어진 주방과 응접실이 있을 텐데, 그중 한 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창문은 적힌 대로 딱 두 짝 있었다.
"창문을 판자로 막아놨군. 야간에 못질하는 소음이라면 이거였을 테지."
창가에는 어설픈 못질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다. 오스카는 썩 손재주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지, 못은 도중에 꺾이거나 반쯤만 들어가 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안쪽으로 흐트러진 파편을 미뤄보아, 바리케이드는 밖에서 안쪽으로 밀고 들어온 것으로 보였다. 그러고도 창틀에는 조각 몇 개가 붙어 있었는데, 이것이 걸려서 창문이 열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밖에서 누가 들어왔군요."
이브는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심각한 얼굴로 나무 부스러기를 살폈다.
"그래서 창문 잠금도 열려 있었고요."
그녀의 추측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나는 거기에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대신에 창문 근처에 남은 판자를 살폈다. 잘 보니 여전히 못에 박힌 잔해 부분에 검붉은 자국이 너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핏자국이군."
"핏자국이요?"
이브는 놀라서 내 옆에 다가왔다.
"꽤 된 거야. 아마도 못을 박을 때 실수했겠지."
보아하니 오스카 박사는 손재주가 좋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서투르게 못질을 하다가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질렀는지, 핏자국은 어느 한 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한 사람의 것인가요?"
이브는 물었다.
"혹시 여러 명의 핏자국이 아닐까요?"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출혈은 한 사람의 것치고는 꽤 많았다.
"아직 모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머릿속에 어떤 풍경이 떠올랐다.
달밤에 흐릿한 창밖의 불빛에 의존하며, 몇 번이고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찍는 박사 말이다. 그렇게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못질을 계속하는 영락없는 광인의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파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못 박힌 판자가 당장에라도 떨어져 나올 것처럼 허술한 것이었다.
"뭐하시죠?"
"아니, 잠깐."
나는 얼굴을 벽에 붙이다시피 가까이 대었다. 그리고 판자와 벽 사이, 가려진 벽면에 난 무수한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뭔가 있나요?"
"못 자국이군. 아주 많이 나 있어. 이러니까 박음질이 헐거웠던 거지."
이브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건 중요한가요?"
"어쩌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지만,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해진 것도 아닌데 괜히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뭐가 말이지?"
나는 벽에서 떨어지며 이브를 돌아봤다.
"어쨌거나 침입자는 실존했으니까요. 정말로 아버지께서 공연한 광증이 도져서 그 모든 기록을 남기고, 달리는 차에 뛰어든 게 아니니까요. 이제 범인과 단서만 찾아나면 다 해결되니까요."
그녀는 애써 이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를 서투르게 위로하는 대신 내가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주방을 둘러보는 것 말이다. 실은 나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소질이 없었다.
주방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살풍경했다.
내 예상대로 건물은 연식이 꽤 되었는데, 그 증거로 오븐에서는 가스를 쓰는 대신 아궁이로 불을 지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입구 근처에는 한동안 검댕이 묻은 흔적이 없었다. 심지어 차게 식은 화구 안쪽에는 큼지막한 거미줄이 처져 있기도 했다.
나는 오븐 위의 선반을 열었다. 안쪽에는 갖은 재료는커녕, 구린 냄새가 나는 철제 우유병 하나와, 뚜껑을 열어서 딱딱해진 설탕 병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나마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은 옆에 놓인 빵 바구니 안에 돌처럼 굳어 있는 시골 식빵 한 덩이와, 또 쥐새끼가 갉아 먹은 치즈 덩이 하나가 다였다. 뻔히 놓인 빵은 내버려두고 치즈만 집중적으로 훔쳐 먹은 것이 참 흥미로웠다.
"빵과 우유라고 했던가. 말 그대로였군."
노인은 딱히 시적이거나 정치적인 수사를 동원한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먹거리의 흔적이라곤 빵과 우유가 다였다.
"원래 식사를 좀 심심하게 하시나?"
"아니요... 집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브는 정갈하다 못해서 공허한 주방 풍경에 당황한 눈치였다.
"박사의 수기를 챙기러 왔을 때도 한 번 와봤을 것 아닌가."
"그때는 자료를 찾느라 경황이 없어서, 주방에는 한 번도...."
그도 그렇다. 주방이란 본래 생명을 이어가는 장소이니, 죽은 자의 주방을 뒤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생전에도 오스카 박사가 딱히 주방을 들락거린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실은 아까 노인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박사는 한 번에 수십 명이 먹을 빵과 우유를 날랐다고 했다.
그것이 비유가 아니란 걸 알게 된 지금에서 의문을 품자면, 왜 하필 빵과 우유였을까. 장기간 잠적하기 위한 식품이라고 한다면, 둘 다 보존에 적합한 식품은 아니었다. 차라리 군용 통조림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리 많은 음식을 비축해도 며칠이면 그들이 전부 먹어치운다."
나는 박사의 수기에서 봤던 내용을 고스란히 읊었다.
그 의미 모를 문구만이 지금 상황을 설명해줬다. 정말로 박사의 집에는 그가 모르는 식객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러지 않고서는 잘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건?"
나는 구석에 놓인 어떤 유리병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실내가 어두운 탓에 몰랐는데, 안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썩은 것이 분명한 뭔가가 표면에 떠올라 있었는데, 아마도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을 오래 방치한 듯했다.
"아, 그건."
이브는 내가 발견한 것을 아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이게 뭔지 아나?"
"그게, 저... 그렇습니다. 그건 아버지의 오랜 습관 같은 겁니다."
그녀는 변명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분께선 쓰고 남은 찻잎을 물에 담가두면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다가 건져내는 시기를 놓치면 이런 식으로 곰팡이가 슬었지만요."
이브는 자기 팔꿈치를 비볐다. 나는 그녀의 부끄러움을 덜어줄 요량으로 말했다.
"옛날에 찻잎이 귀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하기도 했지. 아주 근검하신 분이셨군그래."
"좋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실제론 그냥 구두쇠셨지만요.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를 따라서 대기근 당시에 본토로 넘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 가난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생활이 괜찮아지고도 당시 습관 때문에 편히 지내질 못하셨죠."
이브는 악취가 감도는 유리병은 소중한 물건처럼 매만졌다.
"찻잎 같은 건 그냥 사면 될텐데 말이죠."
우리는 주방 밖 복도로 나왔다.
오스카가 남긴 기록대로 1층 복도에는 응접실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아마도 위에는 침실, 화장실, 그리고 박사가 그토록 엄중히 지키던 서재가 있을 터였다.
다만 한 가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여기서 처음 알게 되었다. 어쩌면 창문이 없으니 굳이 적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하에는 뭐가 있지? 물소리 같은 게 들리는데."
"제가 알기론 보일러가 있습니다."
이브는 말했다.
"하지만 도관이 터져서 완전히 침수되었으니, 내려가도 찾을 건 없을 거에요."
오스카 피츠헨리의 집은 도저히 사람이 살던 곳 같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계단으로 향하자니, 갑자기 이브가 내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요, 조심하세요!"
"뭐, 뭔가?"
나는 놀라서 무심코 말을 더듬었다. 잘 보니 내 눈앞에는 어떤 가느다란 줄이 내려와 있었다. 눈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줄은 그대로 천장 위까지 올라갔다.
"이건?"
"전깃줄이요."
이브는 말에 놀란 나는 급히 뒷걸음질쳤다.
"아직 전기가 통하니까 건드리면 위험합니다."
그녀의 말대로 천장에는 본래 전기등이 붙어 있었는지, 전선이 나오는 어떤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 가장자리에 쌓인 쥐 배설물의 높이만으로 짐작해 보건대, 아무래도 조명은 꽤 오래 전에 떼어낸 것 같았다.
"박사는 이 어두운 곳에서 대체 어떻게 생활했지?"
이브는 말 없이 벽면에 걸린 촛대를 들었다. 생활감이 물씬 묻어나는 손때 묻은 물건이었다. 올려진 양초의 심지도 꽤 짧은 것이 한참 사용한 물건이었다.
나는 오스카 박사의 수기에 적힌 한 문구가 떠올랐다.
'자연광이 아닌 모든 불빛을 피하라.'
그러면 촛불은 자연광으로 구분하는 걸까?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인공광일 텐데, 어떤 기준으로 촛불은 되고, 전깃불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광인의 머릿속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성냥은 들고 다니지 않아서."
"아, 제가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이브가 불을 붙이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촛대를 들게 되었다. 나는 앞서 걷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렇게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