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12화 (112/232)

§112. 켄티시 타운 사건 (2)

2층에도 박사의 수기에 적힌 얼룩진 벽은 없었다.

두텁게 쳐진 커튼 너머로 다 가리지 못한 불빛이 새었다. 나방처럼 홀려서 무심코 커튼을 젖히고 확인하니 가로등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달도 뜨지 않는 슬픈 밤이다.

"아."

앞서 걷던 이브가 짧게 탄식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그녀는 일부러 숨기려는 듯했지만, 벽에 걸린 그림을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액자에는 일곱 명의 일가족이 담겨 있었는데, 모두 붉은 머리인 게 퍽 인상적이었다.

실은 그것 말고는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가운데 앉은 한 남자를 제외한 모든 남녀의 얼굴에는 검은 먹 같은 것이 칠해져서, 이목구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온전한 남자가 가장이라고 짐작했다.

오스카 피츠헨리, 아마도 그자일 것이다.

상상과 달리 꽤나 유약한 인상이었다. 애써 강인한 표정을 지어보지만, 어깨가 좁은 탓인지 괜히 괴팍한 영감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젊을 적에 고생깨나 했는지 주름이 많고, 피부색이 어두웠다.

"이건...."

이브는 시선을 피했다.

남은 여섯 명의 남녀는 아마 그의 가족, 그녀의 가족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받은 충격을 짐작하고 굳이 더 묻지 않았다.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내가 화제를 바꾸자, 이브는 그제야 다시 날 돌아봤다.

"박사의 수기 말이네.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나? 자네는 아까 이 상황을 추리소설에 빗대었지. 실은 꽤 적절한 비유였다고 생각하네."

나는 팔짱을 끼고 계속 말했다.

"의문스러운 죽음, 수상하고 배타적인 마을, 그리고 죽은 자가 남긴 다잉 메시지...."

"무슨 말이죠?"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건 소설이 아니지. 그러니 엽서를 팔아먹기 위한 수수께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의미심장한 문구로 가득 찬 일지 같은 것 말이네."

이브는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설마 아버지가 죽음을 예견했다는 건가요? 그래서 제게 남기기 위해서 이걸 적었다고요?"

"아니, 설마."

나는 단언했다.

그녀는 반쯤 확신했는지, 내 단호한 대답에 도리어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짓죠? 이게 없었다면, 저는 사건에 배후가 있는 줄도 몰랐을 텐데."

"오히려 그게 문제라네. 박사는 죽기 전까지 뭔가를 숨기기 위해 필사적이었는데, 오히려 그 수기에는 적힌 내용이 너무 많아. 자네가 그걸 손에 넣은 것 또한 우연한데, 내가 박사라면 그렇게 불안한 방법은 안 썼을 거야."

실제로 피츠헨리 양이 박사의 유산을 발견한 건 천운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수기는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경찰이 발견하여 압수했을 법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최근 경찰은 도시 곳곳에 숨겨진 전투기를 찾는데 바빴고, 마침 사고 신고 처리가 지연된 사이에 그녀가 현장에 왔다 간 것이었다.

경찰이 바쁘다는 사실은 나 같은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알지 못했고, 그나마도 그녀가 그 사이에 왔다 갈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또 옆집 노인은 어떤가. 박사는 생전부터 그들을 경계했는데, 자신이 죽고서 바로 발견될 공책에다가 모든 암호를 숨겨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아버지가 죽을 줄 몰랐다...?"

이브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이것 밖에 없어요!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에는 잘 짜여진 계획이 있었고, 만약 눈치챘더라면 그전에 도망치셨을 테니까요!"

그녀는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가능성은 있지."

내가 동의하자, 그녀는 도리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알고 말한 것 아닌가?"

"뭘요?"

"켄티시 타운에 오면서 봤을 것 아닌가."

내 물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녀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토록 확신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기 오는 길에 차 한 대라도 본 적이 있나?"

"아마도... 아니요?"

"지금도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사건 당시보다는 조금 이를 거야. 내 말이 맞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보다 주행이 적을 심야에, 때마침 박사의 집 앞에서, 막 집밖으로 나온 박사가 차에 치여서 숨지고, 그걸 목격했다고 증언할 사람이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브는 적잖이 충격받았는지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섰다.

나는 그런 그녀를 두고, 조금 더 걸어서 서재 문앞으로 다가갔다. 생전 박사가 그토록 애써 지키려고 했던 그 문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무심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있었군, 도끼."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벽에 걸린 도끼였다. 장작을 팰 때나 쓸 법한 것으로 이런 가정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 외에도 위화감은 여럿 있었다.

우선 천장이다.

전기등이 있을 자리에는 역시 큰 구멍이 나 있었고, 전기줄은 감아서 위에 올려져 있었다. 바닥에는 여러 잡동사니가 놓였는데 그 주변에 먼지가 엄청났다. 어찌나 심한지 최근에 한 번 정리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물 표면에는 먼지가 막처럼 씌워져 있었다.

다음에는 책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어수선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정리한 순서에 어떤 일관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책이 마구잡이로 꽂혀 있었고, 심지어 일부는 뒤집혀 있기까지 했다. 서재를 따로 만들어 둘 정도의 사람이 할 만한 방식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책상에는 달력이 한 부 올려져 있었는데, 9월 23일까지 체크가 되어 있었다.

역시나 도끼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벽이었다.

박사의 수기에 적혔던대로 어느 한 부분만 유독 희다고 느꼈는데, 어두워서 그렇지 잘 보니 푸른 색에 더 가까웠다. 텁텁한 냄새로 알 수 있었지만, 커다란 곰팡이 군체였다.

여러모로 밖에서 본 것보다 좁게 느껴지는 방이었다.

이브는 내가 방을 한 번 둘러본 뒤에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마음은 좀 정리됐나?"

그녀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 저번에 들어온 적이 있겠지."

"네, 잠깐 뿐이지만."

"바뀐 것은 없나?"

"변화 말이죠. 글쎄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도 이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알 만큼 노골적인 변화는 없었던 듯싶었다. 우리는 잠시 더 주변을 수색했다.

"아."

이브는 바닥의 잡동사니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무릎을 굽혔다.

다시 일어날 때, 그녀의 손에는 작은 걸상 액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오래 전에 인화한 듯이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자네 사진인가?"

낡은 사진 속에는 어린 곱슬머리 소녀가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요."

이브는 복잡한 얼굴로 액자를 쓸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유리 표면 위를 슥슥 지나자, 장갑 끝에 먼지 덩어리가 덜렁거리며 달라붙었다.

"저희 언니 사진이예요. 이걸 찍고 2년 뒤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지만요."

"유감이네."

"누구나 겪는 일이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빠가 언니를 잊으면 안 되죠...."

그녀는 액자에서 사진을 꺼내고, 틀은 책상 위에 올려뒀다. 그리고 가방에서 지갑을 떠낸 뒤, 조심스럽게 접어넣었다.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착각?"

"네, 아시잖아요. 저희가 했던 얘기도 전부 추측이란 거. 어쩌면 제가 너무 많이 생각한 게 아닐까요? 경찰이 말한대로, 그냥 사고였을지도 모르죠. 잘...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잘 안다고 우기기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 너무 모르겠네요."

이브는 장갑에 응어리진 먼지를 떼어내며 억지로 웃었다.

"아버지는 미친 거예요. 가족 모두를 잊을 만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끼 쪽으로 다가갔다.

"허버트 씨?"

"여기 오면서 하나 궁금한 점이 있었지."

벽에 걸린 도끼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촛불 빛이 어른거릴 때마다, 검은 철이 반짝였다. 나는 그걸 두 손으로 쥐어서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뭐하시는 거죠?"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다.

"잠깐, 지금 미쳤어요?"

그리고, 나는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쿵!

벽면의 흰 얼룩에 도끼가 박혔다.

"허버트 씨!"

"비록 내 전공은 아니지만, 나는 여러 업무를 보면서 남들 못지 않게 광인을 보고 겪은 바가 있네. 그래서인지 오스카 박사의 수기를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

나는 박힌 도끼를 잡아 뺏다. 지팡이를 놓은 탓에 쓰러지려는 내 몸을 이브가 급히 잡았다.

───쿵!

다시 한 번 도끼가 벽에 박혔다. 대견하게도 이브는 아주 침착했다.

"일단 이거 놓고 얘기해요!"

"기록이 말이지, 터무니 없는 망상을 적어놓은 것 같으면서도, 각 문장이 꽤 논리적으로 이어져 있었단 말이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집에 오고 알았지만 문구와 행동이 상당히 통일성 있어. 그저 충동적인 망상을 휘갈겨 적은 내용이 아니었단 말이네."

───쿵!

"잠깐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말은, 자네가 좋은 탐정이 되기 어려울 거란 말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도끼를 뽑았다.

"네?"

"좀 더 관찰력을 키우는 게 좋겠어. 아직도 모르겠나? 이 방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좁다네."

───쿵!

오스카 박사는 예상대로 손재주가 별로 없었다. 이렇게 몇 번 도끼질 하는 것만으로, 그가 급조한 벽은 이토록 허술하게 무너져 내렸다.

"내가 탐험하던 시절에 꽤나 유용하게 써먹은 것이지만, 공간 안팎에 온도나 습도가 차이나면 곰팡이가 잘 슨다네. 이걸로 동굴이나 물 웅덩이를 찾곤 했지. 박사는 몰랐던 모양이지만."

나는 조심스레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이브가 내 몸을 갑자기 놓아서,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버텨냈다. 이런 중요한 대목에서 넘어지면 폼이 우습지 않은가.

"내 결론은 이렇네."

갈라진 벽 너머에선 2 평방미터 남짓의 좁은 공간이 드러났다.

"오스카 피츠헨리는 미치지 않았다."

숨겨진 방 안에는 여러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중 한 권을 집어서 넘겼다.

"대체 어떻게...."

"말했잖나, 밖에서 본 것과 넓이가 달랐다고."

나는 읽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뭐가요?"

"도끼 말이야. 지나치게 강조를 하더군. 그것 때문에 처음에는 나도 그가 미쳤다고 단정지었지.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박사는 처음부터 누군가 수기를 훔쳐 읽을 걸 경계하고 있었어. 그 때문에 그런 암호 같은 문장들을 남겨놓은 거지."

이브는 날 따라서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공간이 좁은 탓에 다리 한 쪽만 안으로 걸쳐놓았다. 나는 그녀에게 쌓인 책 중 한 권을 들어서 건넸다.

"일종의 심리적 함정이야. 아무도 들여서는 안 된다는 서재를 그토록 강조하고, 또 거기 걸린 도끼를 몇 번이나 언급하니 도끼가 있는 곳이 서재라고 확신하는 거지. 나조차 여기 들어오고 도끼를 보자마자 제대로 찾아왔다는 착각을 했으니까. 박사는 책만 읽을 줄 아는 샌님들과 달리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어."

계속 책장을 넘기던 나는 이브를 돌아봤다. 마침 그녀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군."

"이것도 암호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벳으로 이뤄진 문장은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았다. 그나마 몇몇 단어가 반복되는 것을 봐선, 마구잡이로 썼다기보단 어떤 규칙을 가진 암호처럼 보였다.

"해독할 수는 없을까요?"

"어쩌면. 하지만 시간이 걸리겠지. 여기서는 무리야."

나는 책을 덮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림은, 대체 왜 얼굴을 지워놓은 거죠?"

이브는 자신도 책을 덮으며 따지듯이 물었다.

"간단해. 적들에게 가족 얼굴을 알리기 싫었던 거겠지."

그녀는 그 단순한 한 마디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에 이브는 멍한 얼굴로 내 눈을 마주봤다.

"자네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었네. 보통 대적하지 못할 적을 상대로 이만한 승리를 이뤘으니까."

"승리라고요?"

그녀는 낮게 중얼였다.

"죽었잖아요, 이게, 이게 어떻게 승리라는 거죠? 대체 그 적이란 게 누구예요? 왕립 학회가 뭐하는 곳이길래 사람이 죽어요?"

이브는 점점 목소리를 높이더니 나중엔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말을 멈추고 진정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층에서 들리는 어떤 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이브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들리나?"

이브의 녹색 눈이 파르르 떨렸다.

───부우웅... 쿵쿵....

실내가 조용해지자, 저멀리 도심의 자동차 주행음마저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일정한 간격의 어떤 울림이 함께 섞여왔다.

그건 발소리였다. 1층 복도에서 누군가 소리 죽여 걷고 있었다.

"창문으로!"

나는 커튼을 젖혔다. 그러자 안쪽에는 아니나 다를까 바리케이드가 드러났다.

"젠장!"

"비키세요!"

욕지거리를 내뱉는 찰나 등 뒤에서 살벌한 바람소리가 들려서 몸을 젖혔다. 그러자 이브가 든 도끼가 창문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잘했네!"

1층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더 커졌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빠르게 걷고 있었다.

나는 두 겹으로 된 커튼 하나를 뜯어내어, 다른 커튼과 묶어서 매듭으로 만들었다.

"잡고 뛰게! 놓지 말고!"

"네!"

이브는 당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조금은 망설일 줄 알아서 격려의 말을 준비하던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발소리는 이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서 비밀 방의 자료를 창밖에 집어 던졌다.

그 사이에 발걸음은 더욱 가까워졌다.

이제는 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팡이를 집어 던진 나는 추락할 기세로 창밖에 몸을 던졌다. 커튼을 힘껏 붙잡은 탓인지, 아니면 원래 길이가 짧았는지, 1층 중턱쯤에 내려올 무렵, 커튼이 끊어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충격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앗!"

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봐, 자네 괜찮나?"

나는 내 아래 깔린 이브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뭔 생각으로 날 받았는지 몰라도, 어떻게 운이 따랐는지 둘 다 무사했다.

"우선 여길 벗어나지, 빨리!"

우리는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빠르게 주워 모아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마지막에 언뜻 돌아본 건물 2층 창문에는 몇 개나 되는 인영이 어슬렁거리며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중 누구도 우리를 쫓아오지는 않았다.

우리는 빛이 가득한 큰길로 나왔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사람이 꽤 보였고, 말을 탄 순경이 막 우리 옆을 지나가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괜찮을 거야."

"그 사람들은 뭐였죠?"

"아마도 노인의 협력자겠지."

나는 말했다.

"동네 주민들 말이야... 분명 도끼질 소리를 듣고 모여든 걸테지."

"역시 아버지는...."

내 대답에 이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단 오늘은 해산하지."

"네?"

이브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면 쉬지도 않고 박사의 행적을 쫓아다닐 생각이었나?"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건강한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너무나도 미숙했다.

"자네도 아마 눈치챘겠지만, 이번 사건의 뒷배경은 아주 깊네. 하루이틀 안에 끝나지 않을 거야. 혹시 저들 중 아무한테나 얼굴을 보였나?"

"아닐... 아마, 아니요."

이브는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그걸로 충분하네. 내일 저녁, 같은 시간에 오늘 만난 식당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리고 주소를 알려줄 테니 그 전에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찾아오게."

자동차 주행음. 취객의 소란. 강물은 굽이치고, 풀벌레의 단말마.

"네."

"늦었으니 바래다 주겠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브리스톨이라면 몰라도, 런던에서 여성 혼자 밤거리를 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야. 내 걱정이라면 붙들어 매게. 이래 봬도 해군 출신이니까."

그러자 이브는 간곡히 다시 사양했다.

"아뇨, 제 말은, 정말로 괜찮아요."

그녀는 그렇게 몇 번이나 극구 사양하고, 기어코 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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