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켄티시 타운 사건 (3)
그 다음 날, 더 디너 홀.
시계를 확인하니 막 저녁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식사를 시작하기에도 마치기에도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입구 쪽은 더 없이 한산했다.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 허버트 씨."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붉은 곱슬머리를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서 날 반겼다.
"꽤 일찍 왔군."
"방금 도착했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장갑 한 쪽을 바라봤다. 이브는 내 시선의 방향을 눈치채곤, 저번과 똑같이 수줍게 웃으며 남은 한 쪽도 벗어놨다.
그러고 보면, 어제 나라면 7시에 왔을 거란 얘길 한 적이 있었다. 정말 그 말을 따라서 7시 정각에 도착했던 거라면 내 생각보다 더 고지식한 여인이었다.
"하루동안 아무 일도 없었나?"
내 물음에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쫓는 기색은 없었고?"
"네."
"잘 됐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우리 신원이 탄로난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안심하지 말고,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게. 자네와 나 같은 경우, 경력이 특이해서 언제라도 감시가 붙을 수 있으니까."
박사의 친딸인 그녀와, 왕립 학회의 대적자인 나이기에, 우리가 이번 사건의 뒤를 캐고 있다는 건 금방에라도 밝혀질 사실이었다. 이브는 제대로 알아 들었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적절한 타이밍에 끊고 들어와 식기를 나열했다.
"암호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녀는 꼭 군인 같은 말투로 물었다.
"해독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거야."
나는 스푼으로 접시 바닥을 긁으며 말했다.
"해독이 가능한가요?"
"음...."
나는 자신감 없는 신음성을 흘렸다.
작년에 퀴리 부인이 남긴 삼개국어 문서를 해독하는 데만 꼬박 1년을 썼던 나였다. 그저 언어를 혼용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벅찼는데, 이번처럼 작정하고 숨기기 위한 암호를 아무 단서 없이 해독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학술회의 힘을 빌리자니, 아서가 예전에 한 농담이 딱 들어맞았다.
프랑크 학술회에는 작가가 없어서 이름을 못 짓는다고 했던 그 농담 말이다. 지금에야 안 사실이지만, 허튼 소리를 좋아하는 아서치고는 꽤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술회에는 마땅한 언어학자가 없었다.
나보다야 잘 해내겠지만, 저들이라고 시간 내에 마땅한 답을 내놓을지 의문스러웠다. 물론 암호학 같은 전문적인 학문은 태동하지도 않았으니, 그런 도움은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의지해볼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둘째 형님일 것이다. 하지만 형님을 이런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한다면 최후의 수단일 것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한 소녀가 떠올랐다.
앨리스가 여기 있었다면 혹시 뭔가 단초를 제공해줬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언어 능력이 뛰어난 그녀니까, 남들보다 나은 결과를 내놨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일상에 녹아든 검은 머리 소녀를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는 건 내 계획이 아니다.
"한 가지."
나는 말했다.
"실은 거기에 한 가지 생각이 있네."
"그게 뭐죠?"
"만약에 이 암호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박사 외에도 있다면 어떨까."
이브는 식기를 내려놨다.
"지난 밤, 그리고 오늘 하루동안, 나는 박사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네. 그러다가 문득 박사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견뎠는지 궁금해졌지. 박사는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고, 또 그걸 은폐하려는 세력에게 감시받는다고 생각했네. 그런 상황에서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정보를 조금 더 잘 숨깁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그것도 방법의 하나지. 박사는 실제로 비밀 방을 만들고, 거기에 암호화한 문서를 숨겨놨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누군가에게 알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가 했던 여러 행동 중에 한 가지 튀는 것이 있더군. 달력 말이야. 왜 그렇게 박사는 시간을 아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슬슬 윤곽이 잡히지 않나?"
이브는 가방에서 수기를 다시 꺼냈다.
─────────────
"Nullius in verba."
나는 오스카 피츠헨리이다. 당신도 오스카 피츠헨리이다.
이 기록은 오롯이 오스카 피츠헨리를 위한 것이니, 결코 분실하거나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혹여 당신이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당신이 오스카 피츠헨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마라.
이걸 읽었다면, 바로 모든 문과 창문을 확인하라. 문은 현관에 하나, 창문은 응접실에 둘, 주방에 둘, 계단을 올라서 복도에 하나, 침실에 둘, 2층 복도에 하나, 화장실에 하나, 서재에 둘이 있다.
문의 잠금은 반드시 삼중으로 걸려 있어야 하고, 모든 창문에는 블라인드 커튼이 두 겹으로 겹쳐져서 바깥의 불빛은 한 점도 들어올 수 없어야 한다. 특히나 자연광이 아닌 모든 불빛을 피하라.
이미 누군가 침입했다면, 그런 징조가 있다면, 절대 내버려둬선 안 된다.
반드시 침입 경로를 다시 봉인하고, 누가 어디 숨었는지 발견해야 한다. 서재에 도끼가 있다. 이미 몇 명이나 침입한 이상, 더 늘어나선 안 된다.
실내에는 최소 다섯 명이 숨어있다.
그들은 내가 한눈을 판 사이에 가구 배열을 멋대로 바꿔놓고, 문의 잠금을 푼 채로 흙발로 드나들거나, 창문 커튼을 열고 외부와 신호를 주고받고, 멋대로 조명을 켜서 인공광에 노출시키곤 한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비축해도 며칠이면 그들이 전부 먹어치운다.
서재에는 도끼가 있다. 요긴히 사용하라. 이들이 날 주로 공격하는 방식은 소음 공해이다.
나는 밤낮을 불문하고 편히 자지 못하는데, 저들은 안팎에서 이상한 굉음을 울리며 내 수면을 방해한다. 그렇게 내가 지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금세 가구의 배치를 마구 바꿔놓는 것이다.
경찰은 저들의 한패다. 신고는 소용이 없다. 옆집 이웃도 마찬가지다.
벽면에 흰 얼룩이 매일 같이 커지고 있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했던 것이, 지금은 내 몸통보다도 크다. 옆집에서는 매일 고함을 지르며 벽을 두드린다. 경찰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서재 침입은 허락해선 안 된다.
나는 잘 지켜내고 있다. 서재에는 도끼가 있다. 끊임없이 회고하라. 나의 사명을 잊지 마라. 달력을 확인하라. 천체를 기준 삼을 수 없으니, 반드시 서재에 있는 시계를 확인해야 한다.
시계가 12시가 되면 달력에 표시하고, 달력에 표식이 둘 있으면 다음 날로 넘어가라. 시간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시계는 서재 말고 다른 곳으로 옮기면 안 된다. 누구도 서재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
Scientia Potentia eST
Ignorati beatitudine eST
Conscientia Periclitor eST
우리의 시조, 뉴턴의 격언을 떠올려라.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 지혜로운 자일수록 쉽게 속는다. 문자는 공간이고, 수열은 시간이다. 0과 10은 다르지 않고, 월은 모든 숫자를 합하되, 십의 자리만 버려라. 월과 일의 구분은, 일과 시간의 관계를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치에 맞게 사고하라.
ABCDEFGHIJKLMNOPQRSTUVWXYZ
─────────────
"문자는 공간이고, 수열은 시간이다."
나는 뜨다 만 스프를 다시 접시에 붓고, 괜히 그 위를 빙글빙글 저었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라도 한 것 같지. 그게 내 추측이네."
"하지만...."
이브는 말을 하다 말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좀처럼 생각이 정리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할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네. 이상하지. 모든 게 모순적이야. 어제 자네와 했던 말, 기억하나? 박사는 숨기려고 했는데, 어째서 일부러 이런 수기를 남겨서 단서를 늘렸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봤네. 현실적인 것부터,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것까지. 그리고 어떤 한 경우의 수가 모든 상황에 들어 맞는다는 걸 눈치챘지."
그렇게 말하고, 나는 수기의 두 번째 문단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박사는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해서 이 모든 기록을 남겼다. 완전히 잊어 버리기 전에, 혹은 잊어도 다시 기억해낼 수 있도록."
나는 오스카 피츠헨리이다. 당신도 오스카 피츠헨리이다.
그 문장은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원인은 불문하고 박사는 빠르게 기억을 잃고 있었던 거야. 심지어 자신의 이름마저 잊을 정도로."
"불가능합니다."
이브는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치매였다고요? 그 상황에 갑자기요? 말도 안 되잖아요!"
"우연이 아니라면."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 오스카 박사의 기억을 일부러 훼손했다고 한다면 어떨까."
"그거야말로 공상이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덜컥 덜컥.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던 홀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틈새 사이로 거센 돌풍이 불어닥치고, 그때마다 창문이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웨이터가 당황하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자네는 이미 깊게 관여했네."
"네?"
"몇 번이고 가라앉을 위기는 있었는데, 무작정 늪 속을 헤매다가 나한테 도착한 거야. 스스론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아주 운이 좋았어. 하지만 이제 단 한 걸음 남았네. 한 발만 내디디면 더는 돌이킬 수 없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경고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중에 하나라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곧장 런던을 떠나게. 아무것도 보고 듣지 않은 걸로 해두어도 좋아. 자네 아버지 일은 내가 마저 수습하겠네."
식탁 위의 가냘픈 촛불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벌벌 떨렸다. 스프를 담은 그릇에 수염 난 신사의 얼굴이 비친다. 내 모습이다. 그 위로 파리 한 마리가 올라왔다.
"그게 무슨 뜻이죠?"
"런던 뒷골목에는 사람의 거죽을 쓴 짐승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사람과 구별할 수 없는 외모를 가졌는데, 죽지도 않고 밤마다 사람을 덮쳐서 잡아먹는다. 템스 강과 하수도에는 어인이 살고 있다. 가정집에 이어진 수로에 귀를 기울이면 언제라도 그들이 첨벙거리며 걷는 소리가 들린다."
웨이터가 힘껏 창문을 닫았다. 좁아지는 창문 틈 사이로 마지막 바람 세차게 불어서, 힘겹게 버티던 촛불 빛이 꺼졌다. 타다 남은 심지에서 검은 연기가 흐릿하게 올라오다 사라졌다.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
갈피를 못 잡고 이브의 녹안이 흔들렸다.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다시 점화하겠습니다."
웨이터가 불을 옮기는 초를 가져와서 다시 촛불에 불을 붙였다. 다시 불 붙은 촛불은 조금 전보다 더 흐리게 보였다.
"사실인가요?"
"일부는 내 경험담이기도 하지."
나는 농담할 셈이었는데, 이브는 전혀 웃지 않았다.
"어제 자네는 추리 소설에 빗대었지. 실은 그건 별로 적당한 비유가 아니었네. 이건 한푼짜리 괴기 소설에 더 가깝거든. 박사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수수께기가 풀리는지 알면 놀랄 검세."
오스카 박사가 남긴 수기는 방식에 많은 영역을 할애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부터,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그리고 특정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로써 박사의 수기는 정체불명의 괴문서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지침서로 바뀌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노인이 박사의 모습에 대해 설명한 것 기억하나? 다리가 O자로 굽고, 말라서 꼭 괴물 같았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오 다리는 주로 비만의 증상인데 박사는 말랐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노인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야."
나는 바구니 안에 든 빵을 집어들었다.
"박사는 서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나가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또 누군가 집안에 살면서 음식을 훔쳐 먹는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지. 그 결과, 그가 내놓은 해답은, 한 번에 대량의 빵과 우유를 사들이는 거였네. 이건 헛된 망상이 아니었어. 그는 매번 음식이 조금씩 없어지는 걸 봤을 테니까."
"침입자의 흔적이 있었다고요?"
이브는 물었다.
"아니, 없었지. 적어도 나는 못 봤네. 하지만 박사가 느끼기론, 음식이 사라진 건 사실이지. 이런 방법으로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빵조각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녀는 내가 빵을 씹고, 목으로 넘기기까지 말 없이 기다렸다.
"없어졌지."
"네?"
"박사는 음식을 먹고, 자기가 먹었다는 사실을 까먹은 거야."
나는 말했다.
"식사 사실을 까먹는 건, 사실 치매 환자들에게 꽤 흔한 증상이네. 아마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먹고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줄어드는 음식을 보면서 스트레스가 쌓였을 테고, 그게 폭식으로 이어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박사는 음식을 사온 직후의 과체중과, 한참 동안 이어진 기아 상태의 저체중을 오갔을 테니, 두 증상이 한 몸에 나타나게 된 것이지."
이브는 놀란 듯이 입을 벌렸다.
"그러면 전부 착각이었다고요? 아버지가 느꼈던 침입자나... 감시자의 징조 같은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실제로 박사는 주변을 누군가 배회한다는 공포를 계속 느꼈을 거야. 그 증거도 집에 남아있었지."
그녀는 이번에도 내 말이 이어지길 끈기 있게 기다렸다.
"바리케이드 말이네. 그는 불안감 때문에 계속 바리케이드를 다시 쳤을 테고, 그때마다 못 자국이 늘어나는 통에 고정은 더욱 헐거워졌겠지. 그게 반복된 결과가 그 부실한 바리케이드라네. 핏자국이 유난히 많던 것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설명이 되지. 여러 명의 출혈이 아니라, 한 사람이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에 여러 차례 상처가 났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잖나."
박사의 손재주가 엉성한 것도 이렇게 하면 이해가 되었다. 그가 겪은 것이 치매와 유사한 증상이라면, 손재주가 무뎌지는 것 또한 흔한 증상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 말은 바리케이드를 아버지가 부쉈다는 건가요? 허버트 씨도 어제 가서 보셨잖아요. 파편은 안쪽으로 흩어져 있었다고요!"
이브는 무심코 언성을 높였다.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실은 파편이 그런 식으로 흩어지는 경우는 한 가지 더 있네. 밖에서 안으로 밀고 올 때 말고, 안에서 안쪽으로 잡아당길 때 말이야."
내 대답에 이브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박사가 느꼈던 감시 받는다는 감각은 진짜였을 거야. 실제로 그의 집 주변에는 몇 차례나 건장한 청년들이 모여 들었으니까. 그것도 경찰에게 걸리지 않는 형태의 집회로 말이야."
그녀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왕립 학회인가요?"
"아니, 아니야! 세상에, 자네는 상황을 너무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군그래.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려보게. 밤마다 들리는 소음을 참지 못한 청년들이 몇 번씩 찾아갔다고 했잖나. 그들이 바로 감시자였던 거야."
나는 말했다.
"하지만 기억이 흐릿한 박사에겐, 그들은 마치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처럼 보였겠지. 심지어 경찰마저 그들을 두둔하고 나섰으니, 박사는 경찰에 대한 불신이 쌓였을 테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박사 집 주변을 배회하는 것만으로 박사를 자연스럽게 고립시켰던 거지."
잠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네."
이브는 아버지가 겪은 불안을 헤아리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서 한 가지. 오스카 박사는 이변이 발생한 건, 이르면 작년 말부터 늦어도 올해 초 사이였네. 자네도 알다시피...."
"런던 대화재 전후 말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네는 런던 출신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그 사건이 있고 도시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네. 런던에 살던 나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최근에야 알 정도로 자연스러운 변화 말이야. 하지만 한 번 알고나서부턴 더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변화 말이네."
잔과 접시,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분주히 오갔다.
"지금 이 소리, 들리나?"
"네?"
"들어보게, 박사의 기억이 연초부터 사라지고 있었다면, 이 소리가 대체 얼마나 이상하게 들렸을지."
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부터 온갖 소음이 우리 주변을 찾아와 소란스럽게 장난쳤다. 떠드는 남녀의 웃음과 갈채, 그리고 무대에서 들리는 은은한 이중주곡.
그 사이에서도 유난한 소음이 하나 반복되었다.
───부우웅....
늦은 밤, 박사도 들었을 소리였다.
"주행음."
이브는 속삭였다.
하지만 박사는 이 소리에 대해 잘 모른다. 그에게는 언젠가부터 나타난 그치지 않는 이명이다. 공포에 젖은 박사는 그 소리 중 하나가 도심에서 자택 방면으로 다가오는 걸 눈치챈다.
"켄티시 타운은 야간에 차가 거의 다니지 않으니, 박사로서는 낯설었겠지. 그 불빛, 그 소음...."
박사는 조심스럽게 불빛이 비치는 커튼 너머를 본다.
도로에서부터 마차보다 빠른 무언가가 질주해온다.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형체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박사는 깜짝 놀라서 1층으로 뛰어내려간다.
"처음에는 창문으로 갔겠지. 그런데 여기서 뭔가 일이 터진거야."
주방 창문으로 도주하려는 박사는 자신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발견한다. 그는 맨손으로 나무 판자를 잡아당겨, 그 허술한 방벽을 부순다. 하지만 어떤 방해로 그는 창문을 통해 나가지 못했다.
"대신 박사는 정문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박사는 결국 정문을 나서 정신 없이 달린다. 도로에 뛰쳐들지만 않으면 차에 치일 일도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자신을 노린다고 믿어서 그대로 달리다가....
"그리고, 사고를 당한다."
불길한 이중주 음악이 흘렀다.
이브는 허벅지 위에 올려진 두 손을 주먹쥔 채,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보를 강하게 노려봤다.
"아버지...."
"하지만 기적적으로 자네는 경찰이나, 다른 주민이 발견하기 전에 박사의 수기를 회수했고, 나를 찾아왔다. 그 덕에 박사가 남긴 정보는 우리 손에 들어왔지. 이제 이걸 풀어낼 단서는 하나 뿐이네."
Scientia Potentia eST
Ignorati beatitudine eST
Conscientia Periclitor eST
나는 세 문장의 암호문을 바라봤다.
"오스카 박사의 협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