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14화 (114/232)

§114. 켄티시 타운 사건 (4)

"협력자 말입니까?"

"그래, 박사는 죽는 날까지 달력을 계속 확인했네. 그러니 적어도 약속 일자는 9월 23일 이후 아니겠나."

문제는 암호였다.

설령 이 암호를 풀어서 일자와 장소를 알아내도, 예정일이 지났다면 기회를 잃게 되었다.

"Scientia potentia est."

그것이 맞는 발음인지도 모르고, 나는 무작정 읽었다.

"또 라틴어군. 왜 다들 라틴어를 이렇게 좋아하지?"

"뜻은 아시나요?"

"est가 be에 대응한다는 건 알겠는데."

나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해두건대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라틴어가 유의미했던 건, 스무 해도 전에 치렀던 라틴어 수업 때가 마지막이었네. 그때는 성적도 꽤 괜찮게 거뒀어."

"아, 네."

"일단 나는 불어, 노어, 이탈리아어에 폴란드어도 조금 할 줄 알지만, 라틴어는 아니야. 죽은 언어 아닌가. 요즘은 논문을 쓸 때도 라틴어로는 안 써. 오직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머리 굳은 노인 몇몇과, 날 때부터 자기가 다른 종으로 태어난 줄 아는 학회 귀족들만 쓰는 언어 아닌가. 그거 알고 있나, 영국 밖에서는 논문에 라틴어를 쓰는 멍청한 관행도 없다는 거."

"아, 알았습니다! 제가 이 문장은 전에 알아봤습니다!"

이브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녀의 기행을 당황하여 쳐다봤다.

"Scientia는 지식, 앎을 의미해요. 그리고 potentia는 힘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곧, 아는 것이 힘이다."

"과연, 맥락은 알겠어. 그러면 Ignorati는 무지, beatitudine는 축복, 모르는 게 약이다. 그런 뜻이 되나?"

"정말 못 읽으시는 거 맞나요?"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사고가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지."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자네 아버지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괜찮습니다. 틀린 말도 아닌걸요."

그녀는 희미하게 쓴웃음 지었다.

"지식은 힘, 그야말로 아버지가 남길 법한 문구네요."

그리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문구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Conscientia는 의사意思, 그리고 Periclitor는 해악입니다."

"정리하면, 의사는 해악이다."

이브는 종이 한 장을 뜯어서, 펜으로 세 문장을 정자로 나열했다.

「지식은 힘이다.」

Scientia Potentia eST

「무지야말로 축복이다.」

Ignorati beatitudine eST

「의사意思는 해악이다.」

Conscientia Periclitor eST

세 문장은 공통으로 인식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 문장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남긴 경구로군."

"아, 그렇군요. 그것까진 몰랐습니다."

"다음 문장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시인이었을 거야. 분명해. 아주 유명한 시인이었는데...."

나는 대답을 요구하듯이 뜸 들였지만, 그녀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단은 넘어가지. 마지막 문구에 이르러선 전혀 짐작 가는 점이 없네."

"그걸 아는 게 중요할까요?"

"어쩌면. 하지만 모르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연관이 있다면 있고, 그렇지 않다면 않은 문장들이었다.

"이 대문자가 수상하네요."

이브는 말했다.

"그래, 그리고 est는 많은 문장에서 보통 생략하는 것 알고 있나? 우리가 아는 유명한 경구 중에도 생략된 것이 많지. 이번 경우에도 그럴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남겼다는 것은 그만의 이유가 있을 거야."

"아, 그렇군요."

그리고 침묵이 길게 흘렀다.

음식은 천천히 식어가고, 가뜩이나 떨어진 식욕은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나도, 이브도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말 없이 문장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문자는 공간, 수열은 시간...."

"혹시 아시겠어요?"

직전에 머리를 지나치게 쓴 것이 문제인지, 전혀 어떤 영감도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말없이 팔짱을 낀 채, 계속 문장을 노려다 봤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제는 문장의 의미조차 가물가물해졌다.

"허버트 씨?"

"뭐, 왜 그러나?"

"네? 아뇨, 떠오른 게 있으신가 해서."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르고서야 겨우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늦었는지, 오늘은 뭘 해도 떠오를 것 같지 않군그래."

"아, 네... 그러면?"

"내일까지 생각해 오기로 하지."

나는 그리 말하고, 준비해온 책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어제 이브 피츠헨리와 만나기로 한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그 책의 사본이었다. 이브는 그걸 받아들곤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이건...? 펼쳐봐도 됩니까?"

"그래, 지금부터 자네 거야."

이브는 책장을 넘겼다.

"명부네요."

그 말대로 여러 인물의 이름이 알파벳 순으로 담긴 명부였다. 그녀는 이름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다가, 여전히 잘 모르겠는지 내 눈치를 살폈다.

"더 읽어보게."

그녀는 내 말대로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O로 시작하는 이름이 나열된 페이지에 이르러서, 갑자기 손을 멈췄다.

"저, 이건 설마...."

"왕립 학회의 명부라네."

"제가 알기엔 반출이 안 되는 걸 텐데...."

"그래, 그래서 밀반출했지."

"네?"

이브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쩌면 우리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인물들이야. 전부 암기하고, 재량껏 파기하게."

"진짜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브를 마주 봤다.

그녀는 공허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진짜로요?"

.........

.....

...

..

.

그날 밤, 나는 꿈속에 있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았다.

검은 하늘에는 태양보다 커다란 목성과 토성이 정렬한 우주의 바깥, 하얀 서리가 수정처럼 솟아난 영하 -223도의 추운 별. 그 차가운 군청색 대지에서 구불거리는 오솔길을 마냥 따라 걸었다.

외진 길의 행선에는 또 하나의 둥근 천체가 떠 있었다. 그것은 걸을수록 높게 치솟아서 종국에는 하늘 일부를 가리고 있었다. 그것이 거대한 안테라를 담은 돔이란 사실은, 길 끝에 도착한 뒤에야 알았다.

아레시보 전파망원경, 그 비대한 아가리는 우주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었다.

부실하게 지탱된 돔 형태의 안테나 아래에서, 소녀는 해맑게 렌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앨리스."

소녀는 입김으로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교수님."

"4개월."

나는 말했다. 이런 추위에는 원하지 않아도 성대의 떨림을 의식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네."

"제가 죽었기 때문인가요?"

앨리스는 한 발로 뛰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자네는 죽지 않았어."

"그러면 저희 사이에 36억 3,520만 마일의 거리가 있기 때문인가요?"

나는 내 등 뒤를 유령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앨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앗."

앨리스는 허망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팔과 다리를 하나씩 무용수처럼 든 채로 멎었다. 그녀의 금발이 월면의 성조기처럼 살랑였다. 그녀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날 불렀다.

"어, 교수님...?"

"사실 나는 꿈을 믿지 않네. 내 꿈을 드나들 수 있는 불청객이 있다는 걸 안 이후론, 특히나 불신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나는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좀 아픈데요."

"앨리스, 정말 자네인가?"

내 질문에 소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소녀의 찬 콧김이 손등에 닿았다. 그녀는 그대로 내 손등으로 입술을 갖다 대곤, 그대로 손을 물어뜯었다.

"아악!"

"아프다고 했잖아요!"

앨리스는 성난 얼굴로 날 노려봤다.

"앨리스, 정말 자네였군... 정말 자네야...."

"애초에 저는 작별이란 얘기 한마디도 안 했거든요?"

이빨 자국이 선명한 손등을 어루만지며, 감격에 겨운 말을 하자 소녀는 태연히 이죽거렸다.

이 건방지고 직설적인 화법이야말로 그녀의 것이었다.

안테나를 가리고 있던 커다란 돔 천장이 열리고, 그 위로 전파망원경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별과 하이얀 은하수, 그리고 그 사이를 헤엄치는 금발을 등진 채, 소녀가 재차 살갑게 웃었다. 나도 고소했다.

"그간 평안하셨나요?"

"기특한 인사를 할 줄 알게 되었군. 나는 무탈하네. 고작 4개월이었거든."

우리는 다시 웃었다.

4개월이면 런던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이 벌어질 수 있는 시간인지 둘 다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서, 저는 잘 지내나요?"

"무슨 질문이 그러나?"

"제 말은... 진짜 저요."

나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 사고도 안 치고, 학교 지도를 만들겠다고 저녁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일도 없고, 도서실에서 흉흉한 기사를 파헤치지도 않고, 말장난 같은 수수께끼를 지어내지도 않으며, 내 수업 날마다 학장실에 찾아오는 일은 없네."

"제가 그랬다고요?"

"누굴 두고 한 얘기는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아, 그래도 친구를 몇 명 사귄 것 같더군."

"친구 말이죠...."

앨리스는 탐탁지 않은 듯한 얼굴로 중얼였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또래를 피했는지 모르는 나로선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 후 앨리스는 막 기억났다는 듯이 대뜸 물었다.

"저희 가족은요?"

"알다시피 나는 자네 아버지와 막 한 번 뵈었을 뿐이고, 소식을 주고받을 만큼 긴밀하지가 않아서."

내 대답에 앨리스는 "그렇죠, 그렇죠...." 하고 중얼거리며 실망했다.

나는 망원경을 향해서 손가락을 뻗었다.

"굳이 내게 물을 것 없이, 여차하면 자네의 그 망원경으로 보면 되지 않나?"

그러자 앨리스는 순간 애달픈 미소를 띠었다.

나는 그녀가 그토록 성숙한 감정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놀라웠다. 머나먼 별에서 완전히 정체되었을 줄 알았던 앨리스는 도리어 더욱 성숙해 있었다.

"이건 안 돼요."

그녀는 담담히 고했다.

"이건 지구까지 닿지 않거든요."

"그것참 유감이군."

생각해 보면 우스운 풍경이었다.

우리는 지구에서 수십만 킬로미터 떨어진 태양계 왜성에서,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망원경을 놓고 대화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물리 법칙을 따진다는 건, 마치 고약한 술자리 농담처럼 들렸다.

"곤란한 일이 있으시죠?"

앨리스는 갑작스레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손에."

그녀의 말대로 내 손에는 언젠가부터 공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확인하기 위해 또박또박 소리 내 읽었다.

"Nullius in verba."

오스카 박사의 수기였다.

"실은 어떤 암호를 발견했는데, 그 해석에 난항을 겪고 있네."

"보여주실래요?"

나는 그녀에게 공책을 건넸다.

내 기억에 남은 인상으론, 앨리스는 이런 상황에 좀 더 방방 뛰며 좋아라 할 것 같았는데, 그녀는 차분하게 공책 내용을 읽을 뿐이었다.

"일단 내 추측으론 누군가와 만나는 장소, 시간을 나타낸 암호 같지만."

"이건 라틴어인가요?"

앨리스는 미간에 주름을 접었다.

"그래, 첫 문장의 의미는...."

"잠깐만요, 하지 말아봐요."

그녀는 친절히 해석해주려는 날 가로막았다.

"보세요, 교수님.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 지혜로운 자일수록 쉽게 속는다."

"그래서?"

"모국어도 아닌 라틴어를 알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 접근하는 건 너무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요? 저는 좀 지혜롭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그랬다. 앨리스는 머리 돌아가는 거에 비해, 성적이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

「Scientia Potentia eST」

「Ignorati beatitudine eST」

「Conscientia Periclitor eST」

"우선 눈에 띄는 건 대문자네요."

앨리스는 말했다.

"보통 대문자는 문장의 맨 앞, 하다못해 단어의 맨 앞글자에 쓰는데, 여기서는 완전 중구난방이잖아요? 섬세한 수수께끼가 아니네요."

"자네의 봥소개구리 때처럼 말이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리스가 날 쏘아봤다.

"그리고 모든 문장 끝에는 eST가 들어가고, ST 부분만 대문자네요. 여기가 제 추측에 결정적인 부분이에요."

"실은 라틴어에서 est는 영어의 be와 치환되고, 또 이런 문장에서는 생략해도 되는데...."

"어휴, 좀 지혜로워지지 말자니까요!"

앨리스는 아예 손으로 내 입을 막으려고 들었다. 좀 어른스러워졌나 했더니 그녀는 여전히 충격적으로 무례했다.

"공간은 되게 쉽네요."

"그래?"

"문자는 공간, 그렇다면 약속 장소로 삼을 만한 장소 중에 ST를 약자 삼을 곳이 어디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골똘히 생각하다가, 미간을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역사* 말이군."

(*STation)

왜 진작에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단순한 결론이었다.

"시답잖은 말장난이었어."

"그야 수수께끼니까요."

앨리스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면 각각 SP, I, CP를 약자 삼는 역사가 있는지만 확인하면 되겠네요."

"찾아볼 것도 없어. 당장 생각해도 알겠네. SP는 세인트 판크라스 역(St Pancras station)일 테고, I는 일퍼드 역(Ilford station)일 거야. 그리고 마지막 CP는... 너무 뻔하지."

나는 말했다.

"수정궁 역(Crystal palace station)."

어쩌다 우연히 맞았다고 보기엔 모두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역사 건물이라면 약속장으로 삼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장소 아닌가.

"과연, 이제 알겠네. 오스카 박사는 협력자와 세 차례에 걸쳐서 접선했던 거야. 세 문장은 각각 접선했던 때와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고."

"남은 건, 수열은 시간 부분이네요. 이건 아마...."

우리는 서로 뜻이 통할 때 피어나곤 하는 서먹한 침묵을 겪었다.

"제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문제랑 똑같네요?"

앨리스는 쑥스럽다는 듯이 헤죽 웃었다.

수기의 끝에 적혔던 A부터 Z까지의 알파벳 나열은 암호문 일부가 아니었다. 그저 해석할 때 이해하기 쉽도록, 알파벳 순서를 나열해 놨을 뿐이었다.

각 알파벳 대문자 수열을 정리하면 이런 식이 되었다.

SPST는 19 16 19 20.

IST는 9 19 20.

CPST는 3 16 19 20.

"쉽게 생각한다면 월, 일, 시, 분 순이겠지만."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두 번째 문장이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면 두 번째 문장이 성립을 안 하잖아요."

"나도 알아! 생각을 정리하려고 말한 것뿐이야!"

마침 생각하던 것을 앨리스가 지적하자, 나는 무심코 언성을 높였다.

"월은 모든 숫자를 합하고, 십의 자리를 버려라. 그렇다면 74, 48, 58이 되는군."

하지만 이러면 전에 했던 추측이 틀리게 되었다.

지금은 9월 말이니, 최후의 접선이 8월이라면 마지막 접선은 한참 지난 일이 되었다. 그러니, 오스카가 더 달력을 확인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 생각에는 월과 일을 구분해야 할 것 같아요. 여기도 그렇게 쓰여 있고요."

"일을 구분한다?"

"어떤 수열은 일자를 나타낼 테고, 그만큼은 빼야 하는 거죠."

나는 다시 수열을 읽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한 곳이었다.

"19와 20. 역시 이게 핵심이겠죠? 일단 유일하게 규칙성이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규칙성?"

"유일하게 이어지잖아요."

앨리스의 설명에, 나는 불현듯 떠오른 영감에 고개를 치들었다.

"과연, 알겠네. 월과 일의 구분을 알려면, 일과 시간의 관계를 보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풀어서 말하면, 일자가 곧 시간을 나타낸다는 거지."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연속되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19와 20의 사이,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자정 말이야!"

말하고 나니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역처럼 사람 많은 장소에서 접선한다고 하니, 이런 인적 드문 시간인 것이 당연했다. 말 그대로 이치에 맞는 사고인 셈이었다.

"그러면 남은 숫자가 월이 되겠지. 월의 숫자를 전부 더하면... 35, 9, 10. 십의 자리를 버린다면 5, 9, 0인가?"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5월 20일과 9월 20일까지는 말이 되었는데, 0이란 숫자는 월에 넣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자 앨리스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그런데 이치에 맞게 사고하란 건 꼭 변명 같죠?"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융통성 있게 생각해 달라고, 그렇게 변명하는 것 같잖아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내 추측대로라면, 오스카는 모종의 이유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건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암호였으니, 그 자신이 할 법한 생각을 유도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9 다음에 오는 0. 그걸 월이라고 한다면...."

나는 말했다.

"10월 20일 자정, 수정궁 역."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솟아났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거대한 건축물이 우주를 가리고 들어서고 있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궁전에서 이름 모를 인물들의 동상이 거닐고, 화려한 만국기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만국박람회였다. 그 주역은 말할 것도 없이 저 찬란한 수정궁이었다.

나는 작별을 말할 새도 없이 잠에서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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