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17화 (117/232)

§117. 수정궁 살인 사건 (3)

모두가 충격에 빠진 와중에 가장 먼저 행동한 것은 알타몬트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뚜렷한 의지를 가지고 계단 쪽으로 질주했다. 물론 그가 벙어리이니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고도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움직이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그 뒤를 쫓았다.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건, 알타몬트가 아닌 해리스였다. 내가 2층에 올랐을 무렵, 그는 이미 진작에 중앙의 미국관 앞에 멈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비록 어두워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처럼 체구가 크니까 확연히 구분되었다. 알타몬트는 그 직후 도착해서 힘껏 숨을 골랐다.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제일 늦은 것은 나였다.

"시체는?"

숨을 고르던 브로케디스가 독백조로 물었다.

"아까 봤던 시체가 어디 갔지?"

시종 과묵할 줄만 알았던 그가 내뱉은 한 마디는 적절히 모든 이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의 물음대로였다.

시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가 1층에서 봤던 진의 실루엣과 흉기, 그리고 여기서 살인이 벌어진 이상 남아 있어야 하는 핏자국마저 신기루처럼 증발해 있었다. 이 영문 모를 사건에 저메인 여사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애타게 호소했다.

"저, 저는 봤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도 봤잖아요, 그쵸?"

실은 그녀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할 필요는 없었다.

중앙 광장에 있었던 우리 모두가 2층 난간에 있는 시체를 봤었다. 그건 개인의 착란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공통된 경험이었던 것이다.

"집단 환각?"

누군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코트를 입은 남성이 서 있었다. 심지어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그가 남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 여기 보십쇼!"

전시관 안쪽을 살피던 가이드가 허둥대며 외쳤다. 우리는 그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가이드는 아까 봤던  창이 걸렸던 진열장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창이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말대로였다.

아까 우리가 봤던 그 기묘한 모양새의 태평양 제도 유물이 모습을 감췄다.

"자네 소견은 어떤가?"

"뭐 말입니까?"

"아까 봤던 시체가 헛것이 아니라면, 분명 길쭉한 뭔가가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창이 흉기였다고 생각하나?"

브로케디스의 물음에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군요."

아까 검은 창에 베인 손가락이 다시금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단서가 없나 찾아 헤매던 나는 바닥에 부스러기가 마구 흩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도 있었는지는 기억나질 않았다.

나는 이브를 손짓으로 부르고, 바닥을 가리켰다.

"저것 좀 주워주겠나?"

"네? 먼지요?"

"아니, 저 파편인지 부스러기인지 말이야."

내가 이렇게 그녀에게 부탁하는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내 왼 다리 말이다. 의족으로는 앉고 일어나는 게 도통 불편하다 보니,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기도 어려웠다.

다행히 이브는 내 사정을 이해해 줬는지, 아무 불만 없는 얼굴로 그걸 주워서 내 손바닥에 올려줬다.

"이게 뭐지?"

"창대에 쓰인 나무 부스러기 아닌가요?"

"나무? 이게 나무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그리 보였다.

내가 바로 이게 나무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 건, 이것이 내가 아는 어떤 나무 품종과도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국에서 흔히 쓰는 것은 아니고, 태평양 어느 섬에서 자라는 낯선 품종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 뒤쪽에서는 유난히 소란스러운 대화가 들렸다.

"애초에 여기 있던 게 맞기는 하나?"

"그렇다니까요!"

브로케디스 부부는 서로 말싸움하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참견했다.

"조금 전까지 진은 여기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흔적이 없잖나."

브로케디스 씨는 바로 따지고 들었다.

"아니면 시체가 제 발로 걸어서 가기라도 했단 거야?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는 하기도 싫네. 차라리 우리 모두가 헛것을 보는 편이 과학적이지."

"저도 시체의 행방에는 할 말이 없지만, 그녀의 자취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요."

나는 슬쩍 이브를 돌아봤다.

갑자기 주목받은 이브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날 마주봤다. 내가 어떤 흉내를 내서 힌트를 주자, 그제야 그녀는 유레카를 외칠 기세로 번쩍 몸을 들썩였다.

"냄새예요!"

"뭐?"

"그 여학생의 몸에서 나던 냄새요! 맞아요, 저번 사건과 똑같아요!"

브로케디스 부부는 동시에 코를 들썩였다.

"정확히는, 체취가 아니라 향수내입니다. 조금만 발견이 늦었어도 사라졌을 단서죠. 하지만 범인의 계획과 달리 완벽한 은닉엔 실패했습니다. 우리 여사께서... 대단한 발견을 하신 덕택에 말입니다."

여전히 저메인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진... 그러니까 피해자의 분투도 있었을 겁니다. 그녀는 아마 우리에게 상황을 알리고자, 필사적으로 난간까지 다가왔을 겁니다."

나는 애써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

어떤 방식에서인가 진을 2층 전시관 쪽에 끌어들인 범인은 준비한 창으로 진의 복부를 찌른다. 그 과정에 폐를 다친 진은 소리를 지를 수 없게 되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소리 질러서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은 즉사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범인은 진을 완전히 놓아주고 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난간 쪽까지 다가와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저메인 여사는 극적으로 진을 발견한다.

아주 절묘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는 더 있었다.

"하지만 시체는?"

브로케디스가 물었다.

"여기서 사건이 벌어졌고, 우리가 본 게 진짜 시체라면 대관절 그건 지금 어딨단 말인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우리는 1층에서 시체를 발견하자마자 여기로 달려왔습니다. 고작 몇 분이었을 텐데, 범인은 그 사이에 모든 흔적을 지우고, 또 시체를 짊어진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이 됩니다. 초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죠. 우리가 모르는 어떤 수단이 있을 겁니다."

그러는 한편, 이상하게도 나는 진이 죽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느낌이 그랬다.

복부에 찔린 창을 보고도, 범인이 그녀를 어디에 가둬놨을 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상처가 얕았다면 지금처럼 핏자국이 없는 것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던가.

나는 그런 생각을 털어냈다.

아는 사람인 탓에, 지나치게 감정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일 록 냉정히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녀는 죽었고, 살인범은 아직 수정궁 안에 있는 게 분명했다.

살인범? 살인범!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지? 당연히 이 사건의 배후에는 범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까 보았던 쪽지 내용을 곱씹었다.

「우리 중에 살인범이 있음」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적절한 문구였다.

정말로 우리 9명 중에 진을 죽인 범인이 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범행이 일어나기도 전에 알타몬트는 어떤 수단으로 그걸 알아내서 해리스에게 전했을까. 그 자신이 범인이 아니고서야!

나는 저 멀리 있는 알타몬트를 쳐다봤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해리스 옆에 착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보다는 해리스가 걱정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호흡이 어찌나 빠른지 멀리서도 가슴이 들썩이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우선 경찰에 신고합시다."

구석에 앉아 있던 가이드가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가뜩이나 주름진 얼굴이 잠깐 새에 곱절은 더 삭아 있었다. 여기 남아서 마땅히 더 할 일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로리가 죽었을 리가 없다고!"

해리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의 얌전한 성정을 아는 나조차 깜짝 놀랐으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퍽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 순간이었다.

────철컥.

이브가 난간 쪽으로 불안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내가 묻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바람 소리를 읽는 동물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아래쪽, 1층의 중앙 광장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못 들으셨어요?"

"뭐?"

이브가 고개를 돌려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소리 말입니다. 지금 철컥, 하고."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가 내게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확인해 봐야겠어."

"잠깐, 어디 가십니까?"

내가 바로 계단 쪽으로 향하자, 우릴 보며 가이드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래서 무슨 소리가 났답니다. 그게 뭐였는지 지금부터 확인할 겁니다."

"소리요? 무슨 소리? 다들 여깄잖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확인하러 가는 것 아닙니까."

나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저도 갈게요."

"저 아래 범인이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괴물 아가리로 뛰어드는 것도 아닌데, 굳이 오겠다는 사람을 말릴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단독 행동은 안 좋아. 어차피 나가서 신고하려면 문을 지나야 하지 않나. 다들 여기서 평생 죽치고 있을 텐가?"

적절한 순간에 브로케디스가 옹호하며 뒤따랐다.

그러자 어물쩍거리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계단 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코트를 입은 남성은 조금 더 거기 있었지만, 결국엔 체구에 맞지 않는 날렵한 모습으로 합류했다.

이동하면서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꼭 송장을 옮기는 장의 행렬 같은 엄숙함이 모두에게 감돌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게 정말로 장의 행렬이 아니란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시체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다시 1층 광장에 도착한 우리는 문쪽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소리가 났단 말이지?"

"네, 뭔가 철컥하고."

브로케디스는 살짝 불안한 눈치였지만, 결국 문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그러나 문에서는 덜컥하는 소리만 날 뿐,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이 문이 원래 무겁나?"

"아니요, 남성 혼자서 열 수 있을 텐데."

가이드는 당황하며 함께 문을 잡았다. 당기거나 밀치거나 해보는 듯했지만, 흔들림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나마도 일정 간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흘깃 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 가지 불길한 상상과, 그게 맞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노인은 비통한 얼굴을 하고 뒤돌아섰다.

"잠겼습니다."

그 한 마디에 저메인은 실신할 기세로 옆으로 쓰러졌다. 천만다행으로 옆에 선 이브가 재빨리 부축해서 또 다른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브로케디스는 눈앞의 평범한 철문이 그가 아는 어떤 수수께끼보다 불가사의하다는 듯이 의구심에 찬 눈으로 문짝을 바라봤다.

"우린 모두 이 안에 있었잖나. 아니,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 않나! 대체 누가 이 문을 잠글 수 있겠어?"

"비켜보시죠."

나는 기세 좋게 앞으로 성큼 걸었다. 그래서인지 브로케디스는 영문도 모른 채 옆으로 크게 물러났다.

"조금 더."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서, 열쇠 구멍에 대고 두 발 쐈다.

────탕! 탕!

날카로운 총성에 놀란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화약내가 비릿하게 풍기는 잠금장치에서 철 파편을 과일 껍질 벗기듯이 치웠다. 장갑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어났다.

"잘 안 됐습니까?"

겁 먹은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금은 풀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막힌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었다. 예상대로 뭔가가 문고리에 걸려서 철컹였다.

"문은 밖에서 잠겼습니다. 아마 막대나 철봉 같은 걸로 빗장을 친 거겠죠."

"범인이 밖에 있다고요?"

이브의 품에 부축받고 있던 저메인이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덩달아 이브마저 놀라서 두 사람이 바보처럼 비틀거렸다.

"범인, 혹은 최소한 그의 협력자가 밖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릴 가둘 필요가 뭐가 있지?"

브로케디스가 물었다.

"신고를 늦출 수 있겠죠. 범인이 숨겨둔 시체를 유기하고, 현장에서 의심받지 않을 만큼 벗어날 시간 말이요.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게 왜 긍정적이지?"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되물었다.

"적어도 여기엔 범인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최악의 경우, 범인은 여전히 이 안에 있고, 그의 협력자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누구든 탈출하는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서요."

문밖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는지, 사람들은 괜히 한두 걸음 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왜?"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이게 하루이틀 안에 급조한 범죄 계획은 아닐 거란 겁니다. 범인은 2층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피해자의 시체를 마법처럼 사라지게 한 뒤에, 자신마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라졌으니까요."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여전히 과호흡에 시달리는 해리스를 돌아봤다.

"자네. 여기서부터 저기 2층 중앙까지 달려가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저, 저 말입니까?"

"그래, 아까도 자네가 가장 먼저 도착했으니까, 자네 기준을 맞춰야겠지."

해리스는 숨을 고르면서 눈으로 한참 복도를 바라봤다.

"여기부터 저 끝까지 얼추 코트 둘... 그러니까 200야드보다 조금 커 보입니다."

"100야드 기록이 어떻게 되지?"

"재본 적은 없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13초, 아니, 14초 정도 될 겁니다, 교수님."

"준수하군. 그러면 자네가 저기까지 전력 질주하고, 또 2층 계단을 올라서, 다시 2층 중앙까지 간다고 하면 얼추 1분 남짓 걸린다고 이해해도 되겠나?"

"왜 그렇게 되죠? 계단을 오르는 데 30초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는 무엇이 억울한지 항의했다. 나는 혀를 차며 답했다.

"처음 100야드보단 다음 100야드가 느릴 것 아니야."

내 지적에 해리스는 기가 죽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범인은 1분 안에, 그리고 어둡다곤 해도 실루엣쯤은 보일 테니, 적어도 그보다는 빠르게 모든 범행과 은닉을 완수하고 모습을 감춘 거네. 어딘가에 장치 같은 것을 숨겨 놓은 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되질 않아."

"범인은 전부터 우리가 여기 올 줄 알았다는 건가? 하지만 대체 왜?"

그토록 과묵했던 브로케디스는 자신이 계속 영양가 없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이, 다시 한 번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걸 알아내야겠죠."

사실 한 가지 짐작 가는 점은 있었다. 그건 조금 전에 떠오른 불길한 착상이었다.

만약에 진이 범인의 표적이 아니었다면?

"몸이 안 좋으신가요?"

"피츠헨리, 자네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보게."

걱정하며 다가오는 이브를 보며, 나는 갑자기 말했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지금 상상할게요. 됐습니다."

이브는 유난을 떨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10월 20일 자정의 수정궁. 여기에 반드시 죽여야 하는 사람이 있는 걸 알게 되었네. 그는 얼마 전에 제거한 오스카 박사의 은밀한 협력자, 왕립 학회에 해가 될 정보를 가진 인물이지."

"범인이 왕립 학회라고요?"

이야기를 듣던 이브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가정이니 계속 들어보게. 하지만 자네는 누가 박사의 협력자인지 몰라. 당일이 되고 보니, 건물 안에는 1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였네. 그런 상황에서 표적이 누군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면, 자네는 어떻게 그를 선별하고 죽일 텐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요... 선별할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딱 그 사람만...."

거기까지 말하던 이브는 뭔가 깨달았는지 눈을 번쩍 떴다.

"설마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

그녀는 말을 마치지 않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죽인다...? 세상에."

"아침이 되면 관리인이 올 겁니다!"

갑자기 가이드가 큰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일과니까 틀림없어요."

"그렇다고 밤새 여기 있자는 말인가?"

브로케디스 씨가 따지듯이 물었다. 오히려 저메인 여사는 아무 말도 없이 분수대 쪽에 앉아서 침울한 얼굴로 바닥을 보고 있었다.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안이나 밖에 살인마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나."

불쌍한 노인은 브로케디스의 기세에 밀려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벽을 부술 수는 없겠나?"

"뭐요?"

"아니, 내 말은, 유리잖나. 문쪽에 누군가 있다면, 뒤쪽 벽을 부수고 탈출하면 되지 않나?"

맹점을 찌른 한 마디였다.

가이드는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천벌 받을 짓이요!"

"사람이 먼저 살아야지!"

"제가 해보겠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던 해리스가 입을 열었다.

"총알은 아끼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래, 자네가 힘이 제일 좋으니, 자네가 하게."

내가 솔선해서 말하자, 이브는 뭔가 불편한 기색으로 내 주변을 정신없이 왔다갔다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런 짓 좀 관두게."

그러자 그녀는 풀이 죽어서 고개를 늘어트렸다.

우리는 문에서 떨어진 어느 벽면에 다가갔다.

옆에 있는 빈 전시관에는 오스만 제국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죠?"

"그래."

해리스는 청소 용구함을 들어서, 그대로 유리창에 내려쳤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구함은 그대로 튕겨 나왔고, 유리에는 작은 금이 갔을 뿐, 깨졌다고 보기에는 턱없었다. 해리스는 쥐라도 났는지, 아니면 손이 저린 지 가슴 쪽을 부여잡고 아파했다.

우리 중에 가장 힘이 좋은 해리스가 이렇게 전력투구하고도 이 정도라면 깨는 동안 나는 소리로 나가려는 시도가 들키고도 남았다.

깨질 지 확실하지도 않은 벽에 총알을 낭비하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제발! 우리 그만 합시다!"

가이드가 소리 질렀다. 그는 자신이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안 된다는 것은 알았잖습니까? 대체 이게 어떤 건물인지 아십니까? 불쌍한 저를 봐서라도 그만해 주세요,제발 그만 합시다, 제발...."

"하, 하지만, 안전하질 않잖아...."

간절한 노인의 애원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브로케디스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아니요, 적어도 여기 있는 동안, 그가 됐건, 저들이 됐건, 함부로 손 쓰지는 못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저메인 여사는 더 묻지 않았다.

내 손에 들린 권총은 무슨 질문에든 대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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