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18화 (118/232)

§118. 수정궁 살인 사건 (4)

수정궁 미국관.

여덟 명은 각자 떨어져 앉아서 시들어갔다. 옆사람만 간신히 들을 만한 대화소리가 여기저기서 산발했지만, 차마 웅성거린다고 하기에도 부족한 기운 없는 속삭임이었다.

벽을 부수는 데 실패한 후에 문으로 돌아가는 건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너머에서 살인범이나 그의 공범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모두 불안해했다. 차라리 현장으로 돌아와서 단서를 찾자는 의견이 모였지만, 한참을 찾아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아서인지 모두 기운을 잃었다.

가이드는 살인 사건보다 아까 유리벽에 금이 갔던 것에 더 충격받은 눈치였다. 수정궁을 소개할 때의 열성은 아예 보이지 않고, 지금은 어깨도 더 움츠러 들어서 난쟁이처럼 왜소했다.

부부 역시 조용했다. 저메인 여사는 시체 발견 이후로 쭈욱 상태가 안 좋았다. 적극적으로 나서던 브로케디스 씨는 그런 부인의 컨디션을 늦게 발견한 게 미안한 듯,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하는 데 바빠서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코트를 입은 남성은 조금 달랐는데, 그자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 정신 없이 싸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몇 번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는 척을 하지 않아서 관두고 말았다.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그를 범인으로 점쳐둔 사람도 더러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행동거지는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심지어 범인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점이 많았다. 그가 살인범이라면 그거야말로 놀랄 일이었다.

그래도 가장 상태가 안 좋은 것은 역시 해리스였다.

연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속내를 모를 알타몬트가 가만히 앉아서 따라다녔다. 한 번 알리바이를 묻기도 했지만, 해리스가 그와 계속 같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이브가 앉아 있는 벽에 다가가서 앉았다.

"꼭 추리 소설 같지 않습니까?"

이브는 날 보며 물었다.

"뭐?"

"밀실 공간, 살인 사건, 그리고 사라진 시체."

나는 이 지경에서도 소설 타령을 하는 그녀의 담력에 기가 막혔다. 그래도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은 있었다.

"자네 말이 맞아. 방법치고는 손이 너무 많이 가지."

"네?"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나?"

"아뇨, 그러니까, 제 말은, 소설 같아서...."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소설과 지금 상황을 빗댔을 뿐이었다.

"아까 자네도 말했잖나?"

나는 노골적으로 힌트를 쥐여줬지만, 이브는 도리어 미궁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범인의 목적 말이야."

"아, 네, 우릴 다 죽이는 것 말이죠."

"숙녀라면 좀 더 단어를 고르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이브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은근히 눈치를 줬다. 하지만 그녀는 알아듣기나 했는지, 영 반응이 없었다.

"여하튼, 계속 말하자면, 왜 추리 소설 같을 필요가 있지?"

"범행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닐까요?"

"왜 숨길 필요가 있지?"

"그야... 살인이니까요."

내 물음에 이브는 뻔한 대답을 돌려줬다.

"그러면 다시 묻겠네. 자네가 만약 여기 있는 10명을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박물관에 비치된 창으로 찔러 죽이고, 미리 준비한 수수께끼의 장치로 시체를 은닉하는 것이 쉽겠나? 아니면 준비해온 총으로 모두 쏘는 게 쉽겠나?"

이브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범인의 목표는 모두 죽이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아니, 제발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러면 범인의 정체가 왕립 학회가 아니란 말인가요?"

내 호소가 보람이 없게, 그녀는 일차원적인 추리를 고집했다.

"어쩌면."

그녀와 얘기하고 있으면, 나까지 생각이 짧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번 사건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시체를 없앤 트릭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와 얽힌 모든 일화 중에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상황에 끌려다니고 있을 뿐이라는 불쾌감이 짙게 느껴졌다.

실은 이브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한 가지 가설은 있었다.

"의외로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네?"

"살인이 범죄니까 숨기려 했다는 것 말이네."

나는 음지의 단체 중 하나의 저력을 봤다.

노란 외벽 회사, 그들이 꿈의 세계에서 보여준 전력은 군대 못지 않았다. 퇴역 군인 위주로 구성된 소방대는 군대처럼 행동했고, 런던 인근에는 그들이 준비한 전쟁 물자만 수도 없이 많았다.

반면에 왕립 학회는 방법이 뭐라고 해야할지... 오스카 박사 때부터 느꼈지만, 조잡하지 않은가?

박사가 학회에 해가 된다는 걸 알고도 직접 손을 쓰는 대신, 그가 죽음에 이르도록 1년 가까이 압박할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박사는 외부에 협력자를 만들고, 그를 통해 두 차례나 정보를 반출해냈다.

입막음으로는 최악이었다.

거기서 피어난 가설은 이러했다.

의외로 왕립 학회는 형편 없지 않은가?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고성에 반쯤 감긴 눈이 뜨였다.

"이거 놔!"

무슨 소리인가 하고 보니, 코트를 입은 남성이 내는 고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카프와 모자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었다. 그 맞은 편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옷을 벗겨내려 하는 건 알타몬트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나는 이브의 부축을 받아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옷을 벗기려고...!"

"그깟 옷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나."

브로케디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지경까지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게 더 수상해."

"사정이 있어서...."

남자는 처음으로 내리깔지 않은 목소리를 내었는데, 나는 왠지 그게 낯익었다.

"잠깐, 설마...."

나는 둘 사이로 뛰어 들어서, 알타몬트를 도와서 남자의 스카프를 붙잡았다.

"뭐, 뭐하는 겁니까!"

"이브, 자네도 도와!"

의외로 손힘이 억센 사내였다. 두 명이 붙어도 벗겨지지 않은 스카프는 결국 이브까지 달라 붙어서야 벗겨졌다. 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내가 잘 아는 것이었다.

"자네,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건가!"

살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인가?"

"알다마다! 이 자식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는 올해 초 옥스퍼드로 향하는 열차에서 만났던 보편사무국의 요원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

"자, 잠깐만요! 때리지 마세요!"

내가 멱살을 잡고 끌어올리자, 그는 버둥대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솔직히 말할게요! 당신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그 대학생을 죽인 건 제가 아니예요!"

"내 뒤를 쫓고 있었다고?"

"네, 네!"

그는 거의 울먹이며 대답했다.

"아시잖아요, 제가 사람 죽일 만큼 담력은 없다는 거!"

────쿠웅!

그와 동시였다. 1층 중앙 광장에서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렸다.

모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서로를 확인했다. 분명히 뭔가 쓰러지거나, 혹은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남자의 멱살을 천천히 놓고, 한 가지 위화감을 깨닫고 물었다.

"해리스는 어딨지?"

그제야 그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난간 쪽을 향해서 급하게 절뚝이며 달려갔다.

"꺄아악!"

저메인 여사의 세찬 비명이 들렸다. 브로케디스는 그녀를 부축하며 읊조렸다.

"신이시여...."

1층 중앙, 쓰러진 여왕 동상 옆에는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 실루엣은 어떻게 보아도 착각할 수 없는 것으로, 그만한 체구를 가진 사람은 꽤 드물었다.

스탬포드 해리스, 그였다.

"서둘러, 1층으로!"

내 외침에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허겁지겁 1층 쪽으로 향했다.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 있을 만한 높이였다.

"자네!"

"네!"

사무국의 요원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뭐하는 거야! 빨리 내려가!"

"아, 알겠습니다!"

그는 허겁지겁 스카프를 챙겨서 주머니에 쑤셔넣고 계단 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가 내려간 걸 확인하고서, 나는 이브의 부축을 받으며 서둘러 뒤쫓았다.

잠시 후, 나와 이브가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 외에는 이미 다들 도착해 있었다.

멀리서도 나는 뭔가 상황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쓰러진 여왕 동상 옆에서 손을 놓고,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해리스는? 그는 무사한가?"

나는 대답을 뻔히 아는 질문을 던졌다.

돌아오는 대답 역시 뻔한 것이었다.

"없어졌습니다."

남자는 겁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체가 또 없어졌습니다."

.........

.....

...

..

.

해리스가 있던 바닥은 살짝 젖어 있었다.

"적어도 그가 여기 떨어졌던 건 분명하군."

이번에도 핏자국은 없었다.

"물로 닦은 걸까?"

"우리 중에 살인범이 있어."

브로케디스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서로 의심하는 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그러면 해리스 군이 스스로 뛰어내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우리 중에 있는 누가 밀친 거야! 분명해! 자넨가?"

그는 가이드를 향해 달려들 기세로 물었다. 그를 멈춘 것은 사무국 요원이었다.

"그, 그렇게 말하면, 당신이 가장 가능성 높지 않습니까?"

남자는 통통한 볼살이 흔들릴 정도로 벌벌 떨며 말했다.

"뭐?"

"저하고 이 학생, 그리고 저 사람은 모두 보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밀 틈이 없었잖습니까."

그는 나와 알타몬트를 번갈아 가리켰다.

"해리스 군은 체격이 좋은 대학생이었으니까, 힘 없는 여성과 노인은 제외하고, 그러면 밀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 어떻게 날 보고 사람을 죽였다고...."

브로케디스는 굉장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요원은 겁 먹어서 벌벌 떨었다. 나는 이 아이러니한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조금 전까지 행복해 보이던 젊은 연인이 몇 시간만에 죽은 사람이 되었다. 간만에 찾아온 더할 나위 없는 무력감에 그저 잠들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두 사람이 고성을 지르는 와중에, 그 옆에 바닥은 밖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불빛을 받아서 반짝였다. 그 아름다운 빛무리가 지금 상황의 아이러니를 더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버트 씨?"

그리고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낮게 웃었다. 그런 날 보며 이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니, 괜찮아. 그런데, 잠깐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나는 그 자리를 조용히 벗어났다.

날 지켜보고 있던 알타몬트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다가, 그대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십수 미터 간격을 두고 함께 산책했다.

만국의 국기가 펄럭였다. 나는 그제야 이 장소를 처음으로 관광할 기분이 들었다.

프랑스 전시관, 분명 굉장히 화려했겠지. 영국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들의 음습한 습성을 고려하면, 큰 예산을 들여서 볼거리를 갖췄을 게 분명했다.

덴마크 전시관, 덴마크는 뭐가 유명하더라? 생선? 물론 그랬을 리는 없지만, 생선을 전시해 놨더라면 꽤 볼만했을 거다. 악취 때문에 관광객들이 코를 부여잡았겠지.

인도 전시관, 알타몬트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내가 거기 도착했을 무렵, 그는 이미 청소 용구함 하나를 의자처럼 깔고 앉아서 내게 들어오란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권총을 겨눴다.

"자넨 누구지?"

"보다시피 범인이요."

알타몬트는 대답했다.

"말할 줄 알았군."

"이제 와서 새삼 당연한 얘기는 하지 맙시다."

권총을 앞에 두고도 멀쩡하던 알타몬트가 갑자기 질색했다.

"당연하다고?"

"아직 눈치 못 챘습니까? 교수님은 제 생각보다 둔하시군요. 이게 얼마나 당연한 사실인지는 이따 차근차근 설명하도록 하죠. 뭐든지 순서대로 차근차근 말할 필요가 있죠. 우선 첫 질문부터 대답합시다."

그는 벙어리이긴커녕, 심지어 유창하기까지 했다.

입 다물고 있을 때는 꽤나 신중한 인상이었는데, 말투는 사람 성질을 긁는 경박한 말투였다. 그리고 나는 이런 말투와 목소리를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왜 내가 벙어리 신세를 자처했는가."

"아니, 그건 말 안 해도 알겠네."

나는 말했다.

"자네는 날 알아봤을 거야. 그래서 내 앞에서 말하지 않으려고 벙어리라는 거짓말을 즉조한 걸테고. 내 말이 틀렸나?"

"이건 너무 쉬웠죠? 맞아요, 교수님은 제 얼굴을 본 적이 없죠. 그러니 모습을 보이는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안 됐습니다. 하지만 제 목소리는 별개의 문제란 말이죠."

그의 말대로, 나는 그의 목소리를 알면서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자네였어. 자네가 수화기 너머의 진짜 의장, 토끼풀십자회의 뉴먼 의장이었던 거야!"

뉴먼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멋스럽게 허리 굽혀 절했다. 꼭 무대에 처음 서본 오페라 신인 배우 같이 풋풋하고 어색한 동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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