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22화 (122/232)

§122. 괴물 저택 (2)

내가 살던 브리스톨에는 오래된 목조 건물이 많았다.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에 삭은 부재를 갈아 끼우는 일쯤이야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도시에서도 이처럼 심각한 상태는 본 적이 없었다.

밖에서 봤을 때도 이 저택의 연식이 꽤 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실내 정경은 그 이상이었다.

마루 바닥은 곳곳이 썩어서 매 걸음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부분도 걸을 때마다 아래로 움푹 꺼지는 탓에 실내인데도 꼭 부엽토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발을 떼어놓으면 끼익거리는 소음이 나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좋게 생각하면 도둑이 들었을 때 모를 리 없다는 것이고, 나쁘게 생각하면 도둑도 들어오지 않을 집이었다.

벽지는 완전히 썩어서 아마 곰팡이 번식장이 되어 있는 듯했다.

어찌나 뻔뻔하게 번져 있는지, 처음에는 그게 불규칙한 벽지 무늬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곰팡내만은 잘못 맡을 수가 없이 독했다.

가장 놀란 점은 허버트 씨의 태도였다.

아버지의 자택에서는 그토록 기민하게 반응해놓고, 여기서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듯이 태연히 지나가는 것 아닌가. 나는 탐정처럼 추측했다.

아마도 저택 상태가 이랬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여러 번 저택을 방문했을 허버트 씨의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조심하세요."

나는 괜한 참견인 줄 알면서도, 계단을 오르는 허버트 씨를 보고 무심코 말했다.

하지만 내가 뒤따라 계단에 올랐을 때, 정말로 그 말이 필요없는 말이었단 걸 깨달았다. 계단 디딤판은 최근에 교체한 것처럼 튼튼했다. 어쩌면 큰 사고가 있어서 공사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면 이 무시무시한 저택도 제법 친근해졌다.

집사의 얼굴이 징그럽고, 안팎이 얼마나 엉망이건, 결국에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란 체감이 든 것이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따라가다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허버트 님은 2층에서 묵으셔야 하겠습니다."

"피츠헨리 양은?"

"3층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대충 봐도 방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층을 나누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3층에는 그나마 가장 깨끗한 침실이 있고, 그다음 깨끗한 침실은 2층에 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주인 어르신께서 마지막으로 쓰신 방이 3층이기 때문에."

나는 뭘 묻지도 않았는데 속으로 던진 의문에 대한 답이 차곡차곡 돌아왔다. 참 절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허버트 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

"그러면 아서는 어딨지?"

"요즘에는 1층에 묵으십니다."

"변덕스럽군. 자네도 고생이야."

2층 복도를 걸으며, 두 사람은 서로만 아는 얘기를 했다.

나는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가며 주변을 계속 관찰했다. 잘 관찰하면 알 수 있지만, 허버트 씨의 왼 다리는 의족이었다. 그 때문에 남들보다 걸음이 느린 편이라, 그에게 맞춰 걸으면 이렇게 여러 사물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마땅히 눈여겨볼 것은 없었다.

방은 여럿 있었지만 명패도 없고, 모두 닫혀 있어서 어떤 용도로 쓰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예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거기에도 보이는 건 없었다.

우선은 빛 한 점 없는 밤인 탓도 있었고, 유리창에 물때가 짙게 남은 탓도 있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게."

방을 안내받은 허버트 씨는 정나미가 느껴지지 않는 저녁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나는 집사와 단둘이서 3층에 올랐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3층 복도가 아주 깨끗했던 덕분이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1층과 비교하면 누군가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체감이 확 들었다.

"좋은 꿈 꾸시길."

얼굴은 무섭지만 집사 쪽이 허버트 씨보다는 좋은 인사문을 말했다. 나는 문을 닫고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습관적 행위였지만, 조금 뒤에  '아서 프랑크 백작'이라는 자에 대해 분석하기 위해서라는 괜찮은 의미 부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인품이나 습관 같은 것은 무엇도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잘 준비나 할 겸, 이불을 한 번 털었다가 먼지가 쏟아져서 그대로 내려놓고 말았다.

차라리 먼지 좀 쌓인 침대에서 자는 게 일을 벌이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

... ... ...

침대에서 한참 뒤척여도 잠은 오지 않았다.

딱히 먼지 때문에 숨쉬기 힘든 탓만은 아니었다. 저택 전체를 육중하게 짓누르는 불온한 기류가 있었고, 그걸 생각하자니 걱정이 많아서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면 조금 덜 피곤한 걸지도 몰랐다.

실은 정신의 고단함에 비하면, 몸의 피로는 대수롭지도 않았다. 아마 허버트 씨는 벌써 잠들었겠지. 아까도 그렇게 흔들리는 마차에서 곤히 잠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안 좋은 징조였다. 그때였다.

쿵... 쿵...

그 소리는 복도 쪽에서 들렸다.

쿵... 쿵...

무언가 떨어진 듯한 묵중한 소리였다. 그렇지만 몇 번이고 계속 들리니, 우연한 사고 같지는 않았다. 3층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걸까.

쿵. 쿵.

소리의 간격은 일정했지만, 그 높이는 점점 커졌다. 무거운 것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듯한 소음이었는데, 주로 선착장 창고에서나 들리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쿵. 쿵.

계속 소리를 듣다 보니, 나는 착각을 정정했다. 소리는 커지는 게 아니라,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계단 반대편에서 내 방 쪽으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쿵.

그것이 방문 앞에서 멈췄다.

나는 숨죽여 귀 기울였다. 이상할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쿵... 쿵...

잠깐의 정적 후에 소리는 다시 내게서 멀어져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것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생각한 것이지만, 아마도 그건 발소리가 아니었을까.

그나마 현실적인 추측을 해보자면, 안에서 자고 있던 누군가가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려 하는 상황 정도가 떠올랐다. 내 방 앞에서 멈춘 것도 우연히 잠깐 쉰 거라면 말이 되었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침대 옆에 벗어놓은 신발을 한쪽 발에만 신었다.

그리고 바닥을 몇 번 탁탁 찼다.

바닥에서 나는 소리는 방금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간신히 차분해지던 머릿속이 다시 한 번 복잡해졌다. 그 중심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방금 그건 사람 발소리가 맞을까?'

나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결국 완전히 일어나서 신발을 고쳐 신었다. 확인하지 않고는 도무지 잠들 자신이 없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를 상상하며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까 들었던 괴물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계속 어른거렸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 듣기로는 그다지 걸음이 빠른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가 나오는 데까지 오래 걸린 탓이었다. 나는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층계에 서서 한 걸음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한기에 발을 멈췄다. 어딘가 창문이 열려 있는가 생각했지만, 정작 바람이 불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내려간 나는 2층 계단참에 어떤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뒷모습을 보아하니 여성이었다.

"저기."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까 복도에서 들린 소리의 발원지인가?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기엔 뭔가 짐을 들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어째서 이런 말이 절로 나왔는지는 몰랐다. 그녀는 딱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같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그녀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가만히 둘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롭게 보였다.

나는 다가갈 생각으로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갔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완전히 일변하여 당장 여기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변덕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걸음 아래로 내려갔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나는 추운 건가, 꼭 병에 걸린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쇠약해졌다.

"저기."

마침내 2층에 내려온 나는 여인을 불렀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을 빙 돌아서, 여인의 정면으로 이동했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정체는 인형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시퍼런 빛이 감도는 밀랍 재질로 된 인형은 멀리서 봤을 때는 꼭 사람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푸른 광채에 이끌린 나방처럼 슬금슬금 다가갔다.

"인형, 이죠?"

누굴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지며,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기필코 그녀가 산 사람이 아니란 걸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그녀의 얼굴에....

"뭐하십니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잠에서 갓 깨어난 몽유병 환자처럼 황급히 떨어졌다.

"아, 아니요."

우리에게 방을 안내했던 흉측한 외모의 집사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까는 들고 있던 촛불이 없이, 그저 어둠 속에 서 있다는 점만이 달랐다.

"잠이 안 와서요. 방으로도 돌아갈게요."

"그러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집사의 목소리는 어쩐지 음험하게 들렸다.

"주인 어르신께서 부르십니다."

"아서 씨, 말인가요?"

"그보다는 프랑크 백작님이라 부르길 원하시겠죠."

나는 내 무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버트 씨는...."

"주인 어르신께서는 아가씨만을 찾으셨습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더는 사양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저택에서 허락받지 않은 손님이었고, 가주가 만나고 싶다고 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안내하겠습니다. 그런 곳에 서 계시면 헷갈립니다."

내 침묵을 멋대로 긍정이라 해석했는지, 집사는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 걸었다. 어쩐지 이상한 말투였지만, 이 저택의 수많은 수수께끼와 비교하면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 인형이 왜 거깄는지 조금 더 궁금해하다가, 더는 생각하기 싫어서 잊으려 애썼다.

1층 복도, 어느 방.

문틈으로는 불빛이 새고 있었다. 저택에서 처음 보는 인공적인 백색광이었다.

나는 빛을 보고 반가워하는 한편,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처음 봤던 촛불 말고는 어느 광원도 없던 저택에 너무 밝은 빛이 있는 게 낯설었기 때문일까.

집사는 문을 두드리며 공손히 말했다.

"모셔왔습니다."

"들어오라 해."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뜻밖에도 젊은 청년 같은 목소리였다. 집사는 문을 열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무언의 독촉임은 나라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전구 빛을 사방으로 흩트려 놓고 있었다. 나는 눈이 부셔서 살짝 찡그렸다.

"사람을 시험하는 것은 예로부터 신의 역할이었지."

창가에는 금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뒤돈 채, 굳게 닫힌 커튼 틈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흘깃 엿봤지만 역시나 검정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랑크 백작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주워들은 이름을 불렀다.

"위대한 여정과 굳은 신념을 보인 인간은 비로소 영웅이 된다. 하지만 신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인간은 어떻게 될까."

내 인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홀로 말하던 남자는 마침내 뒤돌았다.

백작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젊었다.

심지어는 나보다도 더 어리게 보였다. 오늘 수정궁에서 만났던 세 명의 대학생, 그들 사이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혹시 눈앞의 남자가 프랑크 백작이 아닌 걸까. 허버트 씨는 그와 비슷한 연배라는 식의 뉘앙스로 말했는데, 전혀 그 이미지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될 것 같아, 응?"

백작은 딱 그 나이대 청년처럼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마 죽겠, 죠."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나빠. 벌을 받지."

나는 이 문답이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 백작은 허버트 씨와 아주 닮았기에, 두 사람의 친분에 대해서는 납득이 되었다. 우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그랬다.

대답하는 대신,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이게 웃기나?"

백작은 정색하며 물었다.

"저 하늘에서! 인간은 벌을 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아니,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갑자기 악을 쓰며 외치던 백작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광인의 변덕이었다. 나는 그의 기분 변화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자네를 부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험하기 위해서요?"

내 대답에, 백작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아니, 내가 자넬 따로 부른 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네, 피츠헨리 양."

나는 말한 적 없는 이름을 그가 알고 있어서 놀랐다.

"아일랜드 출신인가?"

"부모님께서요."

"자네는?"

"브리스톨 출신이에요. 평생을 거기서 살았죠."

"직업은 뭐지?"

"간호사요."

"군 출신인가 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사이에 쏟아지는 단문형 질문에,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전부 솔직히 답했다. 백작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엄지로 제 아랫입술을 쓸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호흡을 돌리며 천천히 돌이켜 보니, 백작이 내 이름을 아는 것은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허버트 씨와 대화할 때 불린 이름을 집사가 듣고 전했을 테니까. 그저 워낙 갑자기 불리고, 숨 돌릴 틈 없이 질문 세례를 당하니 큰일처럼 느낀 것이었다.

아마 우연이겠지, 이런 대화 흐름을 의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네는 왜 여기 있지?"

"부르셔서...."

"그게 아니라, 어째서 여기까지 왔지?"

별로 바뀌지 않은 질문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집사를 통해서 절 부르셔서...."

"아니, 자네는 별로 말뜻을 못 알아듣는군. 처음 대답에 아니라고 했으면, 다른 질문인 줄 어련히 눈치채야지. 나는 자네가 왜 저 친구를 따라서 저택까지 왔는지 묻는 거네."

백작은 짜증 내며 다시 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히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제 아버지이신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의 죽음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위해서 허버트 씨를 만났고, 사건 배후에 왕립 학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허버트 씨는 여기에서 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듣고 보면 이건 자네 아버지가 얽힌 사건 같은데, 자네는 이 일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백작은 차가운 눈으로 날 응시했다. 어쩐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혈색 없는 그런 눈이었다.

"제 아버지의 명예를 찾기 위해선 뭐든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넨 아까부터 대화의 맥을 잡지 못하는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래서 자네가 뭘 할 줄 아느냐는 거네. 있잖나, 나는 이 저택에 아주 특별한 사람만 들여놓고 있네. 그들은 모두 제 분야에서는 최고이고, 그러지 못해도 뭔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자네는 내가 보기에 아주 평범하게 보이거든."

백작은 검지를 위로 치켜세우며 단언했다.

"여기서 평범함은 죄라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손가락을 다시 접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관심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낮게 중얼였다.

"실망스러워."

윗층에서 쿵쾅쿵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그걸 듣고는 보기 좋게 미소 지으며,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완전히 열었다. 그는 조금 전의 냉대가 거짓말처럼 자연스럽게 말 걸었다.

"보게, 해가 뜨는군."

정말이었다. 창문에는 저 멀리 떠오르는 흐릿한 여명이 비쳤다.

"거기 뭣들하고 있나!"

멀리서도 귀청이 따가운 고성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기가 어딨는지 광고라도 하듯이 복도를 힘차게 밟으며 방 안에 나타났다.

"필로, 여기 이 여자는 자네에게 못 미쳐. 아무래도 자네가 아깝지."

"뭐?"

"아니었나? 매번 질리지도 않고 다른 여자를 데려오길래, 자네가 내 저택을 괜찮은 데이트 코스쯤으로 여기는 줄 알았는데."

허버트 씨는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부스스한 얼굴로 백작을 노려봤다.

"아무튼 그녀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해. 나는 전혀 관심 없으니까."

거기까지 대화가 오갔을 무렵이었다.

나는 허버트 씨의 등 뒤에 누군가 수행원이 있다는 걸 깨닫고 바라보다가, 그 정체를 알고 비명을 질렀다. 대화가 끊기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지만, 전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인형! 아까 그 인형!"

"아까?"

허버트 씨는 뒤를 돌아봤다. 나는 그가 그 밀랍 인형을 부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긴커녕 그는 인형을 향해 태연히 말 걸었다.

"마리, 자네 무슨 짓 했나?"

"여기는 꽤 지루해요, 주인님. 이런 기회가 많지는 않답니다."

"자넬 아서 옆에 두는 게 아니었어. 점점 닮아가잖아, 세상에."

머리가 아팠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혹은 인형의 목소리, 줄이 늘어진 현악기를 연주할 때의 찢어질 듯한 소음 같은 목소리 때문에도 그랬다.

모든 게 웅성웅성 멀리 있는 것처럼 들렸다. 꼭 물에 잠긴 것처럼, 내 의식은 그렇게 아래로 침강하고 있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불쾌한 진실의 화신이었다.

나 자신의 몸에 촘촘히 퍼져 있는 신경망이 투시처럼 보이고, 그 사이를 흐르는 전류 신호가 나고 사라지는 광경이 떠올랐다. 생명이란 게 벗기고 보면 그토록 허무한 것이란 사실이, 나라는 존재가 전등이 꺼지는 것처럼 쉬이 사라질 존재라는 그 기계적인 깨달음!

흐려지는 의식 속에, 내 머릿속을 맴도는 건, 백작의 마지막 질문만 맴돌았다.

대체 나는 왜 여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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