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23화 (123/232)

§"그저 행복한 하루를."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방 안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나온 나는 주방 쪽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에 이끌려, 드물게도 주방 식탁까지 내려갔다.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감자 죽과 흰 빵, 그리고 갓 쪄낸 칠면조가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내가 식탁에 나타나자 역시나 이미 앉은 부부가 가만히 날 응시했다.

"응?"

"아니, 아니야."

브라운은 당황하며 옆 의자를 뒤로 뺐다. 나는 묵례로만 감사를 표하고 앉았다.

내 몫의 칠면조가 접시 위에 올려지는 걸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의구심이 들어서 물었다.

"일하는 아이는?"

"오늘은 일찍 돌려보냈어요."

브라운 여사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날이 날이니까요."

나는 주방 창문을 봤다. 가뜩이나 어두운 밤거리가 쏟아지는 눈 때문에 더욱 알아볼 수 없었다. 창틀에 쌓인 하얀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리는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간만에 풍족했던 식탁에서 일어날 때쯤, 윗배가 부담스럽게 당겼다.

"이봐, 허버트."

브라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날 불렀다.

"응?"

"행복한 성탄절 되게."

나는 그를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뭐?"

"아니... 오늘 성탄절이잖아. 그렇지?"

내 반응을 보고 겁이라도 먹었는지, 브라운은 쭈뼛거리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점은 그의 인사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

"몰랐어요?"

브라운 여사는 날 노려보며 되물었다.

나는 내 모습이 어찌 보였을지 깨달았다. 평소에는 한 번도 식탁에 내려오지 않다가, 식단이 풍족한 성탄절에는 냉큼 내려온 것처럼 보일 것 아닌가.

"아니, 진짜로, 정말 몰랐어.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그래서 나는 변명하듯 몇 번이나 몰랐다고 중얼거리며,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허겁지겁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새벽이었다.

밖에는 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이 꼭 스산한 여인의 울음소리 같아서, 정신이 산만해진 나는 더 공부할 자신이 없어서 불을 껐다.

그러자 창문에서 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서 부딪힌 걸까. 금세 흥미를 잃고 누우려고 하니, 다시 한 번 퉁 하는 소리가 창문에서 들렸다. 두 번째부터는 우연 같지가 않았다.

집 주변엔 2층 창문에 닿을 만큼 높은 나무도 없었다.

나는 옆에 둔 권총을 집어들고, 조심스레 창가에 다가갔다.

눈 쌓인 거리에는 사람 한 명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체구는 작았고, 케이프와 리젠시 보닛을 쓴 고풍스러운 인상의 여성 같았다. 뭘 하나 보고 있었더니, 그녀는 허리를 굽혀 눈을 손으로 푸더니, 뭉쳐서 창문 쪽으로 던졌다.

퉁.

소리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센 바람이 불 때마다 낡은 경첩이 삐걱거렸고, 싸라기눈이 방 안으로 쏟아져서 눈 뜨기가 힘들었다.

"저에요, 주인님."

"마리? 잠깐만, 거기 있게. 지금 내려갈 테니까."

나는 깜짝 놀라서 창문을 닫고, 급히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그리곤 누가 깨기라도 할세라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문밖으로 나오니 거리 한복판에 선 마리가 날 보며 말했다.

"갑자기 불이 꺼져서 주무실까 봐 걱정했어요."

멀리서 봤을 때는 꽤 괜찮게 보였던 의복은 평소의 낡은 사복과 다르지 않았다. 밤과 눈은 여자를 매력적으로 만든다지만, 입은 옷까지 달리 보일 줄은 차마 몰랐다.

"백작님께서 절 보냈어요."

"아서가?"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서의 무심함에 내심 실망했다.

그도 마리가 시내를 혼자 다닐 처지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을 텐데, 오늘처럼 인적 드문 날이기에 망정이지 큰 소동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오늘이기에 보냈는지도 몰라도... 그도 바보는 아니니까 분명 그렇겠지만. 모자챙에 소복이 쌓인 흰 눈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오래 돌아다녔는지 알 수 있었다.

"춥지는 않았나?"

"이런 몸인 걸 아시잖아요."

마리는 수줍게 대답했다.

"그랬지."

나는 서먹하게 대답했다.

"여하튼 무슨 일인가."

"실은 주인님이 급히 조사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고 해서요. 이 근처 거리에 대단한 부자가 사는데, 그자가 아침에 거금의 어음을 여러 자선 단체에 썼다고 해요."

"그건 좋은 소식이군. 그게 다는 아니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상류 사회에서는 그걸로 큰 소문이 돌았다네요. 평생 기부할 위인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 단체 중 하나가 프랑크 백작님이 따로 조사하던 회사 소속이라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노란 외벽 회사의 계열사라고요."

확실히 수상쩍은 얘기였다.

"과연, 그래서 지금 무리해서 자네를 보낸 거야. 연말이 지나면 은행도 정상 업무를 할 테니, 어음 처리가 진행될 테니까. 그 안에 조사하라는 거겠지. 하지만 그걸 알릴 거라면, 놈이 직접 와도 됐을 텐데."

나는 신경질적으로 아서 욕을 했다.

"여하튼, 안내할게요."

마리는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 걸었다.

"방금 내 흉내를 낸 건가?"

"그렇지 않아요."

나는 탐탁잖은 마음을 품은 채, 그녀를 뒤쫓았다.

우리는 눈길을 걸었다.

성탄절의 새벽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쏟아지기 때문인지,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길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아서, 뒤돌아 보면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어느 갈림길 너머를 지팡이 끝으로 가리켰다.

"전에는 여기 살았네."

"네."

마리는 답했다.

"아파트로 가기 전에는 여기 다락방에 세들어 살았지. 결국엔 이놈의 다리 때문에 이사하게 되었지만."

"그렇군요."

목소리에 전혀 높낮이 변화가 없었다. 무관심을 표현하는 것도 이쯤이면 재주였다.

"그게 딱 6년 전 이맘때였을 거야."

"어라, 그랬나요?"

분명 같은 화제였는데, 마리는 이번엔 꽤 적극 반응했다.

"기억 안 나세요? 제가 주인님과 만난 해잖아요."

"그랬나?"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잊으셨단 말이에요?"

한기가 도는 반응에, 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내 나이 때쯤 되면 어지간한 일은 까먹어 버려서."

"저와 만난 게 어지간한 일이었다고요?"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겠나?"

나는 급히 말을 돌렸다.

"맞아, 이제 기억났어. 내 이사 소식을 들은 친구가 큰집에서 혼자 사는 게 걱정이라면서 꾀죄죄한 아이를 한 명 데려왔지. 자기네 집에서 일은 그럭저럭 가르쳤으니까 쓸만할 거라고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풍이 불었다. 일순 눈앞이 새하얗게 뒤덮이는 탓에 우리는 모자를 아래로 누르며 바람을 견뎠다.

"이름이 뭐지?"

"네, 네, 셜리 마리입니다, 주인님."

"그래, 셜리 마리...."

나는 일부러 질질 끌면서, 소녀의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 사무적인 회화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사람을 부린 경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내 또래 청년이나 그 이상의 연배였고, 내 무심한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콧물을 질질 흘리는 이런 꼬맹이에게 하대하며, 심부름시키는 일은 하기가 퍽 어려웠다.

"청소를 해도 될까요?"

오히려 침묵을 끊은 것은 소녀였다. 그녀는 씩씩하게 헤매는 날 잡아끌었다.

"아, 그래, 하지만 침실은 안 돼. 내가 정리해 놓은 거니까."

"알겠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단언했지만, 나는 두 해가 지나기 전에 침실까지 그녀의 관리하에 넘기고 말았다.

서서히 바람이 잦아들었다.

우리는 동시에 마주 봤다. 바람이 그치고도 서로가 거기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굉장했지."

"맞아요, 주인님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마리는 내 생각과 영 딴판인 내용을 말했다.

"그랬나?"

"그래요, 한참을 세워두고 말도 안 하시고 노려보셨잖아요."

뜻밖의 사실이었다. 아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내게는 불편함이었겠지만, 그녀는 어린 나이에 완전히 낯선 환경에 떨어진 상황이었으니까.

보통은 상급자나 부인의 지시를 받을 텐데, 나 같이 키 크고 말 없는 남성을 상대하는 일은 아마도... 꽤 무서웠을 테지.

나는 침묵으로, 마리는 작업으로 서먹함을 이겨 내고자 한 것이었다.

"친구분과는 아직도 연락하시나요?"

"아니, 그 뒤론 소원해."

그 친구는 전형적인 런던 상류 사회에 속한 인물이었기에, 내가 이듬해에 「민족과 운명」을 출간하고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마리를 소개받기 바로 몇 달 전이었으니, 어쩌면 내가 그녀를 만난 일은 꽤 운이 따랐던 것인지 몰랐다.

그녀에게는 전혀 아니었겠지만.

"요즘 집을 알아보고 있네."

"그러세요?"

"안 믿는 모양인데."

"그야 저를 볼 때마다 늘 그리 말씀하시지만, 1년째 아무 소식도 없는걸요."

그녀는 살짝 토라진 어조로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진짜야."

"지금까진 아니었단 말이에요?"

나는 애써 무시했다.

"괜찮은 중개인을 소개받았네. 조만간 물건을 구해올 거야. 내 지갑 형편으로 아이 다섯까지 데려올 만큼 큰 집에 들어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기특한 생각을 하고 계셨네요. 전 솔직히 주인님이 아이들에게 별 관심 없는 줄 알았어요."

"뭐? 아니야. 순서를 따지자면 애들이 먼저 나한테 관심 가져야지."

잠깐 침묵이 흘렀다.

"걔넨 날 무서워할 거야. 첫 만남이 끔찍했으니까. 게다가 아이들은 원래 날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건 주인님이 고루하셔서 그래요."

나는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는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무시하는 건지 계속 말했다.

"지금도 아이들을 책임지는 게 의무나 책임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마리는 내 생각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느리게 떨어지는 눈이 점점 불었다.

발이 눈 사이로 푹푹 빠져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발을 질질 끌면서, 나는 무식하게 계속 걸었다.

"손님이 늘었네요."

마리가 말했다. 그녀가 내게 일 외의 주제로 말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귀찮게 되었지."

"명탐정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셔요."

나는 눈살을 구겼다가 곧 풀었다. 그저 생각하는 습관일 뿐인데, 내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화난 줄 알고 마리가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다.

"하나, 나는 명탐정이 아니야. 둘, 저치들은 명탐정을 찾아온 게 아니지. 런던에서는 시간을 때울 오락거리가 계속 순환하지. 어쩌다가 이번엔 그게 내가 됐을 뿐이야."

그리고 나는 탁자에 놓인 신문을 들어서, 마리에게 건넸다. 「로저街 마차 증발 사건을 해결한 명탐정」 같은 낯부끄러운 제목이 적힌 기사가 실린 부분이었다.

"실제로 해결하고 계시잖아요?"

"정정하자면 저들이 대단하지도 않은 일로 호들갑 떠는 것뿐이네."

마리는 받은 신문을 읽는 사람처럼 꼼꼼히 봤다.

"자네, 글을 읽을 줄 알던가?"

"아니요. 조금요."

아니란 건지, 조금이란 건지, 확실히 하라고 말하려 하자, 마리가 먼저 말했다.

"이 신문 다 보신 거에요?"

"그렇지만."

"그러면 제가 가져도 될까요?"

"그래, 앞으로 책상 위에 올려둔 신문은 물어보지 않고 가져가도 되네."

마리의 얼굴이 팍 밝아졌다. 나는 소중히 신문을 안고 나가는 소녀를 보고 멈춰 세웠다.

"잠깐."

"네, 주인님."

그녀는 겁먹어서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서장을 눈으로 힐끗 가리켰다.

"사전도 챙겨가게."

그때부터였다. 그녀와 내가 사담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신문을 쌓아놓고 있더니, 나중에는 어디선가 스크랩북을 구해와서 괴상쩍은 기사 위주로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불길한 취미라고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렇게라도 공부하는 게 기특해서 하게 둔 것이었다.

눈발이 잦아들고 시계가 트였다.

"기다릴게요."

마리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마도."

나는 자신 없이 말했다.

그러고 우리는 한참 대화가 없었다. 강가에서는 추위에도 얼지 않은 강물이 출렁이고, 어느 건물에서는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내가 밉나?"

"조금은요."

바람 소리가 우리 사이를 헤집었다.

"알고는 있어요. 주인님이 당시 어떤 상태였고, 어떻게 회복하셨는지요. 그 일로 주인님을 탓하는 것도 얼마나 의미 없는 지도요. 하지만 저는 평범한 삶을 상상할 수 있어요."

마리는 말했다.

"가정부 일을 계속해서 돈을 모으면, 스물이 되기 전에 예쁜 옷 한 벌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에요. 돈이 남으면 목걸이도 하나 살 거에요. 그걸 입고 저는 광장에 나갈거에요. 비누로 깨끗이 씻고 차려 입은 저는 분명 아름답겠죠. 남자들은 절 바라볼 거에요.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 저는 야생화 한 송이를 선물 받겠죠. 그 꽃은 분명 새하얀 데이지일 거에요. 그이는 제가 머리에 꽂은 데이지 꽃핀을 보고, 제가 좋아하는 꽃인 줄 알아보고 선물한 거에요. 저는 그이는 관찰력에 감탄하면서 사랑에 빠지겠죠."

보도 블럭 사이에 얼어붙은 잡초가 듬성거렸다.

"식은 성당에서 올릴 거에요. 아침이나 낮은 안 되고 11시쯤이어야 해요. 저는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보일 테니까요. 하객으로 오실 때는 주인님 아는 멋진 신사 숙녀분을 잔뜩 데려와 주셔야 해요. 주인님만 제 하객으로 모실 순 없으니까요. 결혼 후에는 행복할 거예요. 우리는 낮에는 일하지만, 밤에 만나서 서로 사랑을 속삭일 거에요. 어쩌면 제가 주인님께 떼를 쓸 수도 있어요. 주인님은 평소에는 심술 맞지만 이런 일에는 맥을 못 쓰시는 걸 알고 있거든요. 어쩌면 휴가와 용돈을 주실지도 모르죠. 그렇게 우린 도시 구석구석 어디에나 추억을 채워놓을 거에요. 그러면 저는 이 도시를 조금은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요.

건물들 사이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교회 첨탑이 눈발에 가려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어머니가 될 거에요. 아이 이름은 아직도 정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미들 네임은 로베르토 신부님께서 따오려고 해요. 이 일에 마음 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하지만 필레몬은 제 아이에게 지어주기엔 너무 특이한 이름인걸요. 이렇게 저도 평범한 행복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어요."

찬 바람이 몰아닥쳤다.

"그런데 저는 그걸 누릴 자격이 없네요."

나는 옷깃을 여몄다.

"자네는 나의 죄야."

귓볼이 달아오른 증기 기관처럼 뜨거웠다. 올라온 눈송이가 녹고 끓는 소리에, 옆 사람의 발소리조차 멀었다.

"죄에는 가역의 속성이 없네. 한 번 저지른 행위는 결코 되돌릴 수 없지. 인제서 자네에게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겠네. 언젠가 자네 앞에 두 손 모아서 용서를 빌지언정, 그건 약해진 마음으로 짐을 덜려는 알량한 위선에 지나지 않겠지. 그러기에 나는 자네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받지도 않겠네. 다만, 이렇게 자네 손을 볼 때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떠올리고 기억하겠네. 나는 이렇게 속죄하기로 했네."

마리는 날 보지 않고 물었다.

"그러면 제가 미우신가요?"

"어쩌면."

"비겁하세요. 사고를 당한 건 저인데, 주인님은 빚을 갚지도 않고, 제게 부담까지 지어주겠다고 하시는군요."

"아니, 내 말뜻은 그런 게 아니라...."

걷기도 힘든 길에서 정신 팔린 탓인지, 아니면 천벌인지,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굴과 옷 사이로 눈이 쏟아지고, 또 그 위로 내리는 눈이 쌓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나는 자리에 앉아서 허망하게 떨어지는 눈송이를 세었다.

"바닥에 앉아서 뭐하시는 거에요, 경망스럽게."

마리가 급히 뒤돌아 달려오더니, 바닥에 앉은 내 팔을 잡고 일으켰다.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아요. 넘어져서 못 일어나신 거면 차라리 부르지 그러셨어요."

나는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때문에 돌부리가 안 보였어."

맨바닥에 넘어진 게 부끄러워서, 나는 괜한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다 왔어요."

"벌써?"

"벌써라기엔 한참 걸었는걸요."

런던 중심가에 있는 좋은 건물이었다.

"그나저나 다 와서 묻기도 뭐하지만, 한 가지 들었어야 하는 게 있네."

"그게 뭐죠?"

나는 건물 주소 판을 살폈다.

"조사해야 한다는 부호의 이름 말이야."

성에가 들러붙은 명패에는 거주자의 성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걸 소리 내지 않고 몇 번 읽어봤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잘 아는 이름이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 사업가 이름은 스크루지예요. 에비니저 스크루지요."

마리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 또한 너무나 잘 아는 것이었나.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눈 내리는 하늘 위로 희뿌연 입김이 치솟았다. 그렇게 잠깐 더 허무함을 맛보고는, 나는 왔던 길로 다시 몸을 틀었다.

"주인님?"

"자러 갈 거야."

"네?"

"다시 자러 간다고!"

나는 고집 부리면서 건물을 떠났고, 마리는 허둥대면서 날 쫓았다.

잠시 후, 우리는 자동차가 끄는 마차 앞에 있었다.

홀로 차를 잡을 수 없는 마리이기에, 나는 굳이 큰길로 나와서 새벽차를 찾은 것이었다. 이런 날이니만큼 다니는 차가 있었던 게 행운이었다.

"거기까지 가시고 돌아가시는 건 뭔가요."

"아서한테는 내가 책임진다고 전하게."

나는 투정부리는 마리를 억지로 차에 태웠다.

그리고 떠나보낼 인사를 하려다가, 문득 떠오른 문구를 말했다.

"마리, 행복한 성탄절 지내게."

그러자 마리는 그대로 굳어서 날 멀뚱멀뚱 바라봤다. 평소에도 표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얼굴을 가리고 입까지 다무니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왼손 검지를 갈고리처럼 구부렸다. 그리곤 제 입가에 대고, 늘어진 현악기 소음 같은 걸 내며 키득댔다.

"성당도 안 다니는 분께서. 게다가 이미 성탄절은 벌써 지났는걸요."

나는 모자에 쌓인 눈이 무거워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겠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한 반동으로, 나는 괜히 성질을 내며 뒤돌았다.

"주인님."

나는 마리의 부름에 멈춰서, 고개만 움직여 뒤돌아봤다. 차가 출발하고 마차가 움직였다. 그녀는 떠나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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