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24화 (124/232)

§124. 충성, 지배

이브를 홀로 둔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나는 깊이 통감하며, 정신 잃은 이브를 방에 눕혀놓고 나왔다. 부디 이번 사건으로 그녀의 마음이 꺾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이 저택이 내 생각보다 더 위험한 장소라는 걸, 나는 종종 잊곤 했다. 특히나 다섯 명의 고아가 정착한 이래로는 더욱 그랬다. 그들의 뛰어난 적응력이 오히려 내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셈이다.

하지만 모두 내 잘못은 아니었다.

"주인님, 식사는 제대로 하시나요?"

또 한 명의 죄인, 마리는 눕혀놓은 이브의 이불을 고쳐 놓으며 물었다.

"세상에, 얼굴 핼쑥한 것 좀 보세요. 그리고 수염은 또 어떻고요. 머리털도 새집이 따로 없어요."

"가끔 보면 자네는 내가 윗사람이란 걸 잊는 거 같아."

나는 내 얼굴에 손을 뻗는 마리를 보며 질색하며 물러났다.

"정말로, 정말로요."

그녀는 발을 멈추곤, 가만히 서서 날 응시했다.

"꼭 아픈 사람처럼 말랐어요."

"잠을 통 못 자서 그래."

나는 마리를 안심시킬 셈으로 말했는데, 그녀는 낮게 한숨 쉬었다. 꼭 백파이프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 같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입을 달싹거리며 핑계를 떠올려 했으나, 그전에 마리가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는 말없이 그 뒤를 쫓았다.

"여자는?"

밖으로 나오니, 문 앞의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아서가 내게 물었다.

"살갗이 좀 찢어져서 피가 났을 뿐이야. 큰 상처는 아니야."

나는 정신을 잃기 직전에 이브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벽에 박아서, 그대로 기절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발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꽤 적절한 조치였다. 계속 깨어서 어설프게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면 정말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마 그녀 본인은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을 테니, 동물적인 육감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까.

다만,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야말로 불찰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나?"

"뭐?"

나는 아서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모른 척하지 말게. 왜 그녀를 따로 불러냈지?"

"아니, 너야말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아서는 갑자기 벽에서 몸을 떼며, 내게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이제사 보게 된 그의 얼굴에는 온통 불길한 징조로 가득했다. 어째선지 아서는 아주 기분이 나빠 보였으니 말이다.

"내가 말한 '뭐'는, 네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어이없다는 뜻이야."

"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참고로 내가 말한 '뭐'는, 정말로 무슨 뜻이냐고 묻는 거네."

"넉 달이야. 이봐, 넉 달이라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되풀이했다.

"그간 바쁘게 지냈네."

"아, 과연. 나는 또 입대라도 한 줄 알았지. 네가 기대를 배반한 게 이번으로 몇 번째더라?"

"이봐, 아서. 보는 눈도 있는데, 어른스럽지 못하게."

옆에 선 마리를 힐끔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는 허둥대며 자리를 떠났다. 내 의도와는 전혀 상반된 행동이었다. 기왕이면 좀 더 옆에 있어달라는 뜻이었는데.

결국, 복도에는 우리 세 사람만 남았다.

아서는 떠나는 마리를 살피지도 않았다. 그녀가 계속 있었다고 한들,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게 뻔했다. 그는 계속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건 네 나쁜 버릇이야, 필로! 나쁜 버릇! 무슨 일만 터지면 모습을 감추지. 이번에는 또 뭐가 그렇게 널 불안하게 만들었나? 내가 네 정체를 알아낸 것? 아니면 그걸 밝히면서 보인 내 추악한 속내가 그리도 충격이었나?"

"아까부터 말하지만, 나라고 편하게 지내진 않았네."

"아, 넉 달 동안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을 정도로 바쁜 일이 있으셨다."

"자네는 몰라. 내가 어떤 꿈을 꿨는지, 지금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라."

"미래에서 온 너한테는 우리네가 퍽 무식하게 보이긴 하겠지."

"내가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잖나."

우리는 서로에게 개처럼 짖어대면서도, 나는 이 이야기의 합의점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늘 그렇듯이 아서는 마음대로 화내고, 나는 말리는 그런 정상적인 흐름 말이다.

하지만 다음 한 마디가 모든 걸 그르쳤다.

"어차피 네 일은 아니란 거겠지."

그 한 마디에 오래 버텨온 둑이 넘쳤다.

"뭐라고?"

"너는 이 일이 어찌 끝날지 알 테니까...."

"아니, 내 말은, 뭐라고?"

나는 아서의 말을 끊었다.

"20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자네의 부름에 응한 게 누구지? 나야. 자네가 흥미 본위로 벌린 일에 목숨 걸고 뛰어드는 게 누구지? 나야! 수없이 사람이 죽어나갔는데 자네한테는 이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나? 자네야말로 그동안 뭘 하고 있었지?"

내뱉기 시작한 말은 끝내 폭풍우가 되었고, 나는 나 자신도 원천을 알 수 없는 동력에 이끌려서는 말을 계속 쏟아냈다.

"내가 본 것, 그건 꿈이 아니야! 엄연한 현실이었네! 도시는 불타고, 버킹엄 궁전에는 저들 무정부주의자의 처형대가 자리 잡았지! 한시가 머다하고 시체는 강에 버려져서는 부패한 체액과 핏물로 템스 강이 범람할 지경이었네! 자네를 포함해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죽어! 나 말고 누가 막을 수 있겠나? 도시 전체에 폭약을 실은 전투기가 즐비한데, 경찰은 찾아내질 못해! 왜냐, 항공 지식이 없으니까! 필연적인 활주로 같은 개념도 바로 떠올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뭘 믿고 맡겨두란 말인가?"

한참 숨을 토하며, 나는 문득 아서의 모습을 살폈다.

그에게 이렇게 화를 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어떤 기센 역풍이 돌아올까 마음 한편으로 두려워했는데, 달빛도 없는 어두운 복도에서 얼핏 보인 그 모습은... 내가 알던 어떤 모습보다 진솔한 것이었다.

아서 프랑크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내 눈앞에서 제자를 잃었네."

"그건, 꿈이었다면서?"

"아니... 그것만은 엄연한 현실이었어. 자네는 말해도 모를 거야."

거기서 우리는 말없이 숨을 골랐다. 흥분한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으나, 난방이 되지 않는 건물 복도는 서늘했다. 나는 추위에 몸을 떨면서 생각을 정리했고, 아서는 어쩌면 그의 인생 최초일지도 모르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 말이다.

"자네 말대로야."

흥분은 가라앉았지만, 입술은 여전히 떨렸다. 그만큼 겨울 저택은 차가웠다.

"나는 이 시대 사람이 아니야."

모든 것을 토로하려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망설임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서 프랑크를 믿을 수 있는가?

그를 아는 모든 인물이 그의 본성에 관해 경고해왔다. 심지어 아서의 형과 마리조차 그런 언질을 내게 일러둔 적이 있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오랜 세월 교류하며 그의 수많은 생애의 비밀을 엿듣고,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사악한 지식을 공유하는 사이였지만, 내게 아서는 여전히 인두겁을 쓴 불가사의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의 지식을 갖고 있네."

하지만 나는 말했다.

오늘에서야 엿본 그의 진실한 표정은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그것이었다. 최후의 기로에서 나는 간신히 그를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믿어주게. 나는 이 삶을 유일하게 생각하고 있고, 또 이 나라와 도시를 진정 사랑하고 있음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래."

아서는 짧게 답했지만, 그 안에는 그가 평소 즐겨하는 장광설보다도 깊은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티 내지 않는 것은 그의 귀족적인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마리는 알고 있나?"

"아니."

아서는 짧게 답했다. 그리곤 냉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녀에겐 너나 내가 가진 통찰력이 없어."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몰라. 오직 너와 나만 알지. 그리고... 어쩌면 그녀까지."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물으려 했지만, 아서가 말을 이어나가는 통에 기회를 놓쳤다.

"저 여자는 누구야?"

"이브 피츠헨리.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의 친딸."

"왕립 학회?"

"그래."

나는 속내 그의 암기력에 놀랐지만, 정작 본인은 놀랄 만한 일을 했다는 자각이 없는 듯했다.

"피츠헨리 박사는 사고로 죽었네. 하지만 그 죽음에는 걸리는 것이 많아. 그 단서를 내게 전해준 것이 이브 피츠헨리 양이네. 이것이 학회의 비밀로 이어져 있는 실줄임은 틀림없지."

내 말이 끝나자, 아서는 턱에 엄지를 붙이곤 의아한 표정을 했다.

"시기가 기묘하군."

"시기라?"

"너는 분명 내가 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아서는 아무 말에도 이어지지 않는 대답을 꺼냈다.

"실은 그렇지 않아. 내게는 계획, 원대한 비책이 있어. 그걸 위해서는 아주 많은 재능이 필요한 법. 하지만 그를 위해 수 년에 걸쳐 모은 학술회는 해체되었지."

그는 굳이 다 아는 사실을 다시 말했다.

"자네가 1년간 잠적한 일 말이군."

"적어도 활동 재개를 신문으로 알릴 순 없잖아. 머릿수가 적기에 생긴 은밀함은 우리가 가진 몇 없는 강점이야. 그런 학술회가 활동을 공론화하면, 도시에는 우릴 삼키려 들 적이 즐비하지. 반면, 우리 회원들은 퍽 개성적이란 말이야. 이들을 찾는 일은 품이 많이 들어. 섀클턴처럼 해외로 나가거나, 퀴리 부인처럼 어떤 일에 휘말려 실종되면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게 되지."

아서는 몸을 돌려서 독백하듯이 말했다.

"다섯 명. 지난 넉 달 동안, 나는 다섯 명의 회원을 찾아냈어."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들은 어딨지?"

"한 명은 캠버웰 공동묘지에 묻혔고, 다른 넷은 화장해서 뼛가루도 안치하지 않고 뿌렸다더군."

아서는 상반신만 뒤돌아보며 말했다. 슬며시 보인 옆모습은 조금 전까지 기죽었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당당했다. 어째서 그런 감정 변화가 있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열병이야. 도시에 유행병이 돌고 있어. 들어본 적 있어?"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병마는 모든 재난의 여진처럼 찾아와. 집을 잃은 부랑자가 붐비며, 물은 부족해서 위생 상태는 점점 열악해지지. 그들은 혈관을 통과하는 병균처럼 거리 사이사이에 들끓으며 병을 퍼트려. 당연한 현상인 거야. 하지만 이런 증상을 들어본 적 있어?"

그는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뇌가 녹았다더군."

아서의 눈이 다시금 어둡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직감했다.

또다른 악몽이 시작하려 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찾은 회원이 모두 기이한 질병에 목숨을 잃은 거야. 그다지 자연적인 현상처럼 들리진 않지?"

떠오른 것은 오스카 박사의 사인死因이었다.

"피츠헨리 박사는 말년에 부자연스러운 치매에 시달렸네."

"그의 죽음은 왕립 학회가 관여하고 있었고. 자네와 내가 겪은 바로, 우리의 주적이었던 노란 외벽 회사나, 에드워드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지. 오' 제럴드 학장도 마찬가지야. 그가 뇌에 구멍을 내놨다면, 자네는 진작에 폐인이 되었을 테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꿈속에서 봤던 학장은 멸망의 순간까지 대학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자의 소행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상황은 단조롭고, 결론은 명백해."

그리고 아서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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