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귀향
여인이 떠나고, 나는 방에서 J.D의 분골함을 꺼냈다.
"혹시 저울 있나?"
"아니요. 뭐에 쓰시게요?"
"아니, 신경 끄게."
흥미 없는 척하면서도 궁금해서 졸졸 따라오는 여급을 따돌리고, 나는 그대로 인근 정육점으로 향했다. 푸주한은 머뭇거리면서도 이내 저울을 내줬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J.D는 나보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의 사내였다. 적어도 5.5피트는 된다고 생각하고 역산하면, 뼛가루의 무게는 최소 1.8파운드... 그러니까 28온스에서 29온스 사이여야만 했다.
"그거 위생적인 거 맞아요?
영 미심쩍어 하는 푸주한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눈금을 읽었다.
"혹시 자루 있나?"
"파는 물건은 아닌데요."
"비싸게 쳐줄 테니까."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동전을 내놨다. 그러자 푸주한은 결국 자리에서 때 탄 자루를 내게 건넸다. 그 안에 뼛가루를 모두 부어 담은 뒤, 다시 한 번 저울에 재서 눈금을 읽었다.
흔들리는 침은 두 숫자 사이를 산만하게 오갔다.
12온스. 13온스. 12온스. 13온스.
이튿날 오후.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느 한 골목을 지나는 순간, 누군가 내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선수를 빼앗겼습니다."
기척이 없었기에 반응이 늦었다. 청년은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나는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여차하면 바로 휘두를 수 있게 하며 고개 돌렸다.
당장에라도 날아갈 수 있던 지팡이 끝은 다시 바닥에 붙었다. 직전에 얻어맞을 뻔했다는 것도 모르는 청년은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잘 안다고 하긴 뭐해도, 일면식이 없지는 않은 자였다.
"사무엘이라 했던가."
올드코트 대학생, 사무엘이었다. 그는 몇 번 내 수업을 청강하긴 했지만, 그의 이름은 다른 형태로 기억하고 있었다.
"잠깐, 그전에."
골목 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사무엘의 말을 막았다.
"자네는 교수를 세워두고 인사도 안 하나?"
"아."
핀잔 한 마디에 여유롭던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무엘은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잘 보니 동공이 좌우로 맹렬히 떨리고 있었다.
겉보기처럼 마음이 유약한 청년이었다. 그런 반응을 보니, 내가 꼭 괴롭히는 듯해서 도리어 기가 꺾였다.
"됐고 하던 말이나 계속하게."
"그, 그러면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그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둘러봐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미처 신경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숙함의 증거였다.
"선수를 뺏겼습니다."
아까 들었던 내용이지만, 말이 끊겼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는 굳이 다시 말했다.
맥락 없는 대화였지만, 묻는 일은 촌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올드코트 재학생은 유난히 폐쇄적이라서 대학 부지 밖에서 마주치는 일은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이 길은 내가 주로 다니는 통근로에, 내가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그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을 그의 감춰진 신분과 연결지으면 답은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영국은 미쳤습니다."
사무엘은 한껏 힘을 줘서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내리깐 목소리는 꼭 여자가 남자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끝인가?"
"아, 아니요. 사실 이게 원래 순서가 아니긴 한데."
그가 허둥대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물었다.
"의장은?"
"올 리가 없잖아요. 명색이 우리 지도자인데, 그렇게 가볍게 돌아다닐 순 없죠."
사무엘은 정색하며 답했다. 내 첫인상과 둘째 인상으로는 꽤나 활발히 돌아다니던 것 같지만.
여하튼, 이것이 그의 숨겨진 신분이었다.
그 수를 파악할 수 없는 토끼풀십자회의 여러 점조직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회장, 그리고 과거에 나를 납치하려고 주모한 세 회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금 그의 역할은 물을 것도 없이 파발이다.
홈즈는 예상대로 빠르게 그의 심부름꾼을 보내온 것이었다. 설마 수정궁 사건으로부터 이틀 만에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조만간 올 것이라 대비하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면 의장의 전언 전문을 전하겠습니다."
사무엘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귀하께서 보낸 물건은 잘 받았습니다. 예상하던 바대로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던, 정확히는 제가 취미로 만든 암호를 사용했습니다. 해독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잠깐만."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말을 끊었다.
"아무것도 없나?"
"뭐가요?"
"종이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사무엘은 말뜻을 이해 못 하는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 참, 교수님. 우리는 교수님과 달리 전문가예요."
이번에는 내가 말뜻을 이해하려고 애쓸 차례였다.
정말 친절하게도 사무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마디 더 첨언했다.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남기지 않죠. 전부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그거 대단하시군그래. 전언이나 계속하게."
어리숙하기 짝에 없는 그의 모습은 보고 있기가 꽤 민망하기에, 나는 말을 독촉했다. 사무엘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마 모르겠지만, 전혀 기분 상하지 않은 듯했다.
심지어 그는 혼자서 "제가 어디까지 말했죠?" 같은 혼잣말을 하며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해독은 간단합니다. 어쩌면 제가 보낸... 대리인이 도착할 무렵, 이미 끝났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걸 기다리기에는 급한 사안이 있어서, 예정보다 이르게 그를 보냅니다."
사무엘은 대리인이라는 대목에서 말을 씹었다.
확실히 거만한 홈즈답지 않은 표현이기도 했다. 아마 다른 단어를 사용했겠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심부름꾼이라든가.
"선수를 빼앗겼습니다. 영국은 미쳤습니다."
그렇게 사무엘은 말을 끝내고 내 눈치를 힐끔 살폈다.
"전문인가?"
"그렇습니다."
"그걸 다 외웠고?"
사무엘은 별로 넓지도 않은 어깨를 펴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결사의 회장에게 이 정도야, 뭐."
진이 했던 말도 이제는 좀 이해됐다.
확실히 그는 좀 짜증났다. 물론 또래라면 그래도, 내게는 그저 청년 특유의 치기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은 분명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의 웃기는 목소리만 제외하면, 사무엘은 완벽하게 홈즈의 대역을 소화했다.
미세한 단어 선정부터 심지어는 억양마저 그를 본떠 재현한 것이 느껴졌다. 전언을 듣고 바로 여기 왔을 테니, 그저 암기했다고 말하기 힘든 수준의 기억력이라 할 수 있었다.
솔직한 감상을 고하자면, 좀 변태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문득 어쩌면 그가 저번에 의장 대역을 맡았던 건, 그의 회장직 때문이 아니라 모종의 선별 기준이 따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의미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나?"
"아니요. 하, 하지만."
사무엘은 말을 더듬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아실 거예요. 의장은 그런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 거?"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모를 말장난 같은 거요."
어쩐지 알 것 같은 설명이었다.
"도와드릴까요?"
"아니, 전혀 필요 없네. 사실 이미 무슨 뜻인지 알았거든. 고마웠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사무엘을 돌려보냈다. 그는 미련 남은 사람처럼 어슬렁거리다가, 멀어지면서 다시 물었다.
"정말 후회 안 하실 거예요?"
"그래. 가서 책이나 읽게. 아니면 이발을 좀 하던가."
그러자 사무엘은 깜짝 놀라며 자기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사라졌다.
홈즈의 전언은 짧은 만큼 명료했다.
선수를 쳤다는 말은 이번 건이 우리 둘이 함께 획책한 바에 관한 것이란 뜻이었고, 다행히 우리의 교류는 짧았던 만큼 후보군도 좁았다.
나와 그가 함께 알면서, 동시에 영국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 내 머릿속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레오 브레이버리.
왜냐면 레오의 어원인 사자이고, 사자는 영국을 상징하는 동물이니까. 미쳤다는 표현은 그가 지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연상하니, 나는 사무엘이 심부름꾼으로 온 것도 우연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는 당시 수정궁에 없었으니 전언 전문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테고, 동시에 진과 해리스를 연상시켜서 수정궁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그걸 깨닫고는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모든 요소가 정말 그의 안배라면, 홈즈가 지금껏 그 커다란 조직은 은밀하게 유지한 사실도 이해가 되었다.
그는 어떤 사소한 정보도 직접 전하지 않고, 반드시 두어 번 꼬아 생각해야 알 수 있게 했다. 심지어는 당사자와 홈즈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요소로 이뤄진 암호처럼 말이다.
특유의 난해한 유머 감각은 이런 식으로 길러졌을지 몰랐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 셜록 홈즈 아니던가.
"내게 알아보라는 거군."
무심코 홀로 중얼였다. 혹여 누가 들었나 거리 쪽을 살폈지만, 사람들은 분주하게 왕래하기만 할 뿐이었다. 굳이 이런 골목까지 들여다보는 사람은 제복 차림의 여성이 유일했다.
나는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굳이 사람을 보낸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아마 그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라 판단했다면, 굳이 내게 언질을 흘려둘 만큼 착실한 위인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그는 길고 배배 꼬아놓은 전언을 통해서, 내가 직접 알아보라고 독려하는 것이었다. 그 의도를 파악한 나는 골목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공교로운 일이다.
이틀 내리 같은 용무를 가진 손님이 찾아왔다. 그리고 내 오랜 경험에 따르면, 이런 일은 끝이 개운하지 않은 편이다.
눈앞에 진창이 보였다. 건물에서 창밖으로 버린 생활 오수가 고여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좌우로 크게 갈라지며 그 웅덩이를 피해 갔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직진해서 발을 담갔다.
그날 이후, 내게는 야간 일과가 하나 늘었다.
"또 나가요?"
"그래, 아침에 들어올 거야."
최근 날이 쌀쌀해졌기에 두꺼운 코트를 단단히 여미며 나가려는 날 보고 브라운 여사가 물었다. 그녀는 신기한 것을 보는 사람처럼 낮게 감탄사를 내었다.
"왜 그러지?"
"아니요, 허버트 씨 같은 사람도 여자를 만드는구나 해서요."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렸다.
"왜요, 못할 말도 아니잖아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런 용건이 아니면 요 며칠 외박하시는 이유가 뭔데요?"
차마 돌려줄 말이 없어서 신음하니, 브라운 여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서 말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요."
"...그래, 배려 감사히 받지."
변명 조금 하자고,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설명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차라리 나중에 풀릴 작은 오해를 하나 쌓아두기로 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적어도 그녀 입에서는 거짓 소문이 샐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모처럼 나가면서도 찝찝함을 품은 채 밖으로 향했다.
거리에서 지나는 차를 잡아타고, 나는 목적지를 말했다.
"에덴 파크 역으로."
"어디 가시게요, 손님?"
운전수는 여지없이 참견해왔다. 매일 밤, 내가 목적지를 말하면 그들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거기 가는 기차는 다 런던 시가지도 통과해요."
"볼 일이 있어서 가는 거니까 신경 끄게."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그러면 그제야 운전수는 예민한 손님을 태웠구나 하며 입을 꿍 다문 채 출발했다.
그 유별난 손님에 관한 나쁜 기억은 며칠 밤만 지나면 곧 사라질 것이다. 적어도 한밤 중에 정신병원으로 가달라고 하는 손님보다는 덜 인상에 남을 테지.
굳이 조금 떨어진 역 이름을 부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한참 뒤, 말없이 달리던 자동차가 어두운 길목에 멈춰 섰다.
역이 들어오고 조금 개발되었다고 해도 아직은 도시 외곽의 시골이었다. 구석진 입지도 입지였지만, 실은 사람들이 여기 오길 꺼리는 근본적인 원인은 역에서 0.5km가량 떨어진 건물에 있었다.
왕립 베스렘 정신병원.
뭇 소문이 악령처럼 떠도는 건물 주변은 인근보다 서늘하고 침체되었다. 다만 그렇기에 그곳이 정적인 공간이라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쇠창살 벽 주변을 걷기만 해도 예민한 맹견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고, 그때마다 병실에서 공포에 젖은 비명과 울음이 이어졌다.
한번 시작한 아우성은 불길처럼 번져 나가고, 무장한 경비는 귀기 어린 얼굴로 이 소란을 일으킨 주범이 누군지 찾으러 다녔다.
병원이라기보단 감옥에 가까운 경비 체계였다. 문명의 첨단에서 광기란 죄목이다.
반면 나갈 수 없다는 건, 반대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뜻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면회를 요청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전에 한 번 거절당한 전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 시도가 얼마나 멍청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최근 입원한 보편사무국 요원을 만나려는 시도 자체가 눈에 띄는 것이었다.
대신에 나는 7일간 경비의 움직임을 살피기로 했다.
굳이 기간을 일주일로 선정한 이유는 단순했다. 간단하게 생각했을 때, 경비 주기가 순화한다면 일주일이 가장 짧은 단위일 테니까.
또, 그 이상 지체한다면 브레이버리 당사자가 무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시도가 허사로 돌아가고, 한동안 사무국의 종적은 잡을 수 없게 될 터였다.
그렇게 며칠밤을 살핀 결과, 상황은 예상보다 더 나았다.
경비는 매일 밤, 한 시의 오차도 없이 늘 동일했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주변을 배회하며 경비 동선과 일과를 기록했다.
원래는 오늘까지 상황을 볼 예정이었지만,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침입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나는 준비했던 대로 눈에 띄지 않는 그늘진 구석으로 향했다.
4.3미터나 되는 높은 쇠창살 벽이 위엄 있게 서 있었다. 나는 바닥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창살 사이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그리곤 짐가방을 몸에 둘러맨 채, 오직 악력과 한쪽 발만으로 벽을 타고 올랐다. 하늘에는 하현달이 나의 죄를 고발하듯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왔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루나시. 나의 광기가 마침내 고향땅을 밟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