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왕립 베스렘 정신병원
안뜰로 무사히 들어온 것은 좋았지만, 이동은 또 다른 문제였다.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잔디밭 위에는 중앙의 기념비 정도를 제외하면 엄폐물이랄 게 딱히 없었다. 가로지른다면 누가 건물에서 창밖을 보기만 해도 걸릴 만한 그런 상황이었다.
군인 시절 같았으면 낮게 포복이라도 해봤을 텐데, 다리 상태가 이래서는 엎드리는 건 자살 행위였다. 기껏해야 허리를 굽히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마저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 끙끙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렇게 낮은 자세로 서둘러 이동하는 동안, 나는 바깥에서만 볼 때는 몰랐던 위화감을 몇 가지 더 깨달았다.
예를 들어 풀밭이 그랬다.
누구도 밟지 않은 듯이 언뜻 조화롭게 보였던 잔디는 가까이서 보니 풀잎이 꺾여서 바닥에 붙어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정례적으로 누군가 밟고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이 되었다.
어쩌면 경비의 것일지도, 나는 추측했다.
───컹! 컹!
나는 무섭게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봤지만, 개들은 여전히 사슬에 묶여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 대부분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서로 보며 짖고 있었다. 실은 개들은 아까부터 성나게 울어댔고, 평소에도 늘 이런지 경비는 나와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호재였지만, 한편으로는 기이한 일이었다.
개를 풀어두는 것도 아니고 묶어두고, 심지어 상시 짖어서 침입자도 분간할 수 없다면, 대체 어째서 사냥개를 둘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뿐만 아니었다.
나는 영국인치고는 개에게 별 애착이 없었지만, 그런 나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쓰렸다. 밖에서 볼 때는 위협적으로만 느껴졌던 그들이었으나, 입가에 거품이 부글거리며, 흘러 넘친 눈물에 뺨 근처 털은 축축이 젖어서 앙상하게 보였다.
목에는 찢어진 상처가 역력했는데, 지금도 쉬지 않고 당기는 목 사슬에 생긴 상처임이 틀림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 상처부는 이미 노랗게 곪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어떤 부패의 예감을 감지한 파리떼가 계절감도 없이 맴돌았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어쩌면 개를 흥분시키기 위해 위험한 것을 먹였는지도 모른다. 낮에는 이 근방에 개 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평소에는 어두운 곳에 가둬두고 밤에만 인위적으로 흥분시키고 묶어놓는 것이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학대였다.
풀어놓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침입자를 찾아내지도 못한다. 저들은 그저 위협적인 소리를 안팎에 들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것뿐이라면, 정말 개 짖는 소리와 사슬 철컹이는 소리를 내는 것만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 소리를 들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뿐이라면, 그러면 모든 게 말이 되었다.
문제는 효율이다.
이 모든 게 일반적인 병원 시설이라면 필요 없는 구조였다. 물론 정신병자의 탈출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유지하고 있겠지만, 그런 명분마저 무색할 정도로 과했다.
기이하게도 나는 또 다른 장소가 떠올랐다.
도무지 닮은 구석은 없었지만, 이 안뜰을 보고 있자면 프랑크 저택의 가시 정원을 연상한 것이다. 형태는 사뭇 달랐지만, 목적은 여지가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
건물 안에 무언가 가둬두는 것.
아서는 공포를 동력삼아 그 모든 작업을 추진했다. 그렇다면 이 병원에도 그에 준하는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일까.
불안감에 살짝 느려졌던 걸음은 이내 다시 빨라졌다. 막연한 불안보다 발각되는 우려가 더 컸던 것이다. 그렇게 발을 재촉하며 바삐 걸어간 끝에는, 내가 가진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될 근원지가 있었다.
「뇌수술동」
간략한 명패가 흰 외벽에 붙어 있었다.
시멘트로 급하게 지은 듯이 네모 반듯한 건물은 병원의 본 시설과 비교하면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철문은 오랫동안 방치된 폐건물처럼 붉게 녹슬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5월의 꿈에서 봤던 것과 같았기에 당황하진 않았다.
나는 준비한 쇠톱으로 자물쇠를 절단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소리가 컸지만, 상태가 워낙 노후한 탓에 예상보다 품이 덜 들었다.
다행히 그 사이에 나와보는 경비는 없었다. 사전에 확인한 바대로였다.
잠시 후, 나는 끊긴 자물쇠 고리를 조심스럽게 빗겨서 사슬을 풀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다시금 사슬을 문고리에 둘러놓았다.
들키지 않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경비가 태만하다면 적당한 눈속임쯤은 되어줄 것이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쓰지 않는 창고처럼 생긴 어두운 방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철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뇌수술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바깥의 삼엄한 경비가 무색하게도, 안에는 아무런 잠금도 없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안으로는 나 홀로 들어갔다. 제복 차림 여성은 따라오지 않고, 건물에서 나갔다.
───끼이익....
문을 지나서 계단을 내려가자, 서서히 기온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멘트 특유의 무기질적인 백색으로 칠해진 내벽에는 실질적인 한기가 돌고 있었다. 벽뿐만 아니라, 바닥과 천장도 그랬다. 오로지 백색의 공간으로 21세기 현대의 의료 시설을 연상하게 했다.
나는 이내 복도로 나왔다.
환한 불빛이 쏟아지면서 가뜩이나 정없게 보이던 복도는 더욱 살풍경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은 게, 자세히 보면 바닥에는 먼지나 모래 같은 것이 굴러다녔다.
그럼에도 말끔하다는 인상을 받은 이유는 선명한 형광들 불빛 때문이었다.
형광등이라니?
나는 당황하여 천장을 올려다봤다. 불빛을 맨눈으로 본 탓에 건조한 눈이 텁텁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전구 업계에서는 에디슨의 독주가 반세기는 더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명백히 미래에서 온 빛살은 태연히 천장에 붙어서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며 동요를 달랬다.
사실 그리 놀랄 만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겪고 본 것은 이보다 더하지 않던가. 하늘을 덮은 전투기 편대, 100년을 앞선 컴퓨터, 심지어 영원히 시간을 되풀이하는 빌어먹을 열차에도 탄 마당에 이제 와서 형광등이라니.
심지어 나는 이 기술의 출원지도 알았다.
프랑크 올드 패밀리.
그들 엘리트 4인의 비밀 모임은 영란은행 지하 금고에 출처 모를 미래 기술의 설계도를 잔뜩 남겨두었다. 그리고 금고의 열쇠를 네 벌로 복사하여 나눠 가졌고, 그중에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뿐.
남은 세 벌의 열쇠를 우리 적들이 나눠 가진 것은 이미 알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시대를 앞선 기술이라고 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먼 미래의 것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내게는 조금 과거의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요컨데, 여기는 적지 한가운데이다.
무슨 현상이 일어난들 이상하지 않고, 원인을 규명하는 것보다 현상을 타개하는 행위가 더 가치 있었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복도에는 내 발소리만 크게 들렸다. 지상의 병실은 환자들의 소란으로 시끄러운데, 여기는 한기가 돌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처음에 깨끗하다고 여겼던 것도 입구 근처뿐으로, 안에 들어갈수록 비릿한 냄새가 풍기며, 구석구석에 녹색 이끼와 패각 같은 것이 뒹굴어 있었다.
"허억... 허억...."
안에 들어와서 처음 들은 소리는 신음성이었다. 저리 낮은 소리가 들릴 정도면, 내 발소리쯤은 이미 들었겠지만, 나는 의미가 없는 걸 알고도 숨죽이고 말았다.
소리는 폐쇄 병실 안에서 들려왔다.
창은 있었지만, 방에는 어떤 조명도 없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보기에는 웅크린 사람처럼 보였는데, 아무 정보도 없는 나로서는 어떤 징표도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끼익.
"허억... 허억...."
조심히 문을 밀자, 숨죽인 보람도 없이 녹슨 경첩에서 큰 소음이 났다.
하지만 안에 웅크린 사람, 아마도 남자로 보이는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 대신 처음처럼 웅크린 자세를 고수하고 숨을 헐떡거렸다.
"거기, 괜찮나?"
"허억... 허억...."
대답은 없었다.
꼭 아노말로카리스처럼 팔을 구부리고, 등을 굽힌 남성이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복도에서 풍기는 비린내 때문에 몰랐던 피 냄새가 확 풍겨왔다.
"혹시 다쳤나?"
"허억... 허억...."
여전히 숨소리뿐이었다.
"이봐."
나는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엎드린 남자의 어깨를 잡아서 몸을 뒤집었다. 그는 힘없이 굴러서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숨을 삼키며 뒷걸음질쳤다.
남자의 눈두덩에는 뭔가로 파낸 것처럼 안구가 없이 깊은 구멍만 있었으며,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귓구멍에서는 핏물이 흐른 자국이 역력했다. 그의 손, 구부린 손끝에는 붉은 칠이 짙게 묻어서 자해한 흔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놀란 점은, 그가 이미 숨통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방금 시체 숨소리를 들었나? 아니면, 그저 그가 죽기 직전에 들어왔을 뿐인가?
벌써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은 마음을 고치러 오는 곳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이 망가지는 장소였다.
나는 조심히 뒷걸음질치며 방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뭔가가 날아들었다!
방문 옆에 숨죽이고 기다리던 육중한 그림자는 그대로 내 몸을 낚아채고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 날렵한 기습에, 나는 미처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것은 그대로 사냥감을 낚아챈 짐승처럼 목덜미를 잡고 내 몸을 바닥에 질질 끌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마땅한 저항도 하기 어려웠다. 몸부림치면서 그나마 보이는 것은 두껍고 상처가 많은 손이었다.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그 손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아얏!"
거구의 남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악력이라면 요즘 젊은 병사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발로 날 걷어찼다.
"윽!"
옆구리 통증에 손힘이 빠졌다.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어! 도와주는 거니까!"
남자는 체격에 안 어울리는 미성으로 말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지만, 차이면서 폐에서 산소가 빠져나간 탓에 의식이 흐릿했다.
내 몸은 그대로 바닥을 쓸면서 가까운 다른 방 앞까지 끌려갔다.
거기서 그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내 몸을 내동댕이쳤다. 여기도 어둡기는 매한가지라서 보이는 건 없었다.
"악!"
"쉿!"
바닥은 한 바퀴 구르며 앓는 소리를 내니까, 따라 들어온 남자는 내 옆에 쭈그려 앉아서 강제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떤 상황인지도 알지 못한 채, 나는 고분고분하게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밖에서는 어떤 소리나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나는 상대가 적의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입을 막고 있는 손을 힘으로 치웠다.
그는 별 저항도 않고 머쓱한 동작으로 자기 손을 바지에 비볐다.
"당신, 아무것도 모르고...."
바깥쪽을 살피던 남자의 고개가 내 쪽으로 빙글 돌았다.
그리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표정을 한 마디로 서술하자면, 경악이었다. 그는 하던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말 더듬었다.
"다, 다, 당신!"
"어쩐지, 들었던 목소리라고 했지."
덩치 큰 남자, 그보다는 살집이 좋다고 해야 할 레오 브레이버리는 좀 전의 당당함은 어디 갔는지, 내 눈치를 살피며 비 맞은 개처럼 벌벌 떨었다.
나로서는 조금 억울한 반응이었다. 내가 그를 막대한 적도 없을 텐데.
"보기보다 발힘이 좋더군."
"아, 아니, 그건 조용히 시켜야 해서...."
"됐고, 설명이나 하게."
내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다.
우리는 어두운 방에서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기다렸다. 그 긴 고찰 끝에 브레이버리가 내놓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뭘요?"
"아, 그래, 미안하네. 순서상 내가 설명하는 게 낫겠어."
나는 멋쩍어하며 말을 번복했다.
"자네를 구하러 왔네."
"구하러 왔다고요?"
브레이버리는 반색하며 되물었다.
"그래, 조금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방금 차이면서 마음이 좀 바뀌었지."
당연히 농담이었지만, 브레이버리의 안색은 대번에 창백해졌다. 골리는 재미가 있는 청년이다.
"농담이죠?"
"같은 농담 여러 번 하는 취미는 없네. 시시한 얘기는 나중에마저 하고 일단은 여기서 나가지."
그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문으로 나가야지."
"그뿐입니까?"
나는 브레이버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뜻인가?"
"그냥 안으로 들어왔을 뿐이라고요?"
그의 얼굴은 서서히 불안에 차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이럴 수가, 당신 같은 사람까지 당할 줄이야... 저는 분명, 분명 뭔가 조치를 했을 줄 알았다고요!"
"영문 모를 소리 그만하고,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말해보게."
"모르시겠어요? 자물쇠는 속임수예요!"
브레이버리는 크게 소리 질렀다가, 그 소리에 덜컥 자기가 겁먹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함정이라고요. 들어오면서 당신도 봤을 거 아니에요. 경비가 삼엄한 척하지만, 실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잖아요. 공백이 긴 순찰 시간이나, 침입자를 못 잡는 미친개나... 애초에 누가 이런 중요한 시설을 그렇게 낡아빠진 자물쇠로 잠가두겠어요!"
나는 지체 없이 벽을 집고 일어났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서 급히 복도를 걸었다. 브레이버리는 허둥대며 내 뒤를 쫓았다.
"저도 똑같이 당했습니다."
브레이버리는 따라오며 설명했다.
"원리는 모르지만, 병원 놈들은 문이 열릴 때, 어떻게든 알아내는 방법이 있는 거죠. 침입자를 막지 않는 대신, 누군가 들어오면 그대로 잠가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뇌수술동 안쪽 문을 통과해서, 녹슨 철문에 도착했다. 나는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내가 두고 온대로라면 자연히 열렸어야 하는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손에 힘을 주다가, 나중에는 어깨로 밀기까지 했으나,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겼군."
어찌나 낙담하는지, 브레이버리를 보자면 나는 기운 빠진 시늉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제가 여깄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자네 어머니에게 들었지."
나는 이어서 말했다.
"자네 것이라면서 분골함을 가져오더군."
브레이버리는 말을 이해하는 게 버거운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자네는 밖에서 죽은 사람이야."
그제야 그는 무덤에 파묻힌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