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28화 (128/232)

§128. 레오 브레이버리

"이봐, 궁상 좀 그만 떨어."

"이젠 아무 희망도 없어요."

굳게 닫힌 철문 옆에 주저앉아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처박은 브레이버리는 질리지도 않고 우울한 소리만 계속 지껄였다.

"우리는 여기서 죽을 거예요."

"더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않았나."

나는 위로에 서툴러서는 이보다 해줄 말이 더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내 식으로 기운 차리게 해보라고 한다면, 멱살을 잡고 일으켜서 다그치는 것쯤이 떠올랐지만,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았다.

그렇다고 목적인 그를 여기 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서 있자니 다리가 슬슬 아파오기도 했다.

결국, 나는 벽에 기대어 지팡이를 내려놓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자네, 어머니에게는 군인이라고 속였더군."

"그건 어떻게...."

그는 묻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제 어머니와 만나셨을 테니 그때 들으셨겠군요."

"언젠가 들킬 거짓말은 왜 했나?"

내 질문에 그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뭔가?"

"아니요."

하지만 그는 용케 감정을 정제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어머니의 바람이셨습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고국을 지킨 조부처럼 강성한 장병이 되는 거요."

"그러지 그랬나."

나는 말했다.

"그럴 기회는 있었을 텐데. 대신 자네는 그저 거짓말을 한 거고."

"여지가 없었어요."

"살이 쪄서 입대를 못했다는 경우는 못 들어봤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럽니까?"

브레이버리는 욱한 말투로 되물었다.

"사실은 내가 자네 어머니보다 자네 직업에 대해 잘 아는 편인데 말이지."

그러자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날 내려다보며 소리 질렀다. 어두운 창고 건물에서 문틈 사이로 비치는 빛에는 시뻘건 얼굴이 투과되었다.

"다, 당신처럼 날 때부터 뛰어난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범인에게는 범인의 고충이 있습니다! 저라고 노력을 안 한 건 아닙니다! 또 이렇게 말하겠죠! 왜 사람들하고 어울리질 못하느냐고, 왜 운동을 안 하느냐고!"

말까지 더듬으며 외치는 그의 성격이 어쨌든, 나보다 한참 젊은 거구의 청년이 그러는 모습은 꽤 위압감이 있었다.

"그런 말까지는 안 했네만."

"기회만 있으면 하셨겠죠!"

"그건 부정 못하겠군."

그는 호흡 곤란이 온 환자처럼 얼굴을 울긋불긋 부풀렸다.

"그런 것에도 재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그 알량한 재능이 없어서 평생 부모를 속이며 살 생각이었나?"

브레이버리는 변명하려는 듯했지만, 곧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우물쭈물거렸다.

"피, 필요하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고, 그는 내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시 앉았다. 이럴 거면 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군인이 되는 게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제게는 다른 수가 없었어요."

"형제는?"

"브레이버리네는 우물에 똥물을 뿌려서 저주가 들렸대."

돌아온 대답은 영문 모를 곡조였다.

"동네 또래 꼬마들이 절 놀리면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위로는 둘, 아래로는 셋이 있던 형제는 어릴 적에 다 죽었습니다."

"이런, 유감이네."

생각보다 상투적인 위로문이 먼저 나갔다. 나는 말실수를 깨닫고 눈치를 봤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돌림병이라도 돌았다면 모르겠지만, 모두 다른 이유로 한 명씩 한 명씩 죽어나갔죠. 집안에 저주라도 들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함께 살던 집안 어른께서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아버지까지 돌아가시자, 어머니께서는...."

브레이버리는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말을 기워 붙였다.

"어머니께서는 집에 있는 가구를 모두 태웠습니다. 증조부 때부터 내려온 값비싼 것들이었지만, 어머니 당신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죠. 그때 대대로 내려온 조상의 그림, 심지어 우리 가족사진마저 태워서 이제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늙은이처럼 한마디 했다.

"악재로부터 자네를 지키려 한 거야."

"미신이죠. 아무튼 그 덕인지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홀몸으로 저를 손수 기르며, 혹여나 제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14살까지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죠."

그의 모친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잘 차려입었으나 병들고 추레한 그 모습이 자식 걱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전부터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보여준 대담한, 심지어 광인처럼 보이는 행동력의 원동력도 어쩌면 알 것만 같았다.

"어머니께서 제게 바란 건 하나뿐입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돌아가신 조부처럼 제가 훌륭한 군인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든 걸 받았지만, 단 하나의 기대에만 부응하면 됐습니다. 저는 그게 간단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브레이버리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전에 기차에서 만났을 때,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영웅이란 본디 타고나는 것이라고. 저는 영웅까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남자다워지려고 애국심을 기르려고도 노력해봤고, 거친 불량배와도 어울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항구 일도 나가서 돕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 점차 분명해졌죠.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의무감과 현실의 괴리, 저는 그리고는, 그리고는."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은 문장은 내가 완성했다.

"거짓말을 했군."

"보편사무국에 취직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총을 다룰 수 있는 부서까지 들어가게 되었죠. 저는 그걸 보자마자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총을 보여 드리면서 군인이 되었다고 하니 철석같이 믿으시더군요."

브레이버리는 고소를 머금었다.

"자네 상관은?"

"제 사정을 아는 분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되었다.

그의 모친은 밖을 나돌아다니기에 여의치 않은 몸이었다. 그러니 이런 눈 가리고 아웅식인 속임수도 통한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브레이버리가 대뜸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어쩌고 계십니까?"

"나는 그렇게 강한 여인을 몇 몰라. 자네 분골함을 받자마자, 자네가 죽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고 인근 납골당을 털었다더군."

그는 아연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농담이죠?"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더랬지. 하지만 그 행동원리 자체는 논리적이었어. 뼛가루 무게를 비교해서 분골함에 든 게 자네 뼈가 아니란 걸 증명한 거니까."

"하지만, 그건... 그건 완전히 미친 짓이잖아요!"

"자네가 죽는다면 그렇게 되겠지."

내 대답을 들은 브레이버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간다면, 현명한 여인이 보여준 통찰력이 될 테고.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런 법 아니겠나. 자네는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어서 안 돼."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 주변에는 문틈 새로 비치는 달빛도 닿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침묵을 깬 것은 내 쪽이었다.

"수정궁에서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것은 21일 새벽이었어. 그리고 그 다음 날인 22일 점심에 자네 어머니가 자네 분골함을 들고 왔지. 대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런 곳에 갇힌 건가?"

브레이버리는 한참 고민하며 말이 없었다.

"이 지경에도 말 못할 일인가?"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발."

결국,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곳에 앉아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말을 하면서 체력을 많이 쓴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브레이버리는 내 눈이 반쯤 감기고서야 입을 열었다.

"사실 그날, 당신 뒤를 밟은 건 사무국의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제 의지였죠."

뜻밖의 사실이었다.

"거기다 당신과 접촉하는 건, 사무국 내에서 금지된 행위입니다."

"그건 어째서지?"

정당한 질문을 했더니, 브레이버리는 그게 말이냐는 듯이 정색했다.

"우리는 장님도, 귀머거리도 아닙니다. 작년부터 이어진 연속된 사건들... 제이콥 섬 침몰, 지킬 박사 살인, 웨스트 노우드 카타콤 붕괴, 거기에 SMR 웰스호 사건까지. 그 일련의 사건에 공통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쯤은 당초부터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정체를 파악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를 '절뚝거리는 신사'라고 불렀죠. 당신 말이요."

나는 그의 말에 솔직히 놀랐다.

물론 여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신이 없어서 은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지만, 그 정도로 자세하게 정황을 파악하고 있는 집단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당신은 알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나도 때때로 그렇게 느끼네."

"아십니까?"

"그래, 주로 아침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되곤 하거든."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큰 결심을 하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브레이버리는 웃지 못하고 성질 냈다. 이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었다.

"아마 당신도 알겠지만, 런던에는 혼란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무국은 이런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당장 목적을 알 수 없고, 한시적이나마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당신을 굳이 적대하지 말자고요. 철저히 국의 존재를 은폐하고 감시하다가, 목적을 확인하면 그때 다시 상정하기로 말입니다."

나는 상상 이상의 취급에, 천천히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을 하자는 게 아니라, 순전히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

"슬슬 자네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궁금한 참이야."

"우선은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에, 왕실이 인정한 남작이죠. 전쟁 영웅이면서 상류 사회의 이단아이기도 하고요."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3대 수사국장과 막역한 사이에, 수사국 자체와 깊이 연관하고 있죠. 그러면서 런던 암흑가에 한 발 걸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들리지 않나."

"런던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 올드코트 학장의 대리인 역을 자처하고 있고요."

"...뭐."

"현장에서 적발되고도 두 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죠. 대단한 돈이 오갔다던데요."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어서 조금 기분이 나쁜 참이네."

"하나만 더 하자면 당신의 형제, 배즐 남작은 우리 쪽에서 유명인입니다."

"그 자식은 사기꾼이야."

내가 딱 잘라 말하니, 그는 하던 말을 멈췄다.

"저 같은 요원 수준에서는 모르는 정보니까 괜찮습니다."

모순적인 말이었다.

나는 잠시 뜸들이다가 물었다.

"이런 걸 내게 말해줘도 되는 건가?"

그는 의외란 듯이 날 바라봤다.

"내 말은, 이런 건 대체로 내부 비밀 아닌가. 게다가 나는 타인도 아니고, 자네 사무국이 조사하는 당사자일 텐데."

"정정당당하시군요. 당신이야말로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뜻밖이었다.

내심 나는 어쩌면 그가 흥분하거나 절망한 나머지 술술 털어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상황을 제대로 분별하면서 심지어 내 배려까지 곧바로 간파할 만큼 여유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요령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런 얘기를 다 듣고는 그러려니 하는 건 신사답지도 않고 말이지."

"본인이 그렇게  말합니까?"

나는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래, 연초쯤부터 신사 노릇 좀 하기로 했네!"

브레이버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어차피 나가지 못하면 죽을 텐데요."

그 말은 정론이었지만, 그가 이토록 딱 잘라 구분할 성격은 아니었다. 어쩌면 아직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사연이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바로 떠올랐다.

그는 말했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무슨 도움?"

나는 그처럼 수수한 자가 이렇게 날 여러 번 놀랠 줄 몰랐다.

"돕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굳이 자네가 내게 손 벌릴 일이 있나? 내가 파악한 바로 자네가 몸담은 집단은 그리 규모가 작지도 않을 텐데. 애초에 보편사무국이란 게 대체 뭐지?"

그러고 나는 그의 살찐 옆모습을 바라봤다.

"당신은 일반인이 아니니까 말해도 괜찮겠죠. 적어도 보호 대상은 아니니까요."

"지금 사람 차별하는 건가?"

"위에서는 당신이 사람이라고도 확신 안 해요."

브레이버리는 이제 웃을 줄도 알았다. 허탈한 웃음이었지만, 적어도 시체처럼 딱딱한 얼굴보단 나았다.

"그러면 제가 전부 아는 만큼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은 내게 익숙한 연도와 함께 시작했다.

"귀족원과 왕실에서 처음 이상 현상을 관측한 것은 1645년입니다. 유래는 이보다 길었지만, 공식적인 회합을 가져 문제 삼은 건 그 해가 처음이었습니다."

역사의 암막이 막 들춰지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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