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31화 (131/232)

§131. 狂의 궁전

질문에는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무례하다고 탓할 수도 있겠으나, 이유는 더러 있었다. 우선 우리 중에는 아폴로라는 이름을 쓰는 자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 목소리부터가 실재하는지 의문이었다.

찬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꺼진 촛불 잔광을 본 적이 있는가? 혹은 거센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튄 물방울이 옷 끝자락을 적신 적이 있는가?

목소리는 그만큼 희미하고 비현실적이었기에, 어쩌면 그저 환청을 들었을 뿐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동행자도 꼭 나처럼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가 침묵하자, 불행하게도 목소리는 다시 제 존재를 알렸다.

"그대인가, 아폴로?"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인이 분명한 그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생명이 꺼져가는 듯했는데, 정작 살고자 하는 의지도, 죽음을 향한 공포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이전에 생물로서 결핍되어 있었다.

"자네야말로 누구인가?"

질문에 질문으로 돌려주는 게 바람직한 대화법이 아닌 건 분명했지만,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질문 자체가 워낙 생뚱맞지 않은가.

아폴로라고 하면 태양신의 이름인데, 정작 여기는 천구보다는 내핵의 열기에 가까운 곳이었다. 심지어는 공사에 쓰인 시멘트 한 방울조차 햇빛에 닿아본 적 없어 보일 만큼, 시설 자체가 어둠에 속해 있는 그런 장소였다.

그런 곳에서 태양을 부르며 찾는다는 건 얼마나 맥락 없는 행태인가.

"자네는 누구길래 그리 막연한 질문을 하나?"

"서운하니 모른 체하지 말아주게. 나는 그대의 막역한 벗이거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를 아는 체했다. 하지만 나로선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답답하고 짜증 나서 비꼬듯이 물었다.

"만에 하나 내가 아폴로라면, 그러면 자네는 무슨 신인가?"

"신이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신이라고? 아니, 절대 아니지.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는 법이야."

그랬더니 도리어 목소리는 깜짝 놀라며 부정했다.

"인계와 신계는 마치 지상과 저 우주처럼 떨어져 있어서, 밤마다 보고 상상할 수는 있어도 결코 접하지는 않는다네. 그러니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는 거야... 신이 되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한 법."

"피?"

"성혈! 그래, 더도 덜도 말고 한 방울이면 족하지. 인간과 유인원 같은 거네. 아주 작은 차이야. 한없이 닮았지만, 피에 섞인 한 방울로 그토록 큰 차이가 벌어지지. 인간과 신도 마찬가지네. 신성이란 선천적인 거야."

이 선문답이 지긋지긋해져서,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병실 문으로 다가갔다.

"위험합니다!"

브레이버리는 이번으로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를, 똑같은 말로 나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문을 잡아당겼다.

잠금은 없었고, 문이 열렸다. 예상과 다르지 않게, 안에는 행색 나쁜 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여기 수년은 족히 갇혀 있었던 것처럼 마르고 추레했으며, 겉보기엔 꽤 고급으로 보이는 옷은 행주처럼 그 빛깔을 잃었다. 안면에는 정교회 신부처럼 길게 기른 수염이 바닥을 쓸었으며, 수염 사이로 보이는 입에는 누르스름한 이빨이 간신히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특이점도 이것에 비하면 사소했다.

그건 나로서도 드문 경험이었는데, 안면 한가운데서 텅 빈 구덩이를 두 개나 발견한 것이다. 원래 안구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어떤 것도 없이 역겨운 어둠만이 고여 있었다.

나는 약간 기분이 나빠지기는 했으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신학을 논하러 온 건 아니네. 그저 난해할 뿐인 장광설이라면 더더욱 사양이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둘 뿐이야. 자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노인은 낯선 외국어를 들은 것처럼 하염없는 표정을 짓더니, 곧 말했다.

"나의 이름은, 미처 까먹고 말았네. 이해해 주길 바라. 하지만 자네가 정 나를 부르고 싶다면, 그저 범인류(Pananthropos)라고, 혹은 간단하게 벗이라고 불러주게."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헛소리였다.

심지어 발음하기조차 힘든 범인류라는 표현은 생전 들어본 적도 없었으며, 무슨 뜻인지 간신히 유추해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대답이지만,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물었지. 그건 기억하고 있지만, 대답하기는 더더욱 난처한 일이야. 우리 둘은 서로의 고립계여야 한다는 지엄한 율법이 있지 않나. 그걸 아는 자네가 어째서 내가 하는 일에 그리 관심갖는지, 나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아폴로, 자네는 정말 아폴로인가?"

노인은 쉽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러는 와중에 그는 제법 이성적인 대답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그저 광인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나는 판단을 바꿔야 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의 의심에 찬 질문은 지금 내가 상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초가 되어 주었다.

아니,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뚜렷한 질문을 하지 않았던가.

"아폴로, 어느 아폴로를 말하는 거지?"

"그레고리오스 칼라스, 물론 자네 말이지!"

실은 내가 선문답이라 오해했던 그 질문은 훨씬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그는 신학적 난제를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를 또 다른 아폴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착각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걸 조합하면 이런 이름이 나왔다.

아폴로 그레고리오스 칼라스.

그리고 나는 그 이름을 잘 알았다. 그리고 어째서 눈앞의 맹인이 날 그자로 착각했는지도 얼추 짐작되었다. 모를 수가 없지, 그를 쏴죽였던 게 바로 나니까.

아폴로, 그는 올드코트 대학의 전 학장 대리였으니.

노인은 내가 이어받은 직책을 보지도 않고 정확히 간파해서 물은 것이었다. 그 통찰 끝에, 나는 전율스러운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학자적인 어휘 사용, 신학적인 은유, 내 정체에 대한 통찰... 이보다 더 뚜렷할 수 있을까?

모두 그가 올드코트의 관계자, 그것도 학장에 깊게 관여한 인물임을 나타냈다. 세 개의 칼리지, 세 명의 학장 대리. 나는 확신을 담아서 물었다.

"제임스 타운 칼리지로군. 맞지?"

"그러는 자네는 아폴로가 아니군."

"그래, 그의 후임이네."

그 대답을 듣자,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으나 노인의 얼굴에 인간적인 감정이 스쳤다.

"그래, 아폴로는 죽었나."

회환, 향수, 공포. 그리고 끝이었다. 그는 다시 처음처럼 광인의 행색으로 돌아왔다. 잠깐이나마 그가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던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저기,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끼리 대화하자, 브레이버리가 등 뒤에 숨어서 낮게 속삭였다.

"단순해. 그는 나를 전임자와 혼동했지. 그리고 자네도 알듯이, 대학 내 칼리지는 서로 교류해서는 안 된다는 학칙이 있으니, 그걸 언급하는 걸 보고 그가 타 칼리지 인물일 거라 유추한 거네."

"차라리 계속 전임자인 척하지 그랬습니까!"

"나는 자네들이 아폴로건, 아폴로가 아니건 아무 상관 없네."

대답한 건 노인이었다. 그렇게 다 들리게 속삭여놓고, 브레이버리는 상대가 자기 말을 들은 게 퍽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인류를 구분하지 않네. 누구라도 같게 대했을 거야."

이 괴짜와의 대화는 정말 지치는 일이었다.

달밤에 정신병원 지하에서 갇혀서, 환청과 악취에 시달리면서, 이제는 살아 있는 광인까지 뜻 모를 말을 계속 주절거리고 있었으니, 나로선 오래 참은 셈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짜증 내며 물었다.

"자네의 철학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아. 내 질문에나 마저 답하게. 대학은, 제임스 타운 칼리지는 여기서 뭘 꾀했지? 그리고 아직도 여기 남은 의도가 뭔가?"

노인은 가냘픈 몸을 부들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저들과 거래를 했지."

"저들, 누구?"

"들짐승."

"내가 자네한테 영어를 다시 알려줘야 하나? 더 자세하게."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꿋꿋이 추상적인 어휘를 고집했다.

"성체聖體 주위를 배회하는 대제사장들이지. 아, 저들이 어쩌다 한 번은 성공했을지언정, 두 번째는 안 되지. 그렇고말고."

드문 표현을 쓰는 만큼, 그것이 성경에 관한 은유라는 건 간신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아서라면 알까, 나는 언젠가 묻기 위해 대화 내용을 암기했다.

"들짐승, 대제사장, 정말 그따위 이름을 가졌을 리는 없을 텐데."

"아, 그래, 그 이름은 보편사무국이라고 했네. 그들의 우행에 동조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들이 우리에게 없는 걸 제공해줄 수 있는 건 분명했지."

그 이름에 반응하듯 브레이버리의 어깨가 떨렸다.

"그건, 아주 사악한 거래였지. 허나 그 어떤 악행도 고결한 착상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결과가 공익으로 이어진다면 정당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구하려 했던 거야...."

"누구를?"

내 질문에 노인은 눈꺼풀을 부릅떴다.

"인간!"

빈 동공 너머로 광기가 언뜻 새어나왔다.

복도의 불빛이 점멸했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곧바로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러자 거기 있던 노인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묶여서 썩어가는 인골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브레이버리는 비명을 질렀다.

"더 들어가선 안 됩니다! 여긴 정말 이상해요! 있다가는 미쳐버린다고요!"

"잠깐, 진정하게."

나는 발광하는 그를 붙잡아 세웠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네."

"네?"

"방금 노인이 사라진 걸 보고, 나는 여기서 상식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듣게."

브레이버리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멍한 얼굴을 했다.

"아까 자네는 이렇게 말했지. 병실 안의 여인이 일주일 넘게 거기 서 있고,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아서 인간이 아닐 거라고."

"네? 네, 네... 그랬었죠. 그게 왜요?"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눈을 끔뻑거렸다.

"지난 9일간 자네는 여기 홀로 있었지. 입구 쪽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는데, 자네는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어. 애당초 안에 시체가 있는 줄도 몰랐지 않나."

나는 물었다.

"자네는 누구야?"

복도의 불이 점멸하고,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질 무렵, 눈을 뜨니 눈앞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해. 이건 정말로 이상해."

언제부터 가짜였지? 뭔가 바뀐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와 만나지 못한 건가? 그러면 지금까지 그를 흉내 낸 것은 누구지?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홀로 안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계속 복도를 돌면서,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밖으로 무사히 나갈 통로가 있다는 기대는 진작에 접었으나, 나는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아직까지 브레이버리의 것으로 보이는 시체도 보지 못했으니, 그가 안쪽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서둘러야 했다.

옆으로 지나는 병실의 모습들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다.

병실 안쪽에서 "35세남성앵글로색슨코카소이드옅은갈색머리털푸른눈신장67인치체중10스톤9파운드." 이런 말소리가 들리길래, 쇠창살 사이를 살짝 들여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대신 안쪽에는 달빛처럼 은은한 빛이 어디선가 내려왔는데, 천장 위로는 땅 무더기만 수 미터 쌓여 있을 테니, 어디로도 외부의 빛이 들어올 환경이 아니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쳤다.

그러는 동안 노인, 그 범인류를 자칭한 자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계속 맴돌았다.

"시대 흐름에 맞게 발전해온 생리학과 달리, 정신과 신체는 언제나 유리된 영역으로 구분해왔다. 이는 인간의 영혼이 고결하여, 물질계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원시적인 믿음에 따른 무지한 안주였다. 반면, 현대 의학은 어떤가. 모든 정신 활동이 뇌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않았는가. 그들은 이미 정신병 증상 또한 육체적 결함에서 발상한다는 합리적인 추론 영역에 도달했다."

또는 이랬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에 돌아보니, 심해처럼 깊은 어둠이 실내에서 유동 치고 있었다. 기묘하게도 뚫린 쇠창살 사이로는 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방은 폐쇄되었으니 고인 물일 텐데, 노르웨이 앞바다처럼 거대한 물살이 연달아 몰아치고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물속 깊은 곳, 방의 구석에서 나는 어떤 인형의 그림자를 봤다. 쭈그려 앉아서 정면을 보는 사람의 형체였다. 파도는 거기서 시작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특별한 신체 기관이 있어서, 물질계와 정신계 양측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기관은 바로 뇌의 정중선에 있는 세 번째 뇌실 뒤에 위치하며, 두 개의 대뇌반구 사이에 있는 송과체이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날카로운 통찰력이었으나 어떤 초인이라 한들 시대는 넘지 못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틀렸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어딘가 쓸 데가 있겠지...."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복도는 뜻밖에도 금방 끝났다.

나는 지금까지 천편일률적이던 병실과 달리, 크고 널찍한 방을 발견했다. 잠금은 걸려 있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복도의 환한 불빛으로 알아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건 수술실처럼 보였는데, 어디선가 본듯하다 싶더니 올드코트 대학 비밀 통로 끝에 있는 것과 꼭 닮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것이라면 본래 피눈물을 흘리는 태양 무늬만 그려져 있었던 그곳과 달리, 이곳 태피스트리에는 십자가, 초승달, 육망성, 메노라부터 내가 알지 못하는 이교의 상징물 등, 갖은 종교적 심볼이 산재해 있었다.

지금껏 누구도 이렇게 많은 종교를 규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여기는 수술실보다는 만교박람회쯤으로 보였다.

그중 나는 한 시설물에 눈이 갔다.

모든 수술대가 비어 있었는데, 이곳에만 뭔가 올려져서 천에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길하게 느끼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것을 확 걷어 내렸다.

"망할."

입에서 무심코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건 시체였다.

지금껏 봐왔던 것들과 달리 부패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두개골이 열려서 뇌가 보이는 모습을 보면 살았을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 시술대 위에 올려진 종이를 들어 올렸다.

"연령 35세, 신장 67인치, 체중 10스톤 9파운드."

(*약 172cm, 68kg)

문서는 그런 기계적인 문장으로 시작했다.

"평소 경미한 우울감을 호소했으나, 런던 노동계급 평균에선 벗어나지 않는다. 왼쪽 귓바퀴의 흉한 흉터가 있으며, 신체적 콤플렉스를 느낄 수도 있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플리머스 시에서 보냈으며, 성인이 되어 런던 상경 후 적격성을 인정받아 국에 채용되었다."

나는 다시 시체를 살폈다. 여기 적힌 대로 왼쪽 귓바퀴가 짐승에서 물어뜯긴 것처럼 큰 흉터가 남아 있었다. 내용 자체는 흔한 입원 기록처럼 보였으나, 그 내용이 세밀한 점이 유독 불쾌했다.

"1885년 런던 탑 사건 이후 심한 간질 발작을 호소, 빈번한 자해 시도가 발각되었다. 일당 모르핀 10mg을 안약으로 투여했다. 처방 14일째, 양 눈을 스스로 파내어 자해 후 발견되어 지혈, 소독하고 뇌수술동으로 전동轉棟 했다."

그 아래에는 추후 쓰였는지, 필체가 다른 간략한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1886년 1월 5일, 시술 허가."

시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왜 미처 몰랐을까? 너무 자명하여 어째서 바로 떠올리지 못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여기가 격리 시설에 불과하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곳은 뇌수술동이다!

종이 위로 아까는 보지 못했던 문장이 떠올랐다. 실내가 어두운 탓인지, 아니면 이조차 환각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었다.

"마음은 뇌에 붙은 장기다. 우리는 외과적 시술을 통해 정신을 고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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