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융, 지구는 푸르지 않다
"그건 고결한 착상이었다."
복도로부터 긴 그림자가 발치까지 드리웠다. 어느새 나타난 노인은 비어 있는 안구 너머로 날 응시하며 말했다.
"현인은 무지를 추구하되, 우자는 앎을 갈망한다. 이런 모순 속에서도 이해는 맞아떨어졌다. 내가 전한 계획은 온전히 전달되었고, 저들 보편사무국은 착실히 나의 구상을 구현했다. 시설이 완성되었고, 남은 것은 표본뿐이었다. 대학에서는 구할 수 없었지만, 저들은 그것마저 기꺼이 제공했다."
나는 수술대 위에 놓인 시체를 내려다봤다.
"미쳤군."
"치료를 베푼 것이다!"
노인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멀쩡한 사람의 두개골을 가르고, 뇌를 파헤치는 것 말인가?"
"그는 온전하지 않다. 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렇다. 사람은 모두 손상되어 있다. 뭇 생명이 품은 결함을 인간마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인간과 짐승이 저 웅덩이 속에서 함께 뒹굴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지성과 통찰이 고작 세상 일부여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 목소리는 점점 병들어 사그라졌다.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그는 어느샌가 처음 봤을 때처럼 병든 노인네처럼 움츠러들어 있었다.
"나는 끝내려고 했다... 그대는 아까 내게 이렇게 물었지. 여기서 뭘 했느냐고. 학장의 핑계를 댔던 것은 거짓이다. 여기서 행해진 모든 일은 나의 죄업이기에, 너무나도 말하기가 힘들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두렵고, 힘이 벅차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복도의 전등이 깜빡거리며 불빛이 흔들렸다. 그때마다 노인의 그림자도 춤추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거나 짧아지거나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에도, 나는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망상을 품고 있었는지 몰라도, 이 모든 악몽과 광기를 그가 만들어낸 것은 틀림없었다.
오히려 그의 이성적이고 약한 면모는 나의 분노만을 이끌어냈다.
"나는 끝내려고 했다."
"무엇을?"
"원죄."
노인은 말했다.
"무엇이 우리를 좀먹는가. 어째서 우리는 상승을 두려워하며 정체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음을 상상하며, 너무나도 필연적인 결과로부터 도피하고자 헛된 노력으로 인생을 낭비한다. 신이 인간을 설계했다면 이 결함은 무엇인가? 오만에 빠지지 말라는 전통적인 교훈인가? 인생의 가치를 설파하려는 수작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는 그저 실패자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 것이다! 승천 말이다!"
움츠러든 그림자가 산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길어졌다. 서서히 달아오르던 노인의 흥분은 금방 고점에 이르렀다. 나는 그의 관심을 돌릴 생각으로 말을 걸었다.
"오만하고, 이단적이군. 내가 아는 바와 다르지 않다면, 올드코트 대학은 수도원이라 불릴 만큼 신학적인 성격이 강할 텐데?"
"아, 올드코트.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이라. 그자를 말하지 않을 수는 없지... 피차 우리는 학장으로 이어진 관계 아니던가...."
나는 그가 대답하는 사이에 재빨리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붙잡은 단단한 철체가 무엇보다 마음에 위안을 줬다.
"그건 뭐지? 총인가?"
"헤아려 주시니 영광이군. 덕분에 자기 보신하겠다고 촌스러운 협박문을 읽지 않아도 되겠네."
"그대처럼 강한 무기를 가진 이가 고작 그따위 것을 들고 무장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보기 사나운 일이네. 내게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그는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훈계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쩌면 심해의 마법을 꿰뚫어 보고 한 말일까, 그는 평범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았으니 그랬다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제임스 타운 칼리지에는 예로부터 한 가지 업무가 주어졌다. 그대도 이미 아는 바이겠지만, 성 헨리 8세 칼리지에서 오는 졸업생을 맡는 게 그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보았던 그 수술실의 광경을 떠올렸다.
"모든 졸업생의 뇌에는 어떤 공정을 하게 되었다. 뇌의 정중선, 세 번째 뇌실 후면, 대뇌반구 사이에 있는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부위를 절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번 나타나는 이들이 누구이며, 또 이런 작업에 어떤 진의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 이런 의무를 우리에게 지운 것 또한 학장의 안배였지."
설명은 모순적이었다.
"어째서지?"
더는 그의 관심을 돌릴 이유는 없었지만, 나는 순전히 호기심에 이끌려 물었다.
"오랫동안 나는 자네들이 학장의 계획에 협조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성 헨리 8세 칼리지가 학장을 위한 뇌를 키우는 목장이라면, 다른 두 칼리지의 역할이라면 목동과 푸주한 아니겠나."
"숲 짐승은 하늘의 새를 보고, 새가 지상의 모든 일을 알 거라 착각하겠지. 하지만 새는 수풀 속에 가려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법."
노인은 그치고는 알기 쉬운 비유를 들며 설명했다.
"한 번도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나? 엠블럼, 문양, 칼리지의 이름까지, 그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사마저 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성 헨리 8세 칼리지만 하더라도, 어찌나 이상한 이름인지 알았다. 튜더가 패하고, 플랜태저넷이 승리한 이 세계에는 존재할 리가 없는 왕, 그 이름을 딴 대학의 칼리지...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에 대한 해답은커녕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태양이 뜨면, 밤이 진다. 그렇다고 별과 달, 저 하늘의 무수한 신비가 그대로 사라지는가? 아니, 태양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하다. 오히려 어둠이 아닌 저 광채야말로 사람 눈을 속이는 장막이다."
이번에도 그는 또 다시 비유를 들었지만, 여기서 태양이 누굴 의미하는지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굳이 그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우리, 제임스 타운 칼리지의 숙명은 위대한 무지다."
노인이 웅성거리며 말했다.
"그대도 같은 계시를 보았을 테지, 불가시의 너머, 지상의 모든 땅을 빼앗기고 인류가 패퇴하는 그 순간을! 그리고 그게 환각이나 꿈 따위가 아닌 것도."
나는 부정하려 했으나, 입만 달싹거리다가 말았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늘 해왔다. 그날 꿈속에서 에드워드와 달리 학장은 그의 지혜를 통해 자신이 본 풍경을 온전히 내게 전했다.
그것이 실제 일어날 일이건, 그렇지 않건, 학장의 믿음은 분명했다.
나 역시 어느 한때는 그가 보여준 미래를 믿고, 그가 구원하리라고 맹목적으로 따르기도 했다.
"지식은 해롭다. 인간의 정신에서 이뤄지는 모든 인지와 각성, 그것들은 우리 적이 능히 사용하는 것이지... 그러기에 우리는 학장에게 간택되었다. 누구도 묻거나, 의문을 품지 않는다. 모든 직무에 충실하며, 최후의 순간이 다가올 때,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고립되어서 살아남을 민족으로 선택된 것이다. 무지를 숭상하는 풍조가 깃든 제임스 타운 칼리지이기에, 누구도 맡은 의무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지."
그가 말하는 진실은 워낙 충격적이라, 나는 현실에서 듣고 있는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그게 사실이라면 학장의 계획은 원대하다 못해 과대망상적이었고,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이룩해놓았다. 핏물에 잠긴 에덴동산이다!
그때 나는 아까 보았던 가면을 떠올렸다.
그 용도를 마침내 이해한 것이다. 모든 감각을 차단하는 고문기구처럼 보였지만, 실은 달랐다. 의사가 균을 피해 가면을 쓰던 것처럼, 그들은 지식으로부터 스스로 지키려 한 것이다.
멍청한 생각이다!
"말도 안 돼!"
나는 외쳤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생존법이라고 말하는 건가? 태어난 이상, 누구라도 살기 위해 싸우는 법이야! 알지도 못하는 것에 어찌 대처할 텐가!"
얼굴을 가린다고 저 심해의 존재들이 그자를 가만둘까, 뒷골목의 짐승들이 순종적인 먹이를 두고 갈까, 그럴 리 없다!
격한 반박에 노인의 콧잔등이 주름 접혔다.
"나는 아담의 후예다. 우리의 시조가 그랬듯이, 나는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금기를 저지른 대가는 막대했다. 뱀처럼 질문이 꼬리를 물고 물었다. 대체 뇌에 하는 시술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학장은 어떤 계획을 가졌으며, 또 우리가 분리한 뇌는 어디로 가서 무엇에 쓰이는가... 분명한 것은 누구도 이 수술법의 기원은 알지 못했으니, 이 모든 게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의 비법이라는 것이었지...."
노인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그는 신을 보고 애걸복걸하는 사람처럼 간절히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가 들끓었다. 한 명의 것은 아니었다. 무도회처럼 하나둘씩 솟은 그림자가 실내에서 춤췄다.
"학장은 그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송과체."
"혹은 송과선이라 불리는 그 기관을 제거하면 영구적으로 공포를 느낄 수 없게 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떤 광경을 보게 되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먼지가 날리는 어두운 지하실,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밀랍과 황산의 악취가 코를 마비시키며, 한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뇌에 누군가 철침을 찔러넣는다. 그자의 팔을 타고 올라가니, 내가 잘 아는 얼굴이 나타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 바로 그였다.
나는 충격에 빠져 몸을 비틀거렸다.
"그대도 어딘가 짐작 가는 점이 있나 보군. 그래, 우리만의 비밀은 아니다. 뇌 수술을 통해 정신을 고치려는 시도는 예로부터 흔했던 것이지. 하지만 누구도 우리만큼 정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인이 말했다.
"정확히는 모든 영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송과체는 영적인 감각에 닿아 있다. 그러기에 데카르트는 그곳을 통해 인간이 영혼을 가질 수 있다고 오해하였다. 허나 그는 틀렸다, 영혼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뇌는 결국 장기, 세상을 인지하게 하는 기관에 불과한 것이다. 그 부위를 절제한다 한들 목숨을 잃는 일 따위는 없지. 다만, 많은 것을 잃게 될 뿐... 예컨대 저기 십자가, 초승달, 육망성, 메노라, 그리고... 사탄.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나는 무심코 노인이 던지는 시선을 따라 뒤돌아 보았다.
절로 경건해지는, 혹은 두려워지는 그 무수한 상징물 속에, 어느 두족류를 연상케 하는 그 악몽 같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보라, 상실이란 진정 나쁜가? 우리는 평생 어둠에 맞서며 살아간다. 지금도 무고한 이들이 수없이 음지를 들춘 대가를 치르며 미쳐 죽어간다. 이것이 바른 섭리인가? 이 세상에서 인간이 그저 작고 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텐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지...."
노인은 광인처럼 중얼거렸다.
"차라리 나는 여기 이렇게 선언하겠다."
그리고 말했다.
"공포란 인간의 선천적인 장애에 불과하다."
또 다시 말했다.
"나는 학장을 배신하기로 했다."
그 모든 구절이 충격적이라, 무엇을 믿어야 할지 망설인 끝에, 결국 나는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림자는 어느새 내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승천."
나는 아까 들은 단어를 낮게 뱉었다. 그가 무얼 꾀했고,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알게 되었다.
"그게 목적이었나? 공포에 미친 광인들을 뇌 수술로 되돌리는 것?"
"고결한 나와 달리 저들은 다른 생각을 품었지만."
"보편사무국 말인가?"
"그래, 우둔한 저들은 광인의 뇌를 들쑤셔서, 그들이 무얼 보고 미치게 되었는지, 자기네가 마주하는 심연과 직접 맞대면하려 한 것이다. 무엇이든 알고 싶어서 초조했던 거겠지. 운이 더 따른다면, 저들의 주적이 무기 삼는 광기와 공포에서 해방된 이들을 첨병으로 쓸 수도 있을 거라고... 공교롭게도 그런 우행과, 내가 오랫동안 구상한 비책이 나란히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내 행위를 돌아봤어야만 했다...."
노인의 목소리가 우울감에 젖었다.
"뇌수술동은 실패했다."
나는 말했다.
"아까 나와 함께 있던 요원이 사무국 문서에서 발견한 문장이었다."
방 안은 이제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노인은 그 거대한 그림자에 둘러싸여서 난쟁이처럼 작게 보였다. 그림자는 소리치며 외쳤다.
"나는 죄인입니다! 큰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나를 탓하지 마라,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새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으로 웅크린 노인을 향해 나는 물었다.
"그 끝에 어떻게 됐지?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나!"
"수술은 실패하지 않았다. 기술과 이론은 완벽했고, 수술은 단번에 성공했다. 환자는 곧바로 깨어나서, 대화할 만큼 이성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무엇을 보았고, 무얼 깨달았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아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을... 아아, 역설이다. 광기야말로 인간과 어둠을 갈라놓는 막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이로 작은 구멍을 낸 것이다, 그 틈새로 날 것의 악몽이 넘쳐 올 줄도 모른 채로!"
"그리고 어떻게 되었지? 그때 죽었을 자네가 왜 여기 아직도 남아 있느냐는 걸세!"
노인은 발버둥치며 가라앉아 갔다.
"학장은 알았다!"
그러면서 뭔가 외친 듯했지만, 부글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림자에 잠겨 익사한 것이다. 이미 현실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설령 개인에게 파국이 일어났다 한들,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상 현상은 설명되지 않았다. 아니, 딱 하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방법 말이다.
내가 미쳤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설령 그렇다 한들, 내 경우에 한해서는 불가능했다. 지킬 박사가 정제해낸 완벽한 인간성, 그의 유작인 하이드를 마신 이후로 나는 미치지 못하는 저주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누군가 내 뇌를 헤집으며 망상을 심어 넣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차피 손쓸 방법이 없다. 어떤 상황이건 나는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복도로 다시 나온 나는 무언가 발견하고 외쳤다.
"브레이버리!"
그는 복도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재회에, 나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네 괜찮나? 아니, 자네, 그, 미안한데, 진짜이긴 한가?"
헐레벌떡 다가가서 그리 물으니, 그는 낮게 실소했다.
"우스운 질문인 건 아는데,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래."
"여기, 여기가 어딘지 기억났어요."
브레이버리는 특유의 미성으로 말했다.
"뇌수술동이지. 왕립 베스렘 정신병원 지하에 있는."
"한때는 그랬죠. 이제는 아닙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여기는 무의식이 실체화한 공간입니다. 그렇게 되어 버렸죠. 인간의 뇌가 우주에 닿은 탓입니다. 그러니까 복도 끝에는 흘러 넘친 우주가 있습니다. 복도가 기울어진 탓에, 모두 밑바닥에 흘러 고인 겁니다. 거기가 출구입니다."
나는 잠깐 그를 멍하니 보다가 말했다.
"자네까지 미친 소리 하긴가?"
"아뇨,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정말로 우주가 있어요. 자세한 건, 안으로 들어가면 설명하는 사람... 아니, 설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수술받은 환자였는데, 지금은 당시 했던 대화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잘 교육 받은 박물관 큐레이터처럼요."
"그래서 자네는?"
그러자 원래도 창백하던 브레이버리의 얼굴이 더욱 희멀겋게 새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사실 저는 끝났어요."
"아니, 아니야, 왜 그런 소리를 하나."
"애써 위로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여기 갇힌 시점에, 제가 자료를 들춰본 것도 전부 들켰을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차라리 여기 갇혀 죽은 사람이 된다면, 위에서 입막음으로 어머니께 부조금이라도 돌리겠죠."
"이상한 생각하지 말게. 살아만 있다면 뭐든지 되는 법이야."
"암시를 느꼈습니다. 아무리 더 살아도 제가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요. 당신처럼 되고 싶어서 흉내도 내봤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인생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헛소리하지 말고 몸이나 들게. 젊은 놈이 노인을 힘쓰게 할 셈이야?"
나는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드는 건 몰라도 부축할 수는 없었다. 엿 같은 다리 때문에, 나는 혼자 욕설을 중얼였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욕도 할 줄 모르고요."
브레이버리는 그대로 누워서 묵묵부답이었다. 평소 성격 같았다면 때려서라도 정신이 들게 하고,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갔겠지만.
"제게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 포기할 용기가 말이죠. 지금은 있습니다. 당신을 만난 덕입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잠깐 아파하고는 뻔뻔하게 계속 말했다.
"슬슬 눈치채셨겠지만, 당신도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됩니다. 두고 가세요."
나는 벽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기 서서 잠깐 더 그를 내려다보았다가, 뒤돌아서 걸었다.
"자네 어머니가 자넬 많이 보고 싶어 했어."
"...저도 그렇습니다."
조금 더 기다렸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느린 걸음으로, 나는 안으로 향했다.
브레이버리가 말한 그것은 금방 볼 수 있었다.
"알고 계십니까? 인간, 인간은... 인간의 모든 공포는 말입니다, 실은 선천적으로 공유됩니다."
남자는 침대에 앉아서 그림자들을 보며 말했다.
"압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설명하자면... 네, 별 같은 겁니다. 예예, 하늘에 뜬, 아니, 바다, 네, 그 별이요. 생각해 보세요. 모든 수면에 뜹니다. 하지만 그 별이 모두 다릅니까? 아니요, 모든 수면의 별은 우주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쉽지요? 인간도 똑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같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선천적이라고 할 수밖에요. 적당한 예가... 네, 네, 맞습니다. 잘 아시네요. 어둠이나... 죽음 같은 것 말입니다. 어떤 일을 겪지도,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어두운 곳을 기피하잖습니까? 그건 개인의 속성이 아닙니다. 인간, 인간이 그걸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 걸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답은 간단합니다. 이런 훌륭한 시설에서 일하는 여러분은 상식도 뛰어날 겁니다. 그런 여러분이니까 제 말을 차근차근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거겠죠. 제가 사담이 길었군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모든 개인이 느끼는 공포가 같은 거라면, 결국 공포 그 자체도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모든 생각과 감각은 뇌에서 오지 않습니까? 즉, 뇌입니다. 인간은 뇌의 어떤 기관이 다들 같아서 똑같은 걸 두려워하게 설계된 겁니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인간은 참 절묘하게 설계되어서, 오히려 저 뇌에 영향을 줄 만큼,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우면 미치게 됩니다. 그런 광인이 절묘한 인간의 선천성에 해를 끼칠 수 있을 리는 만무하지요. 네?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제가 미쳤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미쳤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처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알고 계십니까? 인간, 인간은... 인간의 모든 공포는 말입니다, 실은 선천적으로 공유됩니다."
그는 영원히 거기서 그림자를 상대로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다.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여기는 깨진 정신들이 떠돈다. 지금은 이곳뿐이지만, 점차 그 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복도 옆에 나타난 노인의 환상은 말했다.
"우리는 광기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무엇도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삼엄한 경비를 붙이게 했다. 대다수가 바로 자결했고, 나는 대책을 모두 전한 뒤에 그들 뒤를 따랐다."
그것은 비통한 목소리로 울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했다. 나의 의식은 이미 녹아서 타인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인간의 뇌에서 나온 부산물에 불과하기에, 범인류라는 이름밖에 댈 수 없다. 유감이다. 우리가 여기서 느꼈던 공포와 광기는 이미 집단 무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인류는 우리로 하여금 멸망할 것이다. 곧바로는 아니겠지만, 서서히 모두가 미치게 될 것이다. 섬세한 사람부터 시작할 테지. 사람은 사람을 해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크게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작게는 원인 없는 살인과 상해가 행해질 것이다. 욕설과 비방, 질투와 시기가 넘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회의 정의와 도덕은 사라져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어떤 악행도 망설이지 않게 될 것이다. 모두가 크고 작은 집단으로 분열하고 반목하여, 서로를 욕하고 경멸하며, 세간에는 악의로 퍼트린 거짓이 넘치는 탓에 무엇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60억에 달하는 그림자가 통곡하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인류는 이렇게 내가 지은 죄로 멸망하게 되었다. 필연이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었다.
복도 안쪽은 어두컴컴한 밤하늘과 은하 성운, 자색의 우주 구름이 피어오른 공간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정신세계와 우주를 빗댄 비유는 그저 시적인 은유가 아니었다는 듯이 말이다.
에테르! 복도에는 그것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출렁이는 우주 근처의 벽면에는 산호와 패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쩌면 달의 조력이 우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에테르는 계속해서 파도치고 있었다.
인생을 끝낸다는 의미에서면 모를까, 출구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공간은 아니었다.
나는 조금 망설였지만,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잠깐 기다렸다가, 그대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
몸이 뭔가 철체에 부딪히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고함이 들리더니, 내 몸은 무언가에 질질 끌려 올려졌다. 잔뜩 머금은 물이 입에서 뿜어지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짜.
축축히 젖은 옷 무게 때문에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나는 엎드려서 상체만 힘겹게 들려고 노력했다. 날 붙잡은 건 억세게 두꺼운 누군가의 손이었다.
"여기, 여기는 어딘가?"
나는 기침하며 물었다. 그때마다 폐 깊은 곳에서 남은 소금물이 뿌려졌다.
날 둘러싼 선원들은 서로 마주 보기만 하며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번에는 프랑스어로 다시 물었다.
"여기는 바다인가?"
"맞습니다."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혹여나 또 말이 통하지 않게 될 세라, 서둘러 다시 물었다.
"북해인가?"
우려했던 바가 현실이 되었는지, 그들은 대답하지 않고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또다시 물었다.
"아니면 영국 해협?"
그러자 한 선원이 어색한 얼굴로 날 걱정하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태평양 한가운데입죠."
바닷새 우는 소리가 들린다. 수평선에는 아침노을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