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33화 (133/232)

§133. 런던 박명

1896년 12월의 겨울 바다, 난간 너머로 노도가 치며 범람한 찬 물살이 갑판을 씻었다. 뉴욕을 떠나고 반 개월이 지나도록 뭍에 들르지 않은 증기선은 여전히 쇠할 줄 모르고 힘껏 삐걱거렸다.

선미 돛대에는 영국기 유니언 잭이 위풍당당하게 펄럭였고, 다른 두 돛대에는 흰 별이 그려진 깃발과, 파도를 배경으로 뛰노는 고래가 그려진 깃발이 걸렸다. 각각 차례로 백성 해운(White Star Line)과 북해 조선 공학(North Sea Shipbuilding&Engineering) 사기社旗였다.

마지막으로 선두에는 이제는 역사 속에 사라진 선수상을 대신하듯, 북극성호(SS Polaris) 이름이 적힌 깃발이 앞서 개선했다.

외륜에서 튀는 바닷물이 해풍을 타고 안면을 때렸다. 나는 수염에서 축축한 물기가 떨어질 때마다 약속한 것처럼 손에 든 와인 병을 입대고 들이켰다.

나처럼 술맛을 모르는 사람은 이런 단 술보다는 투박한 위스키가 어울렸지만, 밤바다 위에서 포르토 향을 즐기는 사치를 또 언제 누려볼 수 있을까. 이런 호사를 마다하는 건, 여왕이나 그의 부군 정도 되는 높으신 분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것이다.

선상에는 몇 개의 필요한 등만이 켜졌는데, 기름불이 닿지 않는 어둠 사이를 선원 서넛이 뛰어넘으며 분주히 뱃일했다.

"밤 공기가 찹니다."

난간 인근 의자에 걸터앉은 내 곁으로 누군가 말 걸며 다가왔다.

"이런 데서 자작하십니까? 그러다가 몸 상하십니다."

"누가, 내가?"

취기가 올랐는지 입에서 경박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자네에게 내가 군인이었단 얘길 했던가?"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 사르데냐 전투에 참가하셔서 훈장도 받으셨다고요."

"1880년, 아니, 1881년도였을 거야. 내게 가장 큰 부상을 남긴 건, 악에 받친 이탈리아 놈들의 총탄도 아니었고, 물이 없어서 돌았던 전염병도 아니었지. 고작 생채기, 자갈인지 가시인지 모를 것에 긁힌 작은 생채기 하나 때문에 왼발을 통째로 잘라내야 했네. 매일 발이 썩어가는 걸 보면서, 이제 죽는가 보다 했을 때 종전이 되었고, 나는 런던까지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진단받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야전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네. 그 당시에는 마취랄 것도 없었고, 그리고 원래 군대에서 수술이란 쇠톱으로 뼈째 잘라내는 게 다였어. 죽을 것처럼 아팠고, 열병으로 사경을 몇 번이나 넘나들었지만, 그거 아나? 런던 항에 도착하고 배에서 내릴 때, 나는 누구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걸어서 내렸네."

나는 과묵한 사람이다.

하지만 드물게도 취기와 밤바다의 마력에 홀린 탓일까, 한 번 물꼬를 튼 말문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바커스의 심문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886년, 나는 탐험가였어. 저 검은 대륙에서 강을 거스르며 내륙을 탐방했지. 그러다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귀국하게 되었네. 그런데 내가 몸 실은 영광호는 작은 증기선이라 몇 번이나 정박해서 석탄과 식료를 보충해야 했지. 때문에 런던에 도착할 무렵에는 앓기 시작하고부터 한 달이나 지난 후였어. 그간 나는 혹시 모를 전염병을 의심받아, 먼지가 뒹구는 창고방 안에서 혼자 앓았지. 또 바닥이 얼마나 쌀쌀했는데 내게는 담요 하나밖에 없었지. 그렇게 열병에 시달리고 귀국했으니, 오죽하면 런던에서 동료 선원들이 가장 먼저 데려온 사람이 의사가 아니라, 관을 짜려고 키 재러 온 장의사였겠나. 그렇게 나는 세상 무덤이란 무덤은 죄다 헤집고 다녔는데, 봐라, 세상아! 나는 아직 살아있다!"

무용담 끝에 나는 찰랑거리는 술병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성난 파도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선체에 부딪히며 바닷물이 튀었다.

"...하물며 몸에 좋은 술과 북풍 따위가 날 어찌 죽이겠나?"

나는 뜨거운 숨을 토하며 나직이 말했다. 어느샌가 바로 내 옆에 선 마른 청년은 안경테를 어루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모처럼 고국에 돌아가시는데, 도착하자마자 몸져 누우면 서운하지 않습니까."

"고국, 그래, 나의 런던."

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주둥이, 혹은 병 주둥이에서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흰 구름을 타고 불었다. 그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추워서 그런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자네, 고향은 어딘가?"

"런던이요."

"아, 나랑 같군. 멋진 도시지."

실없는 소리에도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성탄절에는 한결 괜찮죠. 그래도 이번 성탄은 고향에서 쇠겠군요."

"그래, 자네 덕분에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모실 수 있었던 건, 거기 처음 서 있던 게 저였기 때문입니다."

"젊을 적부터 아첨을 배우면 훌륭한 사람은 못 되는 법이야."

나는 참으려고 했으나, 무심코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그가 한 말은 빈말이었지만, 내가 전한 감사는 결코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이 겸손한 청년의 이름은 마구스라고 했다.

우주에 빠진 후, 태평양 바다에서 발견되어 친절한 선원들의 도움에 혼 곶에 이른 나는 가까스로 영국 배를 얻어 타, 뉴욕만에 도착했다. 그렇다고 한들 무일푼에, 무연고인 나로선 여기서 런던으로 돌아가는 일은 막연하기만 한 것이었다.

만일 그날 그때 부둣가에서 이 청년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즉껏 뉴 잉글랜드 어느 거리를 전전하고 있었을지 몰랐다. 10년 전, 신문에 실렸던 내 사진을 기억해 날 알아본 마구스는 내가 런던에 돌아갈 뱃삯을 대주길 망설이지 않았다.

물론 그가 천성적인 후원인의 자질을 타고난 나머지,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성심껏 봉사하는 걸 인생의 낙으로 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에게 속셈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마저도 내가 보기에는 귀엽고 사소한 것이라 기꺼이 넘어가 줄 마음이 들었다.

"글은 조금 썼나?"

"그게 실은."

마구스는 말끝을 씹으며 하하 웃었다.

"나도 그 마음 알지. 조급하지 말고 뭐라도 써보게. 결국, 세상 모든 명문이란 것들도 다 그리 완성되는 거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조언하는 내가 글쓰기에 통달한 명작가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저 되는대로 내뱉은 말에도 성실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구스를 보면 도무지 나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쯤 하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미국처럼 역사 짧은 나라에서 이런 의젓한 청년이 태어났을까. 하지만 실은 아니었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 청년의 국적은 바로 영국이었던 것이다.

"뭔가 재밌는 기사라도 실렸나?"

"선착장에서 샀으니 벌써 반 개월은 된 것이지만요."

나는 그가 든 신문을 살폈다. 과연 그 말대로 습기를 머금은 종이가 쭈글거리며, 찍어낸 지 꽤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갑판 위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레이아웃으로 나는 그게 어떤 신문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더 런던, 미국 신문이 아니라 영국 신문이었으니, 뉴욕에서는 일부러 구하려 하지 않으면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돌아가면 더 런던으로?"

"한 번 쫓겨난 몸이라서 아마도 어렵겠죠."

실은 이 문답에 모든 비밀이 있었다.

더 런던이 언론 독점을 목표로 내세운 노란 외벽 회사의 계열사임은 상류층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나, 모든 시민이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마구스처럼 해외에 거류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무수한 신문, 잡지가 통폐합되었으며, 마구스가 몸담은 학술지 <페니 아스트로노미컬>도 그 흐름을 피하진 못했다. 현지 파견 기자였던 그가 자신의 실직을 안 것은 월급이 끊기고 2달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간 그가 보냈던 기사와 자료는 모두 더 런던 지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으며, 그저 임금 체불인 줄 알았던 것은 무통보 해고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허나, 이미 정식으로 항의할 시기는 놓쳤으며, 미국에 있는 그는 직접 찾아가서 항의하거나 재판할 상황도 아니었다. 졸지에 무직자가 되어 버린 그는 임시변통으로 현지 잡지, 신문사 상대로 글을 팔며 생계를 이어왔다.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걸, 마구스는 내심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늘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둔덕에, 그는 우연히 발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뉴욕항만에서 어떤 런던에서 저명한 인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비로 유명하신 필레몬 허버트 남작 말이다.

자기자랑할 셈은 아니지만, 나는 학계에서나 민간에서나 나름 이름 날린 인물이며, 여러 곳에 연줄을 두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내 이름을 빌려 자신이 쓴 에세이를 발표, 출판해 런던 내에서 입지를 다지겠다는 게 바로 그의 계획이었다.

물론 나는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곤궁에 처한 상황에서 구해줬는데, 그조차도 못할까.

오히려 더 대단한 부탁을 해도 들어줄 생각이 있었으나, 그는 자신이 부탁한 것만 해도 큰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더 바라진 않았다. 아서 같은 한량이 인기를 끄는 퇴폐한 요즘 시대에, 참으로 보기 드문 청년 아닌가.

"다룰 내용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제 문장만 쓰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군요."

"그러고 보니 무슨 내용을 쓰는지는 못 들었군."

"아, 천문학입니다. 페니 아스트로노미컬은 천문학지였으니까요. 실은 여기 미국에서 대단한 발견을 해서 말입니다. 혹시 런던 근교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나는 그 질문에 몸을 흠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정말 대단한 우연이 다 있어서...."

그를 보며 나는 거들먹거리며 한마디 했다. 내가 말을 끊자, 그는 영문 모른 채 말을 다시 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겨우 100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착각했어, 계속하게."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급하게 와인 병 주둥이를 입에 물었다. 찬 바람에도 얼굴이 뜨거웠다.

"그때 충돌 여파로 런던 근교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졌고, 심지어는 지형 일부가 바뀌어 뻘처럼 해수가 흐르게 되어서 복구 작업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말을 듣던 도중, 나는 의아하여 물었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인데."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대학의 천문학자들은 제가 영국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당연히 알 거라는 식으로 묻는 것 뭡니까? 세계적으로 꽤 유명했던 사건이었다면서요. 영국에 있었을 적에는 전혀 몰랐던 사건이죠. 어떻게 제게 이런 행운이 따랐는지 몰라도, 마치 이 기사를 적도록 신께서 인도한 일 같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큰 반향이 일 겁니다."

나는 흥분한 마구스를 보며 마음 한편으로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여보게."

"네?"

"나쁜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니 신중히 듣게.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부류 사건에 더러 관여하며, 흔히 말하는 도가 트인 사람이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기는 하죠. 영국인들의 천문학에 대한 무관심이요."

마구스는 싫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일부러 말을 피하려 들었다.

"그럴 리가. 소동과 소요는 런던의 명물이야. 그렇게 큰 사건이었다면 진작 큰 소문으로 번져서 누구나 알았겠지. 그런데 어째서 이런 사건을 영국인들만 몰랐을까."

나는 말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은폐한 사건일 수도 있네."

"그럴 리가요."

"자네는 몰라. 내가 자네를 아끼기에 일러두는 거네. 런던에는 그런 비밀이 수도 없이 널려 있네. 그리고 내 경험상, 그런 곳에 깊숙이 관여하면 좋은 꼴은 못 본다는 거야. 관두라곤 안 하겠네. 다만, 조심하게."

마구스는 갑작스러운 충고에 할 말을 잃은 듯이 보였다.

"농담이죠?"

"자네 인생으로 농담할 생각은 없어."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남았다. 더군다나 상대가 영국인이었으니, 진지하게 웃기지 않은 농담을 말하는 거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지.

침묵은 이어졌으나, 적막하진 않았다.

둘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와인으로 목을 적시고 물었다.

"재밌는 기사는 좀 실렸나?"

"이거저거 있죠."

마구스는 그렇게만 말하고 신문을 건넸다. 그저 말을 틀 화제로 골랐을 뿐, 달란 뜻은 아니었지만 주는 걸 사양하기도 모양이 그래서, 나는 결국 받아서 읽게 되었다.

어둡기도 하고, 잉크가 번진 탓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건성으로 신문을 넘기던 나는 어느 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위험합니다!"

급히 일어난 탓에 넘어질 뻔했으나, 난간을 가까스로 붙잡고 버텨냈다. 나는 지팡이를 거칠게 쥐고는 미끄러운 갑판을 가로질렀다.

목표는 선상의 등불이었다. 빛에 비춰봐도 사진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는 충분한 밝기였다.

"왜 그러십니까? 사진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뒤따라 온 마구스가 물었다.

"그래, 한 명."

"세실 로즈 말이군요."

어깨 너머로 내가 보는 사진을 내려다본 마구스는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사진 속에 그 유명한 정치인도 같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조차도 내가 발견한 얼굴에 비하면, 사진에 찍힌 무수한 관계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홀로 옆모습으로 찍혀 있었으나,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이름은,

"에드워드."

─────부우우웅!

북극성호의 기적 소리가 선상에 크게 울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은근한 항구 불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혹은, 런던 박명薄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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