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과거를 향한 전진
내겐 남들에게 없는 특기가 하나 있다.
하늘은 어둑하고, 바람조차 불지 않는 적막한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런 날은 내일보다는 어제를 떠올리게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인생의 어느 페이지 사이에 껴놓은 책갈피를 다시 들추게 되었다. 돌아가는 장소는 늘 같았다.
무질서하게 나열해 있던 길 위의 낯선 건물들이 점차 내가 아는 형태로 배열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숫자를 읽으면 되었다. 숫자는 11부터 시작했지만 다음에는 15, 그다음에는 17로 마구 건너뛰었다.
그 모퉁이를 지나면 또 29였는데, 여기서부터는 마음 편히 읽어도 놓치지 않았다. 30... 31... 32... 그렇게 겨우 규칙성을 찾은 숫자를 읽어내리다 보면 어느샌가 목표로 하던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신축으로 지은 흰 건물 기둥에서는 40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소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았다. 카도간 가街 40번지, 과거로의 여정은 늘 여기서 멈추었다.
"누구세요?"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어느 여인이 물었다.
"파라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주인 어르신이요? 누구라고 알려 드릴까요?"
"허버트가 왔다고 말해주시죠."
잠시 후,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열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가정부의 안내를 따라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잘 아는 노인이 무뚝뚝한 척하지만 입술이 움직이려는 걸 참는 표정으로 날 반겼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차려자세로 경례했다.
"파라 함장님, 갑자기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앉은 자세로 경례를 받았고, 그가 손을 내린 뒤에야 나도 손을 내렸다.
"앉게, 다리도 불편할 텐데."
"감사합니다."
"자네가 그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순간, 그게 무슨 말인가 했지만, 곧 처음 꺼낸 말에 대한 답변임을 깨달았다. 나는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허버트 사관(Lieutenant)."
앨버트 파라는 말했다.
"자주 못 듣는 말이군요."
"자네가 몸 망치는 일이야 늘상 있는 일이고, 그보다는 표정이 좋아졌지. 넉살 좋게도 웃네그래."
그게 칭찬인지, 아니면 알기 힘든 형태로 경고를 보내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그는 혀를 튕기며 문밖의 가정부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따랐다.
"들게."
겨우 밀크티 한 모금을 입에 머금자, 그는 갑자기 떠오른 듯이 말했다.
"아니, 이거 실례했네."
"제 입에는 맞는걸요."
"차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람아."
분명 우유 비린내 쪽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질책하듯 말했다.
"함장(Captain)이라 불러야 했지."
"몇 번 불린 적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대화는 어색한 시점에 끊겼다.
배 없는 함장, 그것이 나의 마지막 직급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당시의 일에는 이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지만, 완고한 성격의 전 상관에게는 여전히 불편한 일로 남아 있는 듯싶었다.
"그래서 용건입니다만."
"벌써 가게?"
"오래 머무르는 것도 폐가 되어서...."
나는 눈앞의 늙은 상관의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군복 말이지."
"예."
"그거라면 미리 말해뒀네."
그는 이미 내 용건을 안다는 듯이 척척 말했다. 나는 매번 그에게 필요할 때만 찾아온다는 자각이 들어서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입어 볼 텐가?"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던 나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 후, 가정부는 낡고 헤진 청코트와 제식 군복 일체를 가지고 들어왔다.
다른 방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그림 속 명장들과 견줄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어째 해가 갈수록 제복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 보였다. 간만에 차려입은 군복은 오히려 아이가 흉내 내는 것처럼 영 유치하게 보였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괜스레 옷의 보풀을 손으로 잡았다.
"하나도 안 늙었군."
어느샌가 방문 앞에 선 파라가 말했다.
"예전이랑 똑같아."
"언제 말입니까?"
"15년 전."
나는 실소하며 답했다.
"그때는 수염도 안 길렀습니다."
"그랬던가?"
습관처럼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나는 손을 헛디뎠다. 다시 꺼낸 손에는 뜯어진 주머니 실밥이 잡혀 있었다.
"옷이 찢어졌나? 꿰매고 갈 텐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더 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마지막 경례를 하는 내게 파라는 다짜고짜 물었다.
"군인인가?"
나는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예."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니요."
파라는 눈주름을 구기며 말했다.
"사실, 나는 자네가 찾아오는 게 두렵네. 언젠가 내 차례도 있겠다는 걸 실감하거든."
"함장님께서는 저보다 오래 사실 겁니다."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띄웠다.
"빈말이라도 고맙네. 하지만 나는 이미 노인이야."
나는 그 말이 진심이었다고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말없이 경례 한 번 하고 그곳을 떠났다. 39... 38... 37... 그리고 17. 거기서 돌아보자 파라 함장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기 싫다는 이유로 억지로 떠맡긴 군복을 보관해주고, 갑자기 찾아도 불편한 기색 한 번 없이 내주는 감사한 분이다.
이렇게 옛 군복을 찾을 때, 용무는 늘 하나뿐이었다. 그건 내가 가진 소박한 특기가 발휘되는 때이기도 했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부고를 전하는데 익숙하다.
돌아가는 길, 서쪽 하늘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자연스럽게 레오 브레이버리의 모친과 다시 만났다.
미리 와서 앉아 있던 그녀는 홀로 오래 견뎌낸 것처럼 전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나는 어렵사리 첫 말을 떼었다.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병원 지하에서 아드님과 만났습니다."
"잘 있던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거기에?"
"어쩌면."
"어쩌면?"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녀는 한참 생각하는 듯 입 다물었다.
"제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나 보군요. 제가 그 아이의 어머니인데도 그렇습니까?"
"그도 어머니가 알기를 바라진 않을 겁니다."
전과 비교해도 짧지 않은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기 직전에, 그녀는 대뜸 말했다.
"아들에게 돈과 편지가 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았다. 그가 병원 지하에서 누워 홀로 죽음을 기다린 것을 보았고, 설령 살았다고 해도 일반우체국을 통하는 모든 편지는 감시되고 있었다.
여인의 망상을 긍정해야 할지, 현실을 보여야 할지, 갑자기 어려운 숙제가 주어지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 그녀는 아예 편지를 꺼내서 내게 보이기까지 했다.
"불어군요. 아드님이 프랑스 말도 알았습니까?"
"아니요."
그녀의 즉답은 날 더욱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필적은 아들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프랑스 어를 읽으십니까?"
"남들 읽는 만큼보다는 조금 더 잘 읽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편지지를 뒤집어서 내 쪽으로 밀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겨우 해독했습니다. 마지막 단어만은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혹시라도 읽으실 줄 알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문장을 속으로 읽었다.
'저는 해외에 있습니다. 언젠가 돌아가겠습니다.'
기초적인 수준의 불어였으며, 그만으로는 누가 보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필적을 감별한다 해도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확신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단어를 읽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족 때문에 몸이 기울었지만, 책상을 집으며 몸을 기울여서 쓰러지지는 않았다.
"맞습니다, 그는 살아 있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말했죠."
여인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놓치지 않고 봤다.
"이 단어는 메시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제게 보낸 것이죠. 세상에, 정말 영리하군. 내가 그녀를 통해 왔다는 걸 듣고, 결국 다시 돌아갈 걸 알았던 거야!"
나는 흥분해서 되는 대로 중얼거렸다.
"메시지요?"
"이건 불어가 아닌 영단어입니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요."
여인은 편지를 다시 제 쪽으로 향하게 하며 물었다.
"어떻게 읽는 거죠?"
나는 여러 번 말했던 그 단어를 어느 때보다 환희에 차서 외쳤다.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돌아가는 길, 나는 의욕 없이 서 있는 신문팔이에게 다가갔다.
"뭐가 있지?"
"더 런던이요."
그는 가방을 들추는 시늉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없어요. 더 런던뿐이죠. 요즘은 다들 그걸 읽어요."
"한 부만 주게."
나는 그의 손에 동전을 쥐여주었다.
신문은 끔찍했다. 무엇이 그러냐면, 제본 상태가 아주 처참했다. 간격을 봐서는 기계로 박음질한 게 분명한데, 기계 담당자가 전날 거하게 한잔하고 작업했는지, 아니면 그러고 자고 일어나서 숙취에 시달리며 작업했는지, 어느 쪽이건 출판업계의 파멸로 이어질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신문의 1/4은 박음질에 가려져서 읽을 수 없었다. 벽에 기대어 신문을 들추며 나는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행히도 내가 찾던 내용이 실린 기사는 신문 가장자리에 실린 덕에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한 편의 시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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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묻겠노라』
영국인에게는 의무가 있다. 그것은 영국에서 나고 자란 모두가 짊어진 짐이자, 우리 말고는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충이다.
영국인에게는 의무가 있다. 모두가 걷는 쉬운 길 대신에, 누구도 가지 않은 거친 길을 앞장서 걸어야 하는 의무이다.
영국인에게는 의무가 있다.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 할지언정, 오로지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의무이다.
영국인에게는 의무가 있다. 만연한 어둠을 향해 등불을 치들고, 무지를 향한 탐구를 멈춰서는 안 되는 의무이다.
영국인에게는 의무가 있다. 한계에 봉착하여 모두가 제자리에 주저앉을 때, 누구보다 앞서서 걸어야 하는 의무이다.
내가 그대에게 묻겠노라. 짊어진 짐이 부담스러워서 당장에라도 벗어던지고 싶지 않겠는가 하고.
내가 그대에게 묻겠노라. 무지한 야만인과 사악한 이교도의 증오와 멸시가 두렵지 않은가 하고.
내가 그대에게 묻겠노라. 누구도 가지 않은 거친 길을 가기보다는 누군가 닦아놓은 편하고 쉬운 길을 가지 않겠노라 하고.
내가 그대에게 묻겠노라. 도전과 탐구를 멈추고 세상의 상식과 타협하여 행복한 무지에 젖지 않겠노라 하고.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그리 대답할 수 있는 자만 오라. 폭풍우가 온다!
- 충직한 여왕폐하의 신하, 세실 존 로즈, 동인도회사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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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
작가인 세실 로즈라면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정치에 관심 좀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비록 그가 실현 가능성 없는 제국주의 망상을 설파하고 다닌다 해도, 그의 사업 감각은 대단한 것이었고, 정치적으론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꾸준히 의원직을 연임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응은 당연히 극단적이었다. 올드코트 대학에선 그의 이름을 딴 농담마저 공공연히 나돌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광신적인 지지자들을 이끌고 다녔다.
그토록 평이 갈리는 정치인이었으나, 내가 그에게 주목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날, 귀국하는 배에서 읽은 한 부의 신문이 계기였다.
에드워드.
아니, 이제는 알레이스터 크로울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청년은 그와 결탁했다. 그리고 하나의 기업을 창립하며 경영자로 이름을 내걸었다.
그것이 바로 동인도회사였다.
아프리카, 암흑 대륙 희망봉 이동以東이 개척되지 않은 지금 세계에서는 아주 잠깐 존재했을 뿐,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그런 이름을 구태여 다시 빌린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은 '아프리카'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마저 강건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프리카라니! 그것도 여기서는 드문 빈도로 쓰이는 학술적 지명이었다.
나는 이제 알았다.
에드워드는 그저 지금 세계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다. 나와 같이, 아니,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많은 미래를 겪고, 비밀을 아는 존재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이와 같은 이름들을 골랐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제 와서 양지로 기어 올라온 그의 행보는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그는 경영자로 나설 필요가 없었다. 동인도 회사나, 아프리카처럼 세계의 비밀을 아는 이들을 자극하는 단어를 선정할 이유도 없었다.
일부러 눈에 띄게 행동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인도로 가기 위해, 굳이 수익성 낮은 아프리카를 처음부터 개척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이 세상에는 남미와 아시아를 지나는 항로도 뚫려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인도로 가고 싶다면, 무작정 서쪽으로 가는 배를 갈아타기만 해도 되었다.
아니면 항로 자체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대서양, 남미, 그곳에 무언가 있단 말인가? 그가 가고 싶은 건 정말로 인도인가?
"동쪽."
나는 이미 해가 지고 사라진 반대편 방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두웠다. 저 동쪽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급히 알아봐야 할 것이다. 이르다면, 날이 밝는 대로라도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