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대기근 / 블렌딩
136. 대기근 / 블렌딩
팔랑, 팔랑.
타고 있는 사람 속마음도 모르고, 얇은 종이는 경쾌하게도 넘어갔다. 노인은 두꺼운 책자를 뒤집을 기세로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좀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요즘은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는 시대니까요."
초조한 마음에 묻자, 그는 태연히 답했다. 주름진 손 아래 깔린 책자에는 런던 거리의 세세한 건물 주소와 형태가 기록되어 있었다. 책 앞에 놓인 명패에는 「W. N. 롤랜드슨, 부동산 중개」라는 문구 위로 먼지가 얇게 씌워졌다.
"그런 아파트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내 목소리에 종이를 넘기던 롤랜드슨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보세요, 여기 접혀 있지 않습니까?"
"있군요. 무슨 뜻이죠?"
그의 말대로 책장의 귀퉁이가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건물이 탔다는 뜻입니다."
"아, 그렇군요."
"원래 올해 나왔어야 하는데, 개정판은 내년에나 나올 예정이라서요."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특히나 런던 시민이라면 더욱. 나처럼 화재로 집이 송두리째 탄 사람이라면 더더욱.
"결혼은 하셨습니까?"
그는 갑자기 물었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아이가 다섯 명은 들어갈 건물을 찾으신다길래."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책장을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대부분 페이지 귀퉁이가 접혀 있었고, 그러지 않은 것도 건물이 비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는 문득 롤랜드슨이 날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내 손을 내려다 보자, 결혼 반지 없이 나이 든 손 하나가 툭 놓여 있었다.
이것 때문에 낭패를 본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장갑을 벗은 일을 후회했다.
"결혼은 안 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분이 여러 아이를 데리고 있을 일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바로 알았다.
"맹세코 그런 일은 아닙니다."
눈앞에 앉은 까탈스런 중개인은 속내를 꿰뚫어 볼 것처럼 작은 유리알 너머로 한참 노려봤으나, 그의 뿌연 안경으론 모호한 거짓말을 간파할 수는 없었던 듯싶었다.
"실례했습니다. 워낙 민감한 주제라서."
"압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롤랜드슨이 유난히 과민한 게 아니었다. 대화재 이후, 런던 전반적으로 부랑자, 특히나 고아에 대한 적개심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지금에 와서는 누구도 빈민을 위해 후원하지 않으려 했고, 인구한계론의 괴담은 종양처럼 도시 곳곳에 피어나서, 심지어는 인명 경시 사상마저 극단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런던에서 가난은 실지로 죄가 된 것이다.
도시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화약 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저 암막 뒤에는 누군가 도화선을 잡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정겨운 런던의 풍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한숨 쉬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롤랜드슨은 계속 페이지를 넘기기만 했다. 그의 마른 엄지 끝이 보는 내가 따가울 정도로 건조하게 닳았다.
"저기, 그, 매물이 없습니까?"
나는 조바심을 숨기며 무심한 척 물었다.
"아시다시피, 요즘은 돈이 있다고 해도 팔 물건이 없는 때 아닙니까."
롤랜드슨은 같은 말을 다시 했다. 그리고 중얼거리는 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 정도 주택난은 아무래도 반세기 만이라서...."
"반세기요?"
노인은 힐끗 날 올려다보더니, 아예 책을 내려놓으며 낮게 속삭여 물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말이요. 압니까?"
홈즈는 그리 물었다.
"알다마다."
"물론 그럴 테죠. 교수님이 쓰신 「민족과 운명」에도 그 시기에 대한 은유가 여실히 드러났으니까요."
나는 질색하며 물었다.
"그걸 읽었다고?"
"전에 말했듯이 교수님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시중에 도는 출판물만큼 그 사람의 본질을 쉽고 값싸게 엿보는 방법도 드물죠."
홈즈는 그리 말하고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싸지는 않았지만요." 하고 덧붙였다.
나는 굳이 그에게 출판업계의 더러운 관행과, 사기 계약, 그리고 실제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금액이 얼마나 적은지 호소하는 대신 조용히 침묵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 비슷한 얘기를 들었는데, 똑같은 내용의 회화를 전혀 다른 곳에서 반복하고 있었다.
시계 분침이 달칵하고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로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다가 홈즈가 내 표정을 확인하지 않았기에 결국 소리 내어 말했다.
"대화할 때만이라도 그 바이올린을 놓으면 안 되겠나?"
"듣고, 대답하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태연히 답했다.
"대화의 의무는 모두 지키고 있으니까, 그 외에는 결국 부산물입니다. 사회적 관행이 만든 비효율이죠. 물론 교수님께서 그런 걸 따지는 분인 건 압니다만, 지금 대화에서는 제가 바이올린을 놓을 만큼 흥미로운 내용이 없군요."
그러면서도 그는 뻔뻔하게 조율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전에 진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나는 확신했다. 그는 가정교육을 덜 받았다. 어쩌면 너무 이르게 발현한 재능이 그를 더욱 거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젠가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가, 그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포기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 보죠?"
"뭐? 아니, 왜?"
"그렇게 요란하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 제가 아니라도 알 겁니다."
그 말에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직전까지 책상을 툭툭 치던 검지가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아니, 관계없는 일이야."
나는 고개 저었다.
"범우는 만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법이죠.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사건도 저만의 인력을 가진 법입니다. 미세할지언정 세상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죠."
"그냥 비슷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을 뿐이야."
홈즈의 흥미를 없앨 요량으로 한 말인데, 그는 갑자기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날 바라봤다.
"어디서요?"
"주택 중개인과 대화를 나눴지."
"중개인이요?"
"이만한 주택난은 대기근 이후 처음이라는 얘기를 했지. 이제 만족하나?"
내가 건성으로 한 대답에, 홈즈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을 이렇게 빨리 증명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러더니 그는 내 앞에 공책 한 권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전에 교수님이 제게 주신 자료입니다. 정확히는 해독본이죠."
나는 그제야 이게 피츠헨리 박사가 목숨을 걸고 사수했던 연구 자료였음을 알아봤다. 물론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있었다.
"건넨 것에 비해 두께가 꽤 얇은데."
"제가 정리했습니다. 전문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또 어딨겠습니까."
그의 뻔뻔한 대답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설명하겠지만, 자료 대부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확히는 이제 의미가 없게 되었다고 해야겠죠."
홈즈는 계속 말했다.
"사실은 교수님께 충분히 읽을 시간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미리 내용을 전한다면 선입견 때문에 정말 중요한 내용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런던에서 가장 똑똑한 자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나?"
내가 비아냥거리자, 홈즈는 싱긋 웃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게 제가 모든 걸 안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아마 교양 부문에서는 교수님이 저보다 더 많이 아실 테죠. 저는 그런 상식은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피하고 있습니다."
"뇌의 용량 때문에 말인가?"
"그것도 있지만, 제 사고 능력에 제한을 두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크겠군요. 상식은 상상력에 제한을 거는 제동 장치와 같습니다. 비현실적인 존재와 싸우려면 그만큼 사고에 여유를 둘 필요가 있죠. 제가 아는 건 최소한의 상식과 비상한 전문 지식이면 충분합니다."
홈즈의 설명은 모순적이면서도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천재 개인이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모든 비밀을 풀어내는 건 그야말로 공상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과학적이지도 않고, 비효율적이죠. 진짜 천재라면 여러 인물에게서 정보를 듣고, 그를 취합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현장에서 홀로 모든 걸 맞춰내는 탐정의 대표 주자가 그런 말을 하는 건 꽤 우스웠지만, 그의 이런 변화는 분명 합리적이었다.
"피츠헨리 박사님께서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연구하셨습니다."
홈즈는 웃음기 없는 말투로 말했다.
"저야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합리적인 추측 정도는 얹어볼 수 있죠. 대기근을 피해서 영국 본토로 넘어온 탓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어쩌면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원인을 규명하려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건, 그분의 연구에 왕립 학회가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지원했다는 거죠. 하지만 그 뒷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죠. 이유는 있습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차차 연구를 이어나간 피츠헨리 박사님은 한 가지 비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들은 바는 없지만 시기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는 박사가 주변 사람이 겁먹을 만큼 거칠고 난폭하게 변했다는 게 바로 재작년 무렵의 일이었으니까요. 대기근은 자연 발생한 재난도 아니었고, 어떤 행정 오류로 벌어진 참사도 아니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은 고도로 정교하고 은밀한 인위적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기근이 인재人災라는 사실은 이미 알았지만, 그가 말하는 인위적 개입은 조금 더 의미를 좁히는 듯했다.
"여기부터는 아마 교수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피츠헨리 박사는 외적으로 심각한 인간 불신을 겪었고, 내적으로는 기억 착란까지 일어나며 정신적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자기 연구를 더욱더 깊이 숨겼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지인 중 일부는 박사가 런던을 떠났다고 믿었죠. 외부 활동이 없으니 생계를 유지할 수단은 왕립 학회의 지원금뿐이었습니다. 경제적 종속은 박사를 정신적으로 굴복시켰습니다. 그는 그토록 비밀리에 하던 연구를 학회 후원인에게만은 서슴없이 드러내었죠."
나는 설명 속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말을 끊었다.
"잠깐, 지금 후원인이라고 했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군요. 맞습니다, 박사의 후원자는 학회의 개인입니다. 오히려 단체가 아닌 개인이었기에 더 쉽게 마음을 열었겠죠. 분명 그럴 겁니다."
"그자는 누구지?"
내 질문에 홈즈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조금 길어지자, 나는 다시 그를 불렀다.
"이봐."
"모릅니다."
홈즈는 말했다.
"박사는 그 사람에 대해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는 기억 착란이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도요."
그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 썼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터였다. 어떤 물증도 없는 확신이 주는 불쾌감은 그토록 컸다.
"그래도 아마 여성입니다."
"박사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 그는 그 인물을 부르는데 그와 그녀를 혼용하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더 몰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죠. 왕립 학회 회원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자는 지킬 박사였다. 사회적으로 명망 높고, 우아하게 나이 든 신사의 표본이었다.
"아!"
나는 깨닫고 외쳤다.
"불우하게도 영국 학계에서 여성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죠. 잘 모르는 상대라고 해도, 왕립 학회 회원이라면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여성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상대가 여성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죠."
홈즈는 대담하게도 자신의 추리를 설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사는 정상이었습니다. 다소 편집적이었지만, 외출하며 이웃과 교류하는 일 정도는 가능했죠. 그러다가 그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일?"
나는 물었다.
"런던 대화재 말입니다. 한밤중 불타는 집에서 연구 자료를 끌어안고 나온 박사는 모든 참사가 끝나고, 연구를 재개하려는 와중에 어떤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지금껏 고발을 위해 준비한 자료, 거기 기록된 모든 정황 증거가 대화재 동안 소실되었다는 겁니다. 은밀하게 준비한 자료들은 증거 없는 망상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점차 모든 상황이 명료해지지 않습니까?"
홈즈는 두 손을 맞비볐다.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후원인은 박사를 지원하며,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증거를 찾게 한 겁니다. 그리고 때가 오자, 단번에 제거하여 대기근의 사건성을 말소했습니다. 이제 남은 증거 하나만 마저 제거하면, 세상에 왕립 학회와 대기근의 관계를 아는 자는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가 무얼 말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는 입막음 당했군."
50년 전, 대기근의 여파로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사망했다. 그리고 올해 초, 런던 대화재로 40만 명의 아이가 학살당했다.
반 세기에 걸쳐 두 번의 학살이 일어났고, 이 모든 사건에 한 조직이 얽혀 있었다. 우연일까?
"범우는 만물의 연관성을 부정합니다."
홈즈의 두 눈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날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안구에는 특유의 저돌적인 총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저는 런던 최고의 지성입니다."
확신에 찬 홈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할 일이 없었다. (끝)
//
거리에는 음울한 하현달이 떠 있었다.
런던 하늘은 채도가 낮다. 그건 달이라고 예외가 아니라 달은 하얗기보다는 탁한 회색처럼 보였다. 멀리서 소음이 들려온다.
보도는 적막했다. 늦은 밤이기도 했고, 길 자체가 으슥한 탓이었다. 느리게 걷는 내 앞에는 여인 한 명이 걸었고,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둘이나 있었지만 둘 다 고독했다.
여인이 지난 자리에는 싸구려 향수내가 악취처럼 남았다. 계절감 없는 얇은 옷차림에, 멀리서 봐도 티가 나는 짙은 화장을 보아, 어쩌면 화류계 종사자인지도 모른다며 시시한 생각을 했다.
무중을 헤매던 처음과 비하면 상황은 나았다.
그리 크지도 않은 이 도시에는 수많은 악이 얽혀 있다. 여기서 나는 누가 적이고,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나름 깨우쳤다. 하지만 아무리 분투해도 파멸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나는 한밤 속을 걸었다.
거리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앞에는 여인이 있었고, 뒤에서는 불쾌한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 붙었다. 슬쩍 돌아봐도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낮게 들리던 발소리가 사라졌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내 발걸음에 맞춰서 작은 소리가 더해졌다.
미행 당하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자, 나는 권총을 꺼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티 내지는 않았다. 가로등 불빛에 총신이 빛날까 봐 손을 소매에 걸치듯이 넣었다.
나는 서서히 벽에 몸을 붙였다. 향수내가 멀어졌다. 어느덧 여인은 저 멀리 앞서 걷고 있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면 움직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꺅!"
외마디 비명을 외치고, 여인이 사라졌다. 잘 보지는 못했지만, 골목 안으로 튕겨서 날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사건을 직감했다.
"누구냐!"
지체없이 권총을 앞으로 내세우고 달렸다. 골목에 다가가자 뭔가 끄는 소리와, 헐떡이는 여인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두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검은 핏자국이 길게 그어졌다. 어느덧 골목 끝까지 이어진 핏물 끝에는 여인의 발이 잠깐 보였다가 다시 모퉁이로 끌려가 사라졌다.
가로등 불빛에 납치범의 그림자가 벽면 크게 비쳤다.
나는 서둘러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걸음이 느린 탓인지 끝에 도착할 무렵에는 납치범도, 여인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독한 향수내가 핏방울과 섞여 공기에 잔류했다.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냄새가 나지 않을 때까지 선 채로 직전 보았던 광경을 머리에 그렸다.
벽면에 비친 그림자는 분명 늑대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