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39화 (139/232)

§139. W의 교훈

우리는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

내 차림은 평소와 같았지만, 마리는 어찌나 기합이 들어갔는지 보는 내가 헛웃음 나올 지경이었다. 피부를 꼭꼭 숨긴 것이 꼭 무슨 귀족 문둥병 환자 같았다.

"그러니까 오히려 눈에 띄네."

"더요?"

"아니, 더는 아니고."

나는 저택 쪽을 돌아봤다가, 급하게 닫히는 커튼을 발견했다. 아서나 그의 형이 이런 귀여운 장난을 칠 리는 없었고....

"아이들하고는 아직도 안 친한가?"

"네?"

"아니, 마중을 나올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요.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아마 제가 아니라...."

그러자 마리는 어려운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뭉갰다. 나는 공연히 그녀의 상처를 파헤치는 일이 될까 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팔랑거리는 옷가지를 보며 물었다.

"그런 옷이 있었던가?"

"백작님이 준비해주셨어요."

어떤 원리인지 몰라도, 잘못 조율한 악기처럼 만들어진 마리의 목소리로는 감정을 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면 가장 신선한 감정을 담아낸다는 음악이야말로 악기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서의 취향인지, 아니면 아서 대에 몰락한 프랑크 가문의 유산을 대충 던져준 것인지 몰라도, 물론 후자겠지만, 아무튼 마리의 차림은 분명 서민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부유하게 보이지도 않아서, 오래된 고급 옷을 계속 입는 몰락 귀족처럼 보였지만, 고아원 출신인 마리가 그런 구분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모시겠습니다."

문 앞에는 전날 미리 불러둔 운전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는 길, 적막 속에서 생각하던 나는 오래 고민하다가 무심한 척 말했다.

"요즘 그놈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그놈, 누구요?"

나는 이미 말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을 군식구로 붙어 지낸 마리는 눈치 빠르게 내 의중을 간파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님 말씀인가요?"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바로 정정했다.

"그래. 얼마 전에도 둘이서 날 찾아왔다면서."

"네? 아니에요."

마리는 놀라며 부정했다.

"원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님께서 용무가 있었는데, 제가 따라가겠다고 조른 거예요."

"오라클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있지만, 주인님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다들 들었거든요. 그리고, 박사님은 다른 용무도 있었던 거 같아요... 어떤 책을 챙겼다가, 그대로 가지고 돌아오는 걸 봤거든요."

프랑켄슈타인이 내게 전할 책이라고 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무게를 실으며 말했다.

"아무튼, 나는 자네가 그놈하고 붙어먹는 꼴은 못 봐.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는데, 그 녀석은...."

나는 순간 뭐라 해야 할 지 몰랐다. 프랑켄슈타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딱히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눈이 마음에 안 들었다.

"박사님은 겉보기엔 그래도 좋은 분이세요."

마리는 변호하듯이 말했다.

"아이에게도 친절하셔요, 누구하고는 다르게요."

"아서?"

내 질문에 마리는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설마, 나?"

"아이들 이름,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사람 이름 잘 못 외우는 건 알잖나."

"십 년 전에 일어난 사건 범인 이름까지 외우고 다니시는 분이요?"

사실이었다. 아서나 홈즈만큼 집착적이진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왕립 학회 명단을 다 외우고 있기도 했다

"주인님은 좀 비인간적이세요."

나는 반박하려다가, 곧 수긍했다.

출발은 순탄했지만, 여로는 내 상정보다 고되었다.

킹스 크로스 역에서 발차한 열차는 대학대표선을 타고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우리는 꼬박 두 시간을 더 기다려서 코츠월드 선(Cotswold Line)으로 갈아탔다.

헤리퍼드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악의적인 시선을 받았다. 마리는 천으로 감싼 향처럼 아무리 가려도 절로 눈에 띄는 존재였다. 다행히 누구도 시비 걸지는 않았지만, 내심 빨리 내려주길 바라는 눈치를 주니 조금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거기에 마리 본인도 골칫거리였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이 걱정돼요." 같은 말로 날 괴롭혔다. 그녀 심정도 십분 이해는 갔다. 저 세간 상식 부족한 아서와 그보다는 조금 더 교양 있는 집사에게 며칠씩 애들을 맡겨두는 게 좋은 선택이 아닌 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내 다리도 다리지만, 몸이 다 낫질 않아서 마리의 도움 없이는 먼 길 나오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나는 고작 며칠이라고 그녀를 달랬다. 여행지에서 그녀를 화나게 하면 피곤하다는 걸 전에 배운 덕이었다.

우리는 헤리퍼드 역에서 내렸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여기도 종착지는 아니었다. 목표로 하는 브로닐스는 한적한 시골이라서 가는 열차가 없었고, 우리는 교외에서 밤마차를 얻어탔다.

여기서 또 한 번 소동이 벌어졌다. 그녀가 마차를 탈 수 없다는 사실을 깜빡한 탓이었다.

말들은 마구 날뛰었고, 우리는 입 맞추지도 않고 용케 서로 모른 척하며 뻔뻔이 자리에 앉아 인자한 승객 흉내를 내었다. 하지만 마부를 제외한 다른 승객들은 뭐가 원인인지 아는 눈치였다.

마을에 도착해서 내리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이미 자정이 지나서 밤보다는 새벽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다. 아침에 출발했으니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었다. 해가 뜨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여독은 이미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런 작은 마을에 숙박 시설이 있을 리 없었고, 그나마 술집에라도 들리면 모포나 잠자리를 빌릴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마리를 그런 사람 많은 곳에 데려갈 수는 없었고, 남은 선택지는 목수 쉼터를 빌리는 것과, 역마차 역에서 선잠을 자는 것 둘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마구간에서 기대어 잤다.

아침이 되고, 찬바람에 몸을 떨며 일어났더니, 수염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크게 재채기하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드물게도 나보다 오래 잠든 마리는 깜짝 놀라며 깨었다.

우리는 그런 지친 몸을 끌고 촌내로 향했다....

브로닐스는 아담한 규모에 비해 긴 역사를 가진 임간 마을이었다. 거주민은 천 명도 되지 않았지만, 그 역사는 웨일스 왕국 성립 이전까지 거슬러 갔다.

이런 역사 긴 장소에는 으레 깊은 비밀이 고이곤 했다. 그리고 모든 비밀은 저만의 비극을 품었다.

겉으로는 여느 시골 마을처럼 평화롭고 독실하게만 보이는 이곳도 고작 십수 년 전에 어떤 끔찍한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여기가 패트릭의 본적이네."

나는 속삭이며 말했다.

"패트릭이요?"

"노퍽 저녁 사건의 마틴 패트릭 말이야."

영리한 마리는 예전 일을 잘도 기억했는지, 놀란 티만 조금 내고 더 묻지 않았다.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 대화는 길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마을 전반에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감돌았다. 사실 그 이상이었다. 감시는 우리 같은 타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렇게 절제되고 엄숙한 상호 감시 체계는 잔인한 비밀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쉽게 나타나곤 했다.

나는 끈질기게 따라붙던 시선이 사라진 걸 눈치채곤 얼른 말했다.

"사건 이후, 지역 사회에서 추방된 마틴의 아내 헬렌과 딸 셰리는 이 마을로 돌아왔지. 하지만 여기서도 차별은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가 작은 만큼 더욱 심했을 거야. 결국, 헬렌은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고, 셰리는 지역 고아원에서 당하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쳤다가 실종되었지."

노퍽 저녁 사건의 뒷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중은 사건의 자극에 흥분하지, 찝찝한 후사까지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도 흔히 여기서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믿었다. 나 또한 그랬다. 실은 그렇지 않았다.

"늑대 인간 사건을 기억하나?"

마리는 발을 멈췄다.

"눈에 띄니까 계속 걷게."

그러자 그녀는 다시 걸었다.

"사건이 있고 16년 후, 나체의 여성이 이 근방의 실그윈 숲에서 발견되었네. 셰리 패트릭이 살아 있었다면 딱 그쯤 되었을 처녀였지. 자기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는 짐승 같은 여인이었어. 지역 신문에도 작게 그녀의 기사가 실렸지."

고작 그 기사만 가지고는 알 수 없었지만, 현지인들은 달랐을 것이다. 그들은 내심 여인이 셰리 패트릭 본인이 아닐까 하는 불안을 품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신사가 나타나서, 그녀를 사고 싶다고 푼돈을 제시하자, 마을은 기꺼이 응했네. 그 신사가 바로 지킬 박사였지. 그는 런던에 돌아와, 그녀를 자신의 잔인한 인간성 분리 실험에 이용했네."

나는 말했다.

"여인은 셰리 패트릭의 몸을 빼앗은 실그윈 숲의 야수였고, 지킬 박사는 자신이 만든 약물을 임상 실험하기 위해 사람들을 습격했지. 내가 미쳐가던 그때와 동시기에 말이야. 나는, 그 때문에 나는, 지킬 박사가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 한 번 의심도 않고 믿었던 거야...."

마리는 대답이 없었다.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일의 진상을 몰랐다. 나는 지킬의 죽음을 보고, 불타는 연구실을 보고, 달을 보고, 짐승처럼 마리를 죽였다.

나의 정신은 지킬 박사의 유작, 인간성의 정수를 모은 하이드를 마셔 회복했지만, 마리는 그러지 못했다.

긴 침묵은 필연적으로 사고를 유도했다.

당시에 나는 모든 일이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잔뜩 남아 있었다. 지킬 박사의 행보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나는 사건을 역추적하며, 웨일스 지방의 지역 신문을 시기별로 읽으면서도 며칠이 걸려 간신히 셰리 패트릭을 암시하는 듯한 작은 기사 하나만 찾아냈을 뿐이었다.

물론 그 기사에도 셰리가 다른 존재가 되었으리라 짐작할 요소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킬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기다린 것처럼 마을에 나타나서 셰리 패트릭을 사들였고, 미리 준비하던 인간성 실험의 피험체로 삼았다. 애초에 실그윈 숲의 야수라는 이름도 그가 지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더 빨리 의문을 품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저 그 사건을 회고하는 것만으로 괴로워서 일부러 외면했던 것이다.

"정말로."

마리는 말했다. 놀라서 심장이 뛰었다.

"정말로, 셰리 패트릭은 몸을 빼앗겼을 뿐일까요?"

오래 침묵하던 마리가 꺼낸 말은 예상과도, 기대와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반만큼 침묵했다가 말했다.

"복수를 위해서, 몸을 넘겼다?"

마리는 눈을 반쯤 감았다. 혹시 찡그린 것일까?

"그런 게 아니라, 그저...."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의도된 침묵이 아니었다. 우리 옆을 지나는 사람 때문에 서둘러 말을 끊은 것이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끝나고, 그 사람이 완전히 멀어지자 마리는 대뜸 물었다.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실 건가요?"

쌩뚱맞은 질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하는 일에 그녀를 끌어들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녀 안에서는 내가 무슨 탐문 탐정 나부랭이라도 되는 듯했다.

"이런 작은 사회에서는 소문이 빨라. 어설프게 캐묻고 다녔다가 저녁만 되어도 누구도 우릴 상대 안 할 거네."

"그러면요?"

나는 그녀가 일부러 모른 척하는지, 아니면 정말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자를 모른다. 하물며 상대가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면 더욱 더.

아무튼, 나는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지킬 박사는 런던에 살았지. 그는 미리 알고 있었을 테고, 누구에게 들어서 안 것이 아니라면, 야수의 정보는 문헌에 남았을 가능성이 높아. 물론 그 정보는 연구실이 불타며 사라졌겠지만, 그가 가진 것이 유일할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네. 오히려 이만큼 역사 길고, 실그윈 숲에 닿은 마을이라면 여기 어디에 기록이 남았을 가능성이 더 높아."

"그런 중요한 기록을 우리가 구할 수 있을까요?"

전부터 마리의 예리한 통찰력엔 놀라곤 했다. 그녀는 이런 일에 경험이 없는 것치곤 정확하게 필요한 질문을 했다.

"아마도. 이건 내 예상이지만, 정보는 그렇게 엄중히 지켜지고 있지 않을 거야. 오히려 현지에서는 별로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거나, 상세하게 아는 자가 드물 가능성이 더 크지."

"어째서요?"

마리는 탐정 조수처럼 물었다.

"그야 야수의 비밀이 엄중히 지켜졌다면, 지킬 박사가 먼 런던에서 그 정보를 듣게 될 일이 없었을 테고, 야수의 비밀이 공공연했다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셰리 패트릭을 넘기지 않았겠지.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셰리를 보고 야수를 연상하지 못했던 거야."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자 마리는 감탄조로 말했다.

"주인님도 자기 일을 하실 때는 조금 달라 보이네요."

꽤 불쾌한 말투였다.

그렇게 평화로운 관광객을 연기하며 마을 변두리를 돌던 우리는 곧 작은 성당 앞에 도착했다. 밖에서 보아도, 실제로도 별 특징 없는 건물이었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게 거기 끌렸다.

나중에야 이유를 붙여보자면, 대게 오래된 마을에서 옛날 책은 성당에 보관한다는 정도였지만, 그것도 내 충동을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나는 설명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따라 들어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식일도 아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마 신부가 살거나, 집무를 볼 것으로 생각되는 방문을 열었다.

열쇠는 걸려 있지 않았다.

"잠깐만요, 주인님."

마리는 놀라면서 방 앞에서만 안절부절못했다.

검소한 방이었는데, 아무래도 생활의 흔적은 없었다. 대신 집무를 본다는 예상은 맞았는지, 책상 아래에는 빈 종이가 수북이 쌓였고, 책상 위에는 뚜껑이 마른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신부가 주민을 위해 대필 업무를 하거나, 아니면 어떤 책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관심은 그곳이 아니라 옆에 있는 작은 책장에 있었다. 듬성듬성 비어 있었는데 대부분은 불어로 된 신학서였고, 일부는 영어로 된 성경이었다.

성경을 제외하곤 읽지 않은지 꽤 되었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중에 나는 책등에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은 책을 뽑았다.

달리 잡기 좋은 위치도 아니었고, 낡았다는 것 말고 어떤 인상적인 점도 없었기에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역사에서도 흔히 혼용하듯, 우연은 운명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기이한 운명이 날 이끌고 있었다.

나는 책을 펼쳤다. 이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푸른 표지는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 책의 특이한 점 하나를 더했다.

책은 옛 영어로 적혀 있었다.

제본을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문장은 고대 영어와 현대 영어의 과도기쯤의 것인 듯했다.

물론 언어학은 내 전공이 아니다. 하지만 아서의 전공이기는 했다.

대학 시절, 그를 따라다니던 암울한 나날 덕분인지, 나는 몇몇 간단한 문법 정도는 알았고, 몇몇 현대식으로 쓰인 단어 덕분에 띄엄띄엄하게나마 해석할 수 있었다.

내용은 브로닐스와 란고스 간의 오랜 전통을 다루고 있었다. 란고스라고 하면 여기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취락으로 호수가 유명한 임간 마을이었다.

그건 일종의 계약이었는데, 두 마을이 서로 지켜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 주를 이뤘다.

예를 들어, 촌장은 반드시 어떤 가문에서만 나와야 한다든지, 그 임기는 어떻게 정해진다든지, 2년마다 한 번씩 교류혼을 치러야 하며 모계와 부계를 번갈아 해야 한다든지, 심지어는 베어도 되는 나무의 높이와, 매년 어느 정도 면적을 개간해야 한다든지 등등 세세한 부분까지 정해져 있었다.

성당에 모셔두기엔 드루이드교의 영향이 짙게 묻어나는 문서였다. 비록 민속학자는 군침을 흘릴 만한 책일지언정 내가 찾는 비밀과는 꽤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구 책장을 넘기던 중, 나는 어떤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모르는 약자 같아서 외면하던 것이었지만, 이것이 마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임은 분명했다.

책에서는 그걸 W라고 불렀다.

건조하게 쓰인 문장 사이에서, W에 관한 문장은 유독 필자의 감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건 두려워하는 어조 같기도 했고, 어쩌면 가엾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헨리 6세는 국왕의 의무를 다했다. W는 배반의 교훈이며, 우리는 잊되 계속 멀어져야 한다.'

나는 거기까지 읽고는 책을 덮었다.

"주인님, 그 책은요?"

"가서 읽어야겠어."

당황하는 마리를 손을 잡고,  나는 누군가 보기 전에 빨리 성당을 멀어졌다.

"간다고 해도 어디로 가게요. 책이 없어진 건 바로 알아챌 거에요."

예리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나의 규칙이 우리의 여로를 비추고 있었다.

'브로닐스는 대마다 한 명을 란고스 호수로 보내서 일생을 마쳐야 한다. 그는 다른 신을 믿어선 안 되고, 첫해에는 목청에 칼침을 박아 벙어리가 되어야 하며, 다음 해에는 오른손 엄지를 잘라내야 한다.'

나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채 답했다.

"란고스 호수, 거기에 분명 무언가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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