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ANATHEMA
마을 광장에서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숲과 마을이 교차하는 흙길을 지날 무렵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었다. 시간상으로 우리가 나오자마자 신부가 돌아왔다고 해야 딱 맞았다. 그렇다면 아주 절묘하게 운이 따른 셈이었다.
범인이 누군지는 금방 알려질 것이다.
우리 모습을 본 주민 수는 꽤 되었고, 지금쯤이면 우리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을 터였다. 그러니 곧 수색대가 꾸려질 테고, 그들이 쫓아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야만 했다.
역마차를 타지 않은 이유도 이랬다. 마차가 출발하는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는 건 물론, 란고스라는 행선지를 알리는 것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주인님, 어떻게 교회 물건을 훔치실 수 있어요?"
"나중에 설명할 게, 지금은."
나는 마리를 재촉하는 말을 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보폭을 조절하는 건 그녀였다. 나는 아까부터 거의 몸을 기대다시피 하고 있었고, 마리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날 부축했다.
"천벌 받을 거예요."
"그것도 나중에 받을 테니까."
옆에서 마리가 어이없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것도 상당히 기괴한 음색이었기에 내 짐작일 뿐이었지만.
나는 여러 경력 때문에 지도를 외우는 습관이 있다.
브로닐스는 란고스와 숲길로 이어져 있었고, 이 길은 오로지 두 마을 사이를 이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내심 우리가 이런 외진 길로 도망친다고 생각하지 못하길 기대했다.
그 노림수가 통했는지, 도망치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누구도 쫓아오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마리의 옷깃을 잡고,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은 수풀인데요?"
"괜찮아."
그렇게 우리는 길에서 벗어나서 걸었다. 별다른 불평이 없던 마리는 가지에 옷이 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조금 뒤, 더는 길가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하고, 나는 다시 그녀 옷깃을 잡아서 멈췄다.
"잠깐만 쉬었다 가지."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른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댔다. 반면, 그녀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문득 그녀가 내색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지칠 수 없는 몸인지 궁금해졌지만, 나는 신사답게 굴기로 했다.
작은 호기심으로 그녀에게 상처 주는 대신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훔쳐온 책을 마저 살폈다.
규범서에는 여러 정보가 난립해 있었다.
예를 들어 집필 시기 하나를 알려고 해도 그랬다. 책 어디에도 구체적인 연도가 기록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추할 방법은 있었다.
'헨리 6세는 국왕의 의무를 다했다. W는 배반의 교훈이며, 우리는 잊되 계속 멀어져야 한다.'
이 문구를 보라. 언급된 헨리 6세가 국왕을 지냈던 건 1400년대 초중반의 일이었다.
그리고 언어 자체에도 단서가 있었다. 책에는 여전히 옛 영어의 잔재가 즐비했고, 근대식 런던 영어가 전국에 확산한 것은 주로 셰익스피어 전후를 꼽았다.
즉, 규범서는 최소 1400년대 중반부터 1500년대 중반 사이에 쓰인 게 분명했다. 만약 내가 아서처럼 언어학에 능통했다면 그 시기를 더 좁힐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내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400년이면 비밀 하나 잊히기에 과분한 시간이지."
"네?"
"W가 뭘까. 사물? 행위? 아니면 어떠한 사건? 쉽게 생각하면 야수를 부르는 약어겠지만, 그건 너무 편의적인 발상이지...."
나는 홀로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본문에 담긴 은밀한 뉘앙스로는 유추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W가 마을에서 그리 드물지 않았다는 점과, 그럼에도 모두 그에 대한 죄악감을 공유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작은 사회에 그리 모순된 정서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결국, 뭔가 더 알기 위해서는 란고스 호수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근거는 있다.
불과 5km 남짓 떨어진 두 마을은 분명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기에 둘은 서로 감시하며 기이할 정도로 세세한 규범을 함께 지었을 터였다.
이 부분은 순전히 추측이었지만, 브로닐스와 란고스에서는 자신들이 품은 죄악감을 이유로 W의 존재를 은폐하려 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완전히 잊는 건 원치 않았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거기서 파생된 것이 다음 규칙이었으리라.
'브로닐스는 대마다 한 명을 란고스 호수로 보내서 일생을 마쳐야 한다. 그는 다른 신을 믿어선 안 되고, 첫해에는 목청에 칼침을 박아 벙어리가 되어야 하며, 다음 해에는 오른손 엄지를 잘라내야 한다.'
그저 전근대 사회 특유의 불합리한 잔혹감 치부하기에는 목적성이 뚜렷한 규칙이었다.
목청을 제거해 벙어리로 만들고, 펜대를 잡을 수 없게 엄지를 잘라낸다. 그들은 이렇게 유출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자신들의 비밀을 이어나갈 희생양을 바쳐온 것이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맥락상 분명했다.
나로선 이런 구시대적인 전통이 여전히 잘 지켜질지 의문이었지만, 최소한 그들이 거주했던 장소라도 발견한다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주인님?"
"아, 그래. 움직이지."
마리의 재촉에 깨어난 나는 다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어쩐지 불만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한참 더 걸었다.
지도상으로 란고스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느린 보폭과 예상보다 거친 흙길 때문에 한참 늦어지고 말았다.
어느덧 하늘은 푸릇함을 잃고 붉게 시들었다. 그러는 동안 동면하지 않은 풀벌레는 끈질기게 팔다리를 기어올라 인생 최후의 증표를 내 몸에 내고 그랬다.
"아마 이쯤에서 빠져야 할 거야."
란고스 마을에 얼굴을 비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곧장 호수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웅덩이 특유의 녹조 냄새가 길을 이끌었다.
가지는 뾰족하고, 지면은 투박했다. 그리고 어느 풀숲은 타고 있는 것처럼 붉었다. 나는 그 가지에 손을 뻗어서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물 냄새가 났다.
란고스 호수는 석양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호수 위에는 나룻배 하나가 유유히 유영하고 있었고, 한가로이 줄을 늘어트려 놓은 낚시꾼도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조금 더 걷고, 호수변 잔디밭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마리는 다소곳이 다리를 모아서 내 옆에 앉았다. 선선한 바람이 풀과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연주했다.
시간은 촉박하고, 몸은 피로했다. 그럼에도 나는 상황에 맞지 않는 묘한 감정에 고조되었다.
"아름답네요."
차마 내가 꺼내지 못한 말을 마리가 대신 했다.
"그런 감상을 품을 때가 아니야."
나는 그녀를 탓하듯 말하며, 코트에 묻은 잎사귀와 가시를 털어냈다. 그렇게 말하고도 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풍경에 감동했지만, 그 뒤로는 무력감이 따랐다.
여기까지 와서 뭘 어쩌려고 한 것인가. 호수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사람 눈을 피해서 인근을 수색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심지어 나는 주변에 내가 찾는 장소가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흘렀다.
해가 저물며 동쪽 하늘에서 보라색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마리는 눈치 빠르게 먼저 일어나서 날 부축했다.
내가 그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동안, 호수 쪽을 바라보던 마리가 갑자기 외쳤다.
"주인님, 저길 보세요!"
"저기?"
"호수 쪽이요!"
조금 전까지 신비로운 색채로 빛나던 호수는 탁하게 흑색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오닉스처럼 빛나며 그 위로 문의 상이 어렸다.
어떤 마법이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빛과 각도의 합작으로 나타난 절묘한 공예였다. 시간과 장소가 맞아떨어져야 드러나는 그런 비밀 말이다.
이쯤하면 나 역시 의심이 들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이제 설명되지 않았다. 런던을 떠나고 나서부터 모든 정황이 우리를 강제로 이끄는 느낌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
런던 대화재 당시에 그는 내게 지식을 주입하며, 자신의 적을 막는 수족으로 날 이용했다. 아직도 그의 마수에서 다 벗어나지 못한 걸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처럼 부자연스러운 흐름은 없었다. 줄곧 함께 있던 마리라면 내게서 이상한 점을 바로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마리가 내 코트를 흔들며 재촉했다.
"주인님, 수면의 그림자가 사라져요!"
"우리와 해의 위치를 미뤄보면 어딘지는 금방 나와. 서두를 것 없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초조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서둘러 그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10분 정도 조사하여 호수 가장자리에 숨겨진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동굴 입구는 반쯤 잠겨 있었다.
겨울 호수의 찬물이 바지 밑단과 신발, 코트를 흠뻑 적셨다. 동굴은 안에서 경사진 구조였고, 호숫물은 입구 쪽에만 고여 있을 뿐이었다.
그 상황에 오히려 발목을 잡은 건 마리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호수에 들어오기를 망설였다. 심지어는 옷을 벗을까 하는 바보 같은 소리도 했지만, 내가 재촉하자 결국에는 호수를 지나왔다.
우리는 젖은 생쥐처럼 질질 끌며 경사를 올랐다. 바윗길 사이로는 작은 냇물이 흘렀지만 통행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냄새가 골칫거리였다. 안으로 향할수록 습기와 이끼가 무성한 냄새가 진득거리게 달라붙었다.
"이건 최근까지 사람 손이 닿은 동굴이야."
나는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보게, 야생동물 흔적이 전혀 없잖아. 잠깐 머무르는 흔적이라도 있을 법한데, 이상할 정도로 바닥이 깔끔하고 냄새가 없지. 사람들이 빈번히 왕래한 냄새가 배어서 다가오지 않은 거야."
탐험가 시절에 주워들은 지식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마리는 감탄하며 말했다.
"주인님을 보고 있으면 제 상식의 기준선이 무너지는 거 같아요."
"낙심하지 말게. 내가 남들보다 조금 유식한 편이니까."
"그도 그럴 게, 세간 상식은 하나도 모르시는 분이 어쩜 이런 것만 잘 아실까요."
분명 칭찬이라고 으레 짐작하고 거들먹거렸던 나는 불쾌해져서 인상을 확 썼다. 내가 뭐라 한마디 하기 전에, 갑자기 마리가 외쳤다.
"저기 문이 있어요!"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말 돌릴 셈으로 한 말인가 의심도 했지만, 정말 조금 더 가니 문이 보였다. 악취의 절반 정도는 여기서 나고 있었다.
"나무로 지었고, 거의 썩었군. 이건 벌레 배설물 냄새야."
나는 문을 당기고 밀어봤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겼나요?"
"아니."
그리고 나는 어깨로 문을 힘껏 두드렸다. 썩은 나무문은 쉽사리 으스러지고, 사람 한 명이 지날 만한 큰 구멍이 났다.
"봤지?"
"늘 이런 식으로 일하시나요?"
"때때로. 내 양심에서 허락이 내려올 때만 그러지."
우리는 실내, 그걸 실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쑥과 향초 냄새가 섞인 듯한 야릇한 냄새가 진동했고, 그다음에는 사람 배설물 냄새가 났다. 어둠에 눈이 길들어지자 내부 풍경이 보였는데 마치 어느 교단의 제사 시설 같았다.
그렇게 말하면 조금 과장한 것이고, 실제로는 십자가와 촛대, 다 쓴 향초 따위가 여기저기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방 중앙에 앉아 있었다.
"꺅!"
마리가 비명을 질렀다. 나도 냄새 때문에 시체라고 생각해서, 그가 움직이자 깜짝 놀랐다.
"브로닐스."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단어는 허공을 가를 뿐,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틈에 진정한 나는 다시 정중히 물었다.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물을 게 있습니다."
노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백내장이 번져 새하얗게 질린 눈이 우리 뒤편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을 할 줄 압니까?"
노인은 과묵했다. 날붙이로 만들어진 침묵이었다. 목에 난 흉터는 저주처럼 노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글은요?"
나는 노인의 손을 살폈다. 책에서 본 그대로 엄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상징적인 의미밖에 안 되었다. 만약 그가 읽고 쓸 줄 안다면, 검지로라도 필담은 나눌 수 있었다.
"W."
노인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때마다 살점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그윈 숲의 야수."
"얼마 전."
그건 목소리보다는 쇳소리에 가까웠다.
"같은 일이 있었지.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잊힌 사당에.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아서 왔는지."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말을 할 줄 알았군요!"
노인은 날 보며 입을 크게 열었다. 어두워서 그저 깊은 공동처럼만 보였지만, 그가 뭘 보이려고 했는지는 예상이 갔다.
"의식은, 실패했다. 저들은 내 목소리를 뺏지 못했어. 하지만, 나는 순순히 빼앗긴 척했지."
"어째서 벙어리 시늉을?"
"말할 줄 아는 것을 들키면, 다시 뺏으려 들 테니까.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법이지... 절대로, 그렇게 안 되지, 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는 적은 양의 핏물을 동반했다.
설령 목청이 멀쩡했다고 해도, 오랜 금언 생활은 기계에 낀 먼지처럼 노인의 성대를 마모시켜 온 것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피와 통증이 따르기에, 노인은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전에 왔던 남자는 지킬 박사겠군요."
"이름은 몰라."
처음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던 말투가 점차 윤활해졌다..
"그는 실패했나?"
"무엇 말입니까?"
"무엇이든 그가 하려던 것 말이네."
"죽음이 실패라면, 그렇습니다."
노인은 죽은 지킬을 회고하듯이 운을 떼었다.
"그는 갈망하는 존재였네."
"갈망이요?"
"그래, 하물며 나 따위 은둔자와는 비할 바 없이 위험한 인물이었어. 그는 여지없이 갈구했고, 나는 그에게 야수의 비밀을 일러주었네. 저 울(uːl)과 불(buːl)의 진실에 대해서."
그의 말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바로 되물었다.
"울과 불이 뭡니까?"
"W는 그들을 부르는 잊힌 발음이네."
내가 했던 모든 예상은 맞았다. 노인은 W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곧장 그 실체를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당신은 평생 벙어리 시늉하며 사람들을 속여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처음 본 지킬 박사나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비밀을 숨기는 게 당신의 역할 아니었습니까?"
노인은 침묵했다. 짙은 애환이 묻어나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겨우 다시 꺼낸 말은 대답이 아니었다.
"양지에는 빛의 법칙이 있듯이, 음지에도 어둠의 법칙이 있다네."
노인은 유창히 말했다.
"햇빛 아래 사는 학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치지. 하지만 나처럼 어둠 속을 사는 자라면 절로 깨닫는 것이야. 나는 그걸 짙음이라 부른다네. 저 태양에서 오는 빛과 기름불에서 나온 빛이 그토록 차이 나듯, 어둠에도 격이 있는 거지."
나는 여전히 맥락을 잡지 못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중에 가장 천한 것은 공간의 어둠이네. 그저 빛이 없기에 생겨난 수동적인 어둠이고, 탄생에 목적이 없는 만큼 그만큼 가치 없지. 다음으로 짙은 건 그림자지만, 빛 아래 있는 사물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니 천박하기 짝에 없어. 그렇다면 가장 짙고 어두운 어둠은 무엇인가."
지금 상황에서 뜬금없지만, 날 가장 당황시킨 건 노인의 어휘력이었다.
처음에는 말하기조차 버거워하던 노인이 열변을 토하며, 일평생 동굴에 갇혀 있던 것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수준 높은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건 인간 안에 있지."
노인은 말했다.
"나는 어둠의 법칙을 따르기에, 내 눈은 빛이 아니라 어둠으로 사물을 본다네. 그런데 인간의 어둠은 너무 짙고 깊어서, 내가 사람을 볼 때면 꼭 세상에 파인 구멍처럼 보이는 거야. 그러기에 내가 사람을 구분하려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지."
그의 말이 끝나고, 나는 그게 어떤 은유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건 어떤 종류의 은유도 아니었다. 노인은 진심으로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러기에, 오직 짙음만을 보았던 거야."
노인은 말을 끊었다.
"나는 한없이 짙은 어둠을 보았기에 선뜻 비밀을 내놓았지. 그는 내 야망을 이뤄주기 충분한 인물이었어. 그런 그가 실패하였다니 유감이네...."
나는 침묵했다. 노인은 내 우려를 꿰뚫어 보듯이 말했다.
"자네들 셋 중에도 내 야망을 이뤄줄 만한 자가 있네."
"야망이란 뭡니까?"
"여기 감금되어서, 손가락을 베이고, 목에 칼을 넣으며 평생을 보냈네. 이제 와서 내가 자유를 꿈꿀까? 아니면 황금을? 아니지, 결코 아니지...."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뭘 바라는지 바로 이해했다. 그가 바란 대로 지킬 박사는 끔찍한 참사를 야기했다. 비록 노인을 감금한 두 마을이 아닌 런던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이런 곳에 홀로 갇혀 있었으니,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가 말한 어둠이 실존한다면....
"저입니까?"
"자네도 특별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르지."
나는 무심코 마리를 돌아봤다. 여전히 그녀가 지킬 박사만큼 사악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의 육체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서?
"자네들이 찾는 걸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네. 허나 조심하게."
그는 말했다.
"나도 한때는 이곳을 벗어나려 했지. 예전보다 감시가 소홀해졌다는 걸 알게 되고 난 뒤, 호수의 수위가 낮아지는 겨울날 나는 과감히 탈출을 시도했지. 탈출은 성공했어. 비록 얼음물에 동상을 입어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지만 어쨌거나 밖에 나왔지. 하지만 해가 뜨고, 결국엔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어. 왠지 아나?
노인은 시종일관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흉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인간이었지만, 나는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던 거야. 살갗은 햇빛에 닿으면 불타고, 눈은 빛을 보지 못하니 맹인이나 다름없었지. 고작 수십 년을 동굴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금단을 익힌 대가인 거야... 인간이 알면 안 되는 걸 알았으니,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이지."
그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마다 관절에서 마찰음이 들렸다.
"W는 이 땅에서 빈번히 일어나던 죄악과 그 부산물의 총칭이지. 어느 쪽이 울이고 불인지는 몰라도, 당시부터 그것들이 거의 동일시 되었던 건 분명하네."
노인은 부러질 것처럼 얇은 다리로 바닥에 지면을 비비듯이 걸었다.
"이것이 어디서 유래되어, 어째서 행해졌는지는 몰라. 로마인을 따라왔다거나, 바이킹 풍습이 정착했다거나, 드루이드교의 오랜 가르침이라는 설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이 자연스러운 행위가 죄악으로 인식되었던 거야. 완전히 잊어야 할 정도로."
이야기의 규모에는 놀랐지만, 내용 자체는 오기 전에 짐작한 것과 거의 같았다. 그는 어느 제단처럼 치장된 바위에 올려진 돌 상자를 열었다.
"헨리 6세 때라고 했네. W를 묘사한 대부분 서적은 불살라졌고, 군대가 동원되었지. 그때 모든 기록이 소실되었지만, 란고스와 브로닐스는 한 권의 책을 동굴에 숨겨서 보존했네. 어느 시대가 되어도 W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고심한 한 권이었던 거야. 최초의 켈트인 수도사 중 하나가 적었다는 책이었지."
그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렸다.
"그 모든 지식이 여기 있네, 야수교본(Text of beast)."
노인이 내게 내민 책은 완전히 변색하여, 심지어 어떤 부분은 생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걸 받았다.
"나는 책의 내용을 모르네."
그는 고백했다.
"문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저 들춰본 것만으로 죄가 되어서, 나는 평생 여기 갇히는 벌을 받았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전에 왔던 지킬 박사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자리에서 읽었네."
나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 마리가 볼 수 없는 각도로 몸을 돌렸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는 읽기 어려운 옛 영어 문자와 함께 지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삽화가 동봉되어 있었다. 나는 글을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노인이 한 말은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책에는 두 가지 행위의 방식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집필 시기를 고려하면 책에서 다루는 해부학적 관점은 놀라웠고, 그 잔혹함은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학술적인 의미로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월등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하지만, 아, 세상에. 어쩜 이럴 수가. 정녕 어찌.
"W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네."
노인은 말했다.
"교접, 낙태...."
책의 전반부에는 인간과 늑대의 성행위 체위를 일곱 종류 묘사했으며, 후반부에는 낙태 시술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아."
나는 앎을 깊이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