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충성, 지배
내가 보기엔 마리는 금방 진정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좀처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대신에 과묵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침묵은 저마다 압력을 가지는데, 밀도가 낮은 것은 내 쪽이었다.
결국 나는 밀려나듯이 방에서 나왔다. 걷는 건 수일 만이었지만, 몸은 곧잘 적응해서 금방 전처럼 걸을 수 있었다.
어두운 복도 끝에는 작은 다락 창이 나 있었는데, 그 사이로 겨우 모습을 비친 초승달의 흐린 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나는 그 사이를 빠르게 지나는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눈의 착각인가 싶었는데 그림자는 잽싸게 움직여서 복도 끝 방으로 사라졌다.
우연히라도 누군가 마주칠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뒤를 밟았다. 형체가 사라진 문앞에 도착하자 틈새로 찬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곧장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이 부산한 사물로 가득했다. 창고로 쓰는 듯했다. 번잡하기는 했지만 공간이 좁아서 숨을 곳은 없어 보였는데, 나는 창가에서 아래로 늘어진 긴 줄을 발견했다.
줄은 1층에까지 닿아 있었다. 나는 울부짖는 외풍 속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상황을 짐작한 나는 늑장 부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1층에는 왜소한 체구의 남성이 서 있었다. 여관 주인이었다. 촛대조차 들지 않고 있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준비라도 한 것처럼 다짜고짜 말했다.
"쾌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거칠게 그의 옷깃을 쥐었다. 집주인은 내 팔을 잡으며 저항도 해봤지만, 이내 발뒤꿈치를 들며 떠올랐다.
"누가 시켰지?"
"저는 무슨 말인지 도통...."
"왜 엿들었지?"
내가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자, 주인은 겨우 자기 범행을 고백했다. 그는 애원하듯이 외쳤다.
"딴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냥 제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대로 그를 패대기치듯 놓았다. 주인은 뒤로 넘어지더니 목을 잡고 괜히 엄살로 기침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이 어쨌건, 이번 일은 내게도 한계를 느끼게 했다.
그녀에게 시골집을 마련해 주겠다던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지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저 마리의 맨손을 문틈 새로 엿봤을 뿐인데도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실망한 속내를 숨기며 으름장을 놓았다.
"만약 오늘 보고 들은 일을 어디서 털어놓는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누구한테도요!"
그렇게까지 위협할 생각은 없었는데, 주인은 사소한 겁박에도 벌벌 떨었다. 사실은 런던에서 먼 이런 한적한 시골에서 무슨 소문이 돌든 큰 상관은 없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떠날 때까진 입단속을 시켜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의 처후를 고민하는 것처럼 시간을 끌었다. 이리 보면 나도 썩 괜찮은 압력의 침묵을 가졌다. 주인이 완전히 질식하기 전에, 나는 젠체하며 운을 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잠시 후, 나는 품에 과일주 한 병과 잔을 끼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바깥이 시끄럽던데요."
"이제야 말할 기분이 들었나?"
마리는 내 질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새촘하게 몸을 돌렸다. 물론 표정도, 눈빛도 바뀌는 게 없는 그녀였기에 이조차 상상이었지마는. 마리가 이처럼 삐치는 일은 드물었기에,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데는 평소보다 많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일이 좀 있었어. 자네가 신경쓸 건 아니고."
나는 침대에 앉으며 목발을 옆에 눕혀놓았다.
"그건 술인가요?"
"자네도 한잔할 텐가?"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음주하시면 어떻게 해요."
혹시나 함께 마시자는 뜻인가 하고 반색하며 묻자, 마리는 독살스럽게 잔소리했다.
"약주 한 잔은 몸에 좋아."
"한 잔으로 끝내시는 경우가 없잖아요."
달리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공연히 성냈다.
"사람을 무슨 주당처럼 말하나?"
"주인님이 취하시면 피곤한 건 저니까요."
나는 다짜고짜 그녀 손에 잔을 쥐여주고, 옷가지 천으로 먼지를 닦아냈다. 마리는 당황해서 잔이 차오르는 걸 가만히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시시한 소리 할 것일랑 함께 마셔주기나 하게."
"아시잖아요, 저는 음주 못 해요."
"자네도 이번 기회에 술을 배워. 지긋한 인생에 낙이라도 있어야지."
"하지만, 제가 술을 마셔도 되는지, 프랑켄슈타인 박사님께 물어봐야 해요."
"왜 자꾸 그따위, 그리고 의사나 박사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법이야. 내 경험상 반 정도만 듣는 게 적당해."
결국, 그녀는 반쯤 채워진 잔을 공손히 들고 내려놓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나는 준비한 잔을 건넨 탓에 뜻하지 않게 병나발을 불게 되었다.
"또 그렇게 다 흘리시면서...."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할까 하는데, 나는 지금도 자네가 이 일을 아는 게 달갑지 않아. 그래도 정 알아야 하겠다면 더는 숨기지는 않겠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말했다. 결국, 기회를 놓친 마리는 더는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아주 시끄럽게 침묵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고, 나는 아주 긴 대화를 나눈 것처럼 피곤했다.
그 끝에 그녀가 내놓은 답은 짧고 명료했다.
"알고 싶어요."
익히 짐작하고 있는 대답이었지만, 기껏 마음의 준비를 한 쓸모가 없게 놀라고 말았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요구를 말하지 않았다.
일찍이 철이 든 마리는 처음부터 주종의 개념을 이해했다. 천성이 기가 센 것인지 아니면 내가 눈 뜨고 못 볼 만큼 답답했던 건지, 결국에는 이것저것 말하게 되었다지만 그 부탁은 대게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반면, 그녀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녀가 괴기 기사를 모으기 시작하고부터, 그건 나 자신의 의무가 되기도 했다. 어떤 일에도 오래 재미 붙이지 못한 내가 신문만큼은 매번 질리지도 않게 사기 시작한 것이다. 나로서는 불쾌한 통찰이었으나, 한심하게도 결론은 뚜렷했다.
나는 마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후회는 하지 말게."
"안 해요."
"그냥 으레 하는 말이야. 일일이 성실히 답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모든 여행담을 말하기에는 술이 부족하고, 짧게는 설명할 자신이 없는데."
"제 술을 드셔도 돼요."
"이것도 그냥 으레 하는 말이야."
나는 용기를 한 모금 마셨다. 첫 입부터 수염이 축축했다.
"그래, 이제는 피하지 않겠네. 이건 나의 죄에 관한 얘기지만, 나보단 자네에게 중요한 이야기일 테니까."
마리는 손가락을 떨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자네의 죽음 말이야. 내가 자네를 죽였던 그 사건부터 얘기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서에게서 온 편지를 받은 때부터, 내가 어떻게 미치고 말았는지, 늑대 인간 사건을 맡을 때쯤 내 정신이 얼마나 황폐했는지, 그리고 내가 저지른 범죄를 어째서 늑대 인간이 저지른 것이라 착각했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앞부분 내용은 마리도 얼추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죽기 전의 일화는 처음 들려주는 것이기에 때때로 불안해하는 반응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야기를 끊고, 이미 지난 일임을 다시 상기시켰다.
나는 마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궁금했다. 처음부터 이 이야기의 끝은 현실보다 끔찍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죽었다. 그보다 나쁜 결말은 없을 텐데, 대체 무얼 걱정하는 것일까. 나는 묻지 못했다.
반면, 그건 나에게는 고통스러울 만치 괴로운 사실이었다. 아무리 늘어트려도, 식도 끝까지 싸구려 과일주를 붓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과거는 내 입을 통해 날 찾아왔다.
"그리고, 내가 자네를 죽였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 다물었다. 이번에도 아주 긴 침묵을 예상하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입 다문 내게 갑자기 물었다.
"그리고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나는 이게 인간적인지, 비인간적인지 알 수 없었다. 오직 하늘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혀를 씹었다. 문자 그대로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그러면서도 아픈 줄을 모르고 되물었다.
"그리고요?"
나는 그녀의 말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말 많고 창의력 부족한 이들의 전유물이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숨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친절하게 날 타박하는 대신에 질문을 풀어서 설명해줬다.
"그다음에 주인님은 어떻게 지금처럼 멀쩡해지셨고, 저는 어떻게 살아난 거죠? 주변 사람들의 대화로 대충은 알아요. 주인님이 보석으로 풀려났고, 프랑켄슈타인 박사님이 제 뇌를 가지고 살려냈다는 건요. 그래도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알고 싶어요."
그것이 제 죽음보다 중요한 일인가?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 하늘이 알 것이라 했지만, 그건 내 실수였다. 하늘은 모른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 사람의 마음을 모르건대.
"두 번째 질문부터 답하자면, 모든 건 아서의 계획이었네."
"프랑크 백작님이요?"
마리는 의외란 듯이 물었다. 그도 그렇겠지. 그녀를 아는 사람 중에 아서만큼 노골적으로 기피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 그는 보석으로 날 풀어내고, 자네가 카타콤 지하에 묻혔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네. 그리고 살려낼 방법이 있다는 것도 말이야.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는 처음부터 프랑켄슈타인의 기술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 거야. 나는 어떤 자의식도 없이 아서의 말을 따랐네. 지하 카타콤에 기어들어서 자네의 머리만 가까스로 구해서 지상에 올라왔지. 머리를 품에 안고 프랑크 저택으로 돌아갈 때야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처음 알겠더군.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나?"
길게 늘어지던 말은 점차 느려지더니 말줄임표 같은 것이 되었다.
"나는, 솔직하게 그만둘까 생각했네. 심지어는 자네가 되살아나고도 그 일을 한참 후회했지. 모든 게 내 이기심이라며."
보지 않아도 마리 표정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나는 늘 같은 모양의 얼굴이 보기가 두려워서, 눈을 돌린 채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공연히 괜한 말을 했네. 술이 들어가면 이놈의 입방정이 심해져. 아무튼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지킬 박사가 하던 연구 덕이네. 그는 본능으로만 이뤄진 실그윈 숲의 야수를 해체해서, 오로지 인간으로만 이뤄진 순수한 이성을 정제해냈지. 하이드, 그 인간성을 먹은 결과, 나의 정신은 파편화되어서 어떻게 해도 완전히 미치지 않게 된 거야."
말을 마치고, 나는 바로 병주둥이를 물었다. 그리고 질식하지 않는 한, 가장 오래 숨을 참았다.
"실그윈 숲의 야수라면 알아요."
마리는 말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건 그걸 막기 위해서고요."
"그래.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서나, 동굴에서 엿들은 게 다니까요."
"처음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나? 긴 이야기가 될 거야. 아니면 대략적인 흐름은...."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처음부터. 그러려면 아주 옛날로 거슬러 가야 해.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분명한 건 불과 400년 전까지는 이어지던 이 땅의 악습에 관한 것이지. 그건 인간과 늑대의...."
나는 말을 씹었다. 취기 탓인지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사요?"
"누가 그따위 말을 입에 담으랬나!"
마리는 토라진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그 망할, 망할 것이 어떤 이유로 행해졌건, 당시에도 그게 떳떳하던 일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 두 종 사이의 잡종이 태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그토록 잔인한 수단까지 사용했으니까. 아니면 두려워했을지도 모르지. 실그윈 숲의 야수만 봐도 도무지 길들일 수 있는 종류의 짐승이 아니니까."
나는 습관처럼 홀로 말하며 추측해 나갔다. 그러자 마리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말이지?"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를 어쩐지 알았다.
"뭐라 안 할 테니까."
"그러고 정말 아무 말도 안 하신 적이 없잖아요."
"틀린 내용을 고쳐줄 수는 있잖나. 그리고 이번에 한해서는 나도 모르는 것투성이라 그럴 염려 없어."
"알았어요, 그러면 물어볼게요."
마리는 그리 말하고도 조금 더 뜸을 들였다.
"정말로 모르는 건데요, 인간하고 늑대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있나요?"
"그야."
나는 곧장 답하려다가 말았다. 안된다고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그리고 실그윈 숲의 야수가 태어난 게 적어도 400년 전이라면,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 거죠? 제가 아는 가장 오래 사는 동물이 예티인데 그것도 200년은 살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초를 쳐서 미안한데, 예티는 없어."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나요?"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데."
"제가 하는 말에는 늘 부정부터 하잖아요."
"나도 맞는 말에는 그렇다고 해. 아닌 것에만 아니라고 하는 거지."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마리가 한 말이 맞았다. 하지만 굳이 말을 고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인간과 늑대 사이의 자식이라면, 어째서 걸러냈을 때, 인간성만 남는다고 하는 거죠?"
마리는 내가 대답을 돌려줄 거란 듯이 담담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완전히 내 추측의 궤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예티 부분말고는 마땅히 대답하지도 못했다.
"아서가 있잖아."
"프랑크 백작님이 왜요?"
그러고 보니 마리는 아서의 출생 배경을 몰랐다. 그리고 내가 없을 때도 그녀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지지 못한 듯했다.
거기서 인식 차가 벌어진 것이다. 아서의 선례를 아는 나는 순순히 인간의 잡종이란 단어를 받아들였지만, 알지 못하는 마리는 자연스레 가불가를 따졌다.
"자네 말이 맞아. 내가 왜 그게 인간의 잡종이라 생각했지?"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물증은 없었다. 오랜 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노인이 주장했고, 나는 그걸 그대로 믿었다. 마리의 말 이외에도 이상한 점은 많았다.
"실그윈 숲의 두 마을은 야수를 두려워하여 탄압을 피해서 기록을 남겼지. 불에 태워도, 늙어도 죽지 않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그런 게 인간과 늑대 사이의 자손이라면, 왜 실그윈 숲에만 그런 게 나타났고, 어째서 두 마을만 애써 기록을 숨긴 거지? 풍습이 전국적이었다면 영국 전역에서 나타났어야지!"
나는 마리를 내버려둔 채, 홀로 상념에 잠겨서 혼잣말했다.
"어쩌면, 야수는 처음부터 거기 있던, 이종 교배와 무관한 존재였다면?"
가까스로 도달한 가능성에 충격받아서는, 나는 한동안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결국에는 마리가 날 깨워서 물었다.
"그래서요? 어떻게 된 건데요?"
"아, 잠깐 생각하느라. 여하튼, 하던 얘기를 계속하자면, 계속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된 거네. 야수란 게 실제 어떤 종이건, 1400년 초에 헨리 6세가 재위하기 전까지 그놈의 악습이 계속되었던 건 분명하지. 그리고 전왕들과 달리 그가 이 끔찍한 전통을 근절하는데 아주 적극적이었다는 것도. 여러모로 유명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분명한 업적은 존재했네. 그는 이 일에 아주 현명하게 대처했네. 늑대 간통죄를 만들어서 사람을 벌하고 벌금을 물리는 것보다 더 쉽고 반발이 적을 방법을 사용했으니까."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헨리 6세 집권부터 100년을 늑대 사냥의 시대라 하네. 아까, 아니... 며칠 전에 자네가 들었겠지만 그는 군대를 규합해서 직접 늑대 무리를 쫓아내기도 했고, 늑대 모피를 비싼 값에 사들여서 민간 사냥꾼을 독려하기도 했고, 멀쩡한 숲을 귀족 사냥터로 만들어서 사냥하게도 했지. 그때의 여파로 헨리 6세의 통치가 끝나고도 그 많던 늑대는 불과 수십 년 만에 다 사라지게 되었지. 한편, 그의 정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 그는 아예 역사에서 이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워버리기로 한 거야. 아주 큰 규모로 집단적이고 철저한 역사 말소가 행해졌을 테지."
"그걸 어떻게 알죠?"
마리는 잔을 입에 대며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내용물을 살폈다. 이제 보니 반쯤 비어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느끼면서 웅변하듯이 외쳤다.
"때로는 무존재가 증거가 되곤 하지! 생각해 보게, 분명 그 행위는 전국에서 행해졌을 텐데, 지금에 남은 기록이라곤, 눈에 보이는 기록이라곤 어디에도 없네! 게다가 당시의 행정 능력을 감안하면, 수도와 먼 웨일스 임간 마을에서 위협을 느끼고 가까스로 책 한 권을 동굴에 숨겼으니, 투자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간단한 유추라네."
나는 거들먹거리며 말을 마쳤다.
"아무튼 그런 노력에도 모든 기록을 없애진 못했지만."
"훌륭한 왕이네요."
마리는 이도 저도 아닌 감상을 내놨다. 나는 병을 비우고는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헨리 6세는 우리네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암군이니까. 그의 대에서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후 벌어지는 장미전쟁은 온전히 그의 잘못이야."
헨리 6세의 재위는 백년전쟁의 한복판이었다.
자신이 시작하지 않은 전쟁을 떠맡은 것부터 어린 왕의 첫 번째 불행이었다. 두 번째 불행은 잔 다르크였다. 그녀의 출현과 함께 발흥한 프랑스군에 의해 전황은 삽시간에 바뀌었고, 그는 재위 내내 패색으로 접어든 전쟁을 수습하기 급급했다.
"그건, 이상하군."
"네?"
"자네라도 백년전쟁이나, 장미전쟁을 들어보기는 했겠지?"
더 말하지 못해 안달이 난 나는 그녀가 떠올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냥 개요만!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했다가 패전했고, 그 뒤 귀족 가문의 왕위 쟁탈 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었다는 정도는 알 것 아닌가!"
마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년전쟁, 그리고 장미전쟁, 두 전쟁의 책임을 함께 지고 런던 탑에 갇혀 사망한 암군의 업적으로, 늑대 토벌과 그와 관련한 역사 말소는 굉장히 뜬금없는 일 아닌가?"
영리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보다 급한 일은 많았다.
설령 늑대와 교접을 막지 못했다는 오명을 쓴대도, 영국사 최악의 패전과 내전을 연달아 이끈 왕보다는 나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헨리 6세는 군대와 국고를 동원하여 늑대 토벌에 힘썼다. 그저 상황 판단이 굼뜬 암군이 저지른 실책일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두 전쟁보다 역사를 지우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던 걸까?
새삼 이상한 상황이었다.
나는 런던에서 늑대 사냥을 하다가, 한 야수의 비밀을 쫓아서 웨일스의 임간 마을에 왔다가, 이제는 인적 드문 길가의 초라한 여관에서 영국사를 아우르는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고 있었다.
이런 통찰이 이번으로 처음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전에도 어떤 연관도 없던 곳에서 은밀하게 숨겨진 왕실의 비밀과 역사 개변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바로 그 런던 대화재 당시에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와 지금, 두 통찰은 하나의 시대적 배경을 공유했다.
나는 그 단어를 말했다.
"충성, 지배."
...우리가 런던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