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찰스 디킨스 신화
두 번째 해가 되어서야 안 사실이지만, 올드코트 대학은 유난히 봄이 늦었다.
비단 이 사실을 눈치챈 것이 나만은 아니었는지, 대학에는 이에 관해 앞선 교수와 학생들이 남긴 여러 재밌는 학설이 더러 남아 있었다.
그중 흥미롭게 본 것은 지질학에 인문학적 해석을 곁들인 일종의 형이상학파 시였다. 화자는 아주 격정적인 어투로, 대학이 수도원이던 시절에 얼만큼 피가 흘렀고, 또 화난을 당했는지 지리멸렬이 늘어놓고, 그 끝에는 토지에 쌓인 잿더미가 장기적인 토질 악화로 이어졌으리라는 나름 이치에 맞는 해석을 내놓았다.
실제로야 어떻건, 어쨌거나 대학 부지에는 풀이나 들꽃이 자라는 시기가 늦었다. 덕분에 나는 출근하는 화, 금요일마다 언덕을 오르며 시간을 거스르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렇다고 내 일상에도 퇴보만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봄이 되고는 불과 한두 달 전과 비교해도 신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일단 그에 관해서는 차차 후술하려 한다.
그러기 앞서, 부끄럽지만 고백할 점이 하나 있다. 알다시피 지난 수년 동안 내게 닥친 매 순간이 격변이었고, 자연스레 나는 독서와 담쌓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간만에 도서관에 들르고도, 나는 도무지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신문이나 편지 따위의 짧은 글에만 길들여진 탓인지, 활자는 각각이 이가 맞지 않는 톱니처럼 뻣뻣하여 문장을 넘길 때마다 고통스러운 마찰을 일으켰다. 기계라면 기름칠이라도 하겠건만 녹슬어버린 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숨돌림을 핑계로 대부분 시간을 독서가 아닌 산책에 썼다.
풀과 나무 사이를 걷는 대신, 죽은 나무 사이에 빽빽이 채워놓은 얇게 압착하고 탈수와 건조를 반복한 나무 사이를 걸었지만 말이다.
한편, 성 헨리 8세 칼리지 도서관은 좁은 대학 부지 내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40대 중년 신사가 만족스레 산책할 만큼 넓지는 않았다.
그러니 내가 도서관 한구석에 박혀서는 끙끙대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한때는 매주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쩌다 달에 한 번 부르기도 힘든 이름이었다.
“앨리스.”
내가 호명하기 무섭게 그녀는 정적을 박찼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는지, 나는 심지어 그녀가 옆으로 쓰러진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런 참사는 일어나기 직전, 그녀는 가까스로 균형을 회복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단거리 주자라도 된 것처럼 품에 종인지 책인지 한 아름을 끌어안고 달려나갔다.
이 모든 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흩날리며 사라지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 끝만 눈으로 쫓았다.
나는 말을 건 자세 그대로 잠깐 더 굳어 있다가, 괜히 부끄러워서 앨리스 근처에 앉아 있던 학생에게 아는 척하며 참견했다.
“혹시 왜 저러는지 아나?”
대답이 없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그녀는 더 정중했는데, 이 예의 바른 학생은 머쓱한 미소를 보이며 더는 상관하지 말아 달라는 완곡한 의사표현을 다했다.
아무튼,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앨리스의 기행이 어제오늘의 것은 아니었다지만, 알다시피 그녀의 머리색이 바뀌고는 새사람이라 해도 좋을 만치 의젓하고 교양 있는, 달리 말하면 상식을 갖추게 되고는 이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하에서 있던 일은 고사하고, 학술회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잊은 그녀는 지금에서는 남처럼 예의를 차렸는데, 방금처럼 매몰차게 행동하는 건 여러모로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무례를 저지를 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더 생각하다, 문득 그녀가 못 들은 척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워낙 앞선 의욕에 비해 몸쓰는 요령 없는 그녀였기에, 떠나기 직전에 보인 의문의 허우적거림이 그런 흉내라면 차라리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굳이 못 들은 척하면서까지 날 피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갔다. 그러다가 그녀가 떠난 자리 바닥에서, 떨어트린 걸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을 발견하고는 주워들었다.
그닥 신사답지는 않았지만, 나는 뭐든지 줍고 그 자리서 읽는 습관 때문에 무심결에 바로 읽었다. 하지만 거기 적힌 문장은 내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앨리스의 필적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무수히 받아본 덕에, 그녀 필적이라면 완벽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낯익은 글씨체였다. 조금 더 읽어나가던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거기 적힌 건 내 필적이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예상 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열기구가 추락했다.」
뒷내용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건 작년 이맘때쯤 열기구로 지하에 내려갔을 때 적었던 탐사 일지였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는 탓도 있었고, 추후 열기구를 반납하며 정리할 때 찾아도 보이지 않길래, 영락없이 지하에 두고 온 줄 알았던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 달리, 이걸 가지고 있던 건 앨리스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지하에서도 내가 탐사 일지와 열기구를 두고 떠난 탓에, 그녀가 날 뒤쫓아서 찾아왔으니 당연히 그녀가 갖고 있어야겠지.
하지만 왜 아직도 그걸 가지고 있고, 또 어째서 들고 다니고 있는지는 불가사의였다. 그녀는 모든 사건을 잊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본다고 해도 여기 적힌 게 무슨 내용인지 알 리가 만무했다.
야수가 사라진 이래, 내 감각은 수개월 동안 사건을 멀리하며 무뎌졌다.
하지만 어째선지 이 종이를 주워들고는, 이전처럼 심장이 불쾌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는 기색, 습기 찬 공기, 스멀거리는 피부....
그날, 나는 다른 때보다 이르게 귀가했다.
끝내 찾아보던 퀸 엘리자베스 양식과 로코코 양식의 가구가 무엇이 그리 다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몇 가지 판단 근거를 잡게 해준 점에서 아주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여하튼, 1897년의 봄이 되었다.
하나의 계절, 하나의 연도가 지나는 동안, 앞서 말한 것처럼 내 일상에는 여러 큼지막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큰 차이라고 하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평소 때와 다른 귀갓길을 걸었고, 늘 가던 건물이 아닌 비교적 한산한 거리 어느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울타리 너머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 런던 시내에서는 사라진 종류의 소음이었다. 나는 거기 서서 가만히 귀 기울였다.
"...하지만 뇌가 녹는다고 했어...."
"...그런 건 알아서 할 거야...."
"...쉿, 누가 왔어...."
그리고 대화는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면, 글쎄, 맨홀에라도 빠졌건.
나는 그 근처 건물에 다가갔다. 시가지는 아니더라도, 런던치고는 뜰도 있고 괜찮은 주택이었다. 나는 거기 문고리에 열쇠를 걸쳤다.
속여 무엇하리, 이곳이 바로 내가 이사한 집이었다. 킹스 로드 138번가 A동.
평생 윤택과는 인연이 없던 나로서는 처음 살아보는 큰 집이었다. 실제로도 여긴 나 정도 박봉으로는 어림도 없이 좋은 물건이었는데, 이 때문에 나는 여러 귀찮은 일을 맡게 되었다. 이것 또한 봄을 맞아 바뀐 일상 중 일부였다.
여하튼, 군소리는 관두도록 하자.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임을 감안해도 좀 어두웠다. 나는 잠깐 마중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는 직접 코트를 벗으며 안에 들어갔다.
"마리."
"안 돼요."
나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목소리는 바로 아래서 들려왔다. 정확히는 현관 근처 선반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는 소년의 것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해내려 부단히 애썼다.
"프레디."
"오셨어요, 주인님."
아이는 새삼 출신이 무색할 만큼 고상한 말씨로 인사했다. 바로 그 아서와 1년을 지냈으니 별반 의아한 일도 아니었다. 한때는 땟국물이 흐르던 꾀죄죄한 얼굴에도 이제는 제법 윤기가 돌았다.
한편, 몇몇 아이가 날 주인님이라 부르는 건 별로 기쁘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마리의 영향을 받은 듯한데, 차라리 그렇게 부르게 두는 게 이웃에게 둘러대기 좋아서 굳이 고치지는 않았다.
"뭐가 안 된다는 거니?"
"지금 마리를 방해하면 안 돼요."
"그래, 그러마."
나는 건성으로 답하고, 내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음이 불편한 탓에 방은 1층에 있었다.
집을 구하고 마리와 다섯 고아를 데려왔을 때, 나는 마리가 그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걸 느꼈다. 다만 피한다는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마리와 아이들이 직접 대화하는 장면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관계는 아주 양호해 보였으니, 참 기이한 동거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여하튼, 아이들이 나보다 마리를 더 생각하는 건, 굳이 내가 불편해할 만큼 특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벗은 코트를 침대 위에 던져놓으며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방해하면 안 된다니, 그건 또 이상한 말투였다. 한 번 그런 의문이 들자, 나는 서서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에게 내가 방해해선 안 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기껏해야 가사를 보는 정도가 아닌가.
자고 있었다면, 깨우지 말라고 했을 테고, 불을 쓰고 있다면 부엌에서 온기가 흘러야 하건만 집안은 싸늘했다.
나는 마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혁대를 풀다 말고 다시 채우며 밖으로 걸어나왔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너, 거기서 뭐 하니?"
문앞에는 또 다른 아이 한 명이 서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아이 이름을 떠올렸다. 월터, 그래, 제일 어린 월터다.
"월터?"
내가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굳이 의심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상태가 평소와 다른 건 분명했다. 나는 어쩐지 집안에서 감시받는 느낌을 받으며 복도로 나왔다.
"아, 주인님."
마리는 마침 방에서 나왔는지, 날 부르며 다가왔다.
"언제 오셨어요?"
"아니, 마침 방금."
그녀는 내 어깨를 힐끔거리며 바라봤다.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에, 조사받는 듯한 시선에 나는 불편해져서 물었다.
"왜?"
"또 코트를 두고 오셨나 해서요."
"누굴 치매인 줄 아나!"
나는 발끈해서 외쳤다가, 괜히 목을 가다듬고 넌지시 물었다.
"뭔가 하고 있었나?"
"집안일을 좀."
"애들이 자네 방해하지 말라던데."
그러자 마리는 가만히 섰다. 사실 여러 번 말하긴 했지만, 내가 그녀의 감정을 알고 짐작하는 건 순전히 그녀의 동작이나 목소리의 높낮이 같은 습관에서 나왔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멈추고 있으면, 그녀는 마치 인형 같아서는 살아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요. 그런 때니까요."
마리는 말했다.
"아이들이 뭔가 이상하면 곧장 말하게."
나는 피곤해져서 대화를 마칠 셈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마리는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면, 보통은 직언하는 그녀의 성격을 알았기에, 나는 예삿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어 자세를 고쳤다.
"뭔가 할 말 있나?"
"저, 주인님."
그녀는 한참 표현을 고르다가 말했다.
"괴롭힘을 좀 당하나 봐요."
"누가?"
"아이들이요."
"누구한테?"
"주변에 사는 애들이요."
"왜?"
나는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라, 바보처럼 질문만 거듭했다. 마리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무지가 아닌 앎에서 오는 침묵이었다.
"병에 걸린다고요."
"무슨 병?"
"가까이 가면 뇌가 녹는 열병에 걸린다고 그런데요."
대화하면서도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물론 그런 유행병이 돈다는 것은 전에 아서에게 듣기도 했고, 요즘 여기저기서 소문으로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 아이들의 관계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지금은 고아티도 나지 않는 아이들이니, 그런 시비를 당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마리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아마 저 때문인 거 같아요."
"왜 그런 말을 하나?"
"아이들에게 들었어요. 우리 집이 주변에서 어떻게 불리는지요. 유령 저택이래요. 늘 커튼을 닫아놓고 산다고."
"그것만으론 누구도 그렇게 말 못하지."
나는 언짢은 말투로 소리 높였다. 그러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누군가 절 본 거 같아요. 그래서...."
당초에 상정하던 안 좋은 상황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다. 마리의 목소리는 점차 낮고 느려졌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말했다.
"아이들한테 운동을 시키지."
"네?"
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괴롭힘을 당한다며. 그런 건 운동을 하면 해결 돼. 다섯이나 있으니 어디서 패싸움이 붙어도 맞고 다니진 않겠지."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았지만, 아이들이 불편해서, 또 피곤하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문제가 당면했으니 피할 수도 없었다.
"네... 그런데 주인님이요?"
"왜, 내가 하면 안될 이유라도 있나?"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됐으니까 오늘 저녁부터 시키지. 밥부터 먹이고, 옷 갈아입히고 모이게 해."
나는 명안을 내놓듯이 말하고 떠나려 했으나, 마리는 다시 한 번 날 멈춰 세웠다.
"또 뭐가 남았나?"
"그게 마침 그 문제이기도 한데요, 줄리엣이 옷이 없어요."
줄리엣, 나는 순서대로 아이들 이름을 되뇌였다. 아, 그래, 맏이였지.
"왜? 아서가 옷을 안 줬나?"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 반대죠, 백작님은 반 년마다 아이들 치수를 재서 재단사한테까지 보내며 옷을 맞췄으니까요."
그녀는 깜짝 놀라며 아서를 변호했다.
"그런데 왜?"
"한창 클 때니까요."
과연, 내가 집에 아이들을 데려오고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때도 딱 맞는다고 했던 옷이니, 슬슬 맞지 않을 때도 되었다. 그러니까 마리는 검소하게 입던 옷을 동생에게 물려 입히는 식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물려받을 옷이 없는 줄리엣을 빼고 말이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빠듯해서요."
"운동을 하려면, 단벌로는 좀 힘들겠지."
"아뇨, 운동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야겠지, 어쩌겠나."
그 말을 하고, 나는 마리가 뭘 요구하는지 이해했다.
"이런, 내가 사러 가야 하잖아."
"네, 부탁 드릴게요. 이를수록 좋고요."
마리는 날 세워두고 방에서 접힌 줄을 가지고 와서 내게 건넸다.
"이게 키예요."
나는 마리에게 헷갈리지 말라는 당부를 몇 번 받고, 성질을 낸 끝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집안의 이상한 기류는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줄리엣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도 나와 마주치는 게 계획은 아니었는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의례 인사차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밖에서 놀아요."
보면 알았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니."
사실 나는 이 아이를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지난 1년 동안, 다른 아이들은 프랑크 저택의 분위기에 꽤 잘 녹아들었다. 비극적인 과거는 금방 잊혔고, 겉보기야 어떻건 부유한 중년 귀족의 비위를 맞추며 음울하고 사치스런 나날을 영위했으리라.
하지만 줄리엣은 그러지 않았다. 찰스 디킨스의 불패 신화도 그녀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작은 차이로 소녀의 영혼은 불타는 거리에 사로잡혔다.
줄리엣은 목격자였다. 나도 그랬다.
총성이 울리고, 한 용감한 소년이 바닥에 쓰러졌다. 수 초도 되지 않는 그 순간은 망막 표면에,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지고 말았다.
"아저씨가 거짓말쟁이래요."
줄리엣은 대뜸 말했다.
"누가 그러든?"
"백작님이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설마 아이들한테까지 속 좁은 뒷담을 해놨을지는 몰랐다. 줄리엣은 그래도 괜찮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백작님은 거짓말이 잘못된 건 아니라고 했어요. 정말로 잘못은 거짓말을 하고 들키는 거라고요. 아저씨는 거짓말을 들키고, 도망까지 쳐서 더 나쁜 사람이랬어요."
나는 아이를 맡길 장소를 잘못 골랐다고 통감했다. 아서 이 머저리가 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소리를 더 지껄여 놨을지 심히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거짓말은 잘못된 거죠?"
그런 내 우려와 달리, 줄리엣은 똑바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크 그 멍청이가 했던 말은 다 잊으렴. 그래, 네 말대로 거짓말은 잘못된 거다. 들키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잘못을 저지르면 많이 혼날까요?"
줄리엣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어쩐지 지금 상황에 대해 감이 오는 듯했다. 아이들이 뭔가 거짓말을 했고, 그걸로 혼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직감이 오고 나니, 나는 괜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는 되지도 않는 허풍을 떨었다.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숨길 엄두도 내지 마라. 이래 봬도 나는 꽤 유명한 추리관이거든. 잘못을 숨긴다면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굳이 말하면 방정이었고, 너무 심하게 말했다는 자각이 든 건, 줄리엣이 떠나고 십여 분 후였다. 나는 꽤 후회하고, 부끄러워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