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8시간 27분 후의 결투 (2)
3시간 45분.
"충성, 지배."
4시간 전.
"옛 새럼은 언덕 위의 잊힌 도시예요."
그녀는 말했다.
"소피는 역사를 몰라요. 하지만 비밀이라면 잘 알죠. 도시는 왕가에 봉헌되었고, 분명 피가 흘러넘치는 수라장이었을 거예요. 그러지 않고선 이처럼 잔혹한 의식을 부활시켰을 리가 없죠."
"도시에 관해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러자 소피는 새침하게 답했다.
"모두가 알면 비밀이 아니고, 비밀이 아니라면 소피도 알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곳이 유혈로 가득했으리란 거예요."
"어떻게 확신합니까?"
"다름 아닌 악마의 혈통에 바쳐진 땅이니까요."
소피는 경박스러운 폭소를 터트렸다.
"악마요?"
"자식은 부모를 고를 수 없죠. 그런 면에서 헨리 1세에게는 죄가 없어요."
나는 더 물으려 했다.
"남작님에 관한 소문도 도시에 허다해요."
하지만 소피는 내가 묻기 전에, 나를 깜짝 놀래는 말로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 그 뻔한 수작은 놀랄 만큼 잘 먹혀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런던만큼 사람이 많은 도시는 없을 거예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소피는 영국을 나가본 적이 없지만 이보다 큰 도시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람이 많으면, 눈 또한 많은 법이죠."
"나는, 나는 몰랐는데."
"왜 아니겠어요, 런던만큼 이목을 받는 도시는 드물어요. 한때는 파리였지만, 이제는 너무 뜨겁죠. 빈과 로마는 너무 오래되었고요. 장미십자회, 보편사무국, 보르조이 호텔의 숙박객들... 국서께서는 수도를 찾은 수상한 방문객을 눈치챘고, 또 우려하고 계세요. 그런 만큼 의지할 사람을 찾았죠. 가능하면 비밀에 익숙한 사람을요."
나는 확신을 담아 물었다.
"그게 저입니까?"
"아니요, 세상에, 절 말한 거예요."
소피는 깔깔 웃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 저었다.
"계속하시죠."
"국서께서는 종종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시죠. 절 찾은 것도 그래요. 하지만 그 재능을 윌리엄 왕자께서도 물려받았는지는 몰랐어요."
여인은 홀을 내렸다.
"남작님은 이번 일에 적격이셨어요."
"좋은 뜻이면 좋겠군요."
"물론이죠. 남작님은 돌려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세계의 음지를 엿보셨고, 요주의 존재들로부터 이상한 참견을 받지 않을 만큼 경계 받고 계시죠. 그리고 나이 드신 분들은 남작님을 꽤 좋게 보고 있으니까요."
"무슨 농담입니까?"
"아뇨, 말 그대로요. 애국자를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러고 소피는 날 돌아보며 격식 어린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아침에 한 약속대로 결투자 두 분은 모두 만나보셨습니다. 그리고 소피가 보기엔 참관인 자격을 거절하실 만한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번 결투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고, 나는 말을 돌릴 셈으로 물었다.
"아까 그 말, 뭡니까?"
"무슨 말이요?"
물론 모른 체였다.
"악마의 혈통 운운한 것 말입니다. 옛 새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듣기로 이건 평범한 결투가 아닙니다. 저는 그 모든 걸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는 걸 말하면, 참관인을 맡아주시는 건가요?"
소피는 더욱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알아야 그때야 판단이 가능한 겁니다. 오히려 말하지 않겠다면, 저는 참관인을 하지 않겠습니다."
마치 이런 말을 끌어내려 한 것 같은 그녀의 반응에, 나는 불안해서 일부러 더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헨리 1세가 찬탈자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는 자신의 형제이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가 살해당하자, 또 다른 형제인 로버트 2세가 물려받을 왕위를 강탈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그를 노르망디로 쫓아낸 뒤, 재차 침공해서 죽을 때까지 감금했죠. 그런데 소문에 따르면요, 헨리 왕이 형제를 가둬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나 봐요."
소피의 이야기는 갑자기 수 세기 과거로 돌아갔다. 나는 대단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무엇이 날 이렇게 답답하게 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로버트 2세는 십자군이었고, 예루살렘에서 어떤 만트라가 적힌 문서를 약탈했다고 해요. 비록 그는 옆에 두고도 그 가치를 몰랐지만, 헨리 왕은 단번에 어떤 법칙을 깨우쳐서는 옛 새럼의 이단자들을 시켜 결투법을 제정하게 한 것이죠."
소피는 낮게 속삭였다.
"앞서 헨리 1세가 로버트 2세와 왕위 전쟁을 벌일 때, 귀족들은 더욱 정당한 로버트 2세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죠. 분명 그때 왕은 귀족의 힘을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거예요. 상품을 내걸 필요는 없었을 거에요. 예나 지금이나 명예는 잘 먹히는 무형의 금이고, 옛 새럼은 도시 채로 투사를 묻는 구덩이였을 겁니다."
그녀는 말했다.
"흐른 피는 고이죠. 혈통이란 건, 결국 피의 웅덩이 같은 거잖아요? 마구 섞여서는 진창이나 진배없지만, 제 딴에는 고귀한 핏줄이 마구 출산했겠죠."
끝내 여인은 경멸 어린 비웃음을 토해냈다.
5시간 전
소메로의 유리 공장은 시가지와 맞닿은 강변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칙칙한 검은 강물 위로 치솟는 기포를 응시했다. 그곳에 한때 수천 명이 살던 섬이 있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남작님?"
소피는 가만히 서서 강가를 바라보는 날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우리는 공장 부지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임에도 공장에선 직공들이 내뿜는 열기가 뜨겁게 뿜어져 나왔다. 공장 감독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우리를 보더니, 묻지도 않고 바로 사무실로 안내했다.
우린 곧 소메로가 있다는 사무실에 들어섰다.
안에는 바닥부터 페르시아 양식의 카펫가 넓게 깔렸고, 한쪽 벽면에는 서적이 가득 채워진 책장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신품이었고, 나는 오래 보지 않고도 소메로가 애독자는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눈에 띄는 것은 업무 책상 위에 놓인 사진 액자였다. 사진 속에는 소메로와 그의 부인, 그리고 자식 네 명이 찍혀 있었는데,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서는 긴장이 사진 너머로도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편, 사진 속 사람들의 모습은 영 어색했다. 무엇이 그런가 하면,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있어 머리 부분만 잘라서 붙인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위화감의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다들 고급스럽게 차려입기는 했지만, 각자 옷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다.
소메로는 우리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
그리고는 그 자리서 팔을 활짝 벌리며 우릴 맞이했다. 나는 그 충격적인 무례에 곧장 반응하지 못했으나, 소피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곧잘 껴안으며 인사했다.
그가 내게 와서 팔 벌리기 전에, 나는 급히 장갑을 벗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행히 내 의도는 똑바로 전해졌는지, 그는 아주 정중하게 악수를 받았다.
"필레몬 허버트입니다."
"알리시아 소메로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메로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유예 없이 물었다.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와인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마침 좋은 물건이 들어와서요."
"아니, 나는...."
"그러지 말고 딱 한 잔만 하셔요."
소피까지 그렇게 말하니,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책상 아래서 병과 잔, 그리고 코르크 따개를 꺼내 올려놓았다.
"1855년산 샤토 마고입니다. 레드 와인이고요, 아시듯이 그해 최고의 보르도 와인으로 선정된 다섯 와인 중 하나죠."
갑작스런 그의 설명은 어찌나 부자연스러웠는지, 그저 암기한 내용을 나열하고 있을 뿐처럼 보였다. 나만이 받은 인상은 아니었는지, 무심결 돌아본 소피의 옆모습에도 나와 비슷한 곤혹이 담겨 있었다.
"자, 한 잔씩 하시죠."
그리고 그는 어찌나 우악스럽게 따랐는지, 본래 병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어야 할 침전물이 유리잔 표면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잔 몸체를 잡고 건넨 손에는 병 겉면의 이슬이 묻어서, 잔을 받았을 때는 내 손가락에도 축축한 습기가 들러붙게 되었다.
내가 줄곧 그에게 받은 인상을 한 단어로 요컨대, 알리시아 소메로는 졸부였다.
"그러면, 건배하죠. 승리를 위해!"
소메로의 높은 목소리에, 나와 소피는 마지 못해 살짝 잔을 들어 보였다. 우리는 잔에 입을 붙였다. 떨어트렸을 때, 나만큼 수위가 낮은 잔은 없었다. 아마도 그가 내 잔에는 술을 덜 따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아마 이쪽, 허버트 씨께서 오늘 결투 참관을 맡아주시는 겁니까? 대단한 유명인 아니십니까, 책도 쓰시고."
"예, 남작님께서요. 지금 막 설명하려던 참이었어요."
소피는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소메로는 대단히 큰 실수를 지적받은 사람처럼 놀라며 서둘러 덧붙였다.
"네, 남작님이요."
"사실은 남작님께서는 이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계셔서, 두 분을 직접 만나뵌 뒤에 결정하기로 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소메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홀로 잔을 기울였다. 그러자 잔은 금새 비어버렸다.
"한 잔 더 따라 드릴까요?"
내가 별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말없이 잔을 채워넣었다.
"남작님께서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는지 몰랐네요."
"아니, 나는 딱히 마실 생각도 없었는데."
소피는 점잖게 지적했다. 이런 노골적인 지적을 받을 만큼 내가 술을 밝혔든가 하는 생각에, 나는 부끄러워서 애써 변명했다.
"아무튼."
소메로는 젖은 두 손을 바지에 닦았다.
"제가 보여 드릴 건 이게 다군요. 여긴 저희 공장이고, 저는 뭐, 보시는 대로입니다. 어떻게 마음에 드셨을지는 모르겠는데."
"사업으로 돈을 버신 건, 꽤 근래의 일 같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목돈을 쥐기 전까지는 세상이 더 단순할 줄 알았습니다. 천하고, 귀하고. 가난하고, 부유하고. 하지만 웬일입니까. 사업에 성공할 때마다 더 많은 난관이 나타나지 뭡니까. 그중에 제가 뭐에 가장 욕봤는지 압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설명했다.
"문화입니다. 세상에, 분명 나도 평생을 런던에서 살았는데, 바로 몇 블럭만 옮겨가도 완전히 다른 도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건물 안에선 하수도 냄새도 안 나더군요! 아니, 이거 실례. 별로 재밌는 농담은 아니었죠. 압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에요."
그는 혼자서 말하고, 변명하고, 국적을 미리 듣지 못했다면 미국인이 아닐까 생각할 만큼 말이 많고 빨랐다.
"그러던 중에 소피 부인과 알게 된 건 제 복이었죠."
소메로는 경박하게 윙크했다. 소피는 피식 웃었다.
"제가 이런 은밀한 귀족들의 전통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통 의식이요?"
"결투 말입니다. 개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고 전통적인 방법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소피를 돌아봤다.
"남작님께서 어떤 착각을 하는지 알겠는데요, 저는 제대로 설명했어요."
소피는 살짝 불쾌를 드러내며 말했다.
"무얼 잃을 수 있는지, 또 무얼 얻게 될지 전부요."
"예, 맞습니다. 남작님이 걱정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전부 감당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소메로는 소피를 두둔하며 나섰다.
"죽을 수도 있단 말도 했습니까?"
"제가 총에 맞으면 죽는 것도 모를 만큼 멍청하게 보입니까."
나는 순간 그가 화낸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과격한 농담이었던 듯 싶었다.
우리는 잠깐 의미 없는 대화와 작별 인사를 말하고는 사무실에서 나가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갑자기 생각나서는 뒤돌아보며 물었다.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잠깐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이렇게 물었다.
"조만간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쟁이요?"
그는 긴 고민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면 창문용 유리를 준비하겠죠."
나는 인상 썼다. 소메로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나 다시 물으려던 찰나, 그는 자신의 말을 설명했다.
"저번에 런던에서 불 난리가 났을 때가 있잖습니까. 군대까지 나타나고, 하여튼 피난하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된 것이지만, 포가 떨어지니까 닿지 않은 유리까지 덩달아 깨지더군요. 저는 그걸 보고 곧장 공장으로 달려갔죠. 그리고 도시의 불이 꺼지지도 않고, 총포 소리가 들리는 중에 창문용 유리를 만들었습니다. 겨우 1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제 공장에는 유리를 구하러 온 건설업자들이 앞다퉈 줄을 서며 돈을 가져오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