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기억의 지평
장례식에 다녀오고 나흘 뒤의 일이었다.
그날부터는 집에 있어도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질 않아, 무얼 해도 잡념이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이틀 동안 찻잔을 세 개나 깨 먹으니, 역시 마리를 볼 염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와 바쁘게 발품을 팔았다. 다행히 내게는 여기저기 쓸만한 줄이 있었고, 이번 일의 협력자도 어렵지 않게 구해냈다.
그는 수사적인 의미로도, 실제로도 경찰모를 벗은 경찰이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날 향해 다가온 그는 아무 인사도 없이 옆자리에 나란히 섰다. 그는 인사 대신 이렇게 물었다.
"담뱃불 있습니까?"
"음."
나는 품에서 성냥갑을 꺼냈다. 잘 쓰지 않다 보니, 장갑을 끼고 딱 한 개비만 꺼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낑낑대는 꼴이 꽤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그는 직접 손을 뻗어 성냥을 꺼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단번에 성냥에 불을 붙였다. 꼴이 우습게 된 나는 괜히 한 번 갑을 흔들고 품에 넣었다.
"한 모금 하시렵니까?"
나는 군말 없이 한 모금 피웠다. 알싸한 맛이 목청으로 밀려들어 연신 기침을 토했다. 벌써 두 번째 추태였다. 나는 변명처럼 물었다.
"경찰은 독초만 피나?"
"다 돈이 없어서 그렇죠."
"아, 그래. 어디나 똑같군."
그는 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다. 너무 모른 척하니 도리어 더 수상하게 보였다.
"구하신 물건입니다."
"확실한가?"
"그거, 매번 물으십니다."
나는 손가락을 봉투 입구에 넣어 내용물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경관은 말없이 두 손가락만으로 입구를 집게처럼 틀어막았다.
"거, 사람 쪼잔해 보이게."
"근무 중에 나왔습니다. 저도 오래 있을 수 없어요."
결국, 나는 의미 없는 신경전에서 물러났다. 그리곤 헛기침하며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지폐 다발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는 세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나는 저녁이래도 상관없댔는데, 자네가 백주 대낮에 보자고 하지 않았나."
"다음부터는 연락하지 마십쇼."
그는 대답 없이 무뚝뚝한 어조로 통보했다.
"이봐, 청년. 이보다 더 받는 건 탐욕이야."
"그런 실없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면은?"
경관은 품에 껴둔 경찰모를 썼다. 그리곤 떨리는 손으로 목줄을 묶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폼이 꼭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왜 낮에 보자고 했는지 압니까?"
"나야 모르지."
"놈들에겐 밤낮이란 게 없습니다."
그는 말했다.
"아뇨, 오히려 밤에 더 왕성하죠. 선생님과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경찰 눈을 피해서 할 일이 있다면 낮에 하시죠. 그게 더 안전합니다."
마치 괴담을 말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답답해서 목소리 높여 물었다.
"놈들, 누구?"
"등불파요."
나는 곧바로 그날 밤 보았던 경찰 무리를 떠올렸다. 군율이 잡히기론 군인 같았고,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던 그들 말이다.
실제로 그건 사병대라 불러도 무방했다.
"저번 이후로, 경찰청이나 수사국 중 놈들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눈에 불을 켜고 다니죠.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젠 본업에만 충실하려 합니다."
"그래, 알았네. 참고하지."
보는 눈이 많으니 길게 대화할 순 없었다. 우리는 서서히 떨어졌다. 목소리까지 닿지 않을 만큼 벌어지기 직전, 그는 대뜸 물었다.
"근데 아는 분입니까?"
"그건 왜?"
"아뇨, 신문에도 나지 않은 사건을 굳이 찾으신다고 하니까요."
나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살짝 열린 틈새로 겨우 한 문장이 보였다. 소피 부인 투신.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어쩌면 별로 궁금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작별인사로 건넨 말이었을지도, 아니면 내가 무심결에 거부감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경관은 더 묻지 않고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금방 떠났다.
"수상한 투신이라."
"네?"
마리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그냥 혼잣말이야."
그녀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영리한 그녀이니까 뭔가 눈치챘을지도 몰랐지만, 나는 이 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봉투 안에는 사건의 경위가 상세하게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반면, 본 수사 내용은 흐리멍덩했는데, 경찰이 이번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게 분명했다.
결국, 경찰은 자살이라 결론지었다.
"그런 시기에? 그럴 리가."
나는 연신 혼잣말했다.
"쟁반은 여기 놓고 갈게요. 주전자가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그러는 중에 마리는 내가 생각에 잠긴 걸 보고, 과연 눈치 빠르게 방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나는 온전히 사고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편, 다시 생각으로 돌아가서, 익히 예상한 바지만, 사건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녀였기에, 그리고 생전 그토록 앞다퉈 그녀에게 인사하러 오던 사교계 명사들은 그녀의 죽음을 외면했다. 나는 한 사람의 존재가 그토록 빨리 흩어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꼭 물안개 같은 사람이었다.
언론과 수사 기관이 그토록 차갑게 외면했을지언정, 이번 죽음에 사건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내가 맡았던 사건들과 비해 덜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의문점은 더러 있었다. 우선 사인부터 그랬다.
소피는 자택 2층 테라스에서 떨어져 죽었다. 머리를 부딪혀 즉사, 그것이 물론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이런 류 사건을 자주 본 내 경험상 2층은 그렇게 치명적인 높이가 아니었다.
과정 역시 만만치 않게 수상했다. 수사 기록을 통해 처음 안 사실이지만, 이번 투신에는 목격자가 있었다. 그는 맞은 편 주민으로, 소피가 직접 테라스 난간에 다가가 뛰어내리는 걸 봤다고 했다. 이 증언이 결정적으로 수사는 바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봤던 소피의 눈에는 죽음을 각오한 자 특유의 기색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비록 감이지만, 나는 지금껏 내 목숨을 수차례 살린 안목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죽을 이유 없는 여인이 죽을 리 없는 방식으로 죽었다.
그녀의 집에서는 오랫동안 열린 흔적이 없는 낡은 옷 상자가 아무렇게나 열려 있었다고 했다. 그녀가 수의로 고른 후줄근한 잠옷 역시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무슨 단서일까?
인근 주민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사건 다음 날, 그녀의 집 앞에는 낯선 차량이 여러 대 멈췄다고 한다. 증언이 일치하지 않아 그 숫자는 알기 어렵지만, 꽤 빈번한 횟수였던 건 분명했다.
심지어 저녁쯤에는 비슷하게 도착한 두 차량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드잡이질을 붙었다는 내용마저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몰라도, 목적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여러 명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소문이 돌던 여자였다. 아마 뜬소문이 아니었던 것일 테지.
이렇게 보면 새삼 대단한 여인이었다.
어떤 기반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쌓아 올린 돌탑 위에서 줄타기하며 버텨온 것이다. 비록 죽음과 함께 무너져서는 돌무더기로 돌아갔다지만.
나는 문득 그녀가 입막음을 빌미로 살해당했을지 모른다고 추리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리곤 고개 저었다.
"소피는 아주 강한 여자야. 죽인대도 순순히 죽지 않겠지."
그런 여인이 누군가의 강압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건 이상했다. 내가 아는 그녀라면 테라스를 뛰어넘어 탈출해서라도 진상을 알리려 하고도 남았다.
"진상을 알린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녀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면, 뭔가 단서를 남겼을 게 분명해!"
갑작스런 깨달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가, 나는 테이블 위의 트레이를 통째로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찻주전자가 부서지며 뜨거운 찻물이 튀어 바짓단을 적셨다.
나는 짧고 굵은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마리는 성급히 방 안에 뛰어들어왔다. 나는 실수가 너무 부끄러워서, 일부러 더 바쁜 척하며 코트로 돌진했다.
"마리, 떨어트린 걸 좀 정리해줘. 지금부터 외출할 거야."
"아까 다녀오셨잖아요? 또요?"
그녀는 당황하며 물었다.
"다른 용무가 떠올랐어."
"왜 그때 보지 않으시고...."
오늘따라 마리는 끈질겼다. 나는 현관까지 나가서는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이제 떠올랐는데 어쩌겠나!"
그리고 돌아보자, 따라나온 마리는 가만히 멈춰 서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그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애써 숨을 고르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 나는 괜찮아. 셜리 마리."
나의 호명에, 그녀는... 어째선지 크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급한 마음에, 나는 그 이유도 묻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아저씨."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며 뒤돌았다. 그러자 작은 뜰에 있던 아이 하나가 그제야 보였다.
"그, 저,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네?"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왜 그러니?"
"혹시 이름, 까먹었어요?"
"그럴 리가."
나는 말했다.
"여하튼, 지금은 너무 바쁘니 나중에 상대하마."
"아저씨?"
그리고는 도망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어떻게 아이 이름을 잊어버릴 수가 있지? 어쩌면 그 사람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정하다. 그 말을 누가 했더라.
그걸 떠올리기 전에, 나는 대로에서 차를 잡아탔다.
원. 우주. 눈앞에 별이 펼쳐졌다.
그리고 목소리.
"지구와 명왕성은 시기에 따라 26억 마일에서 44억 마일 떨어져 있으며, 이는 빛이 최소 5시간 20분, 최대 9시간 20분 동안 이동해야 하는 거리이다. 그 말은 즉,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의 푸른 별빛은 반나절 전에 흘러간 별의 풍경인 셈이다."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나는 그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앨리스."
"어서 오세요, 교수님."
나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어냈다. 우주가 점차 멀어지더니, 머리 위에 크게 부풀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곳에 온 것이다. 푸른 별, 플루토.
"내가, 내가 지금 잠들어 있는 건가?"
내 질문에, 그녀는 뒷짐을 지고 말했다.
"아시다시피."
앨리스는 망원경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헛기침했다.
"저야 모르죠. 보이질 않으니."
"그것도 그렇군."
저번에 꿈에서, 엄밀히는 이 왜행성에서 그녀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명왕성의 망원경은 지구를 비추지 못한다고.
"그리고, 여기 유고스는 지구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곳이에요. 관측은 물론이고. 아마 제가 얼마 만이라 해도, 교수님이 느끼는 시간과는 꽤 차이가 날 거예요."
그녀는 서투르게 웃었다.
"과연, 그렇군."
나는 그 말에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적막이 흘렀다. 이 땅에도 언젠가 지명이 붙을까, 그렇다면 오늘의 일화를 계기로 침묵의 바다라고 부르겠지. 바다이지만, 물 없는 바다이다. 하늘에는 저토록 은하수가 범람하고 있으니.
그런 시답잖은 생각 끝에, 나는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인가?"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앨리스는 말했다.
"저는 언제나 여기 있어요. 교수님은 꿈을 통해 왕래하고요. 그러니까 제가 부른 게 아니라, 교수님이 찾아온 거죠."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의문이 풀리진 않았다. 앨리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몇 차례 여기 오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번 방문이 내 의지라고 한들 납득이 될 리가 없었다.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앨리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보이는 거리감은 낯설었고, 나는 괜히 먼저 농담을 말했다.
"지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치곤 빠삭하군 그래?"
그러자 그녀는 말없이 쓴웃음지었다. 나는 그 표정이 싫었다.
"소피가 죽었어."
"누구요?"
"소피, 옛 지인."
"저런. 친구분이요?"
"아니, 지인."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떨어져 죽었지. 마치... 마치...."
"저처럼요."
앨리스는 말했다.
"그래, 맞아. 너처럼."
"아직도 마음 쓰시고 계신 거네요. 괜찮아요, 제게 그 일은 이미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져요. 교수님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지구에는."
그녀는 아무 전조 없이 화두를 돌렸다. 시간이 흘러도 그런 점은 바뀌지 않았다.
"철이 그렇게 많이 없어요. 그러니, 철을 먹는 생물은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죠."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생물은 어디로 갔겠어요?"
나는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답했다.
"글쎄, 달?"
그러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쓴웃음 지었다.
"비슷해요."
잠시 후, 앨리스는 말했다.
"교수님, 다음에도 절 찾아와요."
"뭐?"
나의 물음이 어떻게 들렸는지, 그녀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별이, 별이 외롭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그때가 되면 아실 거예요."
"그때, 언제?"
"아마 곧. 어쩌면, 금방."
나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운전수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세로 보아 깨우려던 참인듯싶었다.
"깨어 계셨어요?"
"여기는?"
"도착했어요."
둘러보니 소피의 자택 근방 거리였다. 아직 해는 떠 있었지만, 금방 질 것처럼 보였다. 나는 운전수에게 감사를 표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그녀의 집으로 다가갔다.
주소를 확인하며 걷던 도중, 나는 문득 선객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도 날 알아보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별로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기에, 나는 한껏 인상을 쓰며 불렀다.
"일 때문인가?"
"아시면서 물으십니다."
사설 탐정, 앨런 블랙은 반반한 얼굴에 선을 그었다. 시체에는, 어쨌거나 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