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뿌리의 끝
내가 프랑크 저택에 방문했을 적의 일이다. 사람 없는 정문을 지나가던 중 나는 저택 쪽에서 우지끈하며 요동치는 소리를 들었다.
런던에서 소음이란 맑은 공기보다 흔한 것이지만, 울창한 나무 사이에 숨겨진 저택은 숲 속에 유기된 시체처럼 아늑하게 썩어가는 장소였기에, 이처럼 생기 넘치는 소음이 나는 일은 퍽 드물었다.
게다가 이젠 없었던 일이 되었다곤 해도, 한때 프랑크 저택은 에드워드라는 침입자에게 무너져 내린 적이 있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이봐!"
대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아서의 혈육이자 음흉한 집사는 어떤 방식인지, 반드시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 열어!"
결국, 나는 문을 부수려고 마음먹고, 몸을 크게 뒤로 뺐다.
"오늘은 그리 급히 어쩐 일이십니까?"
그래서 집사가 바로 뒤에서 불쑥 나타났을 때, 나는 놀라서 아예 쓰러질 뻔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인기척에 민감한 편이라, 누군가 이렇게 가까이 오도록 눈치채지 못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던 것이다.
"지금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 듣지 못했나?"
"아, 그렇군요."
나는 그가 들었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알았다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그가 보이는 태도는 나와 대조될 만큼 평온해서, 아무리 상식에 둔한 그라도 이상한 반응이었다.
"무슨 큰일이 났을 수도 있잖나?"
나는 끈기 있게 물었다. 그러자 집사는 도리어 내가 이상한 말을 한단 듯이 문 잠금을 풀며 되물었다.
"귀빈께서는 모르십니까? 아니, 그러시겠군요."
"무슨 뜻인가?"
"주인 어르신께서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막대한 재산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두컴컴하고 이끼와 곰팡내로 가득한 복도를 걸었다. 그는 소리의 진원이 아니라 내가 그간 열어본 적 없는 방 앞으로 안내했다.
"이 방은 기억해. 대학 시절, 저택이 손님으로 가득했을 적에 식객을 지내게 하던 방이었지."
"저는 그 시절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택 대부분 방은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열지 않는 방은 대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있지요."
내가 채 의미를 묻기 전에, 집사는 문을 열었다.
실내는 어두웠기에, 복도의 창으로 들어오는 미약한 햇빛이 닿는 방 입구 근방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의 말은 사실이라, 그것만으로 방 안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분노를 남겼습니다. 그 또한 저주스러운 굴레지요."
집사는 웃으며 말했다.
방 안에는 부서진 가구와 구멍 뚫린 액자, 부스러진 석상과 잿더미, 그리고 깨진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프랑크 백작님을 믿지 마세요.'
나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아서 프랑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외출복이나, 그에 준하게 화려한 실내복을 말끔히 차려입던 모습과 달리 옷깃은 풀어졌고, 머리는 땀과 먼지가 엉켜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그는 서먹하게 꺼낸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바빠 보이는데 실례했군."
"아니, 네 방문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야. 하지만... 경우와 시기는 가려줬으면 해."
아서가 앞뒤 안 맞는 말을 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건 대체로 뒤에 이어질 화법을 위한 포석이었다. 오늘처럼 정말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이 마구 내뱉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니, 처음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방문했지?"
그는 애써 여유로운 척하며 등받이가 부러진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고상한 손동작을 한다 해도, 그 모양새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는 잠깐 장난기가 돌기도 했지만, 정말 그를 삐치게 하면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저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상담할 게 있고, 근황을 물을 겸 들렀지."
"아, 그래, 뭔지 궁금하군."
아주 작위적인 말투라서, 나는 무심결에 실소할 뻔했다.
"지금까지 뭔가 진척은 있나?"
"아, 그래. 조사 결과는 예상하던 대로 나왔어."
"무슨 조사?"
"당연히 비석 말이야. 네가 옥스퍼드에 갔다가 덜컥 집어온 그것 말인데, 역시 피에르늄이 검출되었어."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아는 단어는 여럿 있었기에, 나는 몇 번이고 말을 곱씹었지만 도통 문장이 이해되질 않았다.
"뭐라고?"
"저번에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네게 갔잖아."
좀처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날 보며 그는 되려 따지듯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한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랬지. 만나진 못했지만. 나는 그때 한참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어, 자네도 알잖나."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고?"
"늑대에게 상처 입고 병상에 누웠을 때, 마지막으로 전보를 한 번 주고받았지. 그저 증상을 진단했을 뿐이지만."
그러자 아서는 꿍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고심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불만을 품은 정도였는데, 점점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나중에는 격분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기 흥분을 주체 못하는 아이처럼 방 안을 마구 종횡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알트?"
"대체 박사는 뭐가 문제지? 내가 그에게 후원을 아낀 적이 있던가? 아니. 내가 한 부탁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아니!"
"진정해, 아서."
"나는 차분해! 문제는 박사한테 있지! 그처럼 방만하고 태만한 자가 어떻게 정교한 인체의 비밀을 깨우쳤는지 모르겠어!"
아서는 격양된 어조로 자기모순을 실천했다.
"고작 오라클의 결과값, 언제라도 전할 수 있는 그따위 것 때문에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보낸 건 아니야."
그는 여전히 짐승처럼 목울대를 떨며 말했다.
"작년 12월경에 파리에서 심부름꾼이 왔어. 학술회, 그리고 특히 너한테 편지가 왔거든."
"파리?"
"발신인은 네가 더 잘 알 테지. 소르본 대학의 피에르 퀴리니까."
나는 숨을 들이켰다.
"고맙게도 아주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어. 영국 일반우체국을 통했다면 압수당할 내용이었지만, 일부러 자기 학생을 시켜 심부름을 보냈더군. 물론 수고비는 꽤 쥐여줘야 했지만, 그도 이게 돈푼 좀 아낄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던 거지."
그리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다.
"왜?"
"편지를 보여주려던 게 아닌가?"
그러자 그는 버럭 성질 냈다.
"나라고 모든 편지를 지니고 다니는 줄 알아?"
사실 이러한 반응은 그 자체로 놀랄 일이었다. 충동의 화신처럼 보이는 아서지만, 실제로 그는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화법을 구사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준비되지 않은 화제를 갑작스레 꺼낼 바에는, 차라리 대화를 며칠 늦출 만큼 세심한 구석이 있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그는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기다려, 가지고 올 테니까."
그리곤 도망치는 사람처럼 방 밖에 뛰쳐나갔다.
다시 아서가 돌아온 건, 나뭇가지에 걸렸던 해가 언덕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설마 이 정도로 늦게 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어중간하게 긴 시간을 서서 기다린 탓에 매우 피곤했다.
한편, 아서는 아주 여유로웠다.
나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그간 뭘 했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변신이라 해도 좋을 만치 바뀌어 있었던 탓이다.
한껏 차려입은 연미복은 물론이고, 머리카락은 각 잡혀 있었고, 내가 아서의 냄새라고 인식할 만큼 낯익은 향수내는 코가 따가울 정도로 짙게 풍겼다.
그 모든 변화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표정이었다. 방에서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초조함이 감돌던 얼굴에는 근거 없는 여유가 돌아와 있었다.
예상대로 그는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대신 편지를 건네며 왠지 뚱한 말투로 한 마디 던질 뿐이었다.
"여기 읽어봐."
이제 와서 그의 기행이나 무례에 일일이 따지고 드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자코 편지를 받아 읽었다.
종이는 구겨져 있을뿐더러, 무언가에 젖었다가 말린 흔적이 있었다. 편지는 번진 잉크로 '귀하 필레몬 허버트 경'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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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 필레몬 허버트 경
그간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펜을 들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으나, 귀하 및 학술회에서의 일은 생전 아내의 결정이기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는 베크렐 교수님의 뜻과 같습니다.
절 괴롭힌 것은 비단 상실의 고통만이 아닙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는 실로 참혹하여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설령 제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해도 주께서는 제게 검증하게 하셨습니다.
그 모든 고뇌의 끝에서 저는 가장 참혹한 진실을 봤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마저 잊고, 지금 느끼는 감정은 오직 의무감뿐입니다. 여기 적힌 모든 저술이 참이라면, 어쩌면 인류는 무지의 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퀴리, 그녀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적색 광선을 마리아선, 녹색 광선을 피에르선이라 명명한다.'
저는 여기에 문장을 덧붙이려 합니다.
'덧붙여 피에르선의 방사체에는 피에르늄, 마리아선의 인광체 일체를 비평형인광 물질이라 한다.'
피에르선은 피에르늄이 자연 상태에서 끊임없이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원자에서 발생하는 빛입니다. 그 형체는 극히 불안정하여, 이런 원소가 실존 가능한지 여부조차 가늠이 어렵습니다. 알아본바, 아직 유럽 어느 학회에서도 발표된 적이 없는 원소로, 이것이 실존한다면 마리아는 최초 발견자가 됩니다.
정작 그녀는 원소에서 발생하는 광선에 피에르란 이름을 붙였으나, 원소 자체에는 아무 명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과학자로서 실태이나, 저는 그녀를 비난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힘든 연구를 여럿 했지만, 연구하는 대상 자체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피에르늄은 알수록 두려워집니다.
이론상 피에르선은 인간의 심신에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빛 자체에 담긴 에너지에는 단시간 노출에도 인체 결합을 붕괴시킬 힘이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정신에 미칠 영향입니다. 저는 지금껏 이처럼 생명에 대한 악의로 가득한 자연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신이 인간을 혐오한다면, 피에르늄은 그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제 이름을 여기 붙일 수 없던 것입니다.
반면, 마리아선은 화학적으로 발생하는 빛입니다. 상온에서 점성이 높은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비평형인광 물질은 무색무취의 성질로 그 자체로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오직 피에르선에 노출되었을 때만 붉은 빛을 발하는 성질을 띱니다. 이건 저의 사견이지만, 이 물질은 피에르선을 감지하기 위해 화학적으로 조제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두렵습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두 광선에 이런 명명을 하게 되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그리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인간의 마음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소르본 대학의 피에르 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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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 정돈된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두서없는 내용의 편지였다. 문장 사이에는 몇 번이나 펜으로 그어 지운 듯한 단어가 삽입되어 있었다.
내가 편지에서 시선을 떼자, 아서는 미리 준비한 책자와 밀봉된 앰플을 보였다.
"피에르 퀴리는 고맙게도 수식을 동봉했더군. 나에게는 무분별한 문자의 나열이었지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바로 이해하고 필요한 설비와 재료를 주문했지. 그게 작년 말이니, 지금은 소량이지만 실험에 쓸 만큼은 생산할 수 있게 되었어."
그는 내게 앰플을 건넸다. 과연, 안에는 거의 움직임 없는 끈적이고 투명한 액체가 반쯤 들어차 있었다.
"현장을 다니는 네게는 이게 필요할 테지."
"녹색을 피하고, 적색에 주의하라."
나는 불현듯 중얼거렸다.
"그새 격언까지 만들었나?"
"아니, 내가 만든 말이 아니야. 누구의 말이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 아마 사무국의 요원이었을 거야."
흐릿한 기억 속에, 나는 더듬더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정작 당사자도 그 원리까지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보편사무국은 말단 요원에까지 그런 지식을 상식처럼 주입하고 있었다.
회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더욱 오래된 기억을 꺼냈다. 재작년의 일이다.
올드코트 대학에서 어떤 소녀를 쫓다가 찾은 비밀 통로로 제임스 타운 칼리지 수술실에 침범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두 가지 이상 현상이 있었다.
하나는 형광등의 존재였다. 화학적으로 빛을 발생시키는 그러한 기술은 이 시대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마리아선 연구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면, 이처럼 빠른 진보도 충분히 설명되었다.
다른 하나는 벽에 장식된 태피스트리에 있었다. 태양 무늬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모습은 그저 악취미적이라고만 여겼으나, 실은 그게 피에르선에 닿아 발광한 마리아선의 적색광이었다면?
낡은 기억은 통찰로 이어졌다.
올드코트 대학, 아니, 케이시 오' 제럴드 학장과 보편사무국은 이미 두 광선을 기술로서 보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과 보이지 않는 대학 시절부터 깊은 연이 있는 왕립 학회 역시 모를 리 없었다.
더군다나 노란 외벽 회사, 그 아홉 회사는 피에르늄을 그들의 기술에 접합시켜 사용하기까지 했다. 고속열차 SMR 웰스호의 두 비석이 바로 그 증거였다.
연달아 통찰은 공포를, 공포는 절망을 불러일으켰다.
젊고 유망한 퀴리가 목숨과, 수십 년간 이어질 재능을 바쳐 도달한 지식은 고작 무수한 적수가 거쳐 간 관문에 불과했다.
"그만한 희생을 치르고도, 이제 저들의 시작점에 도착했을 뿐인가?"
마른 입술 사이로 흐른 한숨이 부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