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충성, 지배
"그런 의미에서, 네게 품은 기대는 무척 커."
무력감에 빠진 날 향해 아서는 뱀처럼 교활하게 속삭였다.
"나는 자네의 계획을 몰라."
"그렇겠지.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너는 아주 잘해주고 있어."
"아니, 나는 들어야겠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나는 피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때마다 막지 못한 사건으로 사람이 무수하게 죽어나가지. 내가 뭘 하고 있고, 무얼 추구해야 할지 알아야겠어."
"프랑켄슈타인은 생리와 생화학의 극한을 추구하고 있지."
아서는 동문서답했다.
"그 모든 걸 통달한 저술이 완성되면, 그건 과학의 마도서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인가?"
"섀클턴은 남극점에 도전하고 있어. 인류의 비경에 누구보다 먼저 도착한다면, 지구 최남단을 차지한 의식은 저들보다 우위를 점할 거야. 지금까지의 차이를 단숨에 좁힐 만큼... 그리고 퀴리, 그녀를 대신할 인재를 찾는 건 어려워.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기대한 연구물이 보편사무국을 비롯한 단체들이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아냈지. 그들이 무너지면, 간직해온 지식 또한 풀릴 터."
그의 목소리는 연극처럼 높아졌다, 속삭임처럼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내가 아서와 대화를 하는지, 아니면 그의 혼잣말을 엿듣고 있을 뿐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일손은 턱없이 부족해. 슬프게도, 우리 적은 아주 근면하지. 프랑크 학술회는 노출되었고, 새 회원을 모집하려는 시도는 모두 좌절되고 있어. 루트비히 볼츠만, 게오르크 칸토어... 추적한 다른 회원들은 저택 밖에서 실종되거나, 살해당했지. 우리의 힘이 응집하지 못하는 한, 이 이상 방해라도 받아선 안 되는 거야. 그리고 적수를 물리치기 위해선 상응하는 의지와, 그걸 실천할 힘이 필요한 법."
아서는 노을을 등졌다. 얼굴에는 깊은 그림자가 씌워져, 깊고 어두운 공동이 나타났다.
"아직이야, 필로. 아직 일러. 런던은 시작하기 좋은 도시이지만, 그만큼 경쟁자가 많아. 그래서, 나는 네게 기대하는 거야."
나는 마른 입술로 물었다.
"뭘?"
"나는 너에게 아무 부탁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너는 두 해 동안 일부라곤 해도, 저들의 계획을 상당히 망쳐놨지. 덕분에 그들은 혼란스러워했고,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나는 여러 지식을 저택에 수입했어. 책과 비석, 그리고 제사 도구들...."
"날 미끼 삼았을 뿐이라고?"
"말하기 따름이지. 하지만 내가 말린다고 네가 듣기나 했을까?"
그 말대로였다. 나는 자발적으로 대부분 사건에 간섭했다. 오히려 아서의 방해가 있었다고 해도 그랬을 터였다.
그래도 찝찝한 마음에, 나는 계속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난 자네가 그런 걸 모으고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는데."
"그야 당연하지. 말하지 않았으니까."
"왜?"
그러자 아서는 삐친 말투로 답했다.
"너도 나한테 말하지 않는 게 여럿 있잖아?"
설마 이렇게나 유아적인 답변이 올 줄은 예상 못 했기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궁하게 대답을 생각하는 사이, 아서는 계속 말했다.
"게다가 내가 준비하는 의식은 실로 조잡한 것이야.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준비는 부족해. 나는 그 사이를 메꿔야 했고, 저주스러운 혼혈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지. 알아줬으면 해. 그건 정말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 지금 나는 가리지 않고 많은 지식을 삼키고 있어. 당장에라도 흩어질 만큼 불안정한 내장 속에서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소화하고 있는 거야."
아서의 말은 난해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비유고 직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불쾌하게도, 내게는 그 대부분 말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들렸다.
"하지만 필로, 이건 기회야. 인간이 이토록 위험했던 적은 없어. 수도원에서는 학장의 망상을 숭배하며 드높은 상아탑을 쌓아 올리며 바벨의 실수를 재현하고 있어. 아홉 회사는 영국 전역의 은과 금을 모으면 영원과 무한을 살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졌고, 의도를 알 수 없는 왕립 학회는 역사의 이면에서 대학살을 거듭 획책하지. 한편, 에드워드라는 이름의 불청객 때문에 사람은 꿈에서도 안전하지 않아. 극한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이들 모두의 공통점이 뭔지 알겠어?"
아서는 종종 의문형으로 말을 끝냈지만, 언제나 대답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끝에는 런던이 있어. 모두 성공할 수는 없지, 아니, 런던을 차지한 승자 외에는 모두 파멸할 거야."
"내가 기회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나?"
"우둔한 필로. 우리는 음지의 거인들에 비해 약자야. 하지만 그들이 서로 꾀하고 반목한다면, 그건 우리에게 기회가 될 테지."
그는 은유처럼 말했지만,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물론 아서는 알지 못했지만,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 내 일을 돕겠다면 기꺼이 부탁하겠어. 구해줬으면 하는 책이 몇몇 있거든."
아서는 대뜸 말했다.
"지금껏 연구 자료는 거금으로 사들였지만, 정말 진귀한 건 돈으로 구할 수 없는 법이더군. 하지만 소문은 살 수 있었지. 여기 적힌 책들은 모두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들이야."
그리고, 그는 쪽지를 건넸다. 나는 그걸 받으며 실없는 농담을 했다.
"서점에선 구할 수 없겠지."
"이건 내 추측이지만, 런던에서 벌어지는 경합은 음지에서도 가장 치열한 것일 터야. 그러니 온갖 사악한 지식이 브리튼 제도로 몰리는 거지."
그는 무안할 정도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헛기침하며 쪽지를 살폈다. 거기 적힌 이름들은 들어본 적 없는 것들로, 이름만 보아서는 멀쩡한 책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전-프린키피아 대화록(Preprincipia), 브리타니아 외경(Britannia), 아울루스가 클라디우스 황제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the Claudius), G를 위한 젬베 악보(Djembe for G)....
그리고, 알 아지프. 혹은 네크로노미콘.
나는 마지막에 나타난 이름을 알아보고는, 경악하며 아서의 의도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뭔가 아는 것이라도?"
아서가 조심히 묻자, 나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아니, 책이라 해서 말인데, 공교롭게도 내가 오늘 방문한 이유도 책 때문이네. 큰 도움은 기대하지 않지만, 한 권 의심스러운 책을 얻어서."
나는 허겁지겁 소피의 집에서 가져온 책을 꺼냈다.
아서는 받기를 주저하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책에 포개어 받았다. 그러면서 유심히 표지와 옆면을 번갈아 살피는 풍치는 꼭 전문가 같았다.
"15세기 이전의 책이군."
그는 말했다.
"그리고 골동품처럼 보관되는 대신 최근에도 제법 읽혔을 거야."
"그걸 보는 것만으로 안다고?"
"제지 방식으로 큰 시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 종이에서 균등하지 못한 결이 드러나 있잖나. 이건 기계가 아닌 수공업으로 만든 녀석이야. 그렇다고 아주 불균형하지도 않아. 개개인이 하나씩 만드는 것보다는 큰 규모로 작업했을 거야. 그러니까 중세 이후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종이를 썼겠지."
아서는 빈말로라도 박학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놀랄 정도로 깊은 지식을 하나씩 선보이곤 했다. 프랑스어는 까막눈에 가까우면서, 게일어에 통달한 식으로 말이다.
"그건 알았네. 하지만 읽혔다는 건 또 어찌 알았고?"
"이것이 족히 4세기 이전의 물건이란 건 알았어. 하지만 아무리 질 좋은 가죽을 쓰고, 매일 기름을 칠해준다 해도 가죽이란 건 그만한 세월을 버티지 못해. 그런데 겉면 표지는 조금 낡았을 뿐, 수 세기 전의 물건처럼 손상이 없지."
"다시 제본했다는 거군."
"그래, 맞아. 그러나 아무리 꼼꼼히 해도, 제본은 책의 수명을 줄이는 일이야. 종이를 닳고 상하게 하니까, 그저 보관이 목적이라면 하지 않았겠지."
처음에는 별로 대단치도 않다는 듯이 말하던 아서는 내가 거듭 질문하자, 점점 기분이 좋아져서는 뽐내는 어투가 되었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가 들뜨는 건, 화내는 것만큼이나 위험했으니까.
"필로, 이 책 어디서 났어?"
아서는 이번에도 뭔가 영감을 깨우쳤는지, 갑자기 정색하며 물었다.
"자네라면 알겠지만, 소피 부인의 유품이네."
"너처럼 노련한 사람이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꽤 실망스러운데."
"그게 무슨 뜻이지?"
그는 손가락 끝으로 책 표지를 비비거나, 손톱을 세워 갈라진 가죽 표면 사이에 집어넣기도 했다.
"여기 표면이 갈라진 게 그저 가죽 노화라고 생각해?"
나는 질문의 의도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어딜 보아도 갈라진 가죽 표면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아서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건 굳은 피딱지야."
"뭐?"
"이 가죽은 대량의 피를 머금었어."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책 표지에는 검붉은 핏물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영국 귀족 사회를 비밀스럽게 지배해온 집단이 있다고 했네. 그들은 피의 법칙을 숭배하지. 생전 소피 부인은 그중 일원이라 들었네."
결국, 나는 내가 아는 사실을 실토했다.
"어쩌면 이 책이 그들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런 공정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그리고... 이런, 마리에게 만지게 했는데."
"자네 가정부? 그녀가 왜?"
"코트에 넣어둔 걸 깜빡하고 맡겼거든.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어를 모르니 괜찮네. 읽지는 못했을 거야."
아서는 가만히 생각하다 물었다.
"그밖에 이 책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하나 더 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네."
블랙은 책의 가치를 모른다. 그가 정말 책의 가치를 이해하고 탐했다면, 순순히 내가 챙기도록 두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게 그리 중요한가?"
"내용에 따라서 다르겠지."
그는 드물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굳이 내게 가져온 건 잘한 일이야."
"글쎄, 나는 좀 모르겠는데."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물론 자네의 언어학 재능을 기대하는 건 맞지만, 자네는 프랑스어를 못하잖나. 아마 이건 옛 프랑스어야."
아서는 책장을 펼쳐서 읽어 내려갔다. 훑어보는 게 아니라, 그는 정말 착실하게 읽어갔다.
"과연, 네가 왜 착각했는지 알겠어. 아주 틀리진 않았지만, 이건 앵글로-노르만에 더 가까워. 윌리엄 1세 이후, 영국에서 사용한 옛 귀족들의 언어지."
그는 여유롭게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것도 읽을 줄 안단 말이야? 하지만 자네는 프랑스어를 못하잖아!"
"하지만 고대와 중세 프랑스어는 알지. 물론 노르만도."
아서는 윙크했다.
"내가 왜 자네를 상식으로 재단하려 했는지 모르겠네. 됐고, 그래서, 무슨 내용인가?"
"글쎄, 내가 보기엔 역사서 같은데.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앙주의 백작, 제프리 1세와 그 후손에 대한 내용 같군. 제프리 1세는 악마와 혼인했고...."
그는 설명하는 중에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알트?"
"...악마의 혼혈아, 훌크 백작을 후계자로 낳았어. 훗날 흑백작이라 불리며, 잔혹하고 대단한 힘을 가졌던 걸로 유명한 인물이지."
아서는 혼혈을 언급하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단순 역사서치고는 문체가 편향적이야. 꼭... 혈통을 숭배하는 것처럼. 훌크의 딸, 이르멘가르트는 제프리 2세와 혼인해서 훌크 4세를 낳았어. 훌크 4세의 자식 중 훌크 5세는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고, 다른 자식인 제프리 5세는...."
하염없이 가계도를 읊어 내려가던 아서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자네, 괜찮나?"
그는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제프리 5세의 이명은 플랜태저넷."
제복 차림의 여인이 말했다.
"그는 찬탈자 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혼인해서 헨리 2세를 출산한다. 이는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의 초석이 된다."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행동은 주저 없었다. 내 손은 곧장 품속의 권총에 도착했다. 하지만 뽑으려는 동작은 몇 번이나 헛돌며 옷깃에 걸렸다.
"이러한 기록이 아직껏 제도諸島에 남아 있음은 예상 밖이다. 이 또한 플랜태저넷의 어둠이 깊은 탓이다."
간신히 권총을 뽑고도, 나는 그걸로 무얼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멸시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는 베일 장막 이면을 들추는 자이다. 또한, 이치와 합리의 화신이기도 하지. 헌데 그대는 무엇이길래 내게 맞서지?"
그녀가 홀을 들어 올렸다.
"충성, 지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