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58화 (158/232)

§158. 시간이 스치는 경계

막연한 불안 속에서도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열병에 시달리지도 않았지만, 무언가 잊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머릿속에 구멍이 뚫려서는 온갖 소중한 것들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꼴이란.

언젠가부터 주변을 속일 여유도 없어지고 말았다. 마리와 아이들은 물론, 대학 학생들까지 내 이상을 짐작한 눈치였다.

이게 그 소문의 열병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학장의 수법에 당한 건가.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알아봤지만, 기억조차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대단한 조사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마땅한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장애가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때쯤, 블랙의 일을 봐주기로 한 날짜가 되었다.

나는 약속한 자정이 되기 두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밖에는 이미 등불을 켠 순경대가 골목골목을 오가며 통행객을 감시하고 다녔다. 아홉 시쯤 울리는 통금 종에는 법적 효력이 없었지만, 지난 대화재 이후로는 경찰은 이유 없는 왕래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래서, 집 앞의 골목에서 느껴진 인기척은 아주 묘한 것이었다. 나야 어둠을 틈타 할 일이 있다지만, 한창때의 소녀 혼자서 숨어 있는 모습은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애들이 놀러 다니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나는 그녀에게 주의를 줄까 했지만, 가뜩이나 이웃 평판도 나쁜데, 시선을 피해야 하는 오늘 같은 날에 눈에 띄게 굴어서는 좋을 게 없었다.

내 판단이 옳았는지는 몰라도, 기껏해야 주택가에서 도처에 순경이 깔린 판국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그녀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갔다.

목적지는 멀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차를 타지도 않았다. 그리고 큰길을 따라 걷는 대신, 돌아서 가더라도 외진 길목만 골라 걸었다. 두 시간이나 일찍 나왔으니 그렇게 해도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터였다.

물론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러는 건 아니었다. 뇌수술동이나 웨스트 노우드 공동묘지 때와는 명백히 상황이 달랐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런던 중심에선 떨어졌다고 해도, 엄연히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반쯤 유기된 시설들과 달리, 현재도 멀쩡히 운영되는 왕립 기관이기도 했다.

그런 장소에서 소란이 벌어진다면, 이전처럼 유야무야 넘어갈 만큼 작은 소동으로 끝나지 않을 건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을 피한다는 계획은 초장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집을 나설 때부터 느꼈지만, 거리에 순경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게 진정 얼마 전까지 인력난에 시달리던 경찰이 맞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런던 시민의 절반이 경찰청에 취직하였던가?

그럼에도 나는 그들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등불 덕분이었다. 순경이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환한 불빛이 거리의 저편에서 광선처럼 날아와 내게 알렸다. 물론 그렇게 빛나는 등불이 있다는 것조차 금시초문이었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하튼, 나는 겨우 늦지 않게 접선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도착한 블랙은 숨어 있었지만, 내 감각을 속일 만큼 정교하진 않았다. 나는 그가 숨은 건물 계단 밑에서 접선했다.

"놀랐습니다."

블랙은 내게 들킨 게 여간 놀라웠는지, 여러 번 감탄을 말했다.

"특별히 신경 썼거든요. 알다시피, 요즘 경찰이 워낙 극성이라."

"자네한테 도둑질 소질이 없다는 건 잘 알겠네."

내가 그리 말하자, 블랙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얘길 잘도 기억하십니다."

"무슨 얘기?"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날 지켜보더니 고개 저었다.

"아닙니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예전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겠지만, 요즘에는 이런 징조 하나하나가 턱없이 불길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불안을 감췄다.

때로는 약한 면을 인정하는 것이 관계에 도움이 된다지만, 블랙 같은 인물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내 약점을 가차 없이 물어뜯고도 남았다.

"저기 보이십니까?"

다행히 블랙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저 멀리 있는 첨탑을 보며 말했다.

"시인들은 별과 우주가 아름답다는 글을 꽤 쓰는 것 같습니다만, 정작 그걸 연구하는 시설을 저렇게 흉물스럽습니다. 뭐, 제게는 돈 한 푼 안 되는 별보다야, 천문대 쪽이 돈더미처럼 예쁘게 보입니다만."

블랙의 기이한 감성은 제쳐두고,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는 실제로 기형적이었다.

왕립 기관임에도 대학의 부설 시설이었고, 막상 대학 부지와는 큰길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서 홀로 74헥타르 넓이의 공원을 독점하고 있는 점부터 그랬다.

특이한 점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탑 정상에 올려지고 몇 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입방아에 오르곤 하는 돔 형태의 적도실을 포함해, 그리니치 천문대는 건축된 이래 3차례에 걸쳐 비정상적인 증축을 감행했다.

매 시대마다 공학 기술의 한계를 시험했고, 수십 년 주기로 수명이 다하는 지지대를 보완하기 위한 재증축이 연달아 반복되었다. 여러 도안이 제안됐지만, 정작 완공 후에는 언제나 상승할 뿐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본초 자오선 탑'이었다.

원형이 된 건물을 완전히 파묻어버린 4층 구조의 탑, 하부를 지탱하는 흉물스러운 철골 건물, 그리고 정상에 있는 개폐식 돔 형태의 적도실.

파리의 수치, 미완의 에펠 탑만큼은 아닐지언정, 탑은 주변 경관에 조금도 섞여들지 않는 흉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블랙의 관점도 아주 틀리지는 않은 편이었다.

"천문대가 세워진 게 언제였지?"

나는 무심결에 물었다.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개인적인 질문이야."

블랙은 잠시 생각하더니, 의문형으로 끝나는 것치곤 당당하게 대답했다.

"17세기 말엽 아닙니까?"

"200년 전인가."

런던의 이면에 접할 때마다 공통으로 나타나는 시기가 몇 있다.

그중 200년 전은 지금의 런던이 형성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했다. 문화, 사회, 과학 분야 전반에 걸쳐 신비학에 대한 이해가 폭발적으로 확증한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 중심에는 하나의 단체, 세 명의 인물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대학의 창시자, 로버트 보일. 그리고 그의 두 제자, 아이작 뉴턴과 이름 없는 학자... 결국 과학의 영역인 천문학이 그들 입김에서 모면했을 리 없었다.

사정을 알수록, 그리니치 천문대가 비밀을 품고 있다는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주시죠."

그렇게 상념에 빠진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블랙은 대뜸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죠. 아무튼, 준비하시죠. 곧 들어갈 겁니다."

"왜 바로 가지 않고?"

"감은 여전한데, 눈은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풀밭 위를 잘 보시죠."

나는 노인 취급에 속내 투덜대며 그가 말하는 방향을 바라봤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는 몇 개나 되는 인영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정면만 보고 있었다.

"저 어둠 속에서 뭐하는 거지? 저래서야 경비를 보려 해도 힘들겠어."

"저도 최근 안 사실입니다만, 예전부터 천문대 인근에선 조명이 불법이라더군요. 밝으면 밤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나, 잘된 일이죠. 우리처럼 법망 경계를 오가는 이들에겐 준법 시민만큼 손쉬운 상대도 없잖습니까."

"매번 말하지만, 자네와 나를 그런 식으로 묶지 말게."

"아무렴요. 아무튼, 이 시간대에 경비를 교대할 겁니다. 그때 빈틈을 타서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교대만 하는데 빈틈이 생긴다고?"

"보시면 알 겁니다."

나는 블랙의 말대로 주변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시간이 되었는지, 대학 쪽에서 한 무리의 인파가 나타나더니, 풀밭의 경비 인원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지금입니다."

우리는 공백을 틈타 천문대 건물에 바짝 달라붙었다.

"왜 그렇게 굼뜹니까?"

블랙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불평을 말했다.

"자네도 다리 하나 없어 봐. 그리고 그렇게 느리지도 않았잖나."

"거참 관대한 기준을 가지셨습니다."

여하튼, 천문대는 한때 그리니치 공원이 있던 풀밭 중심에 있었다. 조명이 없다 한들 침입자로부터 지키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는데, 침투는 아주 간편했다.

군이나 경찰에서는 인력이 부족해도 방금처럼 교대를 일괄적으로 하는 경우가 없다. 조금이라도 경비 분야에 지식이 있다면 이토록 허술하게 일정을 짤 턱이 없었다.

나는 경비원이 전문 인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들이 온 방향을 보면, 아마 그리니치 대학의 교수나 학생이 동원된 걸 테지. 그 점이 이번 사태를 더 의문스럽게 했다.

"하지만 아주 잘 아는군."

"저 말입니까?"

"그래, 침입로를 미리 알아봤나 보지?"

내 질문에 블랙은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저번에 말한 적 있지 않습니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는 것도, 아무것도 연상되는 게 없었다. 나는 죄라도 지은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선생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리니치 대학 쪽에도 나름 일머리 돌아가는 친구 한 명을 두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를 먼저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그 내용은 기억에 있었다. 블랙이 말한 적 없다고 하자,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그 친구는 어찌 됐지?"

"...뭐,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압니다만, 멀쩡합니다.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돌아왔죠. 그래도 뭘 봤는지 도통 말을 해주질 않아서 말이죠."

블랙은 거짓말을 능히 하는 자다. 더불어 신뢰의 가치를 알았다. 이런 부류가 가장 까다로웠다.

의미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믿을 수밖에 없으면서, 신뢰보다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는 망설임 없이 속이려 들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가 날 속일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왠지 그가 숨기는 게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문은 열리지 않을 겁니다."

그는 말했다.

"잠금은 없어 보이는데?"

"안쪽에서 자물쇠를 걸었죠. 뭘 숨기고 있던, 그게 여간 소중한 모양입니다."

블랙은 준비한 밧줄을 낮은 천장에 걸었다. 준비에 비해 폼이 아주 엉성한 게 이런 일을 자주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먼저 올라가서 도와드릴까요?"

"아서게."

은근히 조롱하는 말투가 계속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블랙처럼 간사한 자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그를 밀치고 먼저 밧줄을 탔다.

밧줄 걸이가 영 불안한 게, 나는 오르면서도 몇 번이나 떨림이 안정될 때까지 멈춰서 기다려야 했다. 결국, 다 올라가서는 밧줄을 풀고 아예 다시 묶어야 했다.

블랙은 굼뜨게 올라왔다. 쭈뼛거리는 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라서, 나중에는 거의 내가 올려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블랙은 질색이 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노인도 이렇게 힘쓰는데, 젊은이가 그렇게 비실거려서 어쩌나."

"비교할 거면 사람이랑 해주시죠."

나는 다시 그에게 존경심을 심어준 것 같아서 만족했다.

"하지만 이상하군."

"선생님 팔심이랑 비교하면 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이렇게 눈에 띄게 움직였는데, 아무도 건물 쪽을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들키지 않을 수 있지?"

"좋은 게 좋은 것 아닙니까. 들키지 않았으니까 됐지요."

블랙은 건성으로 답했다. 그거야말로 수상한 부분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는 들키지 않을 줄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가 뭔가 안다는 추측은 점차 뚜렷해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밀실이다.

나는 적당한 기회를 엿봐, 윽박지르건 구슬리건 그를 추궁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열린 창문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본 높이로는 천문대 건물의 2층 부근이었다.

"조용하군요. 안에 사람이 꽤 있는 걸로 아는데."

실내에는 조명 하나 켜지지 않아서 어둡고 습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나는 블랙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이상을 느꼈다.

"냄새가 나는군."

"대문을 걸어 잠근 지 1년은 되었으니까요."

"아니, 그런 종류의 악취가 아니야. 이건, 확실히 자네보단 내게 익숙한 냄새겠군."

나는 냄새의 발원지를 쫓아 천천히 걸었다.

"그깟 악취 좀 나면 어떻습니까. 이런데 쓸 시간은 없어요."

블랙은 내 뒤를 따라오며 당황한 어조로 따졌다. 나는 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막았다. 내 예상대로라면 냄새는 상관이 없기는커녕, 아주 중요한 행동 지침이 될 터였다.

"확실히 끔찍하군요. 이게 무슨 냄새랍니까?"

계단에 다가가자, 이제야 블랙도 냄새를 맡았는지 불평을 늘어놨다. 그리고 나는 그 정체에 대해 거의 확신했다.

그것은 난간 아래로 훤히 보이게 방치되어서, 내려가지 않아도 바로 볼 수 있었다. 블랙은 헛구역질했지만, 딱히 그가 심약하다고 할 순 없었다. 누구도 이런 것을 볼 준비를 하고 살지는 않는다, 나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여기보단 높이서 떨어졌을 거야."

나는 부검 따위는 할 줄도 몰랐지만, 사인은 진단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곧장 머리로 떨어졌겠지. 하지만 고작 4층 높이일 텐데 이 정도로 깔끔하게 두부가 으스러질 수 있나? 차라리 폭발이라도 한 모양새인데."

예상대로, 그건 썩어가는 시체였다.

그런 표현조차 겸손하게 느껴질 만큼,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거기서 부패해서 이제는 우연히 그런 형체를 가지게 된 식물처럼 보였다.

"죽은 지 한참 되었을 거야. 원래는 더 고약했을 테지, 그런데 시취가 도리어 이끼 냄새에 덮여서 옅어진 거지."

나는 홀로 생각하다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했다.

"하지만 형체가 이렇게 온전할 수 있나? 밀폐되었다고는 한들, 여기가 벌레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는 환경은 아니잖나. 그런데 시체에 파리가 알을 깐 흔적이 없어. 버려둔 시체에다 살충을 했을 리도 없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거 태연하게도 말하십니다."

옆에서 갑작스레 블랙이 끼어들었다.

"속은 좀 괜찮나?"

"저라고 시체를 본 적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아니, 보통 사람은 평생 볼 것보다 더 많이 봤죠."

"허세 부릴 것 없네. 이런 게 익숙해진다고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그는 질린 표정으로 날 봤다.

"선생님에 대해 웃기는 소문 도는 거 압니까?"

"내 소문치고 좋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연쇄 살인마라든지, 인신공양을 하는 사교도에 가입되어 있다든지 하는 헛소리요."

들어보니 상상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었다.

"자네도 그런 멍청한 소리를 믿나?"

블랙은 잠깐 고민하는 척했다.

"오늘부터 그러려고 합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이게 다 뭔 소란입니까? 제가 아는 그리니치 천문대는 연구 기관인데, 언제부터 시체를 현관에 던져놓는 광신도 집단으로...."

그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 나는 지금이 추궁할 때라고 직감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나 보군."

그리고 계속 물었다.

"아까 얼버무린 자네 친구의 행방과 관련된 얘기겠지."

"우리, 뻔한 거짓말은 서로 지적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닙니까?"

"이미 여기까지 들어왔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시체까지 봤지.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나? 순순히 털어놓게."

블랙은 가벼운 어투로 투정했다.

"참, 저는 이렇게 심각한 건인 줄 몰랐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표정은 내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진지했다. 둔한 사람이라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텐데, 블랙처럼 눈치 빠른 자가 상황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거짓말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협력자는 약속대로 두 번에 걸쳐 천문대에 잠입했고, 그때마다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히 돌아왔죠. 처음에는 초입에서 돌아와서 재정비한다고 했습니다. 침입로는 그때 받은 것이고요. 문제는 두 번째 방문인데...."

그는 말했다.

"알다시피, 저는 기계론자입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친구도 제 성향에 맞춰서 사귀는 편이죠. 하물며 그리니치 대학 관련자면 얼마나 이성적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친구가 두 번째 잠입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묘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 아닙니까."

블랙은 타인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는 것처럼 더듬더듬 말했다.

"우리는 구원 받은 마지막 세대라고. 그러더니, 연락을 끊고 사라졌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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