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59화 (159/232)

§159. 점성의 오해

긴 고찰 끝에, 나는 답을 내놓았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을 테지."

자신이 구원을 내린다는 망상병자를 한 명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가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니, 그것도 우리 세대라고 특정할 것은 또 뭐람.

신흥 이단이라면 호객에 소질이 없었고, 망상이라면 보기 안쓰럽게 미친 자였다. 구원이라는 단어에는 그렇게 종교적인 색채가 담겨 있었다.

"천국에 갈 거란 기대는 안 하고 사는 친구입니다. 물론 지옥에 갈 거란 우려도 안 하고 살지요."

나는 잠깐 고민하고 말했다.

"자네, 돌아가게."

"시답잖은 농담하는 거 안 좋아하시는 걸로 압니다."

"위험할 수도 있어."

"이제 보니 아주 농담을 좋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

그러는 그야말로 농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언성을 높였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야."

"선생님께서는 간혹 타인을 과소평가하십니다. 위험한 줄은 선생님보다 제가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나들이라도 나가는 기분으로 왕립 연구 시설에 침투한 줄 아십니까?"

그는 새삼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날 힐난했다. 나는 내 의도가 전해지지 않는 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물론 나야 언변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 해야 할지 도무지 사고가 언어화가 되질 않았다.

"자네가 상정하는 위험이 얼마나 안이한 줄 몰라서 그러네."

"죽기야 더 하겠습니까?"

더할 수도.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친구에게 더 들은 건 없나? 예를 들어, 어째서 우리 세대라든지."

"유감스럽지만."

물론 내게는 나름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 시대가 끝나고, 우리 세대가 저물면 유럽 전역이 두 번의 대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분명 그걸 면하는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천문대에서 미래를 엿보기라도 했다는 건가? 고대의 점성술을 체험하기라도 한 것인가? 물론 나는 그와 비슷한 흉내가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육혜 시계, 별에서 내리는 지혜를 통해, 대학은 불가시의 영역에 있는 미래를 들추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나 역시 그 일부를 수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밝히는 바이지만, 나는 그 미래를 믿지 않았다. 학장과 대학에 대한 불신 때문은 아니다. 인류는 한때 별과 밤하늘을 통해 미래를 점치려 했지만, 그 비법은 점차 쇠락하여 이제는 없는 것이 되지 않았던가. 시대가 지나며 모두 착각에서 깨어난 것이다.

하늘은 본디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그런 하늘이 인간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은 만무한 일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수밖에...."

우리의 대화는 부자연스럽게 끝났다.

그걸 본 건 나뿐으로, 블랙은 내 반응을 보고 눈치 빠르게 맞춘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도 내 시선을 쫓아서는 결국 발견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블랙은 멈칫했다. 물론 그도 양심적인 인물은 아니었기에 결국은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내가 더 빨랐다.

나는 권총을 뽑아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들이밀었다.

"허튼짓말고 앞으로 나오게."

반응은 없었다. 나는 블랙에게 가만히 있으란 뜻으로 눈짓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블랙은 어찌 이해했는지, 바로 내 뒤를 따라 걸었다.

"부르르, 부르르."

가까이 다가가자, 모퉁이 너머에서 낮은 음성, 혹은 진동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둘 모두 본질은 떨림이었기에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서 경험의 차이가 드러났다.

나는 불온함을 느끼고 즉시 멈췄지만, 블랙은 고약한 장난을 마주한 사람처럼 불쾌한 얼굴로 계속 다가갔다. 멈출 틈은 없었다.

"이봐."

"푸득, 푸드득!"

블랙이 바로 근처까지 다가가 말을 걸자, 벌레가 세차게 날갯짓하는 거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이쯤이면 블랙도 이상을 느낄 상황이었다.

그때, 그러한 소음 속에 섞여 음성이 들렸다.

"밤하늘...."

"뭐?"

"밤하늘."

어쩌면 모두 착각일지 몰랐다. 어쨌거나, 떨림이었으니까.

그 직후 일어난 일은 분명하지 않다. 어두웠던 탓도 있고, 말소리를 들으려고 신경을 귀에 집중하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아주 짧은 시간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하튼, 내가 목격한 것을 최대한 선명히 전하자면 이랬다.

숨어 있던 사람의 머리가 갈라졌다. 부위로는 뺨이나 턱의 경계쯤이었다. 그리고 그 부위가 푸드덕거리더니 날아올랐다.

그리고 머리가 비상했다. 몸은 쓰러졌고, 머리만 날아서 우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계단 위로 사라지는 자취만 간신히 쫓을 수 있었다.

"방금, 봤습니까?"

블랙은 물었다.

"머리가...."

"그래, 봤네."

우리는 마주 보며 조금 전의 신비하고 역겨운 장면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머리 없이 덜렁 남은 몸을 살폈다.

남은 몸은 평범했다. 물론 이상한 점은 많았지만, 머리가 날아가는 것보다야.

목 단면에서는 끈적한 체액이 느리게 역류하고 있었는데, 피처럼 붉지도 않았고 냄새도 거의 없었다. 차라리 뇌수나, 고목의 수액에 가까운 액체였다.

그것 외에도 시체는 기이하게 말라 있었다. 근육과 지방은 완전히 퇴화해서 체중을 지탱하기도 버거워 보였다. 잠깐 보았던 휘청거리는 움직임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단순한 호기심이나 욕심으로 덤빌 일이 아니야. 하물며 오기로는 더욱."

나는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선생님 말이 맞았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르군요."

블랙은 심각한 얼굴로 시체를 살피며 속삭였다.

"한몫 크게 벌 수 있겠습니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인정합니다. 선생님께는 제게 없는 괴물을 상대하는 감과 요령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서는 저보다 훨씬 나으시겠죠. 하지만 제게는 저만의 장사 요령이 있습니다. 제 예감대로면, 여기서 건지는 건 뭐든 큰돈이 될 겁니다. 시답잖은 치정 문제나, 한가한 부인들 상대로는 평생 걸려도 못 만질 큰돈이요."

"그깟 돈이 뭐라고."

나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반대로 돈 말고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블랙은 되물었다.

"그깟 돈이라 하시지만, 그깟 돈이 미래를 만듭니다. 하루를 산다고 내일로 가는 줄 아십니까? 아니요, 그건 그냥 수명을 낭비한 것이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블랙과는 나름 긴 인연을 지냈지만, 내가 아는 표정은 거의 없었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산술적으로 얼마나 손해인지 계산하는 사람이었으니, 천문대를 둘러싼 분위기와 거듭되는 이상 현상이 그의 심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무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닙니다. 쉽게 생각합시다. 천문대에 들어와서 시체 두 구를 봤고, 정체 모를 괴물도 봤습니다. 근데 그게 위험합니까? 신변의 위협을 느꼈습니까? 아니요, 기껏해야 사람 머리통이 날아오는 수준이겠죠. 그런데 우리는 총도 있습니다. 위험할 요소가 없는 거죠. 오히려 큰 건 중에서는 안전한 축에 속할 정도입니다."

그는 냉정하다고 호소했지만, 내 눈에는 이미 감당 가능한 임계점에 있었다. 그의 눈에서 어렴풋한 광기의 색채가 비쳤다.

"우선 진정하게."

"선생님께서 돌아간다 해도, 저는 더 들어갈 겁니다. 여기는 저 혼자서도 문제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내게 그를 말릴 자격은 없었다.

"언젠가 호되게 당할 거야."

"압니다. 하지만 그게 이번은 아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실 줄 알았습니다."

블랙은 히죽 웃었다. 그의 말대로, 이성은 흐렸으나 계산적인 성정은 어딜 가지 않았다.

나야 그와 별개로 여기 볼 일이 있으니, 그가 어떻게 하든 탐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결국, 우리는 누구도 돌아가지 않고 실내를 탐색했다.

1층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2층의 여러 방을 돌아다니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은 탓이었다.

2층은 넓고, 방도 많았지만, 대부분 숙직과 기자재 보관 목적의 방이었다. 그나마도 대개 비어서는 낭비되는 공간이 많았으니, 1층이라고 다른 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공사를 서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확장은 본 목적이 아니었을 거야. 예정에 없는 층을 쌓으니, 하중을 견디기 위해 부실한 기반을 다지는 공사로 넓어진 거지."

나는 블랙의 푸념에 답했다.

"하지만 우주가 저렇게 먼데, 고작 한두 층을 더 쌓아서 관측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저야 천문학자가 아니니까 사정은 모르지만, 인간은 제법 잘 알고 있죠."

내가 혀를 차자, 이번에는 블랙이 답했다.

"상승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비상을 동경하지 않고서는 어찌 탑에 박혀서 별만 들여다보겠습니까?"

나는 곰곰이 궁리했지만, 돌려줄 대답이 없었다.

"과연 그렇군."

그리고, 계단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우리도 그 본능에 충실할 때가 된 거 같군."

그렇게 우린 3층으로 올랐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우리는 예상 못 한 상황과 마주쳤다.

"거기 누구신가? 여기는 지금 출입 금지인데."

당연히 경계했어야 했던 것인데, 이상 현상이 반복되자, 지나치게 예민해서는 어떤 면에서는 감이 무뎌진 것이다.

나와 블랙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복도는 어두웠지만, 다행히 그는 우리 손에 들린 걸 오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점은, 그가 멀쩡한 인간이라는 부분이었다.

"위협하지 마시게. 여기서는 숨거나 도망칠 곳도 없으니."

"자네 동료들에게 달려가서 우릴 포박하고, 4층 난간에서 던져버릴 수는 있지."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금이 간 안경알이 흐릿한 달빛이 비쳐 반짝였다.

남자는 앙상했지만, 시체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식자층 특유의 흑색 정복은 얼굴과 대비해서 새하얀 해골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고, 넓은 소매는 어둠 속에 잠겼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현실과 환상 사이에 걸쳐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보통 첫인상은 거기서 판가름나겠지만, 남자에게는 또 하나의 평가 요인이 있었다. 그는 평생 물가 근처에는 가본 적도 없는 것처럼 악취가 흘렀다. 시체의 악취가 템스 강의 그것이라면, 남자에게선 화이트 채플 으슥한 골목 끄트머리의 그것이었다. 고독과 비위생의 합주여라.

"내게는 동료가 없네."

남자는 입에서 단내가 흘렀다.

"또한 동족도 없지."

"무슨 뜻인가?"

"그 질문을 너무 쉽게 입에 담지 말게. 우리의 실수를 반복할 뿐이니."

그는 모호한 선문답을 말했다.

"시간을 끄는 겁니다."

블랙이 상식적인 판단을 했다. 나는 경험을 따랐다.

"전부 설명하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지. 방금 자네가 하다 만 말까지 모두."

"이봐요, 선생님."

"평소라면 나도 자네처럼 판단했을 거네. 하지만 이런 일에서는 내 감을 따라주게."

"그러면 최소한 포박이라도 하죠."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저항하지 않고 무릎 꿇었다. 아니면 저항했지만 너무 매마른 탓에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인지도.

"여기에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는 없네. 설령 훔친대도 장물로 나오는 순간 어디서 났는지 뻔한 것들 뿐이거든. 죄는 묻지 않을 테니, 나라면 여기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나가겠네."

그는 묶이고도 우리를 설득하려 했다. 아니, 사실 그런 표현을 쓰기도 어려웠다. 학자의 태도는 완곡한 조언자의 그것이었다.

"믿건 말건, 우리는 도둑이 아니야."

나는 말했다.

"그러면 더욱 나쁘지."

남자는 우울감을 드러냈다.

"저번에 왔던 여자도 강했지만, 결국에는 무너졌지."

"여자?"

"아, 불쌍한 저스틴, 그녀로군.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저야 남성보다 여성에게 사랑받는 체질 아니겠습니까. 새삼스러운 얘기는 관두시죠."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한테 무슨 짓을 했지?"

"안내."

남자는 말했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가져가게 했네. 못할 짓이었지. 결과를 알면서도 거스르지 않는 게 연구자의 나쁜 천성이야."

그는 모든 걸 드러내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만, 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블랙은 우위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이봐, 우리는 도둑은 아니지만, 아주 바쁜 사람이야. 그리고 밤은 짧고, 너는 여기 묶여있지. 박사라면 말귀 못 알아들을 만큼 멍청한 족속도 아닐 테고. 순순히 행동하면 다치지 않는다는 말이 그리 낙천적으로 들리나, 응?"

나 역시 지금 상황이 꽤 답답한 참이기에, 블랙이 긴 협박문을 읊는 동안 상관하지 않았다.

반면, 학자는 자신의 위기조차 하찮은 드잡이 따위로 여기는 게 분명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과 있으면 시간 감각이 이상해. 그러니 내가 날짜를 이상하게 말해도 이해해주게. 우리 천문대는 지난 200년간 비밀리에 하나의 연구를 진행해왔네."

"벌써 이상하게 말하는군."

블랙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말에 담긴 진의를 바로 알아차렸다.

"천문대 창설 이래인가? 아이작 뉴턴이겠군, 내 말이 틀렸나?"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네. 그리니치 천문대 창설 이래 난제임은 맞지만, 그 과제를 남긴 건 뉴턴이 아니야. 모든 업적을 뉴턴에게 돌리는 것은 대중의 흔한 실수지. 그 시대에는 아이작 뉴턴 외에도 또 하나의 천재가 있었네. 그리고 이름은, 이름은... 잊고 말았네. 용서하게. 불과 얼마 전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 끊기자, 블랙은 초조한 기색으로 날 보며 호소했다.

"우리가 지금 옛날 얘기나 듣자는 게 아니잖습니까."

"빈말로라도 별로 진척 있는 작업은 아니었지.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나 다름없었어. 우리가 알아낸 거라곤, 행성 바깥에 균일한 크기 물체가 다량 공전하며, 때때로 지면에 떨어져서는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뿐이었지. 그건 200년 전부터 이미 알던 것이야."

"100년 전, 런던 근교의 마을 때처럼 말인가?"

"그것마저 안다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중에 설명하겠네, 지금은."

나는 블랙을 달래며, 학자가 계속 말하게 뒀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운 좋게 별실에 있어서 화를 피했네."

"사건?"

"수확이 없던 200년의 연구를 한순간에 끝마친 발견이었으니, 나는 달리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네. 아! 환희에 찬 유레카가 인류를 부르짖는 비명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

그는 한순간 큰 소리를 내었다가, 여기 없는 누군가의 눈치를 살폈다.

"용서하게. 저들은 시끄러운 걸 싫어하거든. 무슨 해를 끼치는 건 아니지만, 구태여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으니...."

"저들, 누구? 다른 학자들 말인가? 그전에 그들은 어딨지? 방금 화를 당했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이고."

내 질문에 학자는 침묵했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거나, 외압을 느끼는 그런 침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황스럽게도,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난처였다. 순수한 무지로 정제해야만 피어오르는 그런 불안이라.

"나 이외에도 여럿이 무사했지. 아니, 화를 당한 자보다는 면한 자의 수가 배는 많았어. 우리는 상황 파악을 끝내고는 대학에 요청해서 천문대의 경비를 강화하고, 숙직을 지내는 시간을 늘리며 저 불쌍한 자들을 보호하고자 했네. 하지만, 지금은... 보다시피 나 홀로 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었지?"

"이기지 못할 괴물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하나씩, 하나씩 잡아먹혔지. 하지만 너무 탓하지는 말게. 그들은 모두 학자였으니까, 패배는 필연이었던 거야."

블랙은 상황을 자신이 아는 언어로 표현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지금 천문대에 괴물이 있다, 이런 얘기인가?"

"아, 아니지. 괴물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순종했을 뿐이야. 이 지경이 되어서야 알았지만, 내가 학자 기질이 제일 덜했던 거야."

"이자는 무슨 중국인처럼 말하는군요."

학자의 모호한 설명에 블랙은 신음했다.

"모든 천문학자가 공유하는 믿음이 있네. 오랜 시간 밤하늘을 들여다본 이라면 자연스레 깨닫는 것이야. 그리고, 우리는 판단을 해야 할 때가 되었지."

"무엇을?"

"기억이란 진정 불가분의 가치를 지녔는가?"

학자는 물었다.

"인간이란 고작 한평생의 기억에 종속하는가? 영혼이 그저 언젠가 꺼질 전기 신호에서 나온 망상임을 인정할 수 있는가? 삶의 의미가 행복 추구에 있다면, 과연 지식의 탐구는 선한 행위인가!"

그의 목소리는 서서히 드높아졌다. 그에 맞추듯이, 위에서 진동이 들려왔다. 윙윙, 부르르, 윙윙, 부르르....

"우리는 모두 계약했네."

학자는 말했다.

"기억을 양분으로, 망각을 약속받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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