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망각에의 여정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이유는 막연하다. 유리 공예처럼 빛깔로 사람을 홀리지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으면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걸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모든 예술가의 숙원이다. 그러기에 해안에서 좋은 시는 나지 않지만, 좋은 연주는 난다.
"어르신, 좋은 날씨입니다."
모르는 선원이 말을 걸었다. 하늘은 뿌옇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잃어버린 거라도 있습니까?"
그는 작정하고 친절을 발휘할 셈인지, 아예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내가 무언가 잃어버렸나? 그렇다. 나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편지."
"편지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선원은 당황하며 머리를 긁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죠? 바람이 강해서 진작에 날아갔을 겁니다."
"분명 여깄어."
이유 모를 확신이 북받쳐서 고집스럽게 말했다.
"뭔 일이야?"
"아니, 어르신이 잃어버린 게 있다고 해서."
또 다른 바닷사람 하나가 옆의 남자를 아는 척하며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는 뭘 잃어버려도 못 찾아요."
그는 곧장 말하고는
"그래서, 뭘 잃어버렸다는데."
"편지."
나는 말했다.
"뭐요? 그러면 매일 편지를 찾겠다고 나온 겁니까?"
"이봐."
선원 한 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묻고, 다른 한 명이 만류한다. 매일이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인가.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도움이 되었다. 여기 없다는 말을 계속 듣자니, 확실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가 찾는 게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성실한 선원 둘은 날 부르기는 했지만 뒤쫓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멀리서 들린다. "노망이 단단히 들었어." "너도 너무 말 걸지 마." 물속에서 듣는 목소리처럼 마냥 뿌옇다.
내가 찾는 건 여기 있지 않다. 제복 코트 안주머니에 단단히 넣어뒀으니 말이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줄로 묶어두었다.
그야 그렇게 중요한 것이니까. 모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게 나의 마지막 의무다.
해는 높게 떠 있다. 땀이 눈썹에 걸려서 어른거렸다.
걷는 게 왠지 불편해서 밑을 보니 다리가 있을 자리에 목발이 걸려 있었다. 그랬지, 찰과상에 감염되어 발을 통째로 잘라내야 했다. 대신 목숨을 건졌으니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절묘한 모순이다. 지난 2년간 총알은 한 발도 날 스치지도 못했는데, 세상은 날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전훈을 내 몸에 새겼다. 왜 하필 내가 살아남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자니,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 게 맞나? 그런 의문이 들자 거리의 풍경이 낯설게 보였다.
주소는 알고 있다. 숫자를 보면 괜찮다. 11번지. 좋아, 제대로 가고 있어. 나는 용기 내 힘껏 앞으로 걸었다. 다음 숫자가 12라면 괜찮다.
그리 생각했더니 왠지 모르게 15번지가 나타났다. 걸어오면서 제대로 신경 쓰고 있었는데 지나친 걸 기억도 못 하는 건가? 애초에 15번지면 목적지를 지난 건가? 내가 어느 주소로 가고 있었지?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걸은 건 몸에 익은 습관 덕분이다. 상황을 이해 못 해도 일단 무조건 걷고 보는 버릇을 들이길 잘한 셈이다.
걷는 동안 기억은 차차 떠올랐다.
나는 지금 상관의 자택, 아니, 퇴역한 몸이니 전 상관의 자택으로 가고 있다. 목적지는 카도간 가街 40번지이고, 처음 여기 들렀을 때도 주소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었다. 목적지만 잊지 않으면 괜찮다. 앨버트 파라는 40번지에 산다. 40번지, 그런 쉬운 숫자를 잊을 리 없지.
40번지에 도착하고, 나는 잠깐 당황했다. 내 기억에는 건물은 꽤 낡은 것이었는데, 눈앞에 있는 건 완전히 신축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간 이사했다면 연락을 했을 것이다. 강직한 나머지 내게 빚을 졌다는 생각마저 품고 있는 그가 말없이 사라지거나 할 리는 없었다.
나는 고민을 끝내고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여인의 목소리였다. 가정부일까.
"파라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주인 어르신이요? 아, 아아. 허버트 씨군요. 네, 전해 드릴게요."
어떻게인지 그녀는 내 목소리를 아는 듯했다. 전에 방문했을 때도 있었던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어쩌면 내가 깜빡했을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방문 목적만 잊지 않으면 됐다.
잠시 후, 나는 실내로 안내받았다. 날 맞이한 가정부는 일순이지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교육이 덜된 가정부다. 아니, 어쩔 수 없나. 전쟁터에서 얼굴이 많이 상했으니, 날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필사적인 예의로 날 맞이했다.
접견실에는 앨버트 파라가 미리 앉아 있었다.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지만, 날 반기고 있다는 사실만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파라 함장님을 찾아뵙습니다."
내가 직립해서 경례하자, 그제야 내 쪽을 본 파라가 놀랐다.
"오다가 먼지 구덩이에서 구르기라도 했나?"
나는 그제야 내 꼴이 말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어디서 더럽혀졌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내가 변명도 하지 않고 서 있자, 그는 다짜고짜 강압했다.
"이따 우리 집에서 씻고 가게.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지. 옷은... 어차피 코트를 가지러 왔겠지. 일단 그거라도 입고 돌아가면 될 테지."
"배려 감사합니다."
결국, 마땅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동의했다. 요즘에는 쓸데없이 기자가 따라붙어서 내 행실로 귀찮게 참견하는 일이 늘었으니 말이다.
"자네가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자, 그는 대뜸 말했다.
"왜, 전에 들른 지 얼마 안 되었잖나. 하기사 이제는 우리도 젊지 않지. 그래도 자네 정도는 양반이야. 요즘에는 간신히 연락을 보내나 하면 죄다 부고니까 원."
파라는 푸념했다. 나는 그저 이 대화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맡긴 옷을 받으러 왔습니다."
"오늘따라 서두르네. 좀 더 앉아 있다가 가지그래. 이제 막 차를 끓이러 갔는데."
정말로 그랬다. 바로 뒤에 있는 줄 알았던 가정부는 어느 샌가 없어졌다.
"우리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어."
전 상관은 외로움에 변명을 대는 것처럼 말했다.
"남아 있다고 해도, 여즉 종군하고 있는 이는 더 그렇고. 기껏해야 나처럼 출셋길에서 벗어난 노인이나 스콧 정도지. 기억하나?"
"로버트 말이군요. 그러고 보면 쟝은 어찌 되었습니까?"
"쟝?"
"있지 않습니까. 제 옆에서 이탈리아 말 좀 배웠다고 앞서던 친구 말입니다."
파라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런 일이 되었나. 야속하네."
"함장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역시 씻어야 하니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씻어야 한다고요?"
"여기서 씻고 돌아가라 했잖나."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몸이 굉장히 더러웠고, 그런 말을 했을 법도 했기에 나는 적당히 맞장구쳤다.
"그랬었죠."
들켰을까? 파라는 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퇴역했다고는 해도 아직은 군인인지 저 눈을 앞에 두면 긴장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없었고, 나는 차를 가져온 가정부와 그대로 함께 나가서 따뜻한 물을 빌렸다. 그리고 무심결에 면도칼을 들었다가 떠올렸다.
그래, 나는 스물이 아니다. 막 퇴역한 풋내기도 아니고, 쟝은 전쟁터에서 죽었다. 내가 정말 그딴 소리를 했나? 파라의 냉담한 반응도 이해가 됐다.
나는 정말 어떤 얼굴로 나가야 할지 모른 채, 거울도 보지 않으며 무작정 수염을 다듬었다.
잊으면 안 돼. 목적을 잊으면 안 돼. 정말 중요한 거야.
조금 뒤, 나는 더러운 코트를 벗고, 비슷하게 낡았지만 더럽지는 않은 청코트와 해군 제식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차려입으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파라는 나와서 그런 내 모습을 바라봤다. 매번 그는 말없이 슬쩍 다가왔다.
"아까는."
나는 일부러 거울을 보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조금 괜찮아졌나?"
"부끄럽지만."
"아니,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예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 조금 늦게 일어난 거니까."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기억이 흐려지고부터 상대 말을 알아듣기 어려우면 곧장 내 잘못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쓸쓸해지겠어."
"스콧이 있잖습니까."
"모르는 소리. 그놈은 일절 찾아오질 않아."
파라는 섭섭한 소리를 냈다. 한때 그토록 엄격하게 보였던 상관이 이렇게 고독을 타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세월이란 흐르는 법이다
"돌려주러 오기 힘들면 이번에야말로 버리건 하게."
그는 말했다. 확실히 미련이다.
"그래서 누구인가?"
"아무도 아닙니다. 제가 오늘 들른 건, 옷에 용건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미련이 아니었다. 버리거나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여기 안주머니에 중요한 걸 남겨두고 있었으니까.
나는 손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손은 헛돌았다. 잡히는 것이라곤 마른 실밥뿐이었다.
아, 그랬지. 주머니는 뜯어졌다. 귀국하고 런던 앞바다에서 하선할 때였다. 그 바람에 한 아름 담아두었던 편지 뭉치는 그대로 젖어 가라앉았다.
어차피 읽을 수 없던 것이지만...
그러니까 그렇게 찾아도 없지. 그러니까....
"함장?"
파라가 물었다.
"자네, 괜찮나?"
"죄송합니다. 못 들었습니다."
그를 돌아보며 정자세로 대답하자, 그는 주름지고 슬픈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아니, 조심히 돌아가라 했네, 필레몬 허버트 사관."
나는 경례를 하고, 최대한 각 잡힌 자세로 집 밖으로 나갔다. 움직임에 목발과 지팡이가 거슬렸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거리로 나오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여기에는 왜 왔더라?
그리고 어디로 가야지?
뇌에다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나는 고개를 치들었다. 석양이 저물고 있다. 반가운 런던의 밤이 찾아온다. 이런 하늘 아래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겠지.
나는 무작정 걸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 즈음에, 내가 도착한 장소는 묘지였다.
공부를 하다가 고민이 생길 때마다 들리는 장소였다. 달리 성묘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앞에 서면 복잡한 머리가 비워져서는 만물이 명료하게 다가왔다.
분명 그럴 셈이었는데, 아버지의 묘 앞에는 모르는 여인이 서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 자리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여인은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다. 아버지의 지인일까. 아차, 너무 오래 보고 있었다. 그녀가 날 눈치채서 고개를 움직였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녀는 웃는다. 나는 깜짝 놀란다. 미소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기다리고 있었어."
"저를요?"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인다. 내가 이런 미인과 사적인 약속을 했던가? 그것도 무덤가에서? 여인의 얼굴에 일순 그림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저런, 설마 못 알아보는 거야?"
잠깐 보였던 침울한 표정이 거짓말처럼 여인은 건강한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모자를 벗는다.
"아니면, 이러면 알아보려나."
런던에서 보기 힘든 단발머리다. 잘 관리했는지 비단결처럼 고운 흑색이다. 색깔이 내 기억을 이끌어낸다. 나는 기억나는 발음을 했다.
"리즈."
아니, 이게 아닌데. 이런 이름이 아니었을 텐데.
"아마릴리스."
"서로 이름을 부를 나이는 지나지 않았어?"
그녀는 당황하며 능청떤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다.
"오랜만이야, 필로."
하나가 떠오르자 덩달아 모든 기억이 거품처럼 떠오른다. 그녀는 나의 대학 동기이자, 알트에게 끌려다니며 고생하는 '위대한 새앙쥐 종격막 탐구회' 동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은....
"그건 말하지 말아줘."
그녀는 표정만으로 내가 뭘 말할 줄 안다는 것처럼 끊는다. 나는 그녀의 결혼반지에 시선을 보낸다. 그녀는 수줍게 손을 감춘다.
"결혼했어?"
"미국에서. 그러다 보니 연락을 못 했네. 하지만 지금은 홀몸이야."
리즈는 말했다.
"무슨 뜻이야?"
"남편이 죽었거든."
그녀는 속삭이며, 간신히 보일 정도로 살짝 웃는다. 나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다.
"왜 그래?"
"아니, 예뻐졌구나 해서."
나는 무심결에 말한다.
"날 찬 게 좀 후회돼?"
여인은 잔인하게 눈웃음 짓는다. 나는 거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