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63화 (163/232)

§163. 아마릴리스

단맛은 뇌척수액 깊이 녹아서 뉴런을 삭힌다.

나처럼 기억이 어수선한 사람이 아니라도 식탁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파악하는 사람이 있을 턱 없었다.

이름 모를 형형색색 요리가 순차대로 내 앞을 오가고, 그때마다 길이가 다른 식기가 서넛 갖춰지고 잔에는 새 술이 담겼다. 나는 이번이 몇 번이 접시인지 세는 것조차 관두고 말았다.

혓바닥은 기름으로 코팅된 설탕의 결정에 덮여서는 곧 어떤 맛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음식은 전시물처럼 색만 가졌을 뿐이니 아무런 인상도 전해지지 않았다.

넌지시 그런 생각을 리즈에게 전하자, 그녀는 "오스모제네시아(Osmogenesia)라고 알고 있어?" 하고 되물었다.

"오스모제네시아?"

"혹은 성향(Odor of Sanctity)이라고도 불리는 것이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부 기독교 성인에게서 일어났던 기적을 부르는 표현이야."

"그리 청결하게 들리진 않는데."

"맞아. 이 기적은 성인이 죽은 뒤에만 일어났거든. 신기하게도 몇몇 성인은 죽고 나서 썩어가는 시취 대신 짙은 꽃향기가 났다는 거야."

"수상쩍은 이야기네."

나는 신랄하게 답했다.

"정말 그럴까? 기록 자체는 시대와 공간을 불문하고 여럿 남아 있어. 교황청에는 이러한 기적을 일으킨 성인만을 따로 분류할 정도로 말이야."

"그 부분이 맹점이겠지. 감각이란 속이기 쉬워. 성인으로 추대된 누군가의 죽음,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픈 치들이 집단 착란을 일으킨 거겠지. 향기가 아니라 빛이 났다고 해도 다들 봤다고 했을걸."

리즈는 미소 지었다.

"공교롭게도 옛 이스라엘의 장례법에 따른 시체는 분명 향기로웠을 테지. 악취가 새지 않게 세마포로 감싸고, 그 위에 향유를 부었으니까. 어쩌면 성향 전설은 그런 데서 시작했을지도."

그녀는 홀로 납득한 것처럼 굴자,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뭐야? 갑자기 알트나 할 법한 얘기를 하고."

"식당의 이국풍 인테리어도, 묵은 포도주에서 풍기는 취기도, 향유 발린 세마포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안목에 불평하는 거야?"

"설마, 그 반대야. 너는 옳아. 오히려 조금 소름 끼칠 정도로."

"악담이야?"

"타인의 시선에 부정적인 것도 여전하구나. 내가 너를 나쁘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 그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인걸.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많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나는 이방인이고, 너는 외부인이야."

"같은 의미처럼 들리는군."

"그래, 너는 언제나 문학의 가치를 부정했었지. 알트는 그 반대였고."

"그리고 너는 항상 중립이었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는 네 생각을 들어야겠어."

그러자 리즈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종업원이 접시와 잔, 식기를 회수했다.

그들이 새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고기 요리 한 점이 담긴 접시를 올려놓을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서로 지켜봤다.

식사 중 내 안의 의심암귀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계기는 블랙의 전언을 떠올린 것이지만, 그 외에도 의심스러운 점은 무수했다. 잠시 느꼈던 반가움은 편린조차 남지 않았다.

목적 없이 모호한 화법이나, 불투명한 속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 검지를 움직이는 버릇, 내가 한때 성적 흥분을 느꼈던 요소요소는 모두 불길한 암시처럼 바뀌어 있었다.

"하던 얘기를 계속할까."

리즈는 식기를 들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나도 오기처럼 나이프와 포크로 눅눅한 고기 요리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달아서 구역질이 감돌았다.

"단어가 둘 있다면, 결코 같은 의미를 가질 순 없어. 그게 내 생각이야."

"사전적인 의미가 같다 해도?"

"같다 해도. 왜 그런지 알아?"

나는 묵언으로 답했다.

"다른 한쪽의 존재 때문이야. 같은 것이 둘 존재하면, 대칭점이 생겨나. 거울의 양면처럼, 같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는 거야."

"철학이야?"

"굳이 따지자면 미학이겠지."

어투는 강해졌지만, 여전히 본의를 알 수 없는 두루뭉술한 화술이었다.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알트보다도 질이 나빴다.

탁.

짧은 상념은 접시와 포크가 부딪히는 파열음에 깨어났다. 눈의 초점이 돌아오자, 식기를 역수로 잡은 채 날 응시하는 리즈가 보였다.

"너는 런던을 어떻게 생각해?"

"어떻다니... 두 번째 고향이지."

"두 번째?"

"아니, 그냥 말실수야. 그래서, 뭐?"

"외부에서 온 내게는 도시의 이상이 속속들이 보여. 예를 들어, 이 요리."

그녀는 먹은 듯 만듯한 고기 요리를 포크 채로 들어 올렸다. 식어가며 굳은 설탕 결정이 눈처럼 펑펑 쏟아졌다.

"런던에서 가장 훌륭한 식당에서 나온 메인이지만, 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일까? 하지만 런던에서는 누구도 이런 음식에 불평조차 말하지 않아. 단 한 명의 예외를 빼고는."

나는 그녀가 누굴 말하는지 바로 알았다.

"필로, 네 감성은 도시 외부의 것이야. 도시의 기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너 자신을 유지하고 있지. 그건 이국의 감성을 익혔을 뿐인 나보다 대단한 거야."

리즈가 하는 말은 어려웠다. 나의 정신이 불안정한 탓은 아니었다. 그녀는 늘 중요한 명제 두 가지를 빠트리고 다녔다.

언제, 그리고 왜.

아마릴리스의 기억은 절묘하다.

1874년 여름, 나는 아버지를 여였다. 리즈는 그런 내게 아무런 전조 없이 다가와서, 가을과 함께 떠나갔다. 분명 떠났을 터였다.

그럼에도 알트... 아서와 어울릴 때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 있었다. "종경막."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적재적소에 있었다.

리즈의 회상은 언제나 같은 질문으로 끝났다.

'아마릴리스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망각 저편에 존재하던 추억이 작금 다시 떠오른 이유가 뭘까. 내가 그 어느 때보다 과거에 목매는 지금에, 대체 무슨 목적으로.

"무슨 생각."

나는 깜짝 놀라서 식기를 내려놨다. 다행히 동요가 들키지 않았는지, 리즈는 계속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해?"

"미안."

입에서 나온 말은 대답이 되질 않았다. 나는 급히 덧붙였다.

"가족 생각을."

"그러고 보니, 네 가족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

"내가 그랬던가?"

"누나 얘기는 했었지."

종업원이 다가와, 고기 요리를 치워갔다. 다음 접시는 치즈였다. 나의 어휘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정말 그저 치즈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 그리고 여읜 아버지도."

나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조금 전까지 불분명했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홀로 임종을 지킨 어머니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알트와 결별했다. 다른 이유보다는 무기력과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그 이유였다.

"너는 살아 있는 가족 얘기는 하지 않는구나."

"피차일반이잖아."

나는 거칠게 쏘았다.

"아마릴리스, 나는 네 가족 얘기는커녕, 네 고향조차 몰라. 너는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잖아. 심지어 네 생각 한 번조차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지."

처음에는 가벼운 힐난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감정이 섞이게 되었다. 그런 투정에 가까운 고함에도 리즈는 말없이 눈을 감을 뿐이었다.

키틴질 껍데기. 그렇게 보였다.

"부친께서는 보수적인 분이셨어. 가족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의 역할이라 굳게 믿으셨고, 그분의 고집이 망집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

리즈는 대뜸 말했다.

"커튼 뒤의 집, 어쩌면 주변에선 이렇게 불렀을지도. 모르지, 나는 이웃이랑 대화해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과보호는 억압으로 바뀌었고, 가족의 외출은 제한되었어. 15살이 될 때까지 나는 하늘색이 뭔지 몰랐어."

처음에는 그녀가 독한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녀는 좀처럼 농담하지 않는 성격이란 걸 떠올렸다.

"어머니는?"

"부친의 소유물이었지. 협소한 세상에서 내게 인간관계란 아버지의 연장선이었어.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았어. 부친의 친우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긴 사람이 하나 있었거든, 혹은 흑심이건. 그는 종종 몰래 찾아와서는 신문과 아직 바깥의 냄새를 간직한 물건들을 가져다주었어. 그래 봤자 꽃이나 풀 따위였지만."

나는 예상 이상으로 암울한 리즈의 과거에 압도되었다.

"집안에서 나는 그저 바깥을 상상했어. 내가 가진 상상력의 출처는 대개 그 시절이야. 밖으로 나오고는 상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떻게?"

리즈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추궁했다.

"그렇게 엄격한 아버지가 널 가둬서 지내게 했는데, 어떻게 케임브리지에 입학한 거지? 지금 시대에조차 흔하지 않은 일인데."

"변질은 집안의 가풍이었지. 보호가 억압이 되듯, 사랑이 순종이 되듯, 동경은 갈망이 된 거야. 아마릴리스, 나는 그 이름이 죽도록 싫었지."

그녀의 얼굴에 혐오가 떠올랐다. 언제나 적당하고 나긋나긋하던 그녀였기에, 그 모습은 내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생생한 날것이었다.

"간단해, 집을 불태웠어. 다들 만취한 아버지의 실수인 줄 알지만, 부친께서는 누구보다 술을 경계하던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이 취한 것도, 부주의하게 촛대를 떨어트린 것도, 사실은 모두 내가 한 거야. 밤에는 방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규칙 때문인지, 끝까지 기다렸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도망쳐 나오지 않았더라고. 그렇게, 겨우 나는 자유의 몸이 된 거야."

내가 뭐라 하려는 순간 눈앞이 점멸했다.

"그건 들불입니다."

조금 전까지 리즈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시야가 흐려졌다.

눈을 뜨자, 그 자리에는 리즈가 앉아 있었다. 방금 것은 뭐였지, 환각?

리즈는 계속 말했다.

"졸지에 무연고가 된 나를 거둬간 건, 앞서 말했던 부친의 친우분이었어. 온정보다는 욕정이었지만. 나는 대학을 보내달라는 조건을 붙였고, 그분은 수긍했어.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정도 유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그는 많은 조건을 붙였지. 너무나도 많은 조건을...."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굳이 말줄임표 안의 단어를 굳이 상상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너무 얕봤지.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간 거야."

"내게 한 고백은...."

"맞아. 비록 삼남이라도, 엄연한 귀족의 자식이야. 너와 결혼했다면 굳이 그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영국에 남을 수 있었겠지. 지금에는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어쩐지, 나를 이용했군. 그거라면 이해가 돼."

내 말이 끝나자, 리즈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종업원이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치우고, 마지막 접시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올려진 것은... 과일이었다. 이번에 한해서는 내 묘사력이 부족한 게 맞았다. 나는 그것을 온전히 문장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식사로 때우기에는 양이 적어도 너무 적은 침묵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강인한 분이셔."

"뭐?"

"배운 것은 많지만, 빈말로라도 아버지께서 늘 훌륭했다고 말할 순 없거든. 가계는 모두 어머니께서 관리하셔야 했지. 없는 형편에, 내가 대학에 진학했던 것은 전부 어머니의 공이야."

리즈는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과분하기로는 둘째 형님도 빼놓을 수 없지. 이렇게 생각하니, 형님은 어머니와 닮은 점이 많았어. 어린 나이부터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었지.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지혜로운 탓에, 형님은 은행을 다니면서 나를 대학에 보낼 돈을 마련했어. 아버지를 여읜 뒤로도 내가 어머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던 건, 전부 둘째 형님의 덕이야."

"그래...."

"첫째 형님은, 배즐은 신이 저울추를 맞추기 위해 보냈지. 집안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사치 부리거나, 기껏 다닌 문법학교조차 허송세월하며 보내는 등 엉망이었어. 지금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기꾼 생활을 하고 있지. 나는... 솔직히 그에 대해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들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무슨 동력을 받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 그토록 훌륭한 분이셨는데, 얼굴을 떠올리려고 해도 사각 묘비 모습밖에는...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아직도 내 삶을 지탱하고 있어. 전에 왜 그렇게 눈을 마주치는지 물은 적이 있었지? 눈을 통해 사람의 본성을 살필 수 있다는 것도 그분의 가르침이었어. 그리고... 누님의 이름은 몰라. 묘비에는 이름이 적혀 있겠지만, 볼 용기가 없었어."

나는 침묵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게 다야."

"고마워."

그녀가 무엇에 감사했는지는 몰랐다. 어쨌거나, 우리는 말 없이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가게 출구로 다가갔다.

"그거 알아?"

리즈는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눈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내 말은 전부 거짓말이야."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한편, 문에 다가갈수록 점차 눈앞이 컴컴해졌다. 조명이 흐려진 것인가 싶었지만, 리즈는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간신히 그녀에게 의지해서 암흑 속을 걸었다. 빈혈치고는 부자연스러웠다.

어두운 점내에, 갑자기 불빛이 돌아왔다. 엄밀히는 어떤 자리만 발광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건 들불입니다."

밝은 청년이 말했다.

그가 앉은 의자 옆에는 등불이 놓여 있었다. 그것 외에 식당의 모든 광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청년이 고개를 움직였다. 대답이라기보단 휘청거림에 가까웠다. 그가 끄덕일 때마다 잿가루가 흰 식탁보에 부스러지며 흩뿌려졌다.

"불길은 사람이 막아낼 만한 성질이 아닙니다. 나폴레옹의 개선 이후, 각국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마는 속절없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간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오직 런던만이 여태 멀쩡했죠. 그것도 인간의 수행은 아닙니다. 고작 150마일의 얕은 해협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입니다."

내 귓가에는 박동이 들렸다. 청년의 심장이 뛸 때마다 실내 온도가 상승했다. 날숨에는 흑색 탄연이 섞여 흘렀다. 사람이라기에는 용광로에 가까웠다.

"지금쯤 파리의 불씨를 담은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겁니다. 불씨라고 해도 작지는 않습니다. 마침 런던 항은 동쪽에 있으니, 일출에 버금가는 장관일 테지요. 저기, 연기가 보이지 않습니까?"

청년은 갑자기 의자를 박찼다. 그 탓에 바닥의 등불이 쓰러지고, 축축한 기름 위로 불이 번져 나갔다.

불빛이 커지자, 청년의 모습이 점차 드러났다. 비록 고열로 불거지고, 아주 조금 탔지만,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여열기, 다단두의 온도!"

그는 미국에서 온 천문학지의 기자, 마구스였다. 광란하는 그 모습에서는 내가 아는 성실한 청년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런던에도 불이 핀다!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를 불로 씻어내리라!"

마구스의 발작에 맞춰, 열기는 점차 거세어졌다.

나의 손에는 처음 보는 산탄총이 들려 있었다. 본능인지, 아니면 습관인지, 나는 무얼 해야는 지 알았다.

퍼져나간 탄환이 마구스의 얼굴을 짓이겼고, 머리는 화약통처럼 폭발했다. 시꺼멓게 탄 목 단면에서는 식지 않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불길은 멈추지 않았고, 곧 르 호튼 전체를 감쌀 만큼 거대해졌다. 나는 그 속에서 화마에 삼켜졌고... 그리고... 그리고....

"필레몬 허버트!"

초점이 돌아왔다. 식당은 밝았다. 눈앞에는 작은 촛불만 흔들리고 있었고, 리즈는 식탁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괜찮아?"

"아니, 미안. 갑자기 빈혈인지."

나는 어설프게 변명했다. 거짓말은 리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변명하지는 않았다. 조금 전 보았던 환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 악몽이 그저 백일몽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그 증거로 가게가 멀쩡하지 않은가.

기억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니, 그건 참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퍽 익숙한 감각이었다.

나의 전생, 일어나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게 분명한 21세기의 기억처럼...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미래의 예지란 말인가?

그걸로도 쉬이 설명되지 않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미래를 예지하게 된다니, 오히려 나는 과거로 밀려나고 있는 처지였다. 남은 기억은 손 틈으로 흘러나가고, 어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이다.

그런 내가 미래를 보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면...."

"필로?"

나는 중얼거렸다.

"있지 않은가... 분명 존재했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잠깐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리즈가 당황하며 날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데려다 줄 수 있겠어?"

"괜찮지만, 나는 런던 지리를 몰라."

"강을 따라 걸으면 될 뿐이야."

"그 정도야... 덧붙여 묻겠지만, 어디?"

밝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우중충했다. 런던 날씨는 변덕스러우니, 분명 비가 올 터이다. 이런 날이라면 틀림없이 날 과거로 돌려보내겠지.

"제이콥 섬."

나는 단말마처럼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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