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64화 (164/232)

§164. 개화

'혐오스러운 아마릴리스.'

언젠가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아마릴리스 신화를 알고 있어?'

"아니."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어. 그녀는 알테오라는 청년을 사랑했지만, 오직 그만은 처녀를 바라보지 않았지. 처녀는 신전의 여사제에게 황금 화살로 심장을 꿰뚫고 매일 그의 집앞을 방문하라는 계시를 받아.'

'신화는 쉽게 잔인해지지.'

'...그렇게 삼십 일째가 되는 날, 길가에는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꽃이 피었어. 처녀는 그 꽃을 따서 청년에게 보였고, 청년은 결국 사랑에 빠져. 꽃에는 처녀의 이름을 본떠서 이런 이름이 붙었지.'

'아마릴리스.'

그녀는 놀란 듯이 날 봤다.

'문맥으로 맞춰봤는데, 어때?'

'정답이야. 나는 이 이름이 싫어. 목적에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의무를 배려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여인의 이름을 본뜬 꽃.'

내게는 아마릴리스의 눈가에 혐오가 아닌 애수가 깃들어 보였다.

'맹목적인 사랑이란 어쩜 그렇게 추할까.'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 ... ...비 내리는 골목. 시체.

내 몸에는 출혈과 함께 내 것이 아닌 피가 빗물을 타고 추적추적 흘렀다. 오른손에는 아직 식지 않은 산탄총의 총신이 붙들려 있고, 나는 온전한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낯선 시체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분노와 슬픔이 함께 서렸다. 내게 특별한 존재였지만, 이제서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수 발의 납탄에 곤죽이 난 안면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종의 차이였다.

인류는 어류를 구분할 수 없다. 남자에게는 인간과 생선의 특징이 반쯤 섞여 공존하고 있었다.

무식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진화의 증거라며 선동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으나, 실체를 아는 내게는 극적인 퇴행의 순간이었다.

노인은 바다로 돌아가려 했다. 인류의 조상이 수천 만 년간 쌓아올린 진화를 되돌려서 이 섬과 도시를 수몰하려 한 것이었다.

올려다 본 하늘은 명백하게 파도치고 있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의 검은 바다였다. 점차 약해지는 빗줄기는 노인의 죽음을 알리는 증거였다.

나는 쓰러진 노인의 손에 들린 책을 잡았다. 미련인지 죽고도 강한 악력이 남아 있었다. 나는 지체 없이 단검으로 그 손을 끊어냈다.

책은 웅덩이에 빠져 있었음에도 젖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젖지 않는 책이라 해서 '임퍼비우스'... 혹은 저자의 별명을 본떠서 '은랑의 서'라 불리며 외경 받은 마도서가 이것이었으니까. 주인의 피가 흘렀음에도 문장은 여전히 출렁이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 강물에서 첨벙거리며 움직였다.

나는 즉시 자세를 고쳐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뭍으로 올라오는 상대를 알아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살아 있었군."

"그러지 못할 뻔했죠."

청년은 물을 토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여전히 총을 치우지 않은 채, 그의 손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빨리 좀 도와주시면 덧납니까?"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푸념처럼 숨을 토하고, 반쯤 기다시피 진창을 기어서는 겉옷을 탈피했다. 입에서는 연신 흙탕물이 게워졌다.

"놈들은?"

"도망쳤습니다."

그는 말하다 말고, 날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다.

"다쳤습니까?"

"그래."

나는 옆구리를 손으로 눌렀다. 죽은 피가 분출했다. 통증 때문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야."

"백작은?"

청년의 질문에, 나는 간신히 시체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그는 필 에식스 백작, 은랑백이라 불리며 왕가를 보필하던, 동시에 희대의 복수극을 꾀하고 있던 악마였다.

그리고, 죽은 아버지를 기억하던 몇 없는 이들 중 하나였다.

"죽였습니까?"

"그래."

"잘됐군요."

정말 잘 된 일일까. 나는 알기 힘들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부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라클이 계산은 멈추지 않아, 아서가 예측한 종말점에 달해가고 있었다.

...의미 없는 상념이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다. 망설임은 이미 권태의 별칭이었다.

"에드워드."

내가 호명하자, 청년이 깜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미안, 지금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지."

"그런 옛날 이름을 알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청년 에드워드는 넉살 좋게 미소를 보였다.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꺼리는 건 이미 아는 바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사람 좋기만 하단 뜻은 아니었다. 그의 빼어난 요령 덕분에 얼마나 많은 위기를 모면했는지.

"저택으로 돌아가지."

"저대로 두고 말입니까?"

고개를 돌리자, 에드워드가 백작의 시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나는 섬 정경을 둘러봤다.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비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부실해진 지반이 가라앉는 탓이었다.

"우리라도 탈출해야지."

"거주민은."

에드워드는 말을 하다 말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섬 바깥에 묶어둔 말에 올라탔다.

말굽이 진창을 밟고 달리자 강물이 무릎을 적셨다....

... ... ...

... ...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이 눈을 떴다.

섬은 강물 아래로 잠들었다. 휘몰아치는 수면에는 한때 섬이 있던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2년 전의 일이었다.

조금 전의 일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에는.

"강을 보면서 뭔가 떠오른 거라도 있어?"

리즈는 날 보며 물었다.

"어쩌면."

나는 막연하게 답했다. 이곳에서는 뭔가 일어났으리란 짐작은 적중했고, 나는 갓 떠올린 기억으로 내게 무엇이 일어나는 중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최근 안 사실이지만, 지구의 시간은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일전 에드워드에게도 들었지만, 진정한 의미는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아마도 나의 전생,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지구에서 에드워드는 프랑크 학술회의 동료였던 적이 있다고 했다.

어떤 원리인지, 나는 기억을 거스르는 끝에, 본래 회상할 리 없는 전생, 그 이전의 기억마저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면한 일조차 흐릿하면서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구멍 뚫린 안주머니에서 걸쳐둔 권총을 뽑았다.

"필로?"

그리고 리즈를 겨누었다.

"뭘 숨기고 있지?"

그녀는 총구 앞에 서고도 침착했다. 이 모든 것을 장난으로 여길 만큼 어리석은 여인은 아니었다.

"이제 기억났어. 처음에는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지. 아까 숨긴 건가? 날 유혹하려 하는 저의가 뭐지? 그리고... 혼인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게 하는 줄 알았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너의 성만큼은 흐릿해. 무슨 수작을 부렸지?"

리즈는 한숨 쉬었다. 내 예상과 달리 꼭 장난을 들킨 소녀 같은 순진무구한 반응이었다.

"좋은 시간은 오래가지 않네."

"무슨 뜻이야?"

"조금 더 나중에 말하고 싶었어."

그녀는 강을 응시했다. 나는 시선을 쫓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나는 저주받았어."

리즈는 말했다.

"뭐?"

"너라면 이해하겠지만, 심령적인 위험을 동반하는 작업이 더러 있어. 태평양 섬에서 들어온 불법 화물을 조사하던 중에, 나는 이름을 빼앗겼어."

나는 아까도 떠올린 문구를 되새겼다. 리즈는 농담하지 않는다.

"본래라면 죽었겠지만, 운 좋게도 체득한 구울의 비법이 통해서 살아있지. 아니, 역시 과언이야. 나는 살아있지도 않아."

리즈는 갑자기 다가왔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결국 발포하지 못했다. 그녀는 권총을 잡고, 가죽 장갑을 벗겨서는, 내 손에 깍지를 끼웠다.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사자의 몸으로 여기 있어."

"말도 안 돼."

"그렇지 않다는 걸 알잖아."

리즈는 이해자의 입장에서 속삭였다.

"그러면 결혼은, 4명의 신랑은?"

"정말, 전부 아는구나...."

그녀는 우울하게 말을 흐렸다.

"대답해."

"...비법은 완벽하진 않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름이 더 필요했어."

"그들의 죽음은?"

"이름을 빼앗긴 탓이겠지. 저주가 퍼진 셈이지. 하지만 믿어줘. 무고한 자를 고르지는 않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로 그녀는 살인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처벌해야 하는가? 지금껏 그랬듯이? 아니, 지금껏은 무엇이고, 내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망념에 빠진 날 두고, 그녀는 한 발자국 걸어 스쳐 지나갔다.

"리즈?"

아마릴리스는 강을 등졌다. 그녀 뒤로 도시의 야경이 반짝였다.

"필레몬."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다음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리라... 내게는 이유가 없으니까.

"사랑해."

아마릴리스는 돌연 내게 말했다. 어찌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는지, 나는 되묻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곱씹어야 했다.

"어째서?"

그것 또한 최악의 대답이었다. 나는 무심함의 변명처럼 계속 말했다.

"알트를 좋아했던 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보내는 호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그리하지 않으면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언제부터?"

"둔하구나. 거의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방금 나한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했던 말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고백은 그저 해봤을 뿐이라고.

"우리는 꽤 닮았어."

"고집이 강한 점이라든지?"

"그것까지 전부."

아마릴리스는 지금껏 본 적 없이 뜨거운 눈으로 응시했다. 나는 열기에 삼켜질 것이 두려웠다.

"거짓말이야."

나는 말했다.

"필로?"

"네가 내게 연심을 품었을 리가 없어. 겨울이 찾아올 무렵에, 너는 떠났잖아. 그런데 어째서 아서와 함께... 애초에 너는 누구야?"

리즈는 소금기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어, 필레몬."

그 말대로였다. 나는 그제야 떠올랐다.

아마릴리스가 떠나고 일주일 뒤였다. 그녀가 떠났다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그녀는 느닷없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심지어 아서 프랑크를 대동하고 말이다.

나는 완전히 아연실색하였고, 알트는 그간 공백이 무색하게 멋대로 나를 자신의 클럽에 가입시켰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게 좋아. 누군가 덜미를 잡더라도, 관계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관계한 단어로 이름 짓겠어. 우리 셋이서 각자 생각나는 단어를 말하고 그걸 이어 붙이는 거야."

알트는 '위대한', 나는 '새앙쥐', 그리고 리즈는 '종격막'을 말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클럽을 제안한 것이 리즈였다.

언제든지 내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알트는 그 유혹에 대번에 넘어갔고... 그렇게, 나는 충실하게 그녀와 알트의 돌다리가 된 셈이었다.

"클럽은 널 위해 만든 거야."

아마릴리스는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너와 함께 있기 위해서. 그 여름 이후로 알트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어. 물론 지금은 그도 재미있는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그 말대로 그녀는 한시도 날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수상쩍게 여겼던 기억도 당연한 것이, 애초에 그녀는 대학 시절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 때문이야? 아니면 이름도 모르는 누이?"

리즈는 물었다.

"나도 너와 똑같아. 죽음 위에서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그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야?"

그녀는 들은 적 없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워? 왜 항상...."

"그만...."

나는 뒷걸음질쳤다. 리즈는 누구보다 날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대칭점으로 묶여 있었다.

우리는 거울처럼 닮았기에, 무자비하게 추한 속내를 밝혀냈다.

"왜 항상 죽으려고 하는 거야?"

...리즈는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가스등이 보급된 이후 도시의 야경은 이전과 많이 바뀌었다. 빛 속에서 여인은 전보다 아름답다.

"너를 데리러 왔어."

그녀는 말했다.

"어쩌면 아서도."

"어디로?"

"내가 왔던 곳. 뉴욕, 42번가."

나는 침묵했다.

"런던은 이미 회생하기에 늦었어. 반면, 미국에는 아직 기회가 남았어. 테슬라는 대단해.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고, 동부와 서부의 전신주가 이어지는 순간, 그가 구상하고 있는 대륙 전력망이 크게 진척될 거야. 머지않아 북미 전체가 전기로 보호될 거야."

그녀는 계속 말했다.

"웨스트 박사는 뇌 병리학에도 통달했어. 분명 네 뇌를 고칠 방법도 있을 거야."

"나는 멀쩡해."

불길한 직감이 떠올랐다. 어쩌면 희망차거나. 일생 구속해온 속박이 풀리며, 나의 의무가 여기서 끝난다는 직감이었다.

나는 늪에 발을 담갔다. 탐험가 시절에는 그런 일이 잦았다. 장화가 빠지면 다시는 건져낼 수 없었다. 나는 외다리니까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너는 날 언제나 거짓말로 대하지. 하지만 내가 너에게 말한 거짓은 하나뿐이야."

저멀리 검은 하늘이 붉어졌다.

날이 저물었다. 감수성에 젖은 내 또래 청년들이 황혼에 자기 처지를 빗대는 건 필연이었다. 대학 기숙사 앞에는 하루에도 두 번씩 우편부의 마차가 짐을 실어갔다.

우리는 그날 석양 앞에 있었다. 드물게도 알트는 없었다. 그보다는 리즈가 나만을 불러낸 것이다. 그녀가 일을 주도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 것."

그럼에도 눈이 마주치자, 나의 미약한 결심은 뿌리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굳건한 호의에, 두려움이 싹튼다.

'혐오스러운 아마릴리스.'

누구의 말이었지?

본 적 없이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름은 알지 못한다.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신화가 떠올랐다. 그리스의 신화였을 것이다. 꽃을 든 여인과, 거부할 수 없는 목동.

기억 속의 여인은 계속 말했다.

'그런 만큼 아름다워.'

"나는 널 사랑해."

그리고,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