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줄리엣의 증언
아, 왔습니까? 미안합니다, 이런 늦은 시간에.
하지만 제게도 여길 나갈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운신이 쉽지 않으시다던데... 과연 듣던 대로군요.
아니요,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기면 즉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이라서요.
하지만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절 찾아오신 건, 제 안배이기도 하지만 최선이니까요. 지금쯤 여러 궁금증을 품으셨을 겁니다.
제가 누군지, 어쩌다 자신이 여기 오게 되었는지, 비밀들이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
그는 어디 있는지.
그 모든 해답은 다시 문턱을 지나기 전에 알게 될 겁니다. 우선 답부터 드리자면, 그는 아직 런던에 있습니다.
이렇게 바로 답을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 생각보다 더 과정을 중시하더군요. 아마 저처럼 명석하지 않은 탓이겠죠.
그러니까 순서대로 경과를 설명하죠. 사실, 당신과 당신의 작은 협력자는 일을 꽤 잘해냈습니다. 하지만 바깥에 신경을 쓴 탓에, 가장 가까운 관계를 놓치고 만 것이죠.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의 얘기로 시작합시다.
어린 소녀, 줄리엣 말입니다.
... ... ...
... ...
...
나는 매일 핏빛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색맹이다. 눈에는 오직 붉은색과 검은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문장이지만 꿈은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는 걸로 시작했다.
옆 건물의 불길은 당장에라도 옮겨붙을 것처럼 창 너머로 으르렁대고, 항상 영악한 동생들은 순한 양처럼 울면서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왕초를 찾았다. 미덥잖은 자이지만, 우리 중에 유일한 어른이자 살아가는 요령으로 가득한 외눈박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항상 애지중지하던 궤짝도 함께 사라졌으니,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망설이는 동안에도 열기는 차츰 가까워졌다. 그때 처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작정 바깥으로 나왔다.
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평소보다 험상궂은 어른들은 연장을 든 채 몰려다니며, 거리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이 번갈아 터져 나왔다.
"숨어 있으면 괜찮을 거야."
내가 침착하게 말하자, 동생들은 그것만으로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해. 누구라도 좋으니까, 한 사람이라도 어른이...."
누군가 말했다. 나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분해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였지만, 물건이나 훔치는 나와 달리 신문팔이 일을 하는 소년이었다. 나처럼 고아면서 그런 번듯한 일을 할 수 있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어쩌면 도와줄 사람을 하나 알아."
솔직히 그와는 친하게 지내질 않았다. 같이 살면서 대화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그 말은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이런 상황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고아를 돕겠다고 자처하는 어른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소년은 사라지고, 나는 동생들을 이끌고 숨을 곳을 찾았다. 으슥한 골목은 몸을 숨기기에 제격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숨을 돌렸다.
그때였다.
불꽃이 번쩍이며, 사방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우릴 감싸준 그림자는 폭발의 잔광에 벗겨지고 말았다.
빛 속에서 어른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장한 병정이었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숨은 골목으로 차츰 가까워지고, 나는 속으로 무사하길 기도했다.
하룻밤의 꿈에서도 신은 들어주지 않는다.
매번 여지없이 그들은 날 발견하고, 악마 같은 얼굴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잠은 늘 거기서 깨었다.
옷과 이불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고, 서늘하게 식어가는 등판에서 오한을 느꼈다. 악몽이 쫓아올세라 조심스럽게 들춘 커튼 밖에는 평화로운 밤거리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동생들의 코골이를 들으며, 등을 굽힌 채 애써 일출까지 시간을 지새우곤 했다.
내게는 부모가 없다. 그 의미를 온전히 아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물론 내가 여기 있으니까 오래전에는 있었을 테지만, 얼굴과 이름조차 알지 못하니까 실감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저 근처의 파리처럼 하수도 으슥한 곳에서 습기와 악취의 입자가 한데 뭉쳐져서 태어났다고 하는 편이 더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런던에서 나 같은 고아의 운명은 대개 뻔한 것이었다.
교구의 후견인은 인신매매범이라 조롱받기 일쑤였는데, 길가에서 고아를 보면 혈안이 되어서 잡아다가 구빈원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후견인 자격을 유지하기 위한 후원을 감면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끌려간 아이들은 헝겊보다 조금 나은 옷을 입혀지고, 쥐 미끼로도 쓰지 못할 음식을 먹으며, 공장이나 도제로 팔려갈 때까지 모진 학대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운이 좋거나, 눈치가 빠른 아이들은 그런 비참한 운명을 피해 갔다. 그들은 길거리 자유의 투사가 되어, 남들 몰래 재산을 평등하게 분배하거나, 인간의 원초적인 동정심을 이끌어내는 전문 업무를 도맡게 되었다.
어쩌다 잡혀서 몰매를 맞아 죽기 전까지는 적어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이 경우였다.
우리 왕초는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일하지 않고 술을 마실 방법을 궁리한 끝에 두 가지 해답을 얻었다. 하나는 이빨을 뽑고 그 사이로 흐르는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자신의 피에서 술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대신 일해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고아들을 데려다가 숙식을 제공하고, 그들이 벌어오는 돈을 자신이 관리하기로 했다.
정말로 그가 이빨을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아를 데려다 키우려는 계획은 성공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남았다. 비록 할 줄 아는 일은 도둑질과 동냥뿐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원래 이름이 없었지만, 불쌍하다며 왕초와 친한 매춘부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모두 그녀의 손님을 본뜬 것이었고, 나는 차마 내 이름의 출처를 묻지 못했다.
그만큼 허술한 관계였다. 평생 이어지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끝은 상상보다 훨씬 비참한 형태로 다가왔다.
런던이 불타고, 모든 게 바뀌었다.
시에서 운영하던 고아원과 구빈원은 모두 문을 닫았다. 고아를 잡겠다고 덤비는 교구 후견인은 없어졌지만, 이제는 순경이 그들을 끌고 갔다.
헛소문은 아니었다. 나도 그런 광경을 한두 번 보아서 사실이란 걸 알았다. 불쌍하게 끌려간 아이의 운명이 어찌 되는지는 소문뿐이었다.
배에 태워져서 죽을 때까지 혹사당하다가 죽으면 바다에 버린다든지, 미국에 노예로 팔아넘긴다든지, 출구 없는 공장에서 평생 일해야 한다든지, 여러 가설이 있었지만, 내가 듣기에는 감옥 죄수들에게 던져줘서 뼈만 남기고 잡아먹힌다는 이야기가 제일 신빙성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린 다시금 운이 좋았다.
우리는 필레몬 허버트라는 신사에게 거둬졌다.
대체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몰라도, 그 아이가 죽고도 아저씨는 군말 없이 우리 다섯을 떠맡았다.
그것과 별개로, 아저씨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비록 아는 어른이라고는 왕초뿐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저씨는 너무 수상쩍은 사람이었다. 다리가 하나 없는 점은 문제랄 것도 없었다.
가슴 따뜻한 미담을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예컨대, 어른임에도 우릴 보자마자 때리려 들지 않는다든지, 갑자기 울면서 소리 지르지 않는다든지,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다든지, 헌 옷이 아닌 새 옷을 사온다든지 하는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그것도 이상하지만.
내 말은 조금 더 괴담 같은 것이었다.
밤에 수다 떨 만큼 체력이 남아 있다면, 서로 겁주려고 머리맡 너머로 보내던 온갖 소문, 심술궂은 왕초가 잠자리에 들이닥쳐서 잠들지 못하게 늘어놓던 온갖 괴물과 그림자에 관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아저씨가 뭔가 수상한 일을 하고 지내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추측에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그의 주변인부터 얼마나 엽기적인지!
그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사실 아저씨와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의 절친한 친우라는 프랑크 백작님의 저택에서 보냈다.
"저택에는 괴물이 산다."
그게 처음에는 겁주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한 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저택은 괴물로 가득했다.
가정부 마리는 인형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지만,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인형 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녀가 저택 사람 중에 제일 낫다는 것이었다!
악몽을 꾸게 하는 목소리는 둘째치고, (사람이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면) 마리는 정말 상냥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무섭지만, 그럴 때는 보통 우리 잘못이었다.
끝내 동생들이 그녀를 따르게 된 것도 이해는 되었다. 지금에는 오직 나만이 그녀를 피했다.
괴물은 더 있었다. 마지막까지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은 집사 노인은 시체처럼 녹아내린 얼굴을 가졌으면서, 목 아래는 거리의 어떤 성인보다 크고 튼튼했다. 그를 볼 때마다, 내가 두 구의 시체를 기워 붙이는 끔찍한 장면을 상상하는 건 불가피했다.
시체라고 하니 이런 일화를 빼먹을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짧은 인생에서도 두 번째 가는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폭풍우 치는 밤이었다.
처음에는 비바람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겁먹은 와중에 조심스럽게 현관 쪽으로 나가 보았다.
현관에는 집사와, 시체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핼쑥한 남자가 축축한 코트를 짜내고 있었다.
"예상이 틀어졌습니다."
남자는 겉보기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빗물이 들어가 버렸어요. 이래서는 오래 보관할 수가...."
"주인 어르신을 깨울까요?"
"아니요. 대신 힘 좀 빌려주시죠. 조심히, 배열이 틀어지지 않게."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묵직한 포대를 끌고 복도를 걸었다. 나는 겨우 비명을 참고, 그늘에 숨어서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완전히 지나가고, 나는 겨우 다시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코끝을 찌르는 악취에 헛구역질하고 말았다.
냄새는 포대가 지나간 바닥에서 났다. 좋게 보아도 빗물 냄새는 절대 아니었고, 도살장 골목에서 나온 쓰레기 더미에서 날 법한 그런 악취였다.
나는 두 사람의 행방을 눈으로 쫓았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찢어진 포대 사이로 흘깃 빠져나온 사람의 손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충격이 다 가시기 전에, 집사가 복도 한가운데에서 무언가 하더니, 벽이 열리며 둘은 그 안으로 사라졌다.
간신히 새집에 적응해가던 나는 다시 한 번 이곳이 괴물 저택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튿날, 그 남자는 자신을 '프랑켄슈타인 박사'라고 소개했다. 예상과 달리, 그는 아주 친절하게 우리를 대했지만, 나는 그 이면의 본성을 알았기에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 방심하면 언제 내가 포대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이들도 저택 최고의 괴물은 아니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우린 그를 괴물 백작이라 불렀다....
...아무튼, 우리는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한 사람도 잡아먹히거나, 지하실에 끌려가는 일 없이 말이다.
"여기가 너희 집이다."
아저씨는 긴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한 번은 마리와 대화하는 걸 엿들었는데, 그녀가 질색할 때까지 말을 이어나갔으니 말이다.
내 예상이지만, 그는 우리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분명 빚지고 있는 건 우리였기에,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말 안 듣는 다섯 아이를 돌보는 일은 불쌍한 마리에게 전담되었다. 당연히 그녀 혼자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맏이인 내가 그녀를 돕게 되었다.
"월터? 월터 어딨어? 씻겨야는데."
"아까 나가던데."
"뭐? 왜 그걸 보고만 있었어?"
"내가 걔가 씻어야는지 어떻게 알아."
"당연히 씻지, 바보야! 걔 머리에 이가 잔뜩 있단 말이야!"
"이는 누구나 있거든?"
"나는 없어."
"원래 있었잖아."
"그건 옛날이고!"
"줄리엣 머리에는 이가 산대요."
"너 잡히면 죽어!"
프레디는 잽싸게 뛰어서는 사라졌다. 나는 바로 뒤쫓았지만, 옛날부터 발 빠르기로는 당해낼 수가 없는 아이였다.
나는 평소에 간 적 없는 골목까지 가서는 발을 멈췄다. 어차피 돌아와야 하니까 그때 가서 혼쭐을 내주면 될 일이었다.
"야."
누군가 내 쪽을 향해 불렀다. 거리의 아이들과 엮여서 좋은 경우가 없었다. 나는 떠나려고 했지만, 그들이 조금 더 빨랐다.
"들렸잖아, 무시하지 마."
입고 있는 옷은 깨끗했다. 물론 프랑크 저택에서 맞춘 것보다는 못했지만, 그만한 부자와 비교하는 게 잘못이었다. 이들은 충분히 유복한 집안의 소년들로 보였다.
"...뭔데?"
"너, 저 집에 사냐?"
나는 그들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끄트머리에 아저씨의 집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우와, 더러워."
아이들은 나를 둘러싸며 더럽다, 더럽다며 연호했다. 왕초와 살 때면 몰라도, 지금은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하나도 안 더럽거든?"
"저기 절름발이랑 살잖아."
아저씨의 얘기였다. 나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야!"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에 화낼 생각조차 잊고 말았다.
"같이 살면서 절름발이가 아프다는 것도 몰라?"
"뭐?"
"열병이래, 열병. 걸리면 뇌가 녹아버린댔어. 엄마가 저 근처에는 가지도 말랬거든. 그러니까 더러운 거지."
나는 잠깐 입 다물었다.
"그러니까, 나하고 닿으면 너네도 병이 옮는 거지? 병균이랑 뽀뽀할 사람?"
"어? 야, 얘 미쳤어! 튀어!"
내가 무작정 덤비자, 아이들은 진짜 놀랐는지 창백한 얼굴로 달아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병이 옮는다든지 하는 괴롭힘은 옛날부터 흔히 당하던 것이니, 이제서 일희일비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약해빠진 도련님들의 괴롭힘에 당해줄 생각은 추모도 없었다.
'그래도 월터는 걱정이야. 워낙 어리니까 맞고 다닐지도 모르지. 물론 그때는 애들이랑 가서 때려눕히면 되겠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 프레디와 월터가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긴커녕 내가 없는 틈에 토미와 도로시까지 뛰쳐나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집에는 외출할 수 없는 마리만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집안에서는 말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이 아닌가.
마리의 손님?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장난기가 돌았을까. 아니, 아마 그보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집 밖으로 조심히 나와서 외벽을 타고 걸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커튼이 두꺼워서 훔쳐 듣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역시 제 예상대로예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여자였다.
"어쩌죠? 이 일을 주인님한테 말해야 할까요?"
마리였다. 절대 헷갈릴 리 없는 음성이었다.
"아니요, 아니요! 절대 안 되죠! 여관에서 있던 일을 미뤄봐서는 교수님에게만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게 뭔지 알 때까지 본인한테 말해선 안 돼요."
"하지만 이대로 두기에는 너무 불안한걸요."
속삭이는 소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점차 흐려졌다. 좀처럼 잘 들리지 않아서 답답했다. 나는 몸의 자세를 다시 잡았다.
그때였다.
"주인님은 기억을 잃고 있다고요."
마리의 말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지금 얘기는 꼭, 꼭, 아까 아이들이 괴롭히면서 한 말이랑 비슷하지 않은가.
"될 수 있는 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면 될 거예요. 대학에서는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뭔가 알아낼 때까지만이요."
"하지만, 주인님을 속일 수는...."
"마리 씨, 그 주인님을 위한 일이잖아요."
마리의 음성은 낮아져서는 이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낮은 속삭임만 오가는 중에, 손님의 마지막 문장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거즘맹세해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도 약속을 함께하게 되었다. 나는 대화의 뜻을 다 알지도 못한 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손님은 그 뒤로도 몇 번 조심스럽게 찾아왔고, 우리는 모두 마리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는 창문을 닫고 조용히 대화하는 통에, 그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동생들도 마리가 아저씨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사실 이 부분은 마리의 당부도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손님이 온 걸 아저씨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런던에서 산다는 건, 비밀을 지키는 법을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고아 출신치고는 그 의무를 꽤 잘 수행했다.
나 빼고는....
한 번 의식한 후부터, 아저씨의 이상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보다 더 자주 깜빡하기 시작했고, 차를 전보다 자주 마셨다.
가끔 할 일이 있다며 밖에 나가려고 하면, 마리가 말을 걸어서는 까먹을 때까지 상대했다. 그러면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에 돌아오곤 했다.
아저씨보다 마리를 더 따르는 동생들은 무작정 그녀를 도왔지만, 나는 좀처럼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건 속임수나 다름없었다.
이러다가 들킨다면? 아저씨가 마리를 미워하게 된다면?
마리는 괴물이다. 밖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게 분명했다. 쫓겨나면 분명 죽고 말 테지. 삶과 죽음에 관한 막연한 불안감은 나날이 비대하게 성장했다.
결국, 어느 날, 나는 참지 못하고 돌려 물었다.
"거짓말은 잘못된 거죠?"
"그래."
아저씨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잘못을 저지르면 많이 혼날까요?"
그러자 그는 엄격한 말투로 고했다.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숨길 엄두도 내지 마라. 이래 봬도 나는 꽤 유명한 추리관이거든. 잘못을 숨긴다면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허풍이 아니었다.
아저씨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맞추곤 했다.
비록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다고 해도, 자택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 맞추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면... 그러면....
거기까지 착상이 닿자, 내 얼굴은 새파래졌다.
이대로면 마리가 죽고 만다!
몇날 며칠을 궁리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상의할 수 없었고, 뭘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그 순간, 나는 기도했다.
한심하게도, 떠올린 것은 하느님도, 왕초도 아니었다. 나는 이미 누구도 도울 수 없는 황량한 유령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도움이 필요해. 누구라도 좋으니까, 한 사람이라도 어른이...."
사실, 나도 그 유령에게 구해지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