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윌슨의 수사
런던이란 도시는 특이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도시가 되곤 하죠. 역사상 이렇게 다양한 군상이 얽힌 도시는 없었습니다.
저에게 런던을 묘사하라면, 거미집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어디로든 이어져 있는 것이 적격이죠. 그런 연유로, 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도시의 속속들이를 모두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입체적인 구조인 만큼, 이 도시에서는 양지와 음지의 구분이 없는 겁니다. 게다가 최근은 그런 현상이 서서히 심해지고 있죠.
그래서인지 그 이름이 나왔을 때는 조금 놀랐습니다.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큰 사고를 칠 거라 짐작하고, 미리 뒷조사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이어져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죠.
방금 거미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거미란 정교한 설계자입니다. 적어도 런던 도시 설계자보다는 영리하죠. 어느 방향으로도 최적의 경로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중심을 두고 실을 짜지요.
중앙에 가까울수록 밀도가 올라갑니다. 정보는 난립하고, 길은 난해하게 바뀌죠. 그런 의미에서 그분께서 발이 넓다는 뜻은 중앙에 가깝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진정 흥미로운 점은 거미집의 중심입니다. 대체 런던의 심연에는 어떤 양분이 묻혔기에, 도시에 이만한 악이 싹틀 수 있었을까요. 그분이 이를 수 있을까요? 아니겠죠. 당연히 제가 먼저 밝혀낼 테니까요.
이야기가 새었군요. 밤이 깊습니다. 여름에는 해가 이르게 뜨죠.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두릅시다.
... ... ...
... ...
...
페터 국장은 실각했다. 그 사실은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예컨대, 후임으로 온 차기 수사국장은 유약한 인물이었다. 영 서장의 끄나풀이었지만, 등불파는 아니었다. 그는 시대에 찬동하거나 반대하기에는 너무 흐릿한 존재였다.
예컨대, 범죄수사국 부서는 해체되었다. 형사는 경찰과 같은 시설을 사용해야 했고, 환한 조명 아래에는 어떤 비밀도 존재할 수 없었다. 수사국의 무수한 비밀 수사가 적나라하게 공개되며 질타받았다.
예컨대, 범죄율은 크게 줄었다. 하찮은 잡범마저 지역 재판소에 끌려가서 처벌받았다. 반면, 심대한 강력 범죄가 늘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의 면적은 줄되, 그만큼 선명해지는 게 자연 섭리였다.
예컨대, 경찰들 눈에서는 안광이 흐르게 되었다. 몇몇은 밤에 조명이 없이도 순찰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진담인지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예컨대,
"미안하지만,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게."
예상과 달리, 충격은 크지 않았다.
"해고 통지입니까?"
"아니, 자네에게는 공적이 있어. 서장님도, 경찰청장님도 원하지 않아. 봉급은 계속 나올 거야."
"그러면."
"내 말은, 앞으로 일하러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네."
나는 입술을 비볐다. 말은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목에서 나왔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걸, 꼭 내 입으로 들어야겠나?"
국장은 안경을 벗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볐다.
"정년 앞둔 노인을 더 괴롭히지 말아 주게. 나는 자네와 대면하고 있는 것만으로 힘들어."
나는 국장실에서 나왔다.
벽면에는 거울이 걸려 있었다. 본래 국장을 만나기 전에 복장을 정돈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추악한 괴물만이 갇혀 있었다.
'자네 모습을 보게. 정상적인 사람인지.'
한쪽 눈이 우물거렸다. 그곳에 이빨이 자란 것은 최근 일이었다.
'수사국에는 무엇보다 신뢰가 필요해. 괴물을 기른다는 여론까지 감당할 수 없네. 그게 경찰청장의 뜻이네.'
섣불리 정치에 손댄 대가로, 나는 그 말이 옳다는 걸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마디의 반론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르는 괴물인가?"
갑자기 이가 시렸다. 하지만 어느 이가? 그 의문에 이르자, 나는 형사복을 벗었다.
앞으로는 시간이 많으니, 무얼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도 아주 많았다.
하루 대부분은 침대 위에서 보냈다.
이전에 수사 중에 사산한 태아를 본 적이 있었다. 아이는 웅크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굽은 등은 극심한 성장통을 견뎌내기 위함이다.
나는 태아처럼 무릎을 감싸고, 우화를 기다리는 고치처럼 자신을 소우주 안에 가뒀다. 변신은 고통스럽다. 나날이 몸이 변해가고 있었다.
세 번째 이빨은 우화의 증거다.
내가 몸으로 체득한 지식이었다. 생피 아래로는 무수한 이빨이 바글거리며 자라날 기회를 엿봤다. 작은 생채기조차 기회였다. 밤마다 피가 흐르고, 아침이면 이가 자라 있었다.
이빨은 무자비한 성장이다.
변화는 언제나 통증과 함께했다. 아침마다 밤새 흐른 피와 고름으로 축축한 이불보를 갈았다. 도축장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악취 때문에 창을 열면 이웃의 불만이 쇄도했다.
그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었다.
이미 무수한 이가 자란 나는 어제와 같은 나인가? 설령 그렇다 한들, 내일 새로운 이가 자란 나는 또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또한, 변화는 불안이었다.
용맹하던 나는 꺼지고, 밤마다 내일이 두려워 울며 떠는 나만이 남았다. 공포를 아는 것도 변화의 일부일까. 모든 이빨이 다 자라고, 나는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잠들지 못하는 날이면, 여러 손님이 내게 찾아와서 속삭였다.
'네 모습을 봐라.'
부패한 해저인이 물장구치며 말을 걸었다. 입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창밖에는 뒷골목의 야수가 지킬 박사의 얼굴로 문대며 뻐끔거렸다.
'네가 우리와 다를 게 뭔지.'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며 불벼락이 쏟아지고 있었다. 침대 밑에는 내가 쏜 페터 국장의 시체가 펄떡이며 핏물을 흘려댔다.
나는 이제 입으로 식사하지 않았다.
열릴 리 없는 문이 열렸다.
누군가 찾아왔다는 사실은 알았다. 이 무렵의 권태는 유별난 수준이어서, 나는 눅눅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묵했다.
이웃들은 날 피하고 있었고, 타인이라면 부재를 깨닫고 돌아갈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틀어졌고, 나는 자신도 놀랄 만한 속도로 문앞을 가로막았다.
"가택 침입은 불법입니다."
"깜짝야!"
문 너머 손님은 면식이 있었다. 매춘부 제니였다. 그녀와는 런던 대화재부터 알고 지냈다. 그녀 외에도 당시 몇몇 여인이 왕립 학회의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고, 나는 사고 이후로도 안전을 염려해서 그들을 찾아다녔다.
다른 여인들은 런던에 오래 남지 않았다. 내 충고에 따라서, 혹은 두려워져서는 도시 생활을 포기하고 시골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런던에 남아서, 아직까지 내게 참견하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막지 못한 재난의 산 증인이었고, 모호한 도덕률의 경계선이기도 했다.
"있으면 대답 좀 해요."
"무슨 일입니까?"
"미안한데, 소개해줄 아이가 있어서요."
나는 애써 한숨을 참았다. 선의라는 걸 알았기에 불만을 내색할 수 없었다.
"중매입니까? 됐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전부터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다. 어째선지 그녀는 내 업무량을 걱정했고, 여자가 생기면 과로를 덜 할 거라는 식으로 중매를 제안해 왔다.
미안하지만, 불필요한 참견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가 뭔가 말하려던 중에 갑자기 문이 열렸다. 예측하지 못 한 순간이었기에, 문을 잡고 있던 손은 순순히 끌려가고 말았다.
"앗, 잠깐, 얘!"
문틈 사이로 나타난 것은 소녀였다. 나는 놀라서 휘청였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드문 아이였다. 요 며칠 거울은 보지 않았지만, 내 몰골이 어떨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내 모습에도 소녀는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순진무구한 눈으로 응시해 왔다.
내가 느낀 신비한 감각의 정체는 간단했다. 소녀는 오직 눈만을 마주쳐왔다. 온몸에 자란 무수한 이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쾌한 시선이었다.
나는 여러 질문을 떠올렸다.
'너는 누구니? 내가 무섭지 않니? 놀라지 말렴. 나는 이렇게 보여도 멀쩡한 사람이란다.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고.'
내가 이렇게 말주변이 없었던가. 차마 부끄러워서 입 밖에도, 목 밖으로도 꺼내지 못할 말들이었다.
"괜찮아, 이분은 생긴 건 이렇지만 형사님이야."
부연 설명한 것은 제니였다.
"저는 줄리엣이에요."
소녀는 말했다.
"형사님이 절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야기는 들어보마."
"그리고요?"
나는 무엇을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줄리엣이 물었다.
"이름이요."
"피터 윌슨."
평범한 통성명조차 이렇게 힘이 들었다. 나는 다음 말을 망설였다. 변화는 불확실이다. 전에는 당연하게 하던 일들이 이제는 멀고 의심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무슨 이유로 찾아왔건, 나는 이제 형사, 아니, 인간조차 아니었다. 그런 내가 소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용기 내어 다시 줄리엣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껏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젠 형사가 아니야. 대신 널 도와줄 사람은 알아보도록 하마. 나는 경찰에 아는 사람이 많거든.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내가 해야 한다.
"윌슨 형사라고 부르렴."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인가.
둘은 집안에 들어오고 악취에 놀란 눈치였다.
다른 의미로 나도 놀랐는데, 둘이 보인 행동 때문이었다. 제니는 이불보를 물에 담가 핏물을 빼냈고, 줄리엣은 군말 없이 그녀를 도왔다.
묵은 공기는 창밖으로 빼냈고, 간단한 청소가 끝난 뒤에는 내 붕대를 새것으로 갈았다. 거즈를 벗기자 눈 대신 이빨이 나타난 것에는 아무래도 충격받았지만, 애써 싫은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듯했다. 줄리엣에 이르러서는 아예 별 감흥조차 보이지 않았다.
"치우고 좀 살아요, 사람이."
그 모든 마법을 부린 후에, 제니는 딱 한 마디 훈계했다.
결국, 본격적인 대화는 두 사람이 들어오고 한 시간은 흐르고 시작했다. 제니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지, 오직 줄리엣의 말을 듣는 시간이었다.
중간중간 흥분해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전달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녀가 아이다운 면을 보이는데 안심했다.
"필레몬 허버트라면, 그 영감님이잖아요?"
대화가 끝나고, 제니는 뒤늦게 놀라며 물었다.
"아저씨를 알아요?"
"안다고 할까. 말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그녀는 내게 절실한 시선을 보냈다. 두 사람이 만난 과정을 아는 나는 그 시선을 이해하고 대화에 끼었다.
"그것보다 선생님의 기억에 이상이 생겼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일전 뇌가 녹는 열병에 대해서는 조사해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수사국 형사가 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입니다. 최근 소문이 퍼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2년 전부터 발생한 병이니까요."
반응으로 보아 두 사람 다 몰랐던 사실인 듯했다. 나는 조금 더 부연 설명했다.
"그럼에도 지금껏 소문으로만 알음알음 알려진 이유는, 유명세에 비해 사례가 아주 적은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빈민가 중심으로, 확인된 사례도 기껏해야 백 명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적은 수 안에 선생님이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우연치고는 절묘하죠."
제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영감님이 그만큼 유명한 분이셨어요?"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알려져서 그렇습니다. 늘상 안개비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런던의 밤에서 그만큼 뚜렷한 실체를 가진 경우는 드무니까요.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런던 제일의 유명인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든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줄리엣은 대화 흐름이 종잡기 힘들었는지 살짝 집중력이 흐트러진 표정이었다.
"작년 9월,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조금 생각하고 정정했다.
"아니요, 사실 그리 닮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경 쓰던 사건이라 곧바로 떠올랐습니다.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몇 있어서 말입니다. 켄티시 타운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입니다. 당시 경찰에서는 아편에 취한 피해자가 길가로 뛰어들어 발생한 우발 사건으로 결론지었고, 끝내 가해 차량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잠깐 망설였지만, 나는 끝까지 말했다.
"피해자는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 왕립 학회 소속의 사회학자였습니다. 대화재 당시, 당신들을 속였던 그들이 맞습니다."
제니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예상대로였다. 의외였던 건, 줄리엣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대화재를 언급하자, 갑자기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누구나 흉터 한둘은 가지고 있을 만했다.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다만, 수상한 점은 피해자의 용태입니다. 아편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주변 증언으로 그의 행색이 얼마나 기괴했는지, 또 점차 그리되어갔는지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으로, 사건 전부터 박사는 집안에 제삼자의 존재를 느꼈다는 듯합니다. "
"똑같아...."
줄리엣이 낮게 중얼였다.
"점진적인 변화, 현명하던 사람에게 닥친 착란 증상, 그리고 본인은 알지 못하는 제삼자... 많지는 않지만 드문 공통점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정보가 부족했다. 줄리엣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허버트 선생님의 기행 정도가 다였다.
제니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 치며 말했다.
"형사님이 그,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알아보는 건 어때요?"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리 눈에 띄는 활동은 할 수 없습니다."
"아, 그래요...."
우리는 침묵에 빠졌다. 정리되지 않은 착상이 늘어진 후에 흔히 나타나는 적막이었다. 피부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새 이빨이 자라나려는 징조였다.
나는 말했다.
"결론이 났군요."
"네?"
제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재 가장 수상한 사람은 둘입니다. 가정부 셜리 마리와, 그녀와 접선하고 있는 협력자 말입니다. 우선 그녀를 붙잡죠. 목적이 일치한다면 협력할 수 있을 테고, 악의를 품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말은 쉽지만... 어떻게요?"
그녀는 여전히 당황한 채 물었다. 나는 의아하여 그녀를 응시했다.
"...왜요?"
"잊으셨습니까? 그게 제 업무입니다."
"아, 그러네요."
제니는 바람 빠진 포대 자루 소리를 내었다.
다음 날부터 잠복을 시작했다. 호언한 것치고는 쉽지 않았다.
나는 어딜 가나 이목을 끄는 외모였고, 그림자 속에 모습을 숨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불심 검문에 휘말리는 일도 여럿 있었으나, 운 좋게 그때마다 나를 아는 경찰이 있어서 모면할 수 있었다.
운 좋게 협력자가 내부에 있으니, 방법 자체는 단순했다.
나는 의심받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고, 그 협력자가 나타나면 줄리엣이 제보하는 것이었다.
제니는 생계 문제 때문에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만 내 쪽에 합류해서 지인인 척하며 시선을 분산시켜줬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라 물었더니, "그러게요." 하고 너털웃음 지었다. 전혀 대답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혹시 새 방법을 강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멀리서 누군가 달려온다 싶더니 줄리엣이었다.
전속력으로 뛰어왔는지, 그녀는 내 앞에 와서는 한참 헐떡였다. 내용은 얼추 짐작되었고, 나는 듣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지금이에요! 그 사람이 왔어요!"
그런 등 뒤로 줄리엣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협력자는 창문을 통해 집을 나왔다.
두꺼운 커튼 때문에 밖에 누가 있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말이다. 신중한 것치고는 덜미를 보이는 게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바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가정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는 그녀가 집에서 멀어질 때까지 뒤쫓았다.
시종 두리번거리며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바로 뒤를 쫓는 날 눈치채지 못할 만큼 허술했다.
나는 익숙한 지형이 나오자, 우회로를 통해 그녀보다 앞서 나갔다. 그리고 골목 벽이 기대서, 그녀가 돌아서 나타나자마자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뜻밖에도 가늘고 흰 손목이었다. 여인보다는 소녀라 부르는 게 바람직했다.
"우악!"
소녀는 특이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내 얼굴을 바라봤다.
"괴물!"
이렇게 직설적이면 도리어 상쾌했다.
상당히 놀라고 겁먹은 듯했지만, 내가 예상한 만큼은 아니었다. 어쩌면 런던의 소녀들은 감성이 유별난지도 모른다, 그런 영문 모를 감상이 떠올랐다.
"잠깐 이야기 괜찮습니까?"
"안 괜찮은데요!"
"해코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형사 윌슨입니다."
내가 신분을 밝히자, 소녀는 조금 침착해진 눈치였다. 그렇다고 해도, 온몸으로 경계와 불신을 숨기지 않았다.
"...형사님이 제게 왜요?"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필레몬 허버트 교수를 알고 있습니까?"
"아, 아니요, 하나도 모르는데요?"
거짓말처럼 서툰 거짓말이었다. 나는 무심코 손에 힘을 더 쥐었다.
"...아픈데요."
"미안합니다."
손에서 힘을 푸는 순간, 소녀는 벗어나고 도망치려 했다. 어째선지 그 당돌한 동작에서 내 기억이 번뜩였다.
"당신,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도망치려던 소녀는 순진하게 놀라며 발을 멈췄다.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보았다는 흐릿한 기억만 있었다. 바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금방 눈치챘다.
머리색이 달랐다. 전에는 찰랑거리는 금발이었는데, 지금은 짙은 흑발이었다. 어느 쪽도 염색치고는 색이 자연스러웠다.
"혹시 염색한 적이 있습니까?"
"와, 그건 되게 변태 같은 질문이네요...."
나는 무심코 인상 썼다.
"아, 미안해요. 그런 질문이 아니죠... 그러고 보면, 제가 어릴 적에는 금발이었다고 해요. 자라면서 머리색이 바뀌었다는데, 신기하죠?"
확실히 드물었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문제는 나의 기억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 기억 속 소녀, 리들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일이 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가만히 혼란스러워하자, 리들은 날 보며 기억났다는 듯이 말을 텄다.
"아,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인데요."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확신 없는 표정으로 쭈뼛쭈뼛 물었다.
"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뭔지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