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68화 (168/232)

§168. 앨리스의 비상 (1)

아마릴리스를 아십니까? 아름다운 꽃이죠. 화단이요? 그걸 보셨습니까? 관찰력이 뛰어나시군요. 예, 있습니다. 눈여겨보지 않고는 놓치기에 십상인 작은 화단이 건물마다 하나씩요.

대학의 건물은 수도원 시절의 모진 핍박으로 만들어진 요새입니다.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니만큼, 일말의 생기를 더해보고 싶었던 거겠죠.

아뇨, 현 학장 대리님 발상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죠. 누군가 눈치채기 이전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학장님이요? 재미 있는 발상입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한들 착상하는 걸 안목이라 부릅니다. 당신은 어쩌면 좋은 수사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탐정이든지요.

분명한 사실은, 교정에 화단을 만들도록 지시한 게 누구건, 그자의 관심은 떠났다는 것이지만요. 처음에 심었던 꽃 종자는 모두 시들었고, 이미 야생화뿐이 피어있지 않으니까요.

귀가 먹고 무심한 정원사는 틀에서 빠져나오지 않도록 쳐내는 일만 합니다. 그렇게 달리 누가 가꾸는 것도 아닌데 한 번도 시든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봐야만 아는 것도 있습니다. 화단의 꽃은 유난히 붉게 피는 점이요. 돌담에는 묵은 핏자국이 묻어 있다는 점이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불쌍한 앨리스.

... ... ...

... ...

...

'...네가 부탁한 물건은 찾아서 우편으로 동봉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걸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남들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네가 걱정스럽다....'

마음 속에 버짐이 피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불쾌감이었지만, 곧 피막처럼 표면을 덮어서는 긁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가려움이 되었다. 핀 것은 작년 봄이었지만, 눈에 띄게 자라난 것은 늦겨울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봄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앨리스 리들 양."

그리고 지금은 어두운 방에 앉아 있었다. 구속은 없었지만,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날 호명한 정면의 남성, 피터 윌슨이라 소개한 형사는 말했다.

"조금은 진정되었습니까?"

그는 사무적인 말투로 알량한 위로를 건넸다. 이 남자는 그게 역효과란 사실을 알까? 그가 말할 때마다 칭칭 둘러맨 붕대가 들썩였다. 아래에는 피부 외에는 뭔가 있을 공간이 없었다.

공포는 점차 비대해졌고, 그 이명은 호기심, 혹은 인간을 죽이는 열병이어라.

"저는 어떻게 되죠?"

내 입에서는 예상보다 차분한 소리가 나왔다.

"소문으로 들은 적 있어요. 올드코트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실종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요. 그들은 어떻게 되었죠?"

말하다 보니 점점 날 선 말투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싸늘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했다.

형사는 과묵했지만, 기압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어쩐지 나는 그가 침울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관해선 유감입니다."

"인정하는 건가요?"

"아니요, 아니요.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제 소행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 오해를 정정하자면, 저는 당신이 올드코트 재학생이란 사실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럼, 앨리스 리들이라서요?"

나는 곧장 정정했다.

"아니겠네요. 붙잡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 같았고."

뺨이 후끈해졌다.

"허버트 교수님의 건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어...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억지 부릴 상황이 아니잖아, 앨리스. 교수님이나 마리 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신변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지킬 의리는 없고.

가장 먼저 떠올린 이유는 인정이었고, 다음은 의무였다. 어쩌면 나는 필사적으로 내가 좋은 사람인 이유를 찾은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지만.

"우선 우리 사이의 오해부터 풀어야 할듯합니다."

"다짜고짜 이런 밀실에 끌고 온 것이 오해인가요?"

"듣기 안 좋습니다. 바깥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여기로 옮겼을 뿐입니다."

"애초에 여긴 어디죠? 무슨 냄새가... 꼭 시체라도 처리하는 곳처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체 처리장이군요!"

"자택입니다."

"아... 그래요."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문쪽에서 부산한 인기척이 들렸다. 상상처럼 험상궂은 인상의 거한들... 은 아니었고, 두 명의 여자였다. 한 명은 지친 얼굴을 한 연상 여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린 소녀였다.

여인은 초면이었지만, 아이 쪽은 알았다.

이름까지는 몰라도, 교수님 댁에 사는 다섯 아이 중 하나였다. 나의 영특한 두뇌는 순식간에 모든 결론을 도출해냈고, 더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었다.

비록 이토록 공통점 없는 이들이 의기투합한 경위는 신경 쓰였지만, 적어도 어떠한 악의를 지닌 집단이 아니란 게 분명해졌다.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내가 무심코 흘린 숨인 줄 알았는데, 실은 윌슨 형사 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어쩌면 그도 나만큼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의 괴물, 혹은 형사, 괴물 형사가 단번에 친근하게 느껴졌다.

"제가 중요한 순간을 놓쳤던가, 방해했나요? 둘 다 아니면 좋겠는데."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먹했는지 여인이 능청떨었다.

"과연, 알겠어요. 뭘 그렇게 어렵게 물으려 했는지."

정신적 여유를 회복한 탓인지, 살짝 우쭐한 목소리가 나왔다. 윌슨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대신 입을 꾹 다문 탓인지 입술만 삐죽 나왔다.

"혹시 기억을 잃은 적 있나요?"

나는 가볍게 물었다.

"저는 있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제게는 사명도, 선의도 없어요. 그저 호기심이 다예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내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형체없는 생각을 문장화하는 일을 어려웠다.

착상에는 규칙성이 없었고, 무수한 형용사와 풍부한 표현력이 필요했다. 다행히 내게는 둘 다 있었다.

어떤 단어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거울. 플라밍고와 보낸 여름. 심장. 석탄 냄새. 검은 태양과 소방수와 기관장. 파란 장미. 내 키의 열 배는 되는 스톤헨지. 노스탤지어.

운 좋게도 나는 이런 이야기에 딱 알맞은 서문을 알고 있었다.

"황금빛 오후에...."

...나는 봄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보통은 평범하고 지루한 작업이라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지만, 그날은 두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일단 그때가 꽃향긴커녕 푸른 떡잎조차 찾아볼 수 없는 늦겨울이란 점이 그랬고, 앨리스가 궁상맞은 자세로 복도 한복판에 쭈그려 앉아 모든 작업을 했다는 점도 그랬다.

문학가들이 애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여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걸 설명하려면 올드코트 대학의 역사까지 거슬러 가야 했는데, 서문만으로도 지긋지긋한 설명을 솔선해서 듣고 싶어하는 괴짜가 있을 리 없다.(물론 로리나 언니 빼고. 언니는 항상 '예리코 지역 역사와 지리향토학의 상관관계' 따위의 지루한 책을 읽었다.)

그렇다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자니, 이야기 속의 내가 굉장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에 줄여서 설명하려 한다.

최대한 간추리자면, 내 방은 협소했다.

더 설명하자면, 남들은 4인실을 썼고, 나는 1인실을 썼다.

더 더 설명하자면, 대학 건물들은 겉보기보다 폭이 좁았는데, 족히 500명은 되는 학생을 쑤셔담기 위해 원래는 빈 공간으로 둘 만한 가장자리에도 방을 만들었다.

더 더 더 설명하자면, 그렇게 억지로 만든 방은 도저히 2명은 살 수 없었고, 1명이 살기에도 좁은 공간이었다. 오죽하면 수도원 시절의 징벌용 독실이라는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더 더 더 더 설명하자면, 명백한 헛소문이었다! 내 방이 다른 방보다 더 깔끔한걸!

더 더 더 더 더 설명하자면, 그만큼 좁은 방이었으니, 복작거리는 4인실에서 부대끼더라도 어느 누구도 그 방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 더 더 더 더 더 설명하자면, 앨리스 리들이라는 세상 물정 모르는 말괄량이가 홀로 방을 쓸 수 있다는 말에 껌뻑 속아 넘어가서는, 그게 왜 비어 있는지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덜컥 입실해 버렸다.

더 더 더 더 더 더 더 설명하자면, 본래는 1년마다 기숙사 각방은 재배정하지만, 요 토끼굴 같은 방에는 아무도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는 통에 그런 규정조차 특례로 쏙 빠져나가고 말았다.

결국, 나는 무식의 대가로 나는 3년을 고통받으며,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특별한 교훈을 얻었다.

이렇다 보니, 꼭 필요한 생필품과 교양을 위한 책 등을 비치하고 나면, 다른 계절의 옷가지나 쓰지 않는 화장품, 놀이용 카드, 장갑, 어머니께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구두에 바르라고 신신당부한 고약한 냄새의 식물 기름, 잔소리 한 묶음, 머리맡에 걸어둘 장검 따위는 도저히 쌓아둘 자리가 없었다.

거기서 용감한 리들 외 7인의 1인실 동지는 투쟁을 단행했다.(사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째선지 불려 가니까 내가 주모자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꾸준히 항의한 결과, 우리는 창고 방 일부를 개인 짐 보관용으로 쓰도록 허락받았는데, 다시 들어가려면 절차가 심히 복잡해서 자주 들락거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언제나 부재중인 경리실을 통해 열쇠 대여 신청을 해야 했고, 다음에는 가엾고 애교 많은 학생들을 보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감의 일정에 맞춰 동행해야 했다.

심지어 그녀는 우리가 꺼낸 짐을 보고 꼬치꼬치 따지거나 훈계하기까지 했다! 동지 중 한 명은 짐을 꺼내고 그 자리에서 압수당했다는 부당한 처사를 당하기까지 했는데 믿을 수 있는가?

하여튼, 그런 사정으로 계절이 바뀔 즈음에 옷을 꺼내려고 하면 늦었다.

나는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스웨터를 입고 다니거나, 반대로 겨울철에 반 팔로 벌벌 떨며 다니기도 했다.

그런 삼 년의 수행 끝에, 마침내 나는 늦지도, 크게 이르지도 않은 절묘한 시기를 학습하게 되었다. ...그런 줄만 알았더니, 사감이 어쩌다가 기분이 좋았는지, 그 해는 바로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내 쪽에서 나중에 가겠다며 심기를 거슬렀다간 무슨 고초를 치르게 될지 몰랐고, 가여운 리들은 올해도 이른 봄옷을 입고 돌아다닐 처지가 된 것이었다.

...하여튼, 나는 옷 상자를 통째로 들고 왔다.

그리고 방문 앞 복도에 던지듯이 내려놨다. 한 해 동안 숙성된 먼지가 눈송이처럼 뽀얗게 흩날렸다.

'이런.'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복도에는 나 혼자였다.

'앨리스, 너는 왜 항상 그러니?'

사실 그리 무거운 짐은 아니었지만, 얇은 팔이 부러지기 직전이라 호소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억지로 넣는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이런 지저분한 상자를 방 안에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구석진 복도 구석에서 처량하게 주저앉아 주섬주섬 옷가지를 가지런히 정리하던 나는 한 벌의 외투가 형편없이 해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오죽하면 내 옷이 아닌 줄 알았지만, 분명 내 것이었다.

일단 미리 변명하자면, 내가 또래에 비해 옷과 장신구에 관심이 덜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런던 애들보다 덜 세련되었다든가, 시골티를 내는 게, 굵은 글씨로, 결코 아니었다.

나는 학생이고, 알다시피 내 고향 옥스퍼드는 탄압 속에서도 청교도적 믿음을 지켜온 종교적 본산으로 지역 유지의 여식으로서 엄숙주의를 지키고자 하였고, 배움을 구하는 입장으로서 금싸라기나 뿌리고 다니는 일은 좀 아니올씨다 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도 같은 용도의 외투가 여러 벌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나는 흔히 말하는 단벌 숙녀였고, 외투가 더럽혀졌다는 뜻은 내가 올해도 벌거숭이 앨리스라고 놀림받는 처지가 된다는 뜻이었다. 리들 가의 영예를 걸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두 번 있었지만!

나는 탐정 흉내를 내기로 했다. 외투 표면에는 흙먼지가 잔뜩 붙어 있었고, 마른 잎사귀도 있었다. 올은 나뭇가지인지 뭔지에 걸려서 풀어져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지경까지 더럽힐 수 있을까, 풀밭에서 누워서 자기?

당연할 테지만, 옷을 그리 막 입고 다닌 기억은 없었다. 아니,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작년에는 없었다.

결국, 탐정은 명석하게 결론을 도출했다.

원인이야 어쨌건 이대로는 입고 다닐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추리에 따르면, 앨리스 리들은 수선이 서툴러서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그만큼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한심하지만, 이건 기숙사의 손재주 좋은 친구에게 부탁하거나, 집으로 돌려보내는 편이 나아 보였다. 물론 후자는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날 테니까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다면 친구에게 보여야는데, 거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나는 외투를 꼼꼼히 뒤졌다. 당연히 그런 것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물건이 들어 있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나는 평범한 옷 정리라면 찾지 않을 부분까지 세심하게 찾았고, 곧 뭔가 딱딱한 것을 붙잡았다. 단추나 주머니는 아니었고, 원래는 손이 닿지 않을 옷감 틈새였다.

의아하여 조금 더 찾아보자, 주변에 길고 날카로운 상처가 있었다. 다른 흠집과 달리 절단면이 깔끔한 게, 누군가 의도를 품고 날붙이로 그어낸 모양이었다.

점점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사이에 손을 집어 넣어봤다.

"아야!"

따끔거려 다급히 손을 빼자, 손가락 끝에 둥근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안에 들어있던 것은 지저분한 날붙이였다.

나는 왠지 모르게 당황해서 그것을 상자 안에 숨겼다가, 옷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서 문을 열고 방 안에 집어 던졌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일상적이던 복도의 풍경이 이질적으로 바뀌어 보였다. 침체한 공기는 점차 무거워지며 어깨를 짓눌렀다. 만약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입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안에는 칼을 꺼내고도 무언가 더 들어 있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더욱 신중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우려와 달리, 손에 잡힌 것은 서툴게 접은 종이다발이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었다. 전에 대학에서 미래에 보내는 편지 따위가 유행한 적 있었다. 그런 것의 연장선일 수도 있지 않은가.

현실을 외면한 낙관은 펼쳐 든 첫 장부터 부정당했다.

우선, 나쁜 징조 하나. 모르는 사람의 필적이었다. 나쁜 징조 둘. 내가 아는 내용조차 아니었다. 편지 따위는커녕, 시간순으로 나열한 일지처럼 보였다.

"예상 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열기구가 추락했다."

나는 나지막이 낭독했다.

"열기구가 추락한 원인은 돌풍이었다. 기구를 띄워서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예기치 못한 돌풍에 기구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아서의 예상과 달리, 이곳 지하엔 출처 모를 기류가 흐르고 있던 것이다."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낯선 문장이었다. 내용은 허무맹랑했고, 인물은 낯설었다.

"소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급격히 흥미를 잃었다. 여기 이른 경위야 어쨌건, 소설 원고라고 하면 대단한 비밀은 담겨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이걸 내 옷 안에 넣었을까. 나는 떨쳐내지 못한 불안감을 안고 계속 읽어내려갔다.

"...나와 앨리스는 앞으로 어찌할지 대화를 나눴다. 조작하는 동안에는 손이 바쁠 듯하니, 추후 앨리스를 통해 대필하고자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원고를 내려놨다.

솔직히 기분 나빴다. 누군가 나를 등장인물로 삼은 소설을 쓰고, 내 옷을 찢어 그 안에 숨겨두는 광경이 머리를 스쳤다.

혐오는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다음에 이어진 문장은, 어딜 봐도 내 글씨체였다. 내용은 이랬다.

'교수님, 절 앨리스라고 부른 적이 없지 않나요?'

그 뒤, 내가 적은 문장이 빈번히 등장했다. 나는 그 사람을 교수님이라 불렀고, 교수님은 날 리들이라 부르면서 적을 때만은 앨리스라고 했다. 이 당시의 나는 그 사실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일지 속에서 나는 교수님과 헤어졌고, 우리 둘 외의 누군가가 일지에서 교수님의 흉내를 낸 것을 내가 알아내며 끝이 났다.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 돌아가고 싶다.'

끝이었다. 소설이라면 최악의 결말이었다.

고원은 어디이며, 사라진 교수님은 어떻게 되었고, 가짜 교수님은 누구이며, 또 내가 어디로 갔는지 나와 있지 않았다.

'물론 무사했겠지, 나는 여기 있잖아.'

나는 홀로 생각했다. 엉뚱한 생각이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내용은 고사하고, 이런 문장을 적은 기억조차 없었다. 하지만 무시하기에는 더럽혀진 외투는....

그밖에도 문제는 있었다. 여기 적힌 내용이 어쨌건, 이 문서가 내 옷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여기 숨겼을까. 중요한 것이라면 자신의 손에 닿는 곳이어야 할 테고, 여기에 둔다면 반드시 내가 발견할 텐데 말이다. 게다가 학교 관계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짐일 텐데 말이다.

분명 상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조작은 없었다. 그 말은 즉슨 상자가 열렸던 것은 작년 봄이 마지막이란 뜻이었다.

추리극은 대단원에 이르렀다. 모든 정황 증거가 모였다. 정리하자면 범인은 나 말고는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언젠가 발견하도록 이걸 숨겨두었다.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교직원? 또 다른 1인실 학생들? 나 말고 대체... 정답은 금방 도출되었다.

나다. 나, 앨리스 리들이 했다.

그러지 않고는 부자연스러웠다. 일지 내용대로라면 이것은 원래 '교수님'이 가지고 있을 물건이었다. 그가 내게 건넸다고 하면 이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었다. 왜냐면 절반은 내가 쓴 것이니까.

하지만 그 대신 누군가는 이걸 옷 속에 숨겼다. 꽤 급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옷을 잘라낸 날붙이를 숨길 시간도 없어서 함께 넣고 말았으니까.

아마도 일지의 여정을 마친 직후일 것이다. 고원에서 탐험 중에 손상된 칼날은 제대로 손질도 하지 못해서 이렇게 더러운 채였으니까.

점점 분명해졌다. 이건 내가 빼돌렸다. 기억은 없었지만 모든 정황이 그랬다. 자, 이제 탐정의 추리쇼도 끝났으니 막을 내릴 차례였다.

추리극의 마무리는 언제나 범인의 동기로 끝난다. 나는 내게 물었다.

어째서? 아마, 잊지 않기 위해서.

왜?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란 게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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