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앨리스의 비상 (3)
그 뒤, 조사의 목적은 변질하였다.
나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 흥미는 교수님에게서 꽤 멀어져서는 감춰진 영국사의 이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답장과 부탁한 소포는 금방 도착했다. 어릴 적에 적었던 자물쇠 걸린 일기장이었다. 열쇠가 있는 위치도 함께 써서 보냈기에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설마 숙녀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분이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안에는 기억대로 여러 암호문과 자작한 단어가 담겨 있었다. 지금 봐도 참신한 표현이 많았기에 내심 놀랐다. 나 혼자 이 모든 걸 만들었단 말이야?
나는 이것을 마리에게 전해서 둘 사이의 암호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보안상의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그편이 기분이 더 살 것 같다는 이유가 더 컸다.
내용물을 다 정리하고, 그제야 나는 편지에 눈이 갔다.
'...네가 부탁한 물건은 찾아서 우편으로 동봉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걸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남들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네가 걱정스럽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언제나 우려가 담겼다. 나는 언제나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에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당신께서는 내 안에 담긴 동심, 조금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자기 파멸적인 모험심을 꿰뚫어 보셨는지도, 나조차 이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나날이었다.
아마 이때부터였으리라. 내가 이국의 풍경을 꿈꾸게 된 것은.
한편, 조사는 계속되었다....
어쩌면 칼리지에서 가장 값진 장소는 도서관일지도 몰랐다. 풍부한 장서량은 좁은 대학 규모를 넘어선 것이었다.
조사를 위해 그곳에 방문하자, 나는 즉시 계시를 받았다. 올드코트 대학의 앰블럼이 그려진 양피지가 길처럼 이어졌다.
사실 두려웠지만, 호기심이 앞섰다.
그 길을 쭉 따라가자, 평소 들어간 적 없는 도서관 깊숙한 곳까지 이끌렸다. 벽면 서고의 책들의 책등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이 그중 하나를 꺼내 읽었다.
"옛 새럼은 언제나 붉은색이었다. 푸른 피는 이곳에서 중화되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을 옆구리에 끼우고, 나는 다른 책을 꺼내서 펼쳤다.
"흑백작은 정복지마다 성을 세웠다. 그리고 옆의 자작나무에는 밧줄을 걸었다."
나는 못된 짓을 한 아이처럼 불안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책들을 되는대로 챙겨서는 그곳을 떠났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책을 쌓아두고 탐독했다. 그건 추잡하고 비밀스러운 역사이자, 광인의 폭력적인 망상과도 같았다.
어느 쪽이 되었건 지식이란 점에서는 같았고, 그렇게 나의 역사관은 서서히 변질해갔다.
나는 펜을 들어서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프랑스 앙주 지방의 백작, 훌크는 흑백작이라 불리며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비범한 능력으로 가문의 영광을 빛냈고, 후손들은 각각 이스라엘과 영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헨리 1세는 두 형제를 살해하고, 영국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그가 찬탈자 왕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또,
「옛 새럼은 헨리 1세의 직할령이며,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이다. 이 도시에서 많은 수의 귀족 가문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잊힌 가문까지 기억하는 역사가는 드물다.」
잠깐,
「헨리 6세는 전쟁 사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반쯤 광증으로 미쳐 있었고, 늑대 따위나 잡는 통에 백년전쟁을 패전으로 이끌었다. 말년에는 완전히 미친 채로 런던 탑에 갇혀 사망한다.」
마지막으로,
「헨리 6세 폐위 후 왕위를 두고 장미전쟁이 벌어진다. 푸른 피가 흘러서 강을 이뤘다. 제도에서 귀족은 절반조차 남지 않았을 때,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가 반란군 헨리 튜더를 격파하며 종전하게 된다.」
진짜 마지막으로,
「잔혹한 정책으로 정통성을 의심받던 리처드 3세는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자신을 플랜태저넷 직계라고 선포하였다. 이후 절대왕권의 시대로 이어졌다.」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대학'은 여러 차례 회동을 가지면서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지 않아, 외부에서는 '불가시학파'라 조롱하였다. 한편, 회담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일부 참가자의 회고록에는 '세계의 불일치성'이란 공통적인 표현이 남았다.」
거기서 나는 펜을 내려놨다.
좀처럼 이어지질 않았다. 모든 서사 사이에는 메워지지 않는 틈이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앨리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씩 차이 나는 일화야.'
결국, 발견한 책들은 우연히 거기 있었을 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산발적인 영국사 괴담 모음이었을까.
"아아!"
나는 머리를 마구 헝클며 낮게 괴성을 질렀다.(전에 옆방에서 항의가 들어온 뒤로, 나는 유령처럼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는 과감히 침대에 뛰어들었다.
잊고 있던 피로감이 삽시간에 몰려왔다. 통제되지 않은 지식과 망상이 앞다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욕구는 이미 호기심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그래.
갈증이다.
어느 날, 교수님의 집을 찾아가자, 마리는 갑자기 한 뭉치의 종이 다발을 내놓았다.
"주인님께서 어디선가 가지고 온 책이에요."
"어... 책 같이 생기진 않았는데요."
"그게, 베껴서 썼어요."
"필사요?"
"아, 네, 그거요."
그녀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비인간적인 움직임이라 살짝 위축되었다.
"사실 주인님이 책을 가져오는 일은 제법 있어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금 이상해서요. 아주 불경스러운 빛깔의 표지였어요. 내용은 읽을 수 없었지만, 한 번 봐주셨으면 해서요."
별로 의외롭지 않게, 마리는 글을 꽤 읽었다. 그런 그녀가 읽지 못했다고 하니 의아한 일이었다. 나는 그걸 받아보고는 곧바로 의문을 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나도 읽지 못한다.
"고대 언어네요. 아마 옛 프랑스어?"
나는 자신 없이 말했다.
"리들 아가씨도 읽지 못하시나요?"
"아뇨, 아뇨! 지금은 아니지만, 아마... 어, 읽을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더 자신 없이 말했다.
정말 다행히, 말대로였다.
대학 도서관을 전전하던 끝에, 나는 해당 언어를 번역하는데 도움 줄 만한 책자를 여럿 발견하였다. 문장이 길지 않기도 했고, 인명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아서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내용은 과연 충격의 연속이었다.
'앙주백伯 제프리 1세는 악마와 혼인했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책은 앙주 백작 가문의 일대기였다. 그러나 쓰이는 어휘가 경건하여 본문의 인물이 마치 신화 속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제프리 1세와 악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흑백작 훌크는 초인적인 힘과 잔혹함으로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이는 악마 혈통의 시작이다.
가문은 끊임없이 성장하였고, 핏줄은 유럽 전역에 흘렀다. 후손 중에 훌크 5세는 십자군 원정에서 비상한 능력을 보여 예루살렘의 왕이 되기도 하였고, 제프리 5세는 영국 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혼인하기도 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헨리 2세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영국의 왕조, 플랜태저넷의 시조가 되었다.
"즉, 영국 왕가는 악마의 핏줄이다."
"...그게 그토록 찾았던 이음매였죠."
길고 긴 이야기 끝에, 나는 다시 한숨을 돌렸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며 세 사람의 반응을 각각 살피었다.
경청의 태도를 가장 뚜렷이 보인 것은 제니였다. 그녀는 사실 부외자에 가까웠는데, 내가 그 사실을 확신한 것은 이러한 태도 덕분이었다.
줄리엣은 그녀 나름대로 회화에 속하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고, 또 흥미를 갖지도 못했다. 다만, 마리와 허버트 교수님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만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다.
그리고, 윌슨 형사는... 나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다. 이는 영국인의 나쁜 점이었는데, 누군가 감정을 드러내면 그 사람을 빤히 관찰하고 마는 것이었다.
"장미전쟁."
그는 이를 갈며 속삭였다.
"맞아요, 그게 계기였을 테죠. 다행히 대학 도서관에는 조사를 위한 도서가 충분히 있었어요. 조금, 부자연스러울 만큼요. 서적을 들여온 누군가가 이를 조사하던 것처럼요."
우리 대화는 완전히 비밀스러웠고, 조금 멋있었다.
"사실 조사 대부분은 거기에 투자했어요. 죄송하지만 교수님이 어찌 되었는지는 잘 몰라요. 다만, 교수님이 뭘 연구하고 깨우쳤는지는 대강 알았어요."
"그뿐입니까?"
"뭐가요?"
윌슨 형사는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시 뒤에 알았지만, 그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 짓자, 그는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당신의 기억 말입니다."
"아,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됐어요. 누가 제 기억을 없앴는지 알아냈거든요. 교수님이었어요."
나는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러자 윌슨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기이한 외모가 슬슬 적응되어 가던 찰나였기에 충격은 배가 되었다.
"악!"
"히끅!"
내 비명에 줄리엣이 놀라서 딸꾹질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계속하세요."
나는 정색하며 답했다.
"선생님께서 어째서 그런 일을. 그리고 어떻게?"
"아, 그것 말인데요. 실은 일지는 제가 찾은 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나중에 자세히 조사하고 안 거지만, 마지막 장 뒷면에 종이가 붙었다가 뜯어진 흔적이 있었거든요. 제게 없다면 누가 갖고 있겠어요? 혹시나 해서 마리 언니에게 부탁하니 찾아다 줬어요."
윌슨은 미간을 좁혔다.
"그 종이는?"
"언제나 들고 다니니까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기억보다 얇은 두께에 당황하며 손을 꺼냈다.
"어, 잠깐만요, 왜 한 장밖에 없지?"
모든 주머니, 그래 봤자 네 개뿐인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도 일지는 나오지 않았다.
"잃어버렸습니까?"
"아니요, 두고 온 모양이네요."
나는 반사적으로 거짓말했다. 어디선가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윌슨에게 그 사실을 고하기는 너무 무서워서 별수 없었다.
"이, 일단 이거부터 읽어봐요. 이게 마지막 장이네요."
그리고 그가 뭐라 더 묻기 전에 허겁지겁 일지를 떠넘겼다. 내용은 이미 암기하다시피 했기에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18
기구는 수리했다. 우리는 상승하고 있다.
현재 앨리스에게 대필을 시키고 있다. 사실상 이것이 일지의 마지막 기록이 된다. 우리는 둘 다 무사하겠지만, 다시 깨어날 무렵에는 아무것도 적지 못할 테니까.
나는 지식을 포기하는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 어째서 이런 비법을 외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호하지만 아마 이 공간에 빈번히 드나든 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이곳 드림랜드는 꿈에 걸친 공간이다.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 놓인 이 장소라면, 의식을 통해 오늘의 계몽조차 하룻밤의 악몽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최악의 수단이지만 별수 없다. 현실에서 에드워드와 결전을 앞둔 지금은 지식보다 정신을 온존할 필요가 있었다. 앨리스는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지만, 이제는 납득했는지 순순히 따라주고 있다.
다만, 그전에 나는 여기서 깨우친 바를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내가 가진 학자의 본성 때문은 아니다. 솔직히 여기서 알아낸 모든 지식을 영원한 망각 저편에 두고 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글을 남기는 내 마음을 이해할 자는 사도 요한뿐이겠지.
우선 고원에 관한 많은 의문을 풀어졌다.
어느 동물이 무슨 연유로 포식자 없는 이곳에 그리 많은 굴을 파놨으며, 어째서 모두 겁 먹고 숨어 다니는지, 열기구를 수리할 만큼 섬세한 소재는 무엇이며, 또 내가 만든 덫을 아무도 밟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이다.
그게 나타났을 때, 처음에는 일식으로 여겼다.
별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기에 문학가가 없다는 사실은 인류의 큰 손해임이 분명하다. 나와 같은 광경을 봤다면, 그는 분명 시대에 남을 문장을 짜냈을 테니 말이다.
아무리 푸념해도, 여기에는 늙은 탐험가와 어린 학생이 있을 뿐이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검고 길었다. 또, 무수한 다리를 가져서는 하늘을 횡보했다. 동작은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망델브로적 불가사의가 탄생했다.
별빛 아래 산맥이 겹겹이 물결쳤다. 하나가 지나고, 다른 하나가 잇따랐다. 그들이 지나간 바닥에는 생명은 사그라지고, 짙은 연기처럼 희뿌연 비단실이 깔렸다.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의 여로를 살폈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저편 지하의 벽면이 어떠한 형질로 되어 있는지, 그리고 또 어떤 식으로 쌓여가고 있는지.
그들도 우리처럼 상승하고 있었다.
그 목적지는 자명했다. 생물의 무관심한 듯한 눈에는 우리를 향한 질투가 담겨 있었으니까. 앨리스는 반쯤 실신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했다.
다만, 입이 닫히질 않았다. 분명, 비명하고 있겠지.
항로는 안정적이고, 별빛은 악의로 차 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앨리스에게 일지를 정리하게 시켰다. 그러니 이게 마지막 문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