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71화 (171/232)

§171. 이브의 해체 (1)

5월 20일, 런던의 아버지로부터 친필 편지가 도착했다.

9월 24일, 새벽에 집을 나선 아버지께서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9월 26일, 런던에 상경하였다. 방값이 비싸 노숙함.

9월 30일, 필레몬 허버트 남작님과 접선했다.

10월 1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쳤다. 증거가 더 필요함.

10월 20일, 수정궁에서 협력자와 접선했다. 집을 소개받음.

그리고,

11월 1일, 허버트 남작은 실종되었다.

...런던 겨울이 이렇게 쌀쌀한지 몰랐다. 또, 햇빛이 얼마나 차가울 수 있는지도.

내가 살던 브리스톨은 거친 해륙풍 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은 적이 없었다. 도시조차 그처럼 다정다감하거늘 거기 사는 주민은 또 어떻겠는가.

하지만 그토록 긴 체류에도 런던은 한 번도 웃어주지 않았다.

추위에 떠는 나를 햇살로 보듬어 주거나 눈꽃 향기로 안아주는 대신, 삭막한 음풍과 잔비로만 창문을 때렸다.

한편, 겨울이 가시고 봄에는 또 다른 일면을 보였다. 거리에는 장미 송이를 든 소년소녀가 행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꽃과 사람, 그야말로 사람 냄새라고 할 수밖에 없잖은가.

그럼에도 나는 옷깃을 여몄다.

봄이 다 왔지만 몸에는 아직 한기가 다 빠지지 않은 탓이었다. 작년 겨울 몸살에는 내 책임도 컸다. 늦가을까짓 썩 견딜 만했지만, 역시 겨울에는 두꺼운 옷을 구해야 했다.

이리 오래 체류할 예정은 아니었는데, 나는 생각했다.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할까.

어느 날, 근래 알게 된 이웃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런던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나름 신경 쓰고 있던 사투리 때문일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품었는데 나중에야 속뜻을 알았다.

"바쁘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당신, 욕먹은 겁니다."

런던에서 신세 지고 있는 아버지 지인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는 런던입니다."

별 다른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말은 심장을 날카롭게 도려내었다. 나는 여기서도 외부인이었다. 문득 정겨운 고향의 해안이 그리워졌다. 정처없는 시간, 장미 열한 송이가 시들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잠깐 점쳐보는 것만으로 우울해지는 상상이었다.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는 무정한 사람이었다.

좋은 곳에서 공부한 대단한 학자라고 벌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지역에서도 소문난 구두쇠라서 하물며 가족에조차 허튼 돈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 성격은 엄해 바라는 것이 많았기에, 우리 가족은 항상 힘들게 지내야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존경심조차 느끼지 않았다.

내 말은, 달리 누가 그러겠는가.

수선비조차 아까워서 물이 다 빠진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밥 한 끼를 얻어먹자면 도시 맞은 편까지 기꺼이 걸어갔다. 누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릴 적 나는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혹시 아버지에게 대단한 유산이 내정되어 있지 않은지, 아니면 달리 아무런 선택지가 없을 만큼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따위의 망상을 하며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병적인 절약조차 검소함으로 받아들일 만큼 어머니가 관대했거나, 사랑했을 뿐이었다. 지독한 열병이었다.

한편, 내가 종군 간호사가 되기로 한 데는 그런 부친에의 반항심도 있었다.

이웃에는 어릴 적부터 남자애들뿐이라 함께 부둣가에 다니며 일을 도왔는데, 그런 우리를 좋게 본 항만 감독이 꼬드기며 해군에 다리를 놔준 것이었다.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그 일로, ...꽤 놀란 듯했다.

그는 식사 자리에서 뭔가 말하려 하기도 했고, 끝나고도 망설이며 날 봤지만, 나는 일부러 못 본 체하며 무시했다. 이때 되돌려야 했을까, 지금도 가끔 스스로 물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가정을 수복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도망치듯이 런던으로 떠났다.

그 후, 나는 배를 탔다.

알다시피 뱃일이란 세상 어느 일과 비교해도 손색없이 끔찍한 일로, 어떤 여자도 자처해서 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물며 간호사 일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배 위에는 항상 아픈 사람이 있었다. 나는 꿋꿋이 그들의 곪은 피부와 토사물을 걸레로 닦아냈다.

손톱은 항상 갈라지고, 손에는 딱딱한 굳은살이 잡혔다. 물집이 생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햇볕에 탄 피부는 금세 거칠어졌다. 식사는 언제나 정량의 보존식과 죽이었고, 맛은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런 와중에도 날 꼬드기려는 남정네들이 몇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까탈스러운 여자는 아니었지만, 뱃사람은 정을 품기에는 최악이었다.

다행히도 그러한 남녀 정사는 엄격히 금지되었고, 함장에게 들키는 날은 경을 쳤기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토록 고되고 바쁜 나날이었지만, 놀랍게도 최악은 아니었다.

일은 금방 손에 익었고, 대부분 선원은 힘들게 일하는 간호사를 존중으로 대했다. 그러지 않은 나머지와 싸움이 붙은 적도 있지만, 몸소 주먹다짐으로 쓰러트린 후부터는 얌전해졌다.

1년 남짓한 첫 항해가 끝나고, 배는 고향 항구에 선착했다. 다른 선원들이 그런 것처럼, 나는 아무런 예정 없이 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고향 집에 귀가하자, 만사가 허무해졌다.

바뀌지 않은 것은 나뿐이었다

아직 작은 아이 같았던 동생은 결혼하고 따로 살림을 차렸다. 그 사이 내게도 몇 번 혼사가 들어왔지만, 뱃일을 한다는 소문이 나고는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어머니는 전보다 여위었고, 하루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셨다. 오랫동안 가족을 부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막냇동생은 각진 마름모 모양 돌이 되어 땅에 박혀 있었다. 듣자니 천연두였다고도 하고, 구토병에 걸렸다고도 하고,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 외로웠던 언니의 묘비가 전보다 들떠 보였다. 눈의 착각일까.

어쩌면 바다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을까.

나는 낙오되어 있는데, 세상은 진작 앞으로 떠난 듯했다. 하루아침에 보내는 돈이 끊기고, 밥을 축내는 처지가 되니 눈치가 보여 집에 머무르기도 힘들었다.

그럴 때 맞아준 것은 부둣가뿐이었다.

여기 시끄럽고, 고약하며, 누구나 바쁜 난장판에는 빛바래지 않은 유년기의 추억이 묻혀 있었다. 항만은 야간에도 쉼 없이 반짝였다.

많은 시간을 바다에 흘려보냈다. 그러기에 항구에서 오랜 벗과 재회한 일도 우연은 아니었다. 나처럼 배를 타는 대신 항만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누가 보아도 이 장소에 섞인 바닷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외부인이었다. 우리는 이미 남이었기에, 담은 회포는 풀어지지 않았다.

귀갓길에 눈이 부셔서 돌아보니, 수평선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바다는, 바다가, 바다만이 나를 불렀다. 그럼에도 나는 망설였다. 이번에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못할 일이 두려운 탓이었다.

집에는 아버지의 부고가 도착해 있었다.

밤까지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울었고, 그리고 나는 잠자리에서 조용히....

다음 날, 나는 가족을 설득했다. 가족이라고 해도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걱정해 아침 일찍 찾아온 남동생 하나가 다였다.

전날 밤 급조해낸 헛소리였다. 당연히 누구도 아버지의 명예 따위를 운운하는 내 말에 진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런던행 열차에 올랐다.

흔들리는 차창에 머릴 기대자, 거기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 마지막까지 미운 사람이었다. 잠들고 깨어나니, 거기에는 낯선 이국이 있었다.

런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밀물이 들어오는 도시, 그리고 아버지가 묻힌 땅.

상경하자마자 허버트 남작의 소문을 들었다. 운이 아주 좋았던 셈이다.

달리 기댈 구석이 없었기에, 나는 아무런 기대 없이 간략한 사연과 약속을 담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답장은 바로 돌아왔다. 런던에서는 이렇게 편지가 빨리 오가는가 했더니, 배달부에게 자신은 우체국 직원이 아니란 대답을 들었던 게 인상적이었다.

남작은 신비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탐정 소설에서 나올 법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은 탐정이 아니라 부인했지만, 그런 점마저 꼭 소설 속 등장인물 같았다.

성격이나 말투만이 그랬다면 단순한 괴짜였겠지만, 그에게는 실제로도 비범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아주 작은 단서에서도 대단한 진실을 발견했다.

문제는 조연의 역할인데, 나는 그걸 잘 수행하지 못했다. 남작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설명하는데 큰 관심이 없었고, 현장을 벗어나고 한참 뒤에 하나씩 정리해보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그처럼 비현실적인 존재의 가까이에 있으면, 점점 현실이 멀게 느껴졌다. 고민은 옅어지고 낙관이 싹텄다.

그리고, 남작이 실종되었다.

마지막 행적을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새로운 단서를 찾을 때마다 그가 런던에 없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졌다.

멀리 떠났다면 흔적이 남을 텐데, 기록은커녕 목격담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증발해버린 셈이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왕립 학회에서 손을 쓴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과 연루되어 잠적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여러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모두 막연하다 못해 몽상 같은 것이었다. 그처럼 이 무렵의 나는 현실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알았다.

이제 남작의 도움은 바랄 수 없었다. 런던의 물안개가 걷혔다. 환상에서 현실로,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탐문을 계속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는 자신 있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도시를 들쑤시고 다녔다. 그게 바로 실수였다.

이런 일에서 은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무모함의 대가를 치렀다.

가까스로 꼬리 문 단서가 자취를 감췄다. 소개를 받은 인물들은 잠적하거나 함구했고, 많은 문장이 하루아침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았다. 신변에 불쾌한 징조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침입의 흔적과 노골적인 경고문이 수시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날 괴롭힌 것은 불안감이었다. 아버지 때와 같은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편집증이 옥죄었다.

모든 성취는 사라졌고, 나는 목적 없이 체류했다. 서서히 뭘 찾고 있었는지 흐릿해졌다. 그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으니까.

긴 방황 끝에 도착한 장소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나는 창문을 밀어봤다. 잠금은 풀려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무도 살지 않았다. 전에 런던의 주택난이 심각하단 소리를 들었는데, 이 집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누가 들어오지 않았다.

전 주인의 끔찍한 죽음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선주민의 흔적을 없애려는 시도 자체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품이라 할 만한 물건은 모두 치워졌다.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공사했던 나무 벽도 모두 허물어졌다. 도끼도, 달력도, 그리고 벽면에 써둔 글자도 모두 새로 칠해 없어졌다.

액자, 나는 무심코 빈 공간에 눈을 던졌다가 실망했다.

한때 거기에는 일가족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와 일가족, 하지만 박사 외에는 모두 얼굴이 새까맣게 칠해졌다.

그걸 보고, 나는 꽤 태연했다. 아버지가 우릴 잊으려는 모든 시도가 아주 정당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남작으로부터 진상을 들은 후였다. 아버지가 그림에서 얼굴을 지운 것은 우리 가족에게 가해질 보복을 염려한 것이라고, 자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가족을 지켜낸 것이라 설명했다.

내 안에서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온전히 소화되지 않았다.

런던에서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가족을 그리워했을까, 이제는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방법은 하나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 내게 스스로 물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지 않고 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았다. 그게 이유였다.

집에서 나오니 어느덧 밤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천천히 거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가증스런 허버트 남작을 찾으시나요?"

나는 놀라서 돌아봤다가, 다른 의미로 깊은 들숨을 마셨다. 나와는 달리 꼭 인형처럼 예쁜 여자였다.

그렇다고 무결하지만은 않았다. 그녀의 눈짓과 손가락 끝에는 저마다의 사연 담긴 슬픔이 깊이 묻어났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흠이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제가 놀라게 했나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내 반응에 어떤 오해를 했는지, 그녀는 당황하며 사과했다. 심지어 그런 모습에조차 학식과 기품이 담겼다.

"저는 아멜리 에식스라고 합니다. 혹은 은랑백이라고도 불리죠."

"아, 네, 백작... 에식스 님?"

그녀는 대답 없이 싱긋 웃었다. 암묵적인 수긍이었다. 나는 단어 선정을 틀리지 않은데 내심 안도했다.

"하던 말을 계속해도 될까요?"

"네, 부디."

나는 바보처럼 기다렸다. 에식스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실수를 깨닫고 허겁지겁 답했다.

"아, 맞습니다. 필레몬 허버트 씨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그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나는 잠시 침묵했다. 방금처럼 질문받은 사실조차 까먹은 게 아니라, 어찌 답해야는지 생각하는 탓이었다.

우선 질문 의도부터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가증스런 허버트 남작'이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들이 별로 유쾌한 관계가 아닐 거란 짐작은 용이했다.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될 듯싶었다. 허나, 어수룩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상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러자 에식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건 애처로웠으며, 다른 한편으론... 반색?

"당신도 그런가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둘만의 이야기입니다.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다면 말씀드릴게요."

나는 다시 한 번 호흡으로 답했다. 곧장 대답하지 못한 건, 내게 바짝 달라붙어 속삭이는 그녀가 가련한 탓이었다.

"그러겠습니다."

"사실 저도 그에게 부친과 조부를 잃었습니다. "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게 사실입니까?"

"세간에는 정당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허버트 씨에게는 가끔 위험한 기색이 느껴지긴 했다. 주저없이 살인을 저지를 법한 군인 특유의 쇠 냄새 같은 것 말이다. 나는 그처럼 살벌한 기색을 비치는 사람을 함장 외에 알지 못했다.

다만 무고한 이를 해칠 사람이었나. 가까이서 봐오기로 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떠오른 잡념을 침과 함께 삼켰다.

부친을 잃은 딸에게 고인을 탓하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에식스는 첨언 없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 질문에도 답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말씀을 신중히 하시네요. 하지만 너무 신중한 나머지,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걸요."

나는 얼굴을 붉혔다.

"저는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직접 만나뵈니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침묵의 가치를 이해하는 여인은 정말 드물거든요."

"무슨 뜻입니까?"

"밀담하기에 여기는 너무 탁 트여있네요."

에식스는 머뭇거렸다. 나는 즉각 제안했다.

"아, 그러면 제 숙소에 가시겠습니까? 여기서 가까운 곳입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되물었다. 더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내가 앞장서자, 에식스는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가치 있는 침묵을 했다.

나는 멀어지는 거리를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건물이 사라지고, 길이 등선에 삼켜지며, 서서히 가로등 불빛이 일몰했다.

낯선 길목이다.

나는 왜 여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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