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이브의 해체 (2)
에식스는 방에 들어서길 망설였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짐을 밀어냈다. 추적이 시작한 이후,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만 해서 방 정리에 게을렀다.
그녀는 큰 용기를 낸 듯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방 중앙에서 자신의 어휘력을 시험받았다.
"그게, 개성적인 방이네요."
허공을 맴돌던 시선은 이내 수사적 종말점에 착륙했다.
"지저분한 방이라 죄송합니다."
"아뇨, 아니요. 실은 저는 벨기에 출신이라, 영어에 서툴러서요."
그녀는 급히 변명했으나, 내가 보기에 그녀의 영어 실력은 충분히 출중했다. 적어도 눈앞의 참상에 에둘러 표현하려는 노력은 더할 나위 없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나눌 대화에 비하면, 오히려 청결하죠."
에식스는 사람을 애태우는 화법을 알았다. 나는 점점 무슨 비밀스러운 용무인지 궁금해졌다. 그전에 우선 앉을 자리가 필요했다.
나는 재빨리 의자와 침대의 짐을 정리했다. 에식스는 진귀한 걸 구경하는 눈으로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대뜸 말했다.
"손이 빠르시네요."
"그렇습니까?"
"네, 저희 유모도 일을 잘하셨지만, 이 정도로 일손이 빠르진 않았거든요."
"아마 군대 습관이 남은 덕일 겁니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군대요?"
"고향이 바다라서, 해군에서 간호사 일을 했습니다."
엄밀히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그런 설명을 일일이 하는 의미는 없었다. 게다가 군인들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문득 까슬까슬한 손 거죽이 눈에 들어왔다. 에식스의 고운 피부와는 완전한 대칭점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매력이란 가지지 못한 여성성에 대한 콤플렉스일지도 몰랐다.
나는 괜히 손을 옷 속에 숨겼다.
"그거 굉장하시네요."
에식스는 짧게 감탄했다. 대부분 사람의 감상과 같았다.
"감사합니다."
나 역시 언제나 하는 대답을 돌려줬다.
자리가 정리되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마주 보는 형태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나무 침대에 걸터앉았고, 에식스는 제대로 나무 의자에 착석했다.
그녀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차폐물, 예를 들어 찻잔이나 빵 바구니 같은 게 없다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했다. 어쩌면 배가 고픈 걸까.
"우선은 선인께서 어떻게 타계하셨는지부터 설명해야겠죠."
에식스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말투는 꼭 남의 일을 읊는 것처럼 무뚝뚝했지만, 담은 목소리는 침울하다 못해 비통한 음색이었다.
"옛 새럼의 결투법을 아시나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들어보지 못한 게 당연해요. 영국 귀족사회, 그것도 수도에서만 암암리에 전해진 비밀이니까요. 결투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공개처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녀는 이를 갈았다.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가 맞게 이해했다면, 속임수 같은 겁니까?"
"아니요, 속임수는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어요. 다만, 절박한 결투자를 끌어들이는 방식 자체는 사기나 다름없지만요."
별로 어려운 단어를 쓰지도 않았건만,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이 만면에 드러났는지, 그녀는 고소를 머금으며 보충했다.
"민담은 좋아하나요?"
"요정 같은 것 말입니까?"
"네, 그리고 마법은 어떤가요. 12세기 영국 왕, 헨리 1세가 창시하고 지금껏 전승된 의식은요?"
나는 당황해서 입을 껌뻑였다. 에식스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국왕 헨리 1세는 찬탈자 왕이라고 불려요. 그의 형제들을 참살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죠. 응당 피로 물든 집권에는 귀족들의 거센 저항이 있었고, 그걸 계기로 헨리 1세는 귀족의 권력을 분산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겁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역사적인 일화였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그런다고 뭐가 더 알아듣기 쉬워지진 않았지만.
"옛 새럼은 헨리 1세에게 봉헌된 도시에요.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아서 무엇이 그리 특별했는지 몰라도, 아주 강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해요. 이곳에서 헨리 1세는 귀족의 피를 희석하기로 했어요. 그에게는 참살한 형제가 십자군 원정으로 가져온 이교도의 만트라가 있었고, 이를 해석해서 피의 결투법을 창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옛 새럼의 결투법입니다."
그녀는 긴 설명을 마치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 역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기에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네?"
"이건 아까 말한 옛날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에식스는 도리에 벗어날 만큼 무식한 질문을 들은 표정을 지었다. 일순이었지만, 나를 풀 죽게 하기 충분했다.
"저야 알지 못하죠. 하지만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지금껏 전승되었고, 실효가 있다는 것도요."
나는 끄덕였다.
"마저 말하자면, 결투는 일종의 주문 의식입니다. 종교적인 행사가 다 그렇듯이 정해진 수순과 요소가 필수적이죠. 옛 새럼의 결투법에는 세 가지 필수불가견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결투자, 일대일 결투를 원칙으로 해요. 다른 하나는 참관인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죠. 마지막은, 혈액입니다."
"혈액."
무심코 따라 하고 말았다.
"피의 법칙, 삼투를 아십니까?"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근래 과학적으로 증명된 생리현상입니다. 농도가 다른 두 액체가 핏줄과도 같은 막으로 나뉘었을 때, 진한 쪽의 액체가 묽은 쪽으로 흘러가서 농도가 맞춰지는 현상이죠."
그녀는 이해했으리란 듯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저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에식스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심호흡했다.
"이 결투에서는 더 짙은 피를 가진 자가 죽습니다. 고귀한 피는 묽어지고, 하천한 이는 귀족으로 출세합니다. 그것이 헨리 1세의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명문은 모두 사하고, 하천한 가문이 벌레처럼 들끓었죠."
에식스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입술의 피막이 벗겨지자,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영락하였다 한들 에식스는 굴지의 가문입니다. 하물며 공장으로 출세한 졸부 따위와 견줄 바가 아니죠. 그럼에도 그들은 아버지를 결투에 내몰았습니다. 그건 공개 살인이었어요!"
시종 섬뜩하리만치 차분했던 에식스는 신경질적인 비명을 질렀다. 아마 지금 모습이 본성에 더 가까운 것일 테지, 나는 생각했다.
"필레몬 허버트, 그자는 참관인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이들에겐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피의 짙음, 푸르고 붉은 피를 구분하는 역할입니다. 이전 세대라면 날붙이로 핏물이 튀기에 현장에서 누구나 농도를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총화기로 승부하게 된 이래, 피를 본다는 건 누군가 죽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결투 이전에 결투자 중 누가 더 고귀한 피와 사상을 가졌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죠. 제물을 선택하는 제사장이라고? 하! 당치도 않아요."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잠깐은 수줍었고, 한참을 무마하려 했으며, 이내 체념했다.
"미안해요. 남에게 말할 기회가 많지 않은 얘기라."
"괜찮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면 결국 허버트 씨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제 아빠를 선택한 거죠."
그녀는 자신의 애교스러운 어휘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자가 죽인 겁니다."
나는 그녀의 결론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말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 한들, 남작이 살해자라는 내용에는 해석 여지가 있었다.
정적이 길어졌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물었다.
"아까 말한 그들은 누굽니까?"
"자작원(House of Birch)이라 하더군요."
에식스는 속삭였다.
"옛 새럼에서 비롯된 혈통으로 구성된 귀족 결사, 악마의 혈통을 섬기며 지난 천 년간 런던 이면에서 암약해온 그림자 의회, 피의 법칙을 섬기는 교단."
듣기에도 음산한 단어가 연달아 이어졌다. 내가 지식을 모두 흡수하기 전에, 그녀는 계속 말했다.
"은랑백은 가문에서도 버려진 작위입니다. 그러기에 외동자식이라 한들 저 같은 여성에게도 승계권이 주어졌을 테고요. 하지만 그 이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주어진 역량을 모두 동원해서 이면에 숨어 있는 이들을 찾아냈죠. 이들은 런던 교외, 죽은 자작나무 숲에 숨겨진 '앙주의 붉은 집'이라 불리는 낡은 저택에서 회합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각오를 다지고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무얼 봤는지 아시나요?"
나는 침을 삼켰다. 에식스는 짧게 말했다.
"치매 노인들이요."
"무슨... 욕 같은 겁니까?"
"아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하물며 갓난쟁이조차 알 법한 귀족원 의원, 성공회 주교, 정부 고위 관료들이 모여서는 자기네 이름조차 외지 못하고 있더군요."
에식스는 발작적으로 홍소했다.
"꺼질 줄 모르던 복수심마저 그런 추태를 앞두고는 음흉한 만복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천벌일까요?"
그녀의 인상은 처음과 제법 달라져 있었다. 그저 가련하게만 보였던 여인은 어느새 섬뜩하게 보였다. 그 사실이 그녀의 매력을 덜 하지는 않았다.
"저는 그들이 소중히 간직하던 물건을 수집했습니다. 숨겨진 역사와 지식을 담은 도서, 정체 모를 의식에 쓰이는 제사 도구... 앞서 말한 결투의 진상도 그 과정에 알게 되었습니다."
에식스는 두껍지 않은 양장본 두 권을 꺼냈다. 흔한 가죽 표지와는 명백히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알았다.
창자의 색깔이었다.
"붉은 성경이에요. 모든 지식의 근간이죠."
"그런 중요한 물건을 제게 주셔도 괜찮습니까?"
"성경이란 게 본디 계몽을 위한 것 아니겠어요?"
그녀는 싱긋 웃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당대 구전되던 피의 법칙과 역사를 총망라하여 세 권의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셰익스피어요?"
처음으로 아는 이름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제가 아는 그 셰익스피어요?"
"...자작원을 거쳐 간 인물은 아주 많답니다. 명단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영국 사학계가 격변할 정도로요."
에식스는 왠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첫 권에서는 역사를 다룹니다. 앙주의 악마 혈통과 헨리 1세의 핏줄이 섞이고, 플랜태저넷 왕조, 현 왕실까지 이어지는 계보를요. 왕가의 핏줄을 숭배했기에 이들은 언제나 왕당파였고, 그 방식이 다소 과격하더라도 탄압을 피해 갈 수 있던 것이겠죠."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끄덕였다.
"두 번째 권에서는 자작원의 설립부터, 저자, 셰익스피어의 전대인 15세기까지의 활동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중세사는 자작원의 역사라 해도 무방합니다. 이 무렵이 그들의 전성기였을 테죠."
문득 호기심이 들어 책을 들춰봤지만, 전혀 모르는 언어로 적혀 있었다. 나는 고스란히 다시 덮어놓았다.
"앵글로-노르만, 옛 귀족의 언어죠. 본질은 프랑스어에 가까운 만큼, 제게는 영어보다 읽기 편하지만요."
"아, 네."
나는 무심코 답했다. 사실 머릿속은 한참 전부터 포화 상태였다. 전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게 뭘 원하시죠?"
결국, 나는 정직하게 물었다.
"지금 하는 얘기,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비밀스러운 내용이란 건 알겠습니다. 초면의 상대에게 선뜻할 말이 아니란 것도요."
에식스는 답하지 않았다.
의도된 침묵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녀는 속내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 듯했고, 나는 재촉하지도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릴 따름이었다
"제게는 두 가지 불안이 있어요. 허버트 남작에게는 온갖 불길한 소문이 뒤따르죠. 쉬운 적이 아닐 거에요. 그저 해하는 것만이라면 쉽겠지만, 제 목표는 그의 범죄를 증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친과 조부의 억울한 죽음도 밝혀지겠죠."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공감하기는 어려운 화제였다. 사연은 알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녀의 원망이 막연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이 일에 방해자가 있다는 거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자작원은 궤멸했습니다. 너무나도 부자연스럽죠. 지난 천 년간 런던 이면에서 암약해온 집단이 하루아침에 구성원 전원이 치매에 걸려 무너지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이죠?"
"미안하지만, 당신 아버지에 대해 조사했어요."
심장이 크게 철렁였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착란을 일으켰다고요. 아편 문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발견되지 않았다죠? 몇몇 증상을 조사해본 결과, 치매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오스카 피츠헨리 박사의 죽음과 같은 원인이라 말하는 겁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식스는 희한하다는 듯이 봤다. 나는 아차 싶어서 눈을 돌렸다.
"반응을 보니, 제 추측이 맞았나 보네요. 그렇다면 가능성은 더 높아지죠. 자작원을 무너트린 누군가와, 당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누군가는 아마 동일범, 혹은 동일 집단의 소행일 거라고요."
그녀는 일이 뜻대로 풀려간다는 듯이 야심 찬 얼굴을 했다. 잠깐은 사랑스러웠던 솔직함이 지금에는 기분 나빴다.
"우린 두 가지 목표를 공유해요. 허버트 남작의 추적, 그리고 방해자의 처리. 당신에게는 돌려 말하는 것보다 직언하는 게 나을 거 같네요."
에식스는 손을 내밀었다.
"제게는 지식이 있지만, 힘이 없어요. 당신에게는 지침이 필요하고, 제게는 수족이 필요하죠. 이 정도면 동업할 이해관계가 되지 않을까요?"
예상보다 여린 살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