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이브의 해체 (3)
백작은 신비한 사람이었다.
해군 시절, 나는 여러 귀족 장교를 만나면서 어떠한 편견을 싹 틔웠다. 반면, 에식스는 그런 잣대를 우습게 만들 만큼 솔직했다.
그런 점이 항상 좋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 경우에는 나쁘게 작용했다. 영국에서는 절제가 미덕이기에, 그녀의 태도는 항상 오해를 불렀다.
정작 에식스가 눈치 없는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함께 할수록 그녀는 자신의 유능함을 여실히 보였다. 비록 허버트 남작만큼 노련하지는 못했지만 그걸 보충할 만큼 행동력 있었다.
그런 만큼 내가 느끼기에는 일부러 그러는 듯했다. 감정을 숨기려는 모든 시도가 큰 죄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모로 '런던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닮은 점이 많았다.
둘 다 최근 아버지를 잃었고, 도시의 외부인이었고, 오직 비현실 속에서만 안도를 찾았다. 함께 있을 때면 삶의 고초나 생활비 따위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별이 빛나는 이유, 남극의 오로라, 보르조이 호텔, 앙주의 자작나무 숲, 몽블랑 산의 비경 따위에 관해 말했다. 나는 경청했고, 그녀는 기쁜 듯이 재잘댔다.
반면,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는 데는 서툴렀다.
나는 인생에서 길을 잃었고, 에식스는 복수에만 전념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는 나보다 더했다. 사실 그녀에게 금전 감각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 같았다.
그러다 보니 첫날 에식스를 만났을 적의 신비감은 모두 옅어진 지 오래였다. 그게 그녀가 카리스마를 잃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는 동업자 이상의 역할을 해야 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보모라고 불러도 되었고 관리인이라 불러도 되었다.
한편, 둘을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면 무서우리만치 화내겠지만, 에식스에게는 남작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
알다시피 남작은 주변 사람의 이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뭔가를 발견하고는 한참 생각하더니 혼자 모든 걸 깨우치고 마구 혼잣말하다가 앞서 갔다.
반대로 에식스는 자신이 안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언제나 깊게 미간에 골을 파고 있다가도, 옆에 다가가면 이때다 싶어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동행자 입장에서는 적어도 '말은 걸어주는' 그녀가 편할 수밖에 없었다.
"존 왕이 프랑스에서 철수한 이래, 그들의 성지 앙주령을 수복하는 건 자작원의 비원이었어요."
에식스는 날 눈치채더니, 책갈피를 꽂아놓고는 눈을 비볐다.
"안 잤습니까?"
"해석을 비교하다 보니... 하여튼 들어보세요. 자작원에서는 꾸준히 왕가에 입김을 불어넣었고, 마침 명분이 발생하자 영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죠. 그게 바로 백년전쟁 개전의 숨은 이면이에요."
본인이 말한 대로 에식스는 영어가 능숙치 않았다. 그런 만큼 매 순간 힘을 줘서 발음했고, 내 감상으로는 그녀의 카리스마 상당 부분은 거기서 나왔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모국어를 발음할 때면 느슨한 말투를 썼는데, 나는 그것이 좋았다.
"처음에는 그들 뜻대로 되는 듯했지만, 성녀 잔 다르크의 출현으로 상황은 반전되었어요. 패색이 짙어지자 자작원에서는 다음 방침을 정했어요."
"잔 다르크."
나는 따라 했다. 그녀처럼 발음할 수는 없었다.
"당시 국왕 헨리 6세는 패전을 직감하고 자신이 영국 최악의 국왕으로 기록될 것을 두려워했죠. 자작원은 그런 심리를 꿰뚫어보고, 영국 내 만연한 악습 '늑대 상간相姦'을 철폐하며 은닉하는 것만이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현혹했어요. 연이은 패전으로 유약해진 왕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꼬드김에 넘어가서 전쟁조차 도외시하고 늑대 토벌 사업에 국력을 쏟았죠. 이게 늑대 사냥의 시대의 배경입니다."
모르는 개념이 일순 쏟아졌다. 헨리 6세, 늑대 상간, 늑대 사냥의 시대, 언제나 에식스는 상대의 배경지식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일일이 따지고 물어서는 설명이 끝나지 않기도 했고, 그녀의 말소리가 끊기는 것도 싫었다.
"검열은 전국적으로 이뤄졌어요. 모든 교회와 수도원의 책이 압수되었고, 그 사업의 전권은 자작원에게 있었죠. 물론 이유는 있었어요. 자작원은 프랑스에 패하여, 국토가 유린당하는 상황을 무엇보다 우려했거든요. 그들이 조사한다면 백년전쟁의 이면에 있는 자작원이 드러날 테고, 무자비한 탄압이 뒤따를 테니까요.
자작원의 선택은 완벽한 은둔이었어요. 이들은 왕을 꼬드겨 전국의 서적을 검열할 자격과 능력을 얻었고, 그 과정에 악마 혈통과 자작원에 관한 모든 기록이 말소되었죠. 후대에 구전된 일화를 바탕으로 셰익스피어가 다시 붉은 성경을 쓰기 전까지는요."
에식스는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녀는 가죽이 피를 머금었단 사실을 몰랐다. 사실 자작원에서 가져온 모든 것이 피범벅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혈액의 색조차 알지 못한 것이다.
충격받지 않게 전할 방법을 고심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 역시 모른 척하고 있었다. 혹여나 알게 되어 그녀가 바뀔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끝내 염려했던 국토 침범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전개는 자작원의 예상을 벗어난 것일 테죠. 숭배해야 할 핏줄이 끊기는 참상이 벌어질 뻔했으니까요. 꼭두각시 왕 헨리 6세는 폐위되었고, 플랜태저넷의 두 방계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왕위쟁탈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장미전쟁이요."
이만큼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다음 부분인데... 해석이 묘해요."
우리 대화는 언제나 예고 없이 끝났다. 에식스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특유의 찌푸린 얼굴로 한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그 곁을 떠났다.
침묵의 이유를 안 것은 나중이었다.
우선, 예상한 대로 그녀는 첫날부터 모든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진 않았지만, 우리 관계는 분명 변해 있었다.
에식스는 점점 사적이거나 은밀한 일화를 일러주었다.
"장미전쟁의 결말은 아시겠지만."
그녀는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말했다.
"폭군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를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부활이었죠."
물론 알지 못했다.
"반면, 붉은 성경에서는... 해독이 잘못되었나 수차례 검토해봐도 항상 같아요. 책에서는 튜더 왕조를 언급하고 있어요. 헨리 튜더의 반란은 성공했고, 악마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왕이 탄생했다고요. 이 부분은 서술이 없는 제 추측이지만, 필시 자작원에는 최악의 결과였을 겁니다. 뭔가 수를 써야만 했을 테죠. 다만 어떤 방법을 써야 이미 패배한 전쟁을 바꿀 수 있단 걸까요."
에식스는 입술을 물었다.
"피츠헨리, 첫날에 제가 붉은 성경에 대해 한 말 기억하나요?"
"셰익스피어가 적은 세 권의 책이란 것 말입니까?"
"그래요. 1권은 혈통의 기원, 2권은 자작원 역사, 하지만 3권은 설명하지 않았죠.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3권은... 마도서예요. 옛 새럼의 결투법 따위는 우스울 만한 참혹한 법칙과 의식이 상세히 저술되어 있죠."
"마도서 말입니까?"
나는 무심코 의심이 깃든 소리를 내었다. 에식스는 그런 내 반응에 살짝 놀라고,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 믿기 힘들겠지만."
"아니요, 믿습니다."
"어쨌거나."
그녀는 애써 일축했다.
"문제는 이들이 어떻게 이런 주문과 의식, 비법들을 손에 넣었는가 하는 점이에요."
"옛 새럼의 결투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논외예요. 헨리 1세는 이교도의 만트라와, 인체의 법칙을 응용해서 의식을 만들었잖아요. 하나의 의식에도 그런 상세한 출처가 따르는데, 여기 많은 의식들은 기원조차 불분명하죠."
에식스는 대단한 발견처럼 말했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무엇이 그리 이상한지 알기 어려웠다.
"종류마저 다양해요. 살인, 수혈, 저주... 그중에 하나 유별난 의식이 있어요. 딱히 강조된 것도 아니고, 특별하지도 않지만, 오로지 하나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어 있는 법이죠. 그건 바로 '백작 부인'의 호출이에요."
"백작 부인?"
"그녀가 누군지는 아무런 설명도 없어요. 직함처럼 '아프리카의 주인'이라는 문구만 쓰여 있죠. 그게 어떤 의미건, 그 정체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어요. 자작원에서 '백작'이란 주로 악마와 혼인한 혈통의 시조, 앙주백 제프리 1세를 부르는 단어예요. '백작 부인'이란 아마도...."
그녀는 끝에 말을 아꼈다. 아무리 그녀라도 불길했으리라. 나조차 생략된 단어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토록 다양하고 사악한 지식을 전수할 수 있는 존재라면, 또 정말로 악마 혈통의 시조라고 한다면, 전쟁의 결과조차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것만이라면 그런 해석을 하지 않았겠죠. 문제는 붉은 성경 2권의 종장이에요."
에식스는 책을 펼쳤다. 어차피 읽지 못해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들었다.
"여기는 자작원에서 지켜야 할 세 가지 맹세가 적혀 있습니다. 하나는 플랜태저넷의 핏줄을 지키는 것, 하나는 영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뿌리 뽑는 것, 하나는 그 신자를 바치는 것...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대체 누구에게 바친다는 말이죠? 왜 바쳐야 하죠?"
그리고 마저 말했다.
"결국, 그들의 맹세는 지켜졌죠. 100년 뒤, 로마 기독교는 영국 땅에서 쫓겨나고 성공회가 국교가 됩니다. 대규모 종교박해로 많은 기독교 순교자가 생겨났죠. 플랜태저넷에는 한 번의 계승 위기도 생기지 않았고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모든 걸 쏟아낸 그녀는 꽤 만족스러워 보였고, 나는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떠나는 중에도 그녀는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의 두 목표는 희색 되지 않았다.
허버트 남작의 추적, 그리고 사람의 기억을 빼앗는 방해자의 규명, 양쪽 모두 저마다 진도를 보였다. 나는 따로 조사하던 내용을 식사 때 넌지시 전했다.
"뇌가 녹는 열병이라."
내 설명을 들은 에식스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전할 시기를 잘못 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유행병이 런던에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런던에 낯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병은 거의 소문으로만 존재할 뿐, 심지어 빈민가를 벗어나서는 알려지지도 않은 게 사실이었다.
"비현실적이네요. 전염성이 강한 병이라면, 런던처럼 사람이 들끓는 도시에서 소문으로 그치지 않았겠죠. 반면, 전염성이 약하다면 자작원의 인사 전원이 동시에 발병했을 리도 없고요."
그녀는 유독 답답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간신히 찾아낸 유사성이 좀처럼 이어지질 않으니, 마치 바늘구멍에 실을 끼지 못할 때처럼 신경질적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실망했거나.
"그러면 우연일까요?"
"그 방해자가 누군가의 기억을 없애는 기술을 가진 건 분명해요. 하지만 그 기술과, 지금 말하는 뇌가 녹는 열병이 같은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에식스는 단정지었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항상 그랬으니 그녀는 별로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에식스는 간신히 식기를 다시 들어 식사했고, 그날 우리는 같은 주제로 회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떤 착상이 끊임없이 맴돌이쳤다. 방해자의 기술과 질병의 연관성을 확인할 방법은 있었다.
나는 상의하지 않았다. 에식스라면 틀림없이 경멸할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나 또한 그랬다.
삽은 무거웠다. 야간 작업이었지만, 악취는 차일 오후에 가장 심하게 올라왔다.
훗날 지역 신문으로 작은 소동이 기록되었지만, 사건 자체를 의심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들짐승의 소행이라 오해받은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묘를 파냈다. 간만에 만난 아버지는 수척했다. 살점은 모두 녹아내렸고, 뼈에는 분해가 느린 지방만이 빨랫감처럼 걸려 있었다.
간호사 사이에선 전쟁터에서 시신을 수습하다가 악취로 혼절했다는 유명한 괴담이 돌았고, 이탈리아 전쟁 당시 수습이셨다는 늙은 간호장교가 사실로 인정했다.
덕분에 나는 만반의 대책을 했지만, 이마저도 쓸모 없을 정도의 시취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무 이유없이 유해를 끄집어내 욕 보일 셈은 아니었다. 내 행위가 그것과 뭐가 다른지는 몰라도, 내게는 만연한 확신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해체했다.
톱 단면 너머의 두개골 속에는 뇌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죽기 전부터 녹거나 부패했다면 이처럼 온전한 형태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열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내 행동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것이었다. 표면상의 기지라 해도, 나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런 내가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훼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어쨌거나, 대답은 내 안에 있는 것이었고, 무수한 상념 끝에 나는 결론에 봉착했다. 인정하기는 어려웠지만 분명했다.
나는 그저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어떤 핑계라도,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갈망은 기행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죽은 아버지는 너무 달라져서, 보고도 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생전 모습을 떠올리는 데는 많은 도움을 줬다.
나는 아버지와 대화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최근까지 그리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란 걸 얼마 전에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우리를 앉혀놓고 삶의 지혜, 당시에는 잔소리로 들릴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엄한 훈육을 했다. 나와 동생은 잘못을 저지르면 밤에 아버지에 혼날까 무서워서 어머니에게 즉시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한 번도 그가 자기 물건을 사는 걸 본 적 없는데, 드물게 어디선가 옷이나 신발을 들고 와서 말 없이 어머니에게 건네곤 했다. 그건 우리 남매의 것이었다.
정말 궁색하고 볼품 없는 기억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 못했다.
... ... ...
... ... ...
"피츠헨리! 있어요? 피츠헨리!"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그리고 어찌나 서둘렀는지 땀으로 축축한 에식스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아요? 최근 따라 멍하니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남작, 허버트 남작이 돌아왔어요!"
내 반응을 보고 에식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봤다.
"놀라지 않네요?"
"놀랐습니다."
사실이었다. 다만 같이 당황하면 무엇도 되지 않을 테니, 애써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뭐, 그건 좋아요. 목격담이 있었어요. 야간에 항구 창고에서 수상한 무리가 들락거렸는데, 거기에 그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딘가 먼 도시에 있는 줄 알았더니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죠. 지금까지는 출국 기록만 뒤졌는데, 다시 조사해 보니 작년 말에 뉴욕에서 런던항으로 입국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조금만 더 빨리 찾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에식스는 경박하게 혀를 찼다.
"피츠헨리, 당신 차례에요."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에식스 님, 저는 이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약한 소리예요."
그런 반응을 곡해했는지, 에식스는 날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름답고, 용기를 주며, 습한 곰팡내가 나는 그런 미소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용기를 가져요, 피츠헨리. 비수는 제가 준비할게요, 당신은 그저."
에식스는 예쁜 손톱으로 내 가슴을 푹 찔렀다.
"그리고 당장 그를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필요한 건, 남작이 부정한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뿐이에요. 우선 항구에서 무슨 일에 관여했는지 알아야 해요. 항구에서 사람 눈을 피해서 할 일이라곤 밀수뿐일 테니, 그 증거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에요."
그리고, 에식스는 남작이 산다는 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나는...
...나는 그녀를 거부하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 허버트 남작의 자택이다. 별로 돈 많은 행색을 하고 있진 않았는데, 의외로 아주 좋은 집에 살고 있다는 감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잡생각이나 하며 시간 죽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남작과 재회할 때까지만 속일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내게는 남작을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빚을 졌으며, 나의 원 목표를 위해서는 다시 합류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에식스와 함께하며 그녀의 허무를 이해하고 말았다. 어찌나 비극적인 출생인지, 그녀는 원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시간이 희석할 수 없는 감정이란 또 얼마나 지독한가. 이해는 그녀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사형선고였다.
나는 내 안의 놀라운 감정을 눈치챘다. 사실, 나는 남작이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무엇도 바뀔 리 없는 정체 속에 안주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그는 발견되었고, 이제 나는 두 평행선 중 하나에 올라타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작년과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고향에서처럼 나는 아무 선택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은 이번에도 도망치겠지.
이번에야말로 바다로 가야 할 것이다. 그때는 어디로도 돌아오지 못할 테지만.
결국, 나는 나흘 밤을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무언가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상한 사실을 눈치챘다. 나흘간 집을 감시한 시간은 짧지 않았는데, 문으로는 오직 아이들만 드나들 뿐이었다.
또 하나 기이한 사실은, 그럼에도 안에는 누군가 항시 있었다. 그의 존재는 오로지 커튼 움직임으로만 알 수 있었다. 커튼을 치우고 난 뒤에는 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것이 남작님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라면 집 밖에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부인일까, 남작님이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있으니까, 혹시 내연녀와 사생아들인가?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치 망측한 망상이 떠올랐다. 의문이 커질수록 주의는 산만해졌다.
그리고,
"당신, 누구야."
나는 배후를 잡혔다.
인기척이 드문 남자였다. 그런데도 기이하게 시종 이를 가는 소음을 냈다. 양립할 수 없는 양면이 기이하게 한몸에 공존했다.
"왜 저 집을 엿보고 있었지?"
한 가지 다행으로 상대는 방심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여성일 테지만, 반격은 상정조차 하지 않는 듯이 부주의하게 접근했다.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대답...,"
그리고 그가 말하는 틈을 타서 힘껏 몸을 돌려 얼굴을 쳤다.
남자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쓰고 있던 중절모가 떠오르며, 붕대투성이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그대로 달려들어 남자를 넘어트렸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밀어내려 했으나, 이 자세는 보통 체격 차이로는 극복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힘에서 밀리는 걸 깨닫고는 당황한 소리를 내었다.
"이게 무슨...!"
그도 노련한 싸움꾼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닫자, 그는 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물론 대비하고 있었기에, 나는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상대 팔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몸을 크게 앞으로 숙여, 다른 팔로 목을 압박하며 팔꿈치로는 상대의 남은 팔을 눌렀다.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항복 또는 기절이다.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윽...!"
목을 누르고 있던 팔이 푸욱 꺼지더니, 순간 격통이 일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어려웠다. 붕대 속에 날붙이를 숨겨놓았나? 아니면....
어쨌거나, 판단보다 행동이 빨랐다. 나는 압박하던 팔꿈치를 돌려, 상대의 안면을 찍으려고 했다. 그러려 했다.
"꺄악!"
그때, 비명이 들렸다.
통금조차 지난 시간이었다. 어쩌면 난투가 소동으로 번진 것일까, 그리 생각하며 돌아보니 뒤편에 경악한 여인이 서 있었다.
"잠깐만요!"
여인은 외쳤다.
"당신도 허버트 씨를 찾아온 거죠?"
어떻게 알았지, 나는 가까스로 질문을 참았다. 의문을 바로 내뱉으면 약점이 된다는 누군가의 조언이 떠오른 덕이었다. 남작님이었던가, 아니면 에식스?
"그 사람은 여기 없어요."
"무슨 뜻입니까?"
나는 곧장 되묻고 후회했다.
"그보다 당신들은 남작님이랑 무슨 관계입니까?"
"남작님?"
여인은 어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리곤, 쉰 목소리로 침착하게 또박또박 답했다.
"우리는, 찾고 있어요. 돕기 위해서요."
그 대답에, 나는 지금 막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단 걸 깨달았다.
내가 서먹한 얼굴로 팔을 치우자, 바닥에 깔린 남자는 마구 기침했다. 붕대가 풀어졌고 그 사이로 움직이는 이빨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누군가 또 골목에 달려왔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괴물 같은 남자와 달리 두 여인 다 험악한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허버트 씨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꽤 되었습니다."
남자는 바닥에서 일어나며 낮게 말했다. 그는 완전히 풀어져서 흙먼지투성이가 된 붕대를 다시 목에 둘렀다.
"보아하니 싸울 필요는 없었던 것 같군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일을."
"아뇨,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내가 사과하자, 남자는 살짝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사과했다. 이제야 눈치챈 사실이지만, 괴물 같은 모습 뒤에 있는 얼굴은 꽤 앳되었다.
"싸웠다고요? 둘이요?"
늦게 나타난 소녀는 우릴 둘러보며 멍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다 끝난 얘기는 하지 말죠."
남자의 얼굴이 뒤틀리자, 앞선 여인이 눈치 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는 제니에요."
"아, 저는 앨리스 리들이요."
"이, 이브 피츠헨리입니다."
내가 통성명하자, 남자가 의아한 음색으로 물었다.
"피츠헨리? 오스카 피츠헨리?"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그러자 모두의 반응이 일제히 어색해졌다.
"피터 윌슨, 형사입니다.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설명하자면 길어질 텐데...."
"안 돼요! 우선은 교수님을 찾아야죠!"
윌슨이라는 남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리들이 껴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신도 온전하지 않은 분이 일주일째 무소식이니... 그래도 단서가 너무 적어서."
"적은 단서로 사람을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까?"
나는 그저 한마디 했을 뿐인데, 모두의 이목이 모였다. 나는 어색한 말투로 마저 말했다.
"사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도움 줄 사람을 하나 아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