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75화 (175/232)

§175. 셜리 마리

'실존적 고통'이란 표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실존'이란 '자연 상에 존재하는 생물'이라 합니다. 저는 그걸 보고도 이해가 되질 않아서, 주인님께 그 의미를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단어를 만들지 않고는 자신의 선택, 존재마저 믿지 못하는 의심병자, 소위 철학자라 불리는 이들이 자기네 언어를 최대한 익히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 만든 말."이라며 일갈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한때는 주인님 말에 맹목 했지만, 지금은 살짝 의심스럽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듯싶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그 이유로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실존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이쯤하면 무식한 나라도 알 만큼 단순해집니다.

그야말로 '실존적 고통'이지요.

밤이 내려온다.

온기가 없는 시간이다. 오로지 미움받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나는 이 적막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촛불이 흐트러질 때마다 책장이 어지러이 춤췄다. 잉크에도 그림자가 질 수 있단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낡은 스크랩북에서 떠오른 글자는 여름철 불쾌한 날파리처럼 몸 주변을 빙빙 돌며 날았다.

"마리, 안 자?"

살짝 열려있던 방문 틈새로 어린 도로시가 몸을 비집어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책을 덮었다. 아이는 아직 잠에 취했는지, 조금 걱정될 만큼 눈을 비볐다.

"마리?"

나는 도로시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려놓고, 방 밖으로 밀어냈다.

"늦게 자면 못 일어날 거야."

"그치만 마리도 안 자잖아."

"나도 곧 잘 거야."

"그치만 잠이 안 와."

지긋지긋한 그치만, 도로시는 누구에게 배웠는지 그 말을 입에 담는 일이 늘었다. 나는 무심코 한숨 쉬려 했지만, 수분 없는 목청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리광부리지 마. 너보다 어린 월터도 잘 자잖니?"

그녀는 계속 칭얼거렸고, 결국 나는 도로시의 방에까지 따라가 그녀를 눕혀놓아야 했다. 어쩌다 나이 차가 많은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남은 촛농의 길이를 보고 다시 책을 펼쳤다.

오랫동안 모아온 스크랩북으로, 안에는 주인님과 연관된 기사가 모여 있었다. 매 페이지가 내게는 후회로 나타났다.

이때 말려야 했을까, 아니면 이때?

무엇도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한숨은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시선과 함께 움직이던 손끝은 어느 기사에 이르러 멈췄다.

뒤에서 두 번째 장이었다.

「공포의 밤이 끝나다! 뒷골목의 식인종, 마침내 경찰 작전 끝에 토벌되다!」

주인님의 이름은 한 자도 적혀 있지 않지만, 그분께서 아주 깊게 관여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분의 일을 보조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하고, 또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웨일스의 시골 여관, 그날 밤, 주인님은 무엇을 알아냈고, 또 무슨 일을 당한 걸까. 내가 없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날 이후, 주인님은 달라졌다.

우선 세간의 평가와 달리 주인님은 그렇게 괴짜가 아니었다. 물론 유별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유독 그에게 각박한 면이 있었다.

이유는 알 법했다. 주인님은 유독 감정 표현이 서툴렀다. 단순히 말수가 적음을 떠나, 남에게 이해받으려는 시도 따위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 주인님의 심중을 살피다 보니, 나까지 덩달아 눈치가 늘었다. 표현하지 않는 주인님, 묻지 않는 나, 우리는 그런 소우주 속에 존재했다.

그리고, 기억 속에 주인님은 언제나 바빴다.

왜인지 의자보다는 침대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때도 항상 손에는 뭔가 읽을 것이 들려 있었다. 끼니조차 차로 때우는 일이 잦았고, 그러지 않을 때도 한 손으로 들고 먹을 빵만 들고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내가 식사 예절을 지적한 날에만 거진 10분에 달하는 투정과 비아냥을 늘어놓고 식탁에 앉았다.

반면, 최근 따라 주인님은 여느 때보다 한가하게 보였다.

항상 그랬듯이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집 밖을 쏘다니지도,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뭔지 모를 책을 뚫어져라 탐독하지도 않은 채, 창가에 둔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최대한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방 청소했다.

"마리."

"예?"

줄곧 창밖만 응시하던 주인님은 어느샌가 자상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이었다. 이런 따뜻한 시선을 보낼 사람은 아니었다.

"공부는 잘하고 있니?"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날 보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주인님은 여기 있지만, 다른 시간에 있었다.

"네."

나는 애써 대답했다.

"일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지금은 모를 수도 있어. 하지만 명심하렴, 글을 모르면 뭘 해도 당하면서 살게 되는 법이야."

주인님은 계속 말했다.

"항상 내가 없어지고 난 후를 생각하렴. 지금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생활이 이어지지는 않아. 나도 사라질 테고, 그러니까 너는 욕심을 부려야 해. 내게서 챙길 수 있는 건 모두 챙기거라."

들어본 적 없는 심중이었다.

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흐릿한 정신이 약하게 만들어서 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나는 이 말을 지금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네가 걱정스럽다."

주인님의 눈이 촉촉해졌다.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내 가정부로 끝나는 일 따윈 바라지도 않아."

그는 내 손을 붙잡았다. 생명이 없는 딱딱한 밀랍 덩어리, 그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고, 그때마다 눈꺼풀이 위로 들렸다.

"마리? 정말, 정말 너니?"

주인님은 경악한 얼굴로 내 손을 붙들어 맸다. 신생아가 손에 닿은 물건을 놓지 않는 것처럼, 그는 몇 번이고 내 손을 다시 잡았다.

"안 돼, 제발...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나의 심장은 2년 전에 썩어 문드러졌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가슴 아파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오열하는 주인님을 안았다.

"믿어줘, 그건 내가 아니었어. 결코, 내가 한 게 아니야... 용서해줘. 나를 용서해줘."

"다 끝났어요. 이미 지났어요, 주인님."

견딜 수가 없어.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거야?

나는 속으로만 비명 질렀다.

꿈을 꿨다.

몽중에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길은 기억의 저변으로 이어졌다. 각 단에는 나의 은밀하고 사적인 기억이 새겨져 있었다.

아래로 갈수록 그 영상은 흐릿해졌고, 도리어 더욱 적나라하게 바뀌었다. 나는 심층심리의 밑바닥으로 하강했다. 거기에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침강해 있었다.

아직 어릴 적이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두 남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 하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나는 이날의 기억을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내 부모라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고아원이나 교구의 사람일 지도 몰랐다.

"운이 좋은 걸까...."

다만, 힘들어질 때면 내가 가진 행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회고하곤 했다. 런던에서 나 같은 처지가 가족을 기억한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라 했다.

"차라리, 그런 기억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양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였다.

"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급히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고, 옆에 선 소녀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줄리엣?"

"뭘 몰랐으면 좋았어?"

"남의 말을 엿들으면 못 써."

"마리가 제멋대로 말한 거지."

두 사람 다 부정할 테지만, 아이 중에 주인님과 가장 닮은 건 줄리엣이었다. 늘상 퉁명스러운 말투나 표정부터, 기척 없이 옆에 다가오는 점이 똑 닮았다.

"아저씨 일이지?"

...무신경한 척하다가 갑자기 핵심을 파고든다거나 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냥 부모님 생각을...."

"마리의 부모님? 마리한테도 부모가 있어?"

줄리엣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지."

"나는 없어."

"아니, 있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에서 태어난 자식이니까. 다만, 길러준 사람이 다를 뿐이야."

그녀는 심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부모는 필요 없어."

"왜 그런 말을 하지?"

"날 버렸잖아. 그럴 거면 낳질 말았어야지."

"줄리엣!"

내가 소리치자, 아이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나는 쫓을 힘조차 나지 않아서, 의자를 세우고 다시 주저앉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는 두 손을 모았다.

"도우소서."

여기 우리가 있는 게 아버지 당신의 안배라면, 어째서 이런 고통도 함께 주셨습니까?

"도우소서."

삶이 이토록 괴로운 것이라면, 왜 우리를 이처럼 약하게 만드셨습니까?

"도우소서."

모든 고통이 태어났기에 있는 거라면, 생명이란 어째서 존재해야 합니까?

"그저,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나는 기도를 마치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눈 감은 채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시가 아닌 과거의 습격이었다.

'인간이 아닌 우리가 인간과 살기 위해서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웨일스의 동굴에서 남자는 말했다. 주인님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나만은 이해했다.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만일 주인님께서 그 뜻을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남자의 말뜻은 이랬다.

그는 인간이 아닌 늑대가 인간과 살고자 한 과정을 봐왔다. 그러기에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한 것인지 알았다.

"사육."

그때, 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창 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편집증적인 비명을 내질렀다.

"꺅!"

자리에서 일어나 부랴부랴 커튼을 닫고, 다시 방 안에 어둠이 돌아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벽에 몸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셜리 마리는 인간이 아니야.

나는 내게 말했다.

누군가 보일까 봐 창문에 비치는 햇살마저 두려워하는 괴물이지. 그런 괴물이 어떻게 인간과 가족이 되겠어.

주인님이 사라졌다.

야밤에 업무차에 나갔다가 그대로 실종된 것이었다. 어찌나 조심스럽게 행동했는지, 그를 봤다는 목격담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모두 재워놓고, 매일 밤 현관 앞을 서성거렸다. 주인님이 실종되고 일주일이 조금 지난 그날도 그랬다.

"마리."

분명 잠옷을 입혀 재웠을 줄리엣이 외출복 차림으로 날 불렀다.

"미안, 내가 깨웠니?"

"찾았어. 가야 해."

"그게 무슨 뜻이니?"

그녀는 다짜고짜 날 제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쫓았다.

"잠깐, 얘, 왜 그래!"

나는 달려가는 줄리엣을 뒤쫓았다. 갑작스럽게 나온 실외는 넓고, 어두웠으며, 하늘은 또 어찌나 높은지.

"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온갖 절망적인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등을 돌리려 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 맞은 편에서 어깨를 잡는 통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리, 마리, 진정하시죠."

"저는 그게, ...어떻게 저를...."

나는 고개 들어 눈앞의 인물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면면을 살폈다.

"어, 떻게?"

"설명하자면 깁니다. 그전에, 오랜만입니다."

"형사님."

윌슨 형사는 어깨를 놓고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나는 무례를 감수하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 몰골은 심히 처참한 것이었다.

"피차 멀리 돌아왔군요."

그는 고소를 머금었다. 우리는 홀린 것처럼 서로 마주봤다.

"저기, 흠."

옆에서 소녀가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격조했습니다. 제가 너무 늦진 않았죠?"

"리들 아가씨."

일행의 시선이 내가 아닌 리들에게 쏠렸다.

"왜 그래요?"

"나는 가식 좀 부리면 안 돼요? 저, 마리 언니 꽤 좋아하는데."

처음 보는 여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랑 있을 때는 안 그랬잖아요."

"그야 당신들도 좋아하긴 하는데, 좋아함에도 급이란 게, 아, 그만하죠."

리들은 슬쩍 뒤로 물러섰다. 낯선 여인, 그러니까 비명 소리의 주인은 내가 바라보자 눈을 피하며 변명했다.

"아, 미안해요. 경고를 듣긴 했는데, 생각 이상이라서. 저는 제니예요. 이런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요."

"마리, 셜리 마리에요."

"죄송합니다. 사람 눈을 피하려면 이런 시간이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가온 사람 역시 알고 있었다.

"피츠헨리 아가씨."

이름을 불린 적발의 여인은 멋쩍은지 눈을 깔았다.

"저번이랑 놀래는 쪽이 바뀌었네요."

"저는 지금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서두르죠. 설명은 가면서 하겠습니다."

"저기, 줄리엣은."

윌슨의 재촉에 한 명씩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 나는 타지 않은 채로 물었다.

"집에 돌려보낼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네? 싫어요."

"있잖아, 줄리엣. 지금 마리가 집 밖으로 나왔잖아. 누군가는 동생들을 지켜야지."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지막이 타일렀다. 줄리엣은 고집을 피우고 싶은 자신과 한참 싸우는 듯하더니, 결국은 포기하고 끄덕였다.

"아침까지는 돌아와. ...절대 없어지지 마."

"그래, 물론이지."

나는 어설프게 약속하고, 줄리엣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야 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가는 동안 설명은...."

피츠헨리는 고개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요. 거기 누구보다 설명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누구요?"

"탐정이요."

"주인님이요?"

"...어, 아뇨. 당신 주인님보다 말이 많은 사람 있어요."

그런 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전말입니다."

셜록 홈즈는 말했다.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의 계획을 알았고, 또 여기까지 이끌었는지 알았을 겁니다."

"주인님께서 어디 계신지는."

"아, 그건 별로 추리할 필요도 없죠. 치매 환자는 뚜렷한 좌표를 가지고 이동하지 않아요. 가장 눈에 띄는 표적을 쫓아다닐 뿐이죠. 그러니까 어둡고 사물도 적은 교외로 나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런던 시내에도 있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이 많고, 길도 찾을 수 없으니 불안할 테니까요. 또, 그랬다면 이미 진작 소문이 났을 테고요. 그러면 어디로 갔겠습니까? 런던은 해안 도시입니다. 어디로 가건, 강과 바다에 도착하게 되죠. 실종된 직후라면 몰라도, 이만큼 시간이 지나면 수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는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걸 알았다면 간단하죠. 발로 뛰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수소문으로 교수님을 추적하고 있고, 유력한 후보지도 찾아냈습니다. 대학 정문 밖에서 대기 중인 윌슨 형사님이 그곳으로 데려다 줄 겁니다."

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제가 가서 뭘 할 수 있죠?"

"아마, 아무것도."

홈즈는 비관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단순한 가능의 문제입니다. 허버트 교수님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건 사실이죠. 하지만 우리 중 누가 가도 기억을 빼앗길 뿐입니다. 당신 말고는요. 원리도 모르고, 대책도 없습니다. 그저 경험상 당신이 유일하게 튜더 회장의 공격에서 무사했다는 것밖에요.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피츠헨리 양은 이미 당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교수님이나,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겠죠. 달리 말하면 당신 말고는 누구도 보낼 수 없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날 직시했다.

"사실대로 고하자면, 저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겉모습과 달리 당신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지 압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유일하게 튜더 회장의 계획에 저항할 수 있는 인물인지도요. 제게 시간을 주면, 적절한 방법을 모색해서 음모를 저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주인님과 피츠헨리 아가씨는...."

"죽겠죠.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내주세요."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당신이 가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거 보시죠."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말했다.

"적어도, 함께할 수는 있겠죠."

홈즈는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들은 대로 칼리지 입구에는 윌슨 형사가 세워둔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차에 타자 출발했다.

"여기서부터는 제니가 안내할 겁니다."

우리는 대화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멀리 강변 가로등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목격담을 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여인과 동행하고 있었다고 하니,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날 보며 윌슨이 말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아닙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나는 감사를 표하고, 차에서 내렸다.

제니는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그렇지 않겠느냐만, 그녀는 윌슨보다 말 많은 동행자였다.

"런던에서요, 사람이 대체 뭐가 가능하겠어요?"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제 말은, 하루종일 공장에서 일하고, 그러고도 돈 때문에 몸을 팔잖아요. 진짜 끔찍한 인생 아니에요? 아, 동정받으려고 한 말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보지 마요. ...그런 식으로 본 거 맞죠? 표정을 못 읽겠어서."

제니는 농담하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런데 아는 형사는 반쯤 괴물이 됐고, 아, 그 사람한테는 이런 말 했다고 하지 말아요, 상처받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웬 미친 여자가 제 은인까지 죽이려고 든다잖아요."

그녀는 발을 멈췄다.

"이런 데서까지 지고 살고 싶지 않아요. 그게 이유예요."

그때,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도, 거기에는 어둠뿐이 없었다. 그저 기분 탓인가 싶다가도 점점 위화감이 뚜렷해졌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다하네요. 마리?"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봐요, 어디 가요? 마리?"

망설이던 걸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가속이 붙어서 어느샌가 뛰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빠져나오자, 환한 강변대로가 나타났다. 세 인물이 있었다. 처음 보는 제복 차림의 여성,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 있는 두 남녀.

여인 쪽은 낯설었지만, 다른 쪽은 바로 알아봤다. 달리 알아볼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주인님?"

그의 몸 아래로 붉은 웅덩이가 깊게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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